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설교본문 : 이사야 40:1~31(참고 열왕기하 11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2년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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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니”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제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여러 믿음 중에서 어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만한 믿음인가요?
오늘 열왕기하 11~12장과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믿음이 무엇이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1 부 : 형식적인 신앙의 위험(요아스의 거짓 신앙)
먼저 형식적인 거짓된 믿음이 무엇인지 요아스 왕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1장에 기록된 요아스 왕에 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 왕 요람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아스의 아버지인 남왕국 유다 왕 아하시야가 병문안을 왔다가
반란을 일으킨 예후에게 요람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유다 왕이며 자기 아들인 아하시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희대의 약녀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가
남왕국 유다의 왕가로 시집와서 벌인 끔찍한 이야기에서부터 오늘 말씀은 시작합니다.
●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사야 40장이므로
요아스에 대한 말씀은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드립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큐티방을 참조해주십시오.
1. 아달랴의 반역과 요아스를 살린 여호야다
1) 정권 찬탈을 위해 자기 손자들을 죽인 아달랴(열왕기하 11:1)
1. (유다 왕)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유다 왕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곧바로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포함한 유다의 왕족을 모두 죽입니다.
아하시야의 아들들은 아달랴의 친손자들입니다.
아하시야가 살아있을 때에도 아달랴가 태후의 자리에 있어서
어느 정도 나랏일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들이 죽었으니 손자들 중 하나가 왕이 될 터이고
그러면 자신은 태후의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에
아예 손자들을 포함한 왕족을 모두 죽이고 자기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려 한 것입니다.
권력의 욕심이 이처럼 무섭습니다.
권력 앞에는 자식도 없고 손자도 없는 것입니다.
2) 요아스를 살리신 하나님(왕하 11:2~3)
2. 요람 왕의 딸이며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그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3.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그러나 악이 세상을 점령할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을 모두 멸족시켰다고 생각했지만,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자기의 침실에 몰래 숨겨둡니다.
이때 요아스의 나이 1살입니다.
이때부터 여호세바의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간 그를 지키고 돌봅니다.
● 묵상 : 역사를 이끄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모두 강물에 빠뜨려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을 내린 바로의 딸을 통해 모세의 생명을 구하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요아스의 고모와 고모부인 여호세바와 여호야다를 통해
그를 살리셨습니다.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를 이끄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2. 요아스의 성전 수리와 종교개혁
요아스가 성전에서 숨어 지낸 지 7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백부장들과 호위병들을 동원하여 아달랴를 죽이고 요아스를 왕위에 올립니다.
7세에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된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자신을 교훈하는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백성들로부터 직접 예물을 받아 성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제사장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백성들이 직접 성전을 수리하는 자들에게 드리게 하여 성전을 수리합니다.
3. 요아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
1) 요아스의 배반과 타락(역대하 24:15~19)
15.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 세라
16. 무리가 다윗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19.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요아스의 이야기는
그의 생명의 은인인 제사장 여호야가다 죽은 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요아스 왕은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서 구하여 왕이 되게 했던
제사장 여호야다가 130세로 죽자 곧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이 요아스 왕을 충동질하자
그들의 말을 듣고 바알신과 아세라신은 물론 각종 우상을 섬기는 죄에 빠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스가랴를 처형하는 요아스(역대하 24:20~21)
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인 선지자 스가랴는 단을 높이 만들고 그 위에 올라서서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으니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리시리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요아스의 지지자들이 요아스의 명을 받고
스가랴에게 백성을 선동한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성전 뜰에서 돌로 쳐서 처형하였습니다.
스가랴는 자신의 억울함을 신원하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죽었습니다.
3) 요아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대하 24:23~25)
23. 일 주년 후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하여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그 모든 방백을 멸절하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24.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 손에 붙이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25. 요아스가 크게 상하매 적군이 버리고 간 후에 그 신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 하였더라.
요아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인 일이 있던 그 다음 해에
아람(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에서 아람 군대는 심하요아스에게 심하게 중상을 입히고 떠났고,
침상에 누워 있는 요아스를 그의 심복들이 죽였습니다.
여기에서 역대기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합니다.
➀ 제사장인 여호야다는 왕들의 묘실에 묻혔는데
요아스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들의 묘실에 묻히지 못했다는 점.
➁ 아람(시리아) 군대가 유다의 군대보다 훨씬 적은 군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요아스는 그들보다 훨씬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패하였다는 점.
이로써 역대기는 하나님을 버린 자들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었고,
또 전쟁은 무기의 수가 군사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4. 요아스의 신앙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대하 24:17~18)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렇다면 그 동안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를 책망할 정도로 성전 보수에 열심을 내었던 것은
어떤 의미로 한 일이었을까요?
그동안의 요아스의 성전을 향한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제사장 여호야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열심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자마자 그의 행동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제 2 부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요아스의 형식적인 거짓 신앙이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보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가 죽기 전에 그 실체를 벗기시고
그에게 멸망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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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을 때 부르짖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겨우 부르짖기 시작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위로하십니다.
거짓된 신앙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아주 차갑게 버리시지만,
진심으로 나아오는 자에게는
지극히 초보적인 기도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주십니다.
1. 너희의 복역의 때가 끝났다
1)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1절)
1. 너희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다가
70년 후에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리라고 예언했습니다만,
실제로는 43년 만에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앞당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40장이 기록될 때는 아직 포로 중에 있을 때입니다.
이사야(제2 이사야)가 40장의 이 말씀을 선포할 때는
포로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아직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제2 이사야)를 통해
‘그 복역의 때가 끝났으니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단순한 위로나 격려가 아닙니다.
가령 과거 조선시대에 사형 집행을 눈앞에 둔 죄인이
왕으로부터 위로와 함게‘내가 반드시 너를 살리리라’라는 말을 들었다면,
이 말은 일반인이 주는 위로나 격려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는 그의 죄가 모두 사함 받았다는 선언과 함께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지키고 도우리라”는 하나님의 의가 담겨 있습니다.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2절)
2. 너희는 정다이(마음에 닿도록)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들에게 외쳐 말하라.
그(예루살렘)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그 죗값을 배나 받았느니라’할지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사야 39장까지의 말씀이나,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등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벨론 포로의 그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그나마 그 기도라는 것도 제대로 된 기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정도이거나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기도에도 하나님께서 반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다이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회초리를 때린 후에,
아이가 울자 엄마도 함께 울면서 그 아이를 품에 안듯
그렇게 탄식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에 위로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3)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2절 성경구절 위에)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복역의 때가 끝이 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며 부르짖는 순간
그들이 저지른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동안 당한 그 고난으로 그 죗값이 다 갚아졌으니
이제 위로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1)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3절)
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大路)를 평탄케 하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그들을 바벨론 포로의 고난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광야와 같은 고난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니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대로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가지고 오시는 큰길을 뜻합니다.
마치 과거 조선시대에 왕이 행차할 때
그 앞에서 왕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큰 복을 가지고 오시니
하늘의 왕의 행차를 평탄케 하라는 것입니다.
2)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낮아져서 평탄게 되며(4절)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복을 가지고 오시면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산은 낮아집니다.
골짜기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가리키고,
산은 교만하여 높아진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에게는 힘을 주시고,
교만한 자는 그 교만을 꺾어 겸손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길이 평탄하듯 모든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며 섬기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이런 일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120명의 성도에게서 나타났습니다(사도행전 1~2장).
3. 하나님의 대로가 열리는 광야와 사막
1) 광야와 사막은 죄의 독을 빼내는 곳(3절)
(3절 성경구절 위에)
그런데 하나님의 대로가 열리는 곳이 하필 광야와 사막입니까?
광야와 사막은 사람들이 살기 가장 싫어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사는 것은 고사하고
단 며칠 여행하는 것조차 싫다고 할 만큼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이 광야와 사막에서 하나님을 향한 대로가 열립니까?
그 광야에서 죄의 독이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때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나게 하셨고,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가나안 남부 광야로 부르신 것입니다.
2) 광야와 사막은 하나님을 찾고 부르게 하는 곳
광야와 사막은 재미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곳입니다.
고통과 답답함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바랄 곳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곳, 그곳이 광야와 사막입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우니 저절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됩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도 이런 고통 속에서는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3)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니 복역의 때가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이 광야와 사막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이 이스라엘에게는 광야요 사막입니다.
바벨론 포로 중에 광야와 사막에서 사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 고통 중에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니 복역의 때가 끝이 난 것입니다.
4.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1)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6~7절)
6. 말하는 자의 소리가 이르기를 “외치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하고 물었더니,
그 소리가 이르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사람이 가진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봄에는 비가 촉촉이 내려온 대지에 풀과 꽃이 가득하지만,
여름이 오면 건조하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
대지에 가득한 풀과 꽃이 불과 2~3일 만에 다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가진 모든 아름다움도 다 사라지고 맙니다.
아무리 젊고 싱싱한 아름다움을 가진 자라도 조금 후에는 그 흔적조차 없어지고,
그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게 됩니다.
2)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8절)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아름다움을 영영히 간직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다가,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신을 벗을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몸을 갖고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5. 위대하고 광대하신 하나님
그러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이사야에게 이 말을 전할 때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어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자로 오시리라는 말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이 말을 듣고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능히 짐작이 갑니다.
이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1)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12절)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皿秤, 천칭, 접시저울)로 산들을,
간칭(杆秤, 손저울)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느냐?
바닷물이 얼마나 되는지 손바닥으로 헤아려본 이가 있느냐,
뼘으로 하늘을 재어본 자가 있느냐,
땅의 먼지들을 되에 담아 본 자는 누구이며,
접시저울과 손저울로 산들의 무게를 달아본 자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천지 만물을 한 번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온 우주를 만드신 이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2)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느냐(13~14절)
13. 누가 여호와의 신(여호와의 마음)을 지도하였으며,
모사(謀士, 상담자)가 되어 그를 가르쳤느냐?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리를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通達, 총명)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여호와 하나님을 지도한 이가 있느냐,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느냐,
그에게 공평의 도리를 가르친 자는 누구이며,
누가 그에게 세상의 이치를 가르쳤느냐고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다 모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혜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15~16절)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6. 레바논의 짐승들은 번제물 드리기에도 부족하겠고,
레바논의 삼림은 그 화목 소용(제단의 장작)으로 쓰기에도 부족할 것이라.
지금은 비록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저 강력한 나라 바벨론도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 위에 있는 작은 먼지 같습니다.
레바논의 짐승들을 다 모아도 하나님께 번제물 드리기에도 부족하고,
레바논의 그 무성한 숲의 나무들을 모두 모아도 제단의 장작으로 쓰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강력하심과 광대하심을 믿고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4) 그는 모든 열방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17절)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저 열방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십니다.
저 강력한 나라 미국이나 러시아나 중국을 모두 다 합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한 방울의 물이나 먼지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눈에 보이는 힘과 권세를 믿고 그 오만함을 과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십니다. 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5)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한낱 메뚜기에 불과하다(22~23절)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居民,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遮日, 휘장)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쳐 놓으셨고
23. 귀인(귀족)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士師, 땅의 통치자)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우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그 우상의 배후에 있는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 때문입니다.
그 우상은 바벨론의 힘과 권세의 상징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도 그 상징물로 표현되는 바벨론의 그 화려한 문화와 권력에
자기들도 들어가서 함께 참여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강력한 힘을 가진 거대한 제국 바벨론의 통치자나 그 화려한 문화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메뚜기에 불과합니다.
하늘을 차일(천막)같이 치시는 이 땅과 하늘의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들에 불과합니다.버리는 검불 같은 존재들입니다.
6)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누가 창조하였나 보라(26절)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모든 별들을 하나하나 그 수를 세며)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그리고는 우리가 보는 이 모든 것을 누가 창조하였는지 보라고 말합니다.
주께서는 마치 양의 우리에게 양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 하늘의 별들을 하나하나 그 이름을 부르며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는
저 은하계를 넘어 우주 저 끝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6.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1) 너희는 어찌하여 내 사정은 하나님께 숨겨졌다고 말하느냐(27절)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다”고 말하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바벨론 포로 중이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벌써 몇십 년째 포로 생활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나의 원통함을 돌아보시지도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2)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28~29절)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그러나 땅끝 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곤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를 이 땅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진 자로 만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든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것을 주실 수 있는 힘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주고자 하시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잠시 우리를 광야와 사막의 고통에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3)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30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여기에서 말하는 소년과 장정은
지금 이 땅에서 가장 힘이 있고 권세를 가진 세상의 최고 엘리트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재벌들 같은 돈과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군인으로 말하자면 최정예 특공대 같은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실 때인 여호와의 날이 오면
소년이라도 넘어지고 장정이라도 자빠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로 특별히 택함을 입은 자들일지라도
죽은 낙엽처럼 넘어지고 쓰러질 것입니다.
4)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31절)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같이 힘차게 오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새 힘으로 바꾸신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나를 도우실 날을 바라보며 끝까지 주님을 믿는 자리를 지킨 자들,
주님을 소망하며 기다린 자들을 주께서 새 힘으로 바꾸십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채우십니다.
● 묵상 :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31절)
우리가 이 땅에 육신으로 있는 한 우리도 달음박질하기도 하고 걷기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때로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이 땅에 있는 한 때로 우리도 힘들고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신앙의 자리를 잃지 않는다면
그 힘들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중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결 론 :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요아스의 신앙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꽤 그럴듯해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 거절당했고,
바벨론에 포로 된 유다 백성들의 신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엉망진창인 것 같아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초라하고 소박한 신앙이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1)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앙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잠시 매일 일을 해야 먹고 사는 일용직이라고 합시다.
어제도 그제도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일을 하지 못하면 식구들이 모두 굶어야 합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새벽 4시부터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은 제일 처음에 내가 일꾼으로 뽑혔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런 상황이라면 그날 여러분은 어떤 심정으로 일을 할까요?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일을 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할 때 무엇을 생각하며 일을 할까요?
저녁에 일을 다 마친 후에 받을 품삯을 생각하며 일을 할 것입니다.
그 품삯을 받으면 가족들이 밥을 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품삯을 생각하며 더워도 일하고, 힘들어도 감사하며 일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앙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바라보며 좋든지 나쁘든지 기쁘든지 답답하든지
항상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 이것이 앙망하는 것입니다.
2)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연약한 힘을 새 힘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은 새 힘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바라보며 날마다 주님을 섬기며 사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연약한 힘을 강력한 새 힘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하늘의 힘과 권세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모습이 비유하셨습니다.
3)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이 한 기도는 그리 훌륭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힘들고 고달프다는 탄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초라한 기도를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을 불러놓고는
“봐라, 재들이 기도하기 시작했다!”하고 말씀하시고는
좋아서 춤이라도 추셨을 것입니다.
● 묵상 :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도 좋아하시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저 조금만 시간을 내시면 됩니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십시오.
날마다 회개함으로 하루의 영의 더러움을 청소하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채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연약함을 강한 힘으로 바꾸십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 하나님께서 새 힘으로 바꾸신다.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겉만 번지르르한 그럴듯한 신앙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소박하더라도 내 마음이 담긴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주님
하나님을 향한 대로가 광야와 사막에 있다는
이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게 하옵소서.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일을
멈추는 자 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는 오직 주님을 앙망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능력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