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설교본문 : 요한복음 20:1~23, 21:1~17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2년 4월 17일(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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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절이므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전합니다만,
오늘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의 말씀에 하나 더하여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가 변화되는 말씀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1 부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1. 그의 사랑과 믿음만큼
1)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20:1)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공관복음서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다른 두 여인이 함께 하였으며,
그 두 여인이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였다고 증거합니다(마가복음 16:1~2).
마태복음 28:2에 의하면 이때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무덤을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남자들의 동행 없이 여인들만 찾아 갔습니다.
2) 세 여인 중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공관복음서에서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세 명의 여인이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으나
본문 요한복음 20:1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본문을 종합해보면
처음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해서 세 명의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으나,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움직인 것을 보고
두 여인은 너무나도 흥분하여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고
막달라 마리아만 그곳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 묵상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받은 은혜만큼 표현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두 여인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죽을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던 그 여인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여인들 중에서도
특히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보다도 주를 향한 간절함이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받은 은혜만큼 표현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믿는다면
당신이 받은 그 은혜를 주님 앞에
감사로, 찬양으로, 봉사와 섬김으로 표현하십시오.
2.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기초이며 출발점이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믿을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기에
우리 앞에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능히 고치실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서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1 : 빈 무덤(20:1~2)
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마태복음 27:62~66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간 후 부활했다고 말할 것을 두려워하여
무덤의 입구를 큰 돌로 막은 후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 완전군장을 한 로마의 군사들에게 무덤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만일 무덤을 봉인한 인봉이 떼어지거나 시체가 사라진다면
그 무덤을 지키는 군사들이 대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갈 것을 염려하여
그들이 이렇게 군사를 동원하여 무덤을 지킨 것이
도리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지켰음에도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2 : 세마포와 개켜진 수건(20:3~7)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본문 7절에 나온 개역성경의‘개켜 있더라’는
세마포와 수건은 쌌던 모양 그대로 놓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건이 따로 떨어져서 개켜 있었다는 것은
수건은 얼굴과 머리만을 쌌기 때문에 몸을 싼 세마포와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명합니다.
● 묵상 :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하리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하리라는 것을
그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 가지 않고 그냥 자기들의 집으로 간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확실한 믿음이 없으면 신앙의 기쁨도 열정도 사라지게 됩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을 때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믿음에서 세상을 이기는 신실한 신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3. 가서 전하라
1)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뻐하는 막달라 마리아(20:16~17)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너무도 기뻐 랍오니여 하고 부르고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손을 대지 말라”는 말씀의 원어의 뜻은 ‘현재 부정 명령법’으로
‘나를 계속해서 붙잡고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또 놓칠까 싶은 마음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경험한 이 기쁨은 주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기쁨으로 세상의 유혹도 이기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믿음을 잘 간직하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들만
이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처럼 만나고 경험하는 자들만이
이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뵙지는 못하지만,
성령을 통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자가 되십시오.
2) 가서 전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을 붙잡고 있던 손을 그만 놓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경험했으면
그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쁨의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만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났으면 주님을 만난 기쁨을 증거하고 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전해져야 그들도 주님을 믿어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2 부 :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1) 예수께서 부활하신 직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20:17)
(성경구절 위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나의 가장 친근한 친정아버지가 되십니다.
언제 어느 때에도 기꺼이 내 편이 되어주시는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2) 거듭남, 영, 새로운 피조물이 된 주의 백성들
이렇게 하나님이 내 아버지, 내 하나님이 된 상태를 가리켜
요한복음은 ‘거듭남’, 혹은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과 이런 친교를 맺으며 사는 자들은
이 땅에서부터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3) 그러나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영생은 물건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날마다 호흡을 하고 물과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는 등
생명을 위한 일들을 해야 하는 것처럼,
영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일들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이고, 기도는 영의 호흡이며, 봉사와 섬김은 영의 운동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빛을 받는 것처럼 영도 빛을 받아야 하는데,
주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받는 것입니다.
● 묵상 :
육신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일들이 중단되면 육신의 생명을 잃게 되는 것처럼,
영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일들이 중단되면 영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영의 생명을 잃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영생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장차 주께서 심판하실 때 영원히 멸망을 받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영의 생명을 이어가는 신령한 경건의 일들을 날마다 반복하며 행하십시오.
제 3 부 : 베드로의 회복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마술을 보는 것처럼 신기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똑같은 모습을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여
예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던 베드로의 회복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의 공허한 움직임
1) 공허한 열정 : 의미 없이 밤새 그물을 던지기만 한 베드로(2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불과 얼마 전에 예수께서 안나스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후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이니 한밤중의 바닷바람은 아직 차갑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옷을 벗고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후 주님과의 신령한 관계를 잃어버린 베드로는
그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했고,
그래서 한 일이 고기를 잡는 일입니다.
고기 잡는 일은 그가 평생 한 일이니
이처럼 공허하고 답답한 마음일 때에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도 몰두할 수 없습니다. 고기가 잡히는지 안 잡히는지도 모른 채
추운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그물을 던지기만 할 뿐입니다.
● 묵상 : 이런 공허한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이때의 베드로와 같은 공허하고 답답한 상태를 오래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신앙적으로 볼 때 이런 공허한 상태는 응급 상황입니다.
특히 이런 답답한 마음의 상태에서 결단코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술을 마시는 일입니다.
술은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몇 배나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마시다 자살합니다.
2) 절망과 좌절을 벗지 못한 제자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제자들은
아직도 좌절과 절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직접 뵈었으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은 갖고 있으나,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믿음은 지식에 머문 믿음입니다.
단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 아직 그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소망 없는 삶입니다.
● 묵상 :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을 가지십시오.
혹시 이때의 제자들처럼 신앙을 단지 지식으로만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대로 내가 움직일 때 믿음의 능력이 나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2. 실패 속에서 발견한 은혜
1) 예수께서 그들 곁에 오셨으나 오직 요한 한 사람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21:4~7)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무기력한 삶이 더욱 심해져 좌절감을 경험하게 될 즈음에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얘들아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때였기에 그들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말씀대로 했더니
일곱 명의 장정들이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바로 그 때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로 헤엄쳐 갔습니다.
2) 실패 속에서 만난 은혜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때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였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장본인임을 밝혔습니다.
실패 속에서 만난 엄청나게 많은 고기들은
삶 속에서 경험하는 작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그 기적을 통해 해변가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나의 삶에 새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실패 속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실패 속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된 이유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보다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베드로의 죄가 훨씬 가볍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 본문에서 베드로가 다시 용서받고
예수님의 제자의 지위를 회복한 것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므로
가룟 유다와 똑같이 베드로도 예수님과 완전히 단절된 자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은 만 못한 멸망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복했고, 가룟 유다는 끝내 멸망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인지,
베드로는 영생의 사람이 되었고,
가룟 유다는 영원한 멸망의 사람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베드로가 실패한 후에도 믿음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었으므로
베드로가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이후
답답하고 공허한 중에도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 역시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령한 영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답답하고 공허한 상태가 매우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은 후 곧바로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특히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시켜달라고 간곡히 간구합니다(시편 51편 참조).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회복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2) 만일 베드로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갔다면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
공허하고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갔다면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은 것만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잠시 즐거움을 주지만,
그 즐거움 후에는 그 공허함과 답답함이 더욱 커지지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답답함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도 그의 답답함을 세상에서 해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일 제자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 부끄러움을 참고 그 제자들 틈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아무리 답답하고 공허하고 힘든 상태에 있더라도
결코 은혜를 받을만한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것은
절벽을 오르는 자가 힘들다고 손에서 밧줄을 놓아버리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4. 예수님 안에서의 풍성한 삶(21:11)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제자들이 매일 오늘처럼 153마리나 되는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된다면
이 세상을 풍요롭게 여유 있게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의미 없는 삶입니다.
예수께서 그날 그들에게 풍성한 고기를 잡은 기적을 보이신 것은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더 풍성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숯불을 준비하셔서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구워 주셨습니다.
1) 153마리는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153마리의 기적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153마리의 기적에만 집착합니다.
➠ 당신은 어떤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153마리의 고기를 잡는 풍요로운 삶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기를 153마리나 잡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까?
예수님 안에는 그보다 더 풍성한 기쁨의 삶이 있습니다.
나에게 더 풍성한 것을 주실 수 있으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2) 광야의 만나, 오병이어의 기적 때의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지날 때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더 좋은 만나와 더 맛있는 고기를 내려주기만을 바랬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고
그 자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를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12 바구니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다음 날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반복되기만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물고기와 보리떡의 풍요만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을 피하십니다.
3) 물고기 153마리가 아니라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하는 요한의 소리를 듣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바다 위로 뛰어듭니다.
바다를 헤엄쳐 가려면 오히려 옷을 벗어야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니 옷을 다 갖춰 입고 헤엄을 쳐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머리에는 153마리는 그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보일 뿐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그 여인도 예수님을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의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모습입니다.
● 묵상 1 : 이처럼 주님을 바로 찾고 바로 만나는 자가 되십시오.
주님을 만나기 위한 도구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면 주께서 떠나십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주님의 호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십시오.
● 묵상 2 : 153마리의 영적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때 잡은 153마리에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지를 찾으려 합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153마리를 잡은 그 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반한 후 마음의 공허감에 빠졌던 베드로가
이 일로 예수님도 만나고 그의 영적 위치도 회복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153마리나 잡았다든지, 153마리는 마지막 때의 어떤 징조라느니
이런 해석을 하느라 본문에 담긴 중요한 영적 의미를 잃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5. 용서와 회복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 시몬은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기 전의 이름(21:15~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상태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을 때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영은 심히 피폐해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영은 여전히 좌절과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2) 공허감과 좌절에 빠져 있었던 베드로
이런 상태였기에 예수께서 이미 부활하셨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고기 잡는 일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밤새껏 한 마리도 못 잡았으나 그는 그 일에 몰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의미 없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반복해서 질문하신 예수님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하신 것은
변절한 베드로를 다시 용서하시고
사도로서의 권위와 위치를 회복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질문을 통해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진정한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베드로의 영이 회복되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예수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비탄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비탄에 잠긴 상태가 바로 회개입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회개는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같이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께 고백하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런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도록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자
주께서 “내 양을 먹이라”하며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단지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주신다는 선언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 묵상 :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지만,
우리는 베드로처럼 육신의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뵙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하면
주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만나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는 기도 중에 주님을 찾는 기도를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 생명을 전하는 사명의 회복
1)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20:17)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이 말씀은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친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누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더라 하는 식으로
그저 보기에 신기한 마술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모습대로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이며,
이 일이 미래의 일일 뿐 아니라
오늘 지금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고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2)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21:15~17)
(성경구절 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베드로에게 유일하게 강력한 교황권을 준 것이라고 말하지만,
변절한 베드로에게 잃어버렸던 사도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베드로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내 양을 치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양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 묵상 :
이런 일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세우신 생명 구원의 일을 합니다.
생명을 전하는 성도가 됩시다.
생명을 구하는 교회가 됩시다.
이 일을 위해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떠함을 알게 하옵소서.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홀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가진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을
경험하여 아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그 기쁨을 세상에 전하게 하옵소서.
풍성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을 더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