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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문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니라(4월 16일; 고전 1:1~25)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3.04.17|조회수156 목록 댓글 0

설교제목 :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니라

설교본문 : 고린도전서 1:1~25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3년 4월 16일

 

 

서 론 :

 

➠ 신앙은 기쁨과 평안을 두고 마귀와 벌이는 평생의 전쟁입니다.(지난주 설교요약)

 

    구원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평생의 삶은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 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평강을 빼앗는 일을 조심하십시오.

    기쁨과 평강을 잃으면 마귀가 그 틈을 타고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기쁨과 평강이라도 주께서 주시는 것이라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 평강은 멸망의 길을 잠시 잊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평생은 기쁨과 평강을 두고 마귀와 벌이는 한판 전쟁입니다.

 

    기쁨과 평강을 잃는 것, 이것이 신앙의 응급 상황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염려를 버리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평강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었다는 바울의 말처럼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기쁨과 평강을 잃지 않는 자들이 됩시다.

 

 

고린도전서 소개 : 고린도 교회와 바울

 

 1) 탈진과 두려움의 상태에서 고린도에 들어간 바울

 

    바울은 고린도에 가기 전에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2차 전도여행을 지나면서 그야말로 쉴 틈 없이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아테네에서는 조금 여유를 가지면서 전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성경말씀은 물론 헬라철학에도 능통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가 가진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하여 자신 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아네테 시민들은 바울의 전도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네테 시민들은 그저 새로운 것을 듣기를 원할 뿐입니다.

 

    아테네에서의 전도에 큰 실패를 맛본 바울은

    탈진과 두려움에 빠진 상태로 고린도에 들어갑니다.

    이때 바울의 상태는 기쁨이나 평강은 1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두려움과 답답함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기로 합니다.

    그의 답답함을 해결하는 것보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세운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지 얼마 후

    고린도 교회를 무너뜨릴 만한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가 고린도 전서와 후서입니다.

 

 2) 아테네보다 상황이 더 나쁜 고린도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갔는데

    고린도는 상황이 아테네보다 더 나쁩니다.

 

    ➀ 성(性)문화가 발달 된 타락한 도시 고린도

 

       고린도는 그리스의 항구도시로 아가야 지역의 수도(首都)로

       상업과 무역과 정치의 중심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와 같은 신전이 12개나 있었는데,

       이들 신전에 신전 창기들이 무려 1,000명이나 있었으므로,

       아테네 시민들처럼 교만한데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기까지 한 도시였으니

       바울은 고린도에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➁ 아테네와 같이 철학과 학문의 도시 고린도

 

       신약성경에서 ‘로고스’는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말씀이나 예수님 자신을 뜻하고,

       ‘그노시스’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지혜를 뜻합니다만,

       아테네와 고린도에서 이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여 ‘로고스 그노시스’라고 하면

       ‘철학이나 학문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설득력을 가진 달변가’라는 뜻이 됩니다.

 

       그 당시 아테네와 고린도는 철학과 학문(로고스와 그노시스)의 도시였고,

       그것을 설득력 있고 솜씨 있게 말하는 수사학이 발달 된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1차 선교여행 초반부에 말라리아 풍토병 후유증으로

       말이 어눌하게 된 바울로서는 말씀을 전하기 아주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3) 여호와 이레 : 그런 바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미리 브르스길라와 아굴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도울 자를 바울보다 미리 보내셨습니다.

    로마에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바울보다 먼저 고린도에 도착하게 하셨고,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후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둘도 없는 동역자들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전도한 그 어느 교회보다도 뜨거운 열정을 가진 성도들이 됩니다.

 

 4) 아픔을 딛고 세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큰 믿음이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때에도

    변함없이 주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을 말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뚫고 들어간 고린도에서

    바울은 1년 6개월을 지내며 사역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고린도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어느 교회보다도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 일부 교인들이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이

    이런 문제들을 정리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1 :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1.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분쟁

 

    바울이 죽을 만큼 마음에 부담감을 가지고 힘들게 시작한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지 얼마 후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세운 고린도교회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조금 특이하게 그 당시 대표적인 지도자들인

    바울과 게바(베드로)와 아볼로를 추종하는 자들 간에 일어난 분쟁이었습니다.

 

    각 파당들은 자기들이 추종하는 자들의 이름을 따라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라 불렸고,

    이들 파당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자기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들을 ‘그리스도파’라 불렀습니다.

 

 1) 특정한 사람을 추종하는 자들끼리 모인 파당(12절)

 

           12.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너희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하고 말하는 것이니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과 베드로와 아볼로 사이에는

    그 어떤 분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아볼로를 추종하는 자들 간에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보이는 무엇인가를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의지하더니,

    고린도교회에서는 그들이 존경하는 어떤 사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 존경하는 것과 숭배하는 것의 차이를 분별하십시오.

 

    물론 우리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누군가를 통해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또 믿음이 자랄 때까지는 누군가를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부모님이든, 교회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든,

    아니면 존경할 만한 교계의 지도자이든 간에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고 그를 바라보며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롤모델로 여기는 그 정도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 그를 추종하고 숭배하는 단계에 이르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그가 어떤 능력을 가진 자라도

    예수님처럼 의지하고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조각하여 만든 우상만 우상이 아니라

    예수님 대신에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고 숭배하는 것도 우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복음의 다양성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편식하는 사람들

 

    각 파당은 독특한 특징을 가졌습니다.

    바울파는 믿음을 강조했고, 게바파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강했으며,

    아볼로파는 학문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지하는 지도자의 성향을 따라

    신앙의 다양한 모습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였고,

    오직 이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 각자의 특성과 은사를 가지고 서로 돕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신앙은 종합예술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함께 있어야 건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율법도 잘 지킵니다.

    율법을 잘 지키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공부하고 묵상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파당들은 각자 자기들의 독특함을 예수께서 주신 은사로 여기고

    서로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고린도교회는 건강한 영을 가진 교회로 더욱 성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묵상 : 분쟁과 다툼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악한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 은혜받은 자들은 말씀만 강조하고, 기도로 은혜받은 자들은 기도만 강조합니다.

    또 기도를 하더라도 뜨겁게 기도하는 자들은 조용히 기도하는 자들을 멸시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자들은 뜨겁게 기도하는 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이 모든 자들이 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맞는 은사를 적절하게 주셨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파당을 만들고 서로 비난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독특한 특징이나 성품으로 서로 돕는 자가 되고,

    나와 다른 은사를 가진 자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서로 도우라고 각자 다른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17)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인간의 말재주)로 하지 않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 우리는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부득이하게 다른 교회로 갈 수밖에 없다면 그를 비난하지 말고,

    그가 그 교회에서 믿음 생활 잘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또,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에게 그 교회는 잘못된 교회이니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오라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혹시 이단에 속한 교회에 다니고 있다면 물론 그곳에서 나오게 해야 하겠지만,

    정상적이고 건강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자라면

    그 교회에 다니고 있음을 칭찬해 주십시오.

 

    ● 묵상 :

 

       내가 속한 교회가 부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주님을 바르게 믿어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주께서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다른 사람의 경험도 존중하는 자가 되십시오.

 

    서로 자기의 신앙적인 경험만을 강조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사람만 강조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일 역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의지하는 동안

    나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이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됩니다.

    내 눈의 시선이 예수님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 :

 

    예배나 세례는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입니다.

    예배와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까지 자기 파당이나 교회의 확장의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주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의 능력을 가로막는 행위가 됩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예배드립니다.

    예배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예배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부흥을 위해 예배드리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예배드리십시오.

    교회 부흥을 위해 전도하지 말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도하십시오.

 

    교회 부흥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을 섬기기에 힘쓰면 교회 부흥은 주께서 이루어지실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세례요한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3.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18)

 

           18. 십자가의 도(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이치)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한낱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 멸망과 구원 : 지금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

 

    구약의 사람들은 구원을 장소와 혈연의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들의 나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으니

    그 성전의 능력으로 자기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멸망과 구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전에 있으면 구원이요 성전 밖에 있으면 멸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과 구원은 시간의 개념입니다.

    어떤 시간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멸망과 구원을 구분 짓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가 살아가는 시간이 멸망이 되기도 하고 구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2~23절)

 

           22. 유대인은 표적(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마음에 걸리는 것,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로되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는 주님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죽지 않고

    산 채로 불 병거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과 같은

    환상적인 기적이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헬라인들이 원하는 것은 마음에 감동을 주는 철학적인 심오한 말들입니다.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에서

    그들은 철학적인 심오함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형벌을 당한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소리를

    실없는 소리, 미련한 자의 헛소리로 여긴 것입니다.

 

묵상 : 구원의 말씀을 걸림돌로 여긴 사람들

 

    이렇게 십자가가 유대인과 헬라인들 모두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나약하고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십자가가 걸림돌이 된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보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가 되십시오.

 

 

2 :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에는 능력과 지혜니라

 

1.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니라(24)

 

 1)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가 되십시오.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이 내 손아귀에 들어와야 안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님의 약속을 더 신뢰합니다.

 

    약속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2) 십자가의 도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이미 천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21)

 

1)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어리석게 보이는 말씀 선포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작정하셨도다).

 

    그러므로 말씀은 이 땅의 사람들을 하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에게 천국의 시간을 살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말씀이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전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회자의 설교가 세상 사람들의 강연보다 훨씬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강연을 단 5분만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고 마음에 감동이 생깁니다.

    그러나 설교는 졸리기도 하고,

    뭐 저런 설교가 다 있나 싶은 정도로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2) 소박한 말씀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만일 설교가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엄청난 기적을 행하면서 설교한다면

    그야말로 시청각 교육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이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유창한 강연가들처럼 화려한 솜씨로 설교를 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명의 유명한 설교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소박한 설교를 합니다.

 

 3)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21절)

 

            (21절 성경구절 위에)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소박하게 전파되는 바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세상의 화려한 것을 찾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지혜를 만날 수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자,

    바로 이런 자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묵상 :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진 자들은

    소박한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자들은

    오직 자기 마음에 감동이 되는 화려한 설교만을 찾습니다.

    당신이 설교를 듣는 자세는 어떻습니까?

 

 4)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25절)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 어리석게 보여도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여도

                       사람의 힘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다들 자기 호주머니 채우기에 바쁜 세상에

    남을 섬기자고 하니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휴일조차 일하고,

    혹은 휴일에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휴식을 취해야

    더 나은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데,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일이 평일보다 더 바쁘니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더라도

    우직하게 오직 하나님만 믿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앙의 질서를 지키며 사는 자들,

    이들이 바로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시간, 천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묵상 :

 

    나는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인지 천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인지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3.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18)

 

           18. 십자가의 도(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이치)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한낱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 멸망과 구원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한낱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이 말씀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받는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이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멸망과 구원은 장차 주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나타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래형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일로 되어 있습니다.

 

 2)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멸망과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멸망과 구원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것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멸망의 시간, 혹은 구원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일상생활 속에 멸망과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직장에서 어떤 사람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 :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이 말씀처럼 같은 자리에서 맷돌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멸망의 시간을, 한 사람은 구원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으로

    구원과 멸망이 이 땅에 함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4. 더 위험한 유혹 :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

 

    흔히 ‘유혹’하면 도덕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유혹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한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에 더 관심을 갖고있는 지를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지키는 것과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일이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이 잘 안될 때 내 마음이 괴로운지,

    어떤 것은 잘 안돼도 그저 그렇게 지내게 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은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항상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신령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을 주께 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은

    이 세상의 것에 대하여 항상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어떤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묵상 :

 

    마귀는 우리가 세상일에 집착하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유혹입니다.

    소리 없이 살며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단지 관심을 갖기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죄짓는 것도 유혹에 빠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한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세상일에 분주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결 론 :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를 결단코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1) 세상의 힘과 권세를 자랑하면 구원받기가 어려워지므로(마 19:24)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 있는 자,

    높은 지위에 있어 세상에서 유력한 자들을 다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것을 많이 가진 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게 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데,

    자기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고, 자기의 힘과 권세를 의지하게 되니

    구원받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2)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가지지 못한 자들은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으므로 의지할 곳은 하나님뿐이니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구원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세상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3)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러나 가난한 자라도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긴 자라면 부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자가 자기의 가진 재물에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가난한 자 역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가 된다면

    그들 역시 멸망의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우리는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바르게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건강한 믿음의 성도가 됩시다.

 

 

주님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를 가진 것을 인정하고

서로 돕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자라면

나와 다른 모습을 가졌더라도

서로 비난하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날마다 거룩하여지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떠나서는 결코 거룩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멸망의 시간이 아니라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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