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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문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고 믿었으므로 행하였다(6월 25일; 고후 3:12~4:18)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3.06.26|조회수88 목록 댓글 0

설교제목 :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고, 믿었으므로 행하였다

설교본문 : 고린도후서 3:12~4:18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3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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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왜 똑같은 말씀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어떤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심지어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외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었으나,

    성경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마음에 수건이 덮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수건이 덮여있으면 아무리 세상 지식이 많아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서 그 수건이 벗겨지면 글도 모르는 베드로 같은 무식쟁이라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마음에 덮인 수건에 대한 말씀에서부터 시작해서

    주께서 주시는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 주의 영광을 보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고

 

1. 마음에 수건을 덮고 있는 사람들

 

 1) 곧 사라지게 될 영광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모세(3:12~13)

 

           12. 우리가 이같이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사라져가는 것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과 같은 일을 아니하노라.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지내고 내려오니

    모세의 얼굴에서 밝은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너무 심하여

    백성들이 두려워하므로 백성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그 수건을 벗었습니다(출 34:25~39).

 

    그러나 바울은 그 광채가 곧 사라지게 될 것이므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 가렸다고 말합니다.

    곧 없어질 영광이지만 그나마 백성들이 두려워하니 가려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2) 오늘까지도 그 수건을 벗지 못한 유대인들(14~15절)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 가려진 수건을 다시 비유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고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 마음이 완고하여 그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음에 수건이 덮여있으면 말씀을 보고도 주님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에 수건이 덮여있으므로 이 세상의 것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십자가에까지 달리시면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그 하늘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르고

    오직 이 땅의 것을 구하는 데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선이 벗어지고(16절)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내 마음에 덮인 수건이 벗겨집니다.

    마음에 덮인 수건은 오직 주께서만 벗겨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부르십시오.

    주님의 성령을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에 덮인 수건이 벗겨지고

    내가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일들이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를 집어삼킬 듯이 덤벼드는 사자처럼 보였으나

    쇠사슬에 매여 나를 공격할 힘이 없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묵상 : 마음에 덮인 수건을 벗겨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염려 걱정 근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마음에 수건이 덮여있어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토끼를 보고도 놀라는 개구리처럼

    세상의 별것 아닌 것 가지고도 좌절감에 빠지고

    우울증에 공황장애까지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덮인 수건을 벗겨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2. 복음의 말씀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1) 믿지 않는 자들 : 이 세상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4:4)

 

            4. 그 중에(혹은, 그들로 말하자면,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신(사탄)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자들은

    이 세상 신인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마음에 수건이 덮여 있어서(고후 4:4)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탄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까지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니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말씀 묵상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마귀가 우리 마음에 수건을 덮고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 신앙의 주광성과 굴지성

 

    식물의 잎과 줄기가 햇빛을 향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주광성(走光性)이라 하고,

    뿌리가 땅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굴지성(屈地性)이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아는 자들은 날마다 그 빛을 향하여 나아가려 하고,

    주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멸망의 캄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주님의 은혜의 기쁨을 모르니 세상의 기쁨이 전부(全部)인 줄로만 알고,

    오직 땅의 것을 얻기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의 기쁨을 아는 자들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게 됩니다.

주광성, 굴지성(빛과 중력에 따라 구부러지는 현상)

 

 2)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마태복음 13:3~4, 19)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의 빛이 비치지 않는 것을

    예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이 비유에서

    씨는 주님의 말씀이고 밭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아무리 말씀이 선포되어도

    그 말씀이 그 마음에 심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빛은 말씀과 함께 들어가게 되는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니 주님의 영광의 빛도 비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수건이 덮이고 복음의 광채가 우리 마음을 비치지 못하게 되면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깨닫지 못하니 말씀 읽는 것도 싫고 설교를 듣는 것도 지겹게 느껴집니다.

    그저 내 마음을 자극하는 세상 이야기나 듣고 싶어 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가 되지 않도록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십시오.

 

 3) 믿는 자들 :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셨다(고후 4:6)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창 1:3)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직 빛을 만드시기 전에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창 1:3)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듣고 주님을 아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나를 위한 것임도 알게 되었고,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된 것입니다.

 

묵상 :

 

    믿음도 내 힘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용서하신 것,

    나에게 믿음 주신 것,

    나에게 직분을 주셔서 장차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될 소망을 주신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신 주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3.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3: 17)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자유’로 번역된 ‘엘류데리아’에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소극적 자유’와 ‘거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적극적 자유’,

    이렇게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1) 소극적 자유 : 죄와 율법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자가 누리는 자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으니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기쁨이 있습니다.

 

    ➀ 죄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자기도 그 일로 인하여 결국은 망하게 되리라는 것도 아는데

       그 일을 중단할 수 없는 죄의 중독증이 죄의 억압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려움에 눌려서 사는 것입니다.

 

       이 일로 장차 심판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두려움이 죄의 억압입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내 안에 있는 죄의 중독증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도저히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주님의 은혜로 그 죄를 짓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저주받은 죄의 중독증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➁ 죄를 용서받은 자가 누리는 자유

 

       죄의 중독증을 해결하여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마음에 남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은 죄는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그 이전으로 가서 죄를 짓지 않는 삶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가 지은 그 모든 죄도 예수님의 은혜로 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은 자가 누리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➂ 날마다 용서를 받으며 사는 자가 누리는 자유

 

       세례를 받을 때 그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고,

       또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죄의 중독증도 치료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남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산다는 점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 중

       단 하루라도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사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주님과 교제하는 일을 통하여

       날마다 그 죄를 씻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매일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듯

       날마다 주님과 교제함으로 그날 지은 죄를 날마다 씻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적극적 자유 : 은혜와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누리는 기쁨의 자유

 

    그러나 이런 소극적 자유는 주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진짜 자유는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자유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내 마음을 변화시켜주셔서

    주님의 거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게 하니 자유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자유의 기쁨을 느낍니다.

    하기 싫은 일은 10분을 해도 지겹지만,

    하고 싶은 일은 24시간을 꼬박해도 지겨운 것을 모릅니다.

 

    내 마음에 수건이 덮였을 때는 성경 한 구절 읽는 것도 지겨웠으나,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1년 365일을 매일 성경을 읽어도 즐겁습니다.

    내가 즐거운 일 하고도 주께 복을 받으니 자유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묵상 :

 

    물론 세상에서도 자유의 기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그 끝에 멸망이 있습니다.

    자유의 기쁨을 느끼지만 그 시간이 너무나도 짧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만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4.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고

 

 1)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니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혹은,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이르게 되니,

                         이 일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

 

    마음에 덮인 수건이 벗겨지면 말씀에서 주님을 봅니다.

    전에는 그냥 성경에 쓰인 글의 내용만 보였는데,

    마음에 덮인 수건이 벗겨지고 내 안에 주님의 성령이 오시면

    성경말씀 안에 계신 주님이 보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묵상을 통해 날마다 주님을 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니(18절)

 

            (18절 성경구절 위에)

 

    이렇게 날마다 주의 영광을 보는 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합니다.

 

    물론 우리가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보는 중에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묵상 :

 

  ➀ 조금씩 점진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은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단지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여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➁ 그 첫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완성된 자로 여김 받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중에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땅의 시간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변화된 상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까요?

     우리가 100년이 아니라 1만 년의 시간을 산다고 할지라도

     결코 주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으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그 첫 출발점에서부터 완성된 자로 여기십니다.

 

     날마다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서 변화되는 그 시간 속에 살아가기만 한다면

     많이 부족한 채로 삶을 마감하게 될지라도 우리는 완전한 자로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니 복음이고, 그러니 은혜입니다.

 

 

2 : 내 안에 보배가 담겨 있음을 믿으십시오

 

1. 질그릇에 담긴 보배(7)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간직하고 있으니, 담고 있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몸이 깨지기 쉬운 연약한 질그릇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 안에 담긴 영광스러운 보배는 잘 보이지 않고, 

    질그릇같이 깨지기 쉬운 우리의 육신만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들도

    자칫 잘못하면 절망과 좌절에 빠져 파멸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우리 안에 넣어 주신 영광스러운 보배를 잘 간직해야 합니다.

 

    질그릇이 아무리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도

    그 안에 보물이 담겨 있으면 보물단지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보물단지를 더욱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그것이 질그릇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질그릇이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보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담겨 있으면

    우리도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나도록 주께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묵상 :

 

  ➀ 내 안에 보배가 담겨 있음을 여겨라(믿으라)

 

     우리가 이런 답답하고 힘든 삶을 살지라도 바울처럼 낙심하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보배가 담겨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여긴다’는 이 말은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완전히 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믿고 여기는 것,

     바로 여기에서 바울과 같은 믿음의 힘이 나옵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지금도 나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연약한 육신을 가졌기에 잠시 걱정도 하고 염려되는 일도 있겠지만,

     그러나 곧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➁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십시오.

 

     그러므로 연약한 자신의 모습만 보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비록 질그릇같이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은 강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보물이 우리 안에 있음을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늙고 병들고 초라해지지만,

    우리 안에 모신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더 힘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모신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인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림받은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망한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여졌더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으로 더욱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묵상 : 이렇게 성령으로 새 힘을 얻는 자들을 통해 주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자가 되십시오.

    마귀가 오늘도 사망의 독을 쏘아 미움과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할 것이지만,

    믿음으로 마귀의 사망의 독을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십시오.

 

 

결 론 :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고

          믿었으므로 행하였다

 

 1)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시편 116:10)

 

           10.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바울은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시편 116:10)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시편 116편의 말씀은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통 중에도 이렇게 말하였다”라는 뜻입니다.

 

    고통 중에 겨우 믿음을 잃지 않고 근근이 버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엄청난 고통 중에도

    116편의 시인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리라”하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116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하시다”하는 말을 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그가 고통 중에도 이런 말을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2) 우리도 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니 믿고 말합니다(13절)

 

           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믿었으므로) 말하였다”(시 116:10)라고 한 것같이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의 마음(믿음의 영)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시편 116편의 말씀을 인용한 바울은

    자기도 역시 그 시인과 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통 중에도 이렇게 말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죽음 같은 고통이 몰려올지라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리라고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일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좌절과 절망의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 마침내 승리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기에(14절)

 

           14. 주 예수님을 다시 살라신 이가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결코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육신의 껍질이 죽더라도 우리가 주님처럼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기에

    항상 자신의 육신을 죽음에 넘겨지게 하는 일도 두려움 없이 행합니다.

    주님 안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기에

    극심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죽는 판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에게는 얼마나 더 가혹한 핍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핍박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부활의 승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고,

    믿었으므로 행하였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선택하였다.

 

 

주님

 

우리 마음에 덮인 수건을 벗겨주셔서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아

우리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도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러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에 덮인 수건을 벗겨주시고

우리 마음을 혼미케 하는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신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게 하옵소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영광의 부활로 나타날 것을 믿기에

우리도 바울처럼 기쁨으로 수고하고

헌신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겉 사람이 후패하더라도

우리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도 다윗이나 바울처럼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고

내가 믿었으므로 행동하고

내가 믿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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