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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문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월 6일; 눅 5:37~39, 6:20~49)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2.02.07|조회수106 목록 댓글 0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새벽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시편 57:8)

    - 나의 오늘로 내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마태복음 6:34)

    - 땅의 생명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땅의 시간이 아니라 하늘의 시간을 사는 자.

 

    (올해 표어에 대한 설명은

     2022년 1월 첫째 주 설교 결론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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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설교본문 : 누가복음 5:37~39, 6:20~26, 39~49)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2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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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1) 이 땅의 그리스도인 안에서 벌어지는 두 생명의 치열한 대결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새로운 생명은 이제까지 우리에게 있던 육신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생명입니다.

 

    성경은 이 생명을 가리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신령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 신령한 생명을 가진 것을 거듭남이라고도 말하고, ‘영’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영의 생명이 생겼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여전히 육신의 생명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자라 알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의 생명과 육신의 생명, 이 두 생명을 함께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두 생명이 마치 민주당과 국민의힘 당이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며 대결을 하듯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차지하기 위해 대결을 벌입니다.

 

 2) 우리 안에 있는 두 생명의 배후를 살펴보십시오.

 

    이 대결은 우리가 두 생명 중 어느 것을 더 주목하며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영의 생명에 주목하면 영의 생명이 우리 안에 주도권을 잡게 되고,

    우리가 육의 생명에 주목하면 육의 생명이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영의 생명의 배후에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시고,

    육의 생명 뒤에는 육신의 본능을 자극하는 사탄과 마귀가 있습니다.

 

 3) 어느 편에 나의 생명의 주도권을 맡길 것인가 : 결단은 우리의 몫

 

    그러므로 영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의 주도권을 잡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게 되고,

    육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의 주도원을 잡으면 마귀와 사탄의 지배 아래 있게 됩니다.

 

    영의 생명과 육의 생명, 하나님과 마귀, 어느 편에 나의 생명과 주도권을 맡길 것인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문제를 결단해야만 합니다.

 

➠ 오늘 본문 :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에 대한 경고와 비유의 말씀

 

    오늘 말씀은 영과 육의 싸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주께서 하신 경고와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네 가지 복과 저주로 주께서 경고하신 말씀을 살펴보고,

    그다음에 거듭나지 않은 거짓 그리스도인의 실체를 고발하신 주님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 네 가지 복과 저주

 

    주께서 내리시는 모든 복과 저주는 결국 우리의 마음의 열망과 시선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의 품은 열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열망하는 것을 계속 바라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서 신령한 새 생명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 열망이 인도하는 곳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이것을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저주로 말씀하십니다.

 

 

1. 네 가지 복 :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마태복음에서는 팔복을 말하지만,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는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미움을 받는 자, 이렇게 네 가지 복을 말합니다.

 

    ‘복이 있나니’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와 연결됩니다.

    이런 자들은 이 땅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복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의 돌보심과 위로하심을 받고 살아가니 복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하나님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니 복이 있습니다.

 

 1) 너희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6:20)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마태복음에서는 가난하다는 것에 ‘심령’을 붙여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구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절대적인 가난 상태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마태복음은 여기에 ‘심령’을 붙여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한 것은

    가난한 자가 절박한 마음으로 구걸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간절하게 찾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냥 단순하게 ‘구걸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지독한 가난에 처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를 위해 일하다가 가난해진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도저히 부자가 될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하나님 대신 로마 황제를 섬기게 했습니다.

    장사를 하려면 로마 황제의 우상 앞에 절을 해야만 합니다.

    이런 시대였으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가는 가난한 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기 위해 구걸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각오하는 자들,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주님을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2) 너희 지금 굶주린 자(항상 굶주린 상태에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6:21)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가난하면 당연히 굶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굶주린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의미입니다만,

 

    누가는 여기에서 ‘굶주림’이란 단어를 현재분사로 사용하여

    계속해서 굶주린 상태 있는 자들,

    항상 굶주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믿기 위해 부자가 되는 길을 포기한 사람들,

    주님을 믿기 위해 웃을 일을 포기한 사람들,

    주님을 위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길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위해 세상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을 믿는 일을 포기하고

    황제숭배의 자리에 나아가면 돈벌이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주님을 믿기 위해 끝까지 굶주린 상태를 고집하는 자들, 이런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내리십니다.

 

 3) 너희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6:21)

 

            (성경구절 위에)

 

    여기에서 우는 것은 자기의 죄로 인해 우는 자를 뜻합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를 범한 자인지를 깨닫고,

    자기의 죄를 아파하며 슬피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굶주린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죄의 문제를 더 슬퍼하는 자,

 

    이렇게 자기 죄를 아파하며 애통해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주님 앞에 자기 죄를 슬퍼하며 고백하는 자는

    그 죄를 용서받고 이 땅에서부터 천국백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주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웃는 자가 됩니다.

 

 4) 인자로 말미암아 따돌림과 욕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6:22)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주님을 믿는 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악한 자라는 욕을 먹으며, 버림과 배척을 당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인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가장 확실한 천국 시민의 증거입니다.

 

그날에는 기뻐하고 뛰놀라(6:23)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뛰놀라’에 해당하는 ‘스키르테사테’는

    여기저기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최상의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욕을 먹거나,

    버림을 당할 때에는 기뻐하고 뛰놀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기까지 주님을 믿고 섬겼으므로

    이미 천국 백성으로서의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

 

    믿음을 버리면 편안할 줄 알면서도 편안함을 버리고 주님을 택하였으니

    이미 천국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뛰놀라는 것입니다.

 

묵상 : 더 큰 상을 사모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23절).

    순교를 당한 자와 겨우 주일 출석만 하는 자가 같은 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은혜이겠지만,

    천국에서 받는 상은 분명히 다릅니다.

    같은 별이라도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같은 짐승이라도 쥐새끼의 영광이 다르고 사자의 영광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더 큰 상을 사모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 땅의 상은 금방 사라지고 없어지지만,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2. 세상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버린 자들에게 저주가 있다.

 

    그러나 세상을 얻기 위해 주님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습니다.

    주께 순종하기를 택하기보다 부유하게 되는 길을 택한 자들,

    주께 순종하기보다 그들을 배부르게 할 만한 일을 택한 사람들,

    주를 멀리한 대신 웃고 즐길만한 일을 택한 자들에게 저주가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여기에 속한 자들은 이미 화가 그 사람 안에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미 지옥의 고통과 재앙이 이런 자와 함께합니다.

 

    위의 네 복에 속한 자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이 함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 네 화(禍)에 속한 자는 이미 지옥의 재앙에 속한 자입니다.

 

 1)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부요한 자여(6:24)

 

           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위의 가난한 자가 믿음을 위해 부요하게 되는 것을 포기한 자들인 것과는 반대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믿는 것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장차 누릴 천국의 기쁨 대신에

    지금 이 땅에서 부자로 사는 것을 선택한 자는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즐거움을 위해 영원한 즐거움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두 생명 중에 오직 이 땅의 일에만 열망을 품고 있는 자,

    이 땅의 것만 바라보는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풍족하다고 만족해하며 하늘을 구하지 않는 자에게 더욱 화가 있습니다.

 

 2)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6:25)

 

           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배부른 자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며 사는 자를 뜻합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의 은혜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주께 은혜를 달라고 구하지도 않고,

    혹시 구한다고 해도 의례적인 기도일 뿐입니다.

    갈급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배부르고 좋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여 주께 갈급한 마음을 잃어버린 자에게

    화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러 자들은 마음에 열망하는 것과 시선이 땅에 있는 자들입니다.

 

 3)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6:25)

 

            (성경구절 위에)

 

    지금 웃는다는 것은 위의 배부른 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지금 만족하여 웃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주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지금 애통하며 울어야 사는데, 웃고 있으니 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4) 화 있을진저, 너희 세상에서 칭찬 듣기만을 바라는 자들이여(6:26)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며 좋게 말할 때에는 너희에게 화가 있도다”

    이런 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기만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만 늘 신경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는 주께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주께서 싫어하실 만한 일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들은 주저 없이 행합니다.

    그들이 듣고 싶은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이미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2 : 네 가지 비유

 

1. 첫째 비유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6:39)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첫 번째 비유는 소경과 소경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소경이란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다면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함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의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목회자들을 향한 경고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아무리 능력 있는 설교자라 할지라도

    구원의 길이 바르게 증거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목회자 자신이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육의 생명만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전하는 설교가 아무리 화려한 언변과 지식을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을 영의 세계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3) 성도들을 향한 경고 :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목자들을 위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를 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자를 따라가는 자들도

    함께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명에만 갇혀있는 목회자를 따라가는 성도들 역시 땅에 속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도 감동이 있고, 나름 은혜받았다는 느낌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영의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4) 그러나 온전케 되면 그 스승과 같이 되리라(6:40)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영의 생명을 주목하며 사는 자,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천국 백성으로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는

    그 스승과 같이 온전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의 생명에 담긴 주님의 신령한 생명이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서

    주님처럼 온전한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주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2. 둘째 비유 : 들보와 티의 비유(6:41~42)

 

 1) 들보와 티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둘째 비유는 들보와 티의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들보는 경복궁에 있는 커다란 통나무 기둥 같은 것을 말하고,

    티는 각목에서 조금 삐져나온 나무 조각이나 대패밥과 같은 것입니다.

 

    들보는 구원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위의 소경과 소경의 비유에서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가

    우상숭배나 살인과 같이 지옥에 떨어질 만한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이 들보이고,

    티는 예배 의식에서 순서를 빼먹은 것과 같이 구원과 관계없는 작은 잘못을 의미합니다.

 

 2)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경고

 

    들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 환전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장사터가 되게 하여

    예배의 자리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야말로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들보의 죄를 범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갈릴리 백성들이 사소한 교회의 규칙을 범했다며

    그들을 비난하고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구원의 길을 망가뜨리는 들보와 같은 훨씬 큰 죄를 저지르고 있으면서,

    갈릴리의 가난한 자들이 자기들이 정해 놓은 정결예식의 사소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을 빗대어 들보와 티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3)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 네가 밝히 보고(42절)

 

            (성경구절 위에)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남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거듭난 자라 되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 앞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자신이 먼저 주님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바르게 파악하여 그

    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 영을 알지 못하니 엉뚱한 것에만 집착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교회가 신령한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 이렇게 엉뚱한 것만 집착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됩니다.

    내용은 없고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영의 세계에 있는 자들을 도리어 핍박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셋째 비유 :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비유

 

    들보와 티의 비유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말씀은 외면하고,

    예배의 순서나 교회의 전통과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만 빠져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책망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의 비유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참된 신앙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1) 못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6:43절).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셋째 비유는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의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나무는 사람을 가리키고,

    열매는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자를 가리킵니다.

 

 2) 좋은 열매 : 주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거룩한 본성

 

    좋은 열매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후로 우리가 천국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거룩한 본성이 생깁니다.

    이 거룩한 본성을 가진 자는 거룩한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쁨이 일어나고,

    말씀에 어긋나게 살면 갈등과 번민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본성이 없는 자는 그저 세상의 일로 기쁨을 느낄 뿐입니다.

    돈이 생긴다면 좋을까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려줘도 좋은 걸 모릅니다.

    혹시 감동은 받을지 몰라도 간절한 갈망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이런 간절한 갈망이나 거룩한 본성이 있는지의 여부로

    내가 좋은 열매를 가진 천국 백성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3) 선택 이전에 믿음의 문제 :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아나니(44절).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본성을 갖지 못한 자는

    결단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려면

    내가 전에 가졌던 목표나 인생의 방향이 다 바뀌고 수정되어야 하는데,

    참된 믿음이 없는 자라면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손에 다이아몬드를 가진 자가 것을 버리고 500원짜리 동전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위기에 있는 자가 그 500원짜리 동전을 가져야만 살아날 수 있다면

    그 비싼 다이아몬드라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4. 넷째 비유 :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6:46~49절)

 

 1) 건기에는 사막이 되는 개울 ‘와디’를 두고 비유하신 말씀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넷째 비유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비유입니다.

    팔레스틴은 여름에는 비가 없으므로 개울이 전부 모래로 되어 있으나

    9월에 비가 오면 그동안 말랐던 개울은 급류로 변합니다.

    이렇게 건기에는 마른 사막이었다가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개울을 ‘와디’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건기에 그곳이 개울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그 모래 위의 맨땅에 집을 짓는다면

    비가 와서 급류가 흐르면 곧 무너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2) 홍수와 탁류(급류) : 인생의 길에서 닥치는 시련과 위기의 때

 

    여기에서 홍수와 탁류는 인생의 길에서 삶을 포기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닥쳐오는 시련과 위기의 때를 비유한 말입니다.

    마지막 때 주께서 오시기 전에 최후의 심판 때에 있을 큰 환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기에는 급류가 흐르는 아주 위험한 개울이라도 건기에는 사막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비만 오지 않는다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도 훌륭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오면 그 집이 얼마나 허술하게 지은 집인지 곧 들통나게 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가짜 믿음이라도 시련이나 환난이 없으면

    그것이 참된 믿음인지 표가 나지 않아 가짜 믿음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시련이나 환난을 만나면 가짜 믿음인 것이 곧 드러나게 됩니다.

 

    평소에는 그 믿음이 거짓인 것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하여 시련과 박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참믿음을 가지지 않은 자들, 여전히 이 땅의 것을 주목하며 사는 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길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때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신 것 역시

    마지막 때 참된 믿음을 가려내시기 위한 것임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묵상 : 믿음은 행동하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믿음은 행동하게 하는 에너지를 가졌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믿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길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그 길을 향하여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 길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 믿음이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가 믿는다고 고백한 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1) 예수께서 새롭게 여신 새 시대 : 성령을 통한 기쁨의 시대

 

    예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스스로 자원하여 말씀을 지키는 시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도록 하는

    새로운 기쁨의 시대를 열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기쁨은 죄 사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께 주님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께서 주님의 의와 함께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을 내려주십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5:37~38)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포도주가 발효하여 낡은 부대가 터지고 맙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버리고 낡은 부대도 못쓰게 됩니다.

    또 낡은 옷을 깁기 위해 새 옷을 잘라 조각을 떼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새 옷 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 낡은 옷도 버리고 새 옷도 버리게 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는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새로운 은혜의 질서는

    결코 과거의 낡은 율법주의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이 서로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고 과시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멸시하는 율법주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사랑은 오직 예수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예수께로부터 새로운 의를 얻는 것으로만 주어집니다.

 

 3)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포도주를 찾는 자가 없나니(5:39절)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

 

    그러나 묵은 포도주를 마신 자들은 새로운 포도주를 찾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묵은 포도주는 주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세상의 질서만 찾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기쁨을 먼저 맛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먼저 회개를 하고 주의 영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세상의 기쁨은 회개 없이도 곧바로 주어지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기쁨을 얻은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찾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묵은 포도주를 맛본 자는 새 포도주를 찾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묵상 :

 

    하늘의 생명, 하늘의 기쁨을 얻는 데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므로

    시간도 걸리고 갈등과 아픔도 겪어야 합니다.

    또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의 도전을 이겨야만 하는 숙제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은

    계속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신령한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의 일을 크게 느끼게 만들어서

    우리를 그 은혜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려 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런 은혜의 삶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주님의 의를 선물로 받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직 주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얻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을 얻기 위해

주님을 포기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을 얻기 위해 세상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시는 복이 가장 귀한 것임을 믿고

주의 복을 항상 구하고 찾게 하옵소서.

 

구원에 이르는 좋은 열매를 맺는

신령하고 좋은 나무,

좋은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항상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건강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는 오직 주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얻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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