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설교본분 : 갈라디아서 1:1~20, 예레미야 28:1~17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3년 12월 17일
============================
서 론 :
미래의 일을 오늘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미래의 운명 같은 것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현재를 진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의 상태를 진단한 결과 미래가 어떠하리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입니다.
오늘은 예레미야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미래를 말하는 두 그룹의 치열한 대결을 보려 합니다.
두 그룹은 미래에 대하여 정반대로 말하며 서로 치열하게 대결합니다.
물론 미래를 다르게 말하는 것은 현재를 진단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두 그룹의 대결을 보면서 나는 어디에 속하였는지를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제 1 부 :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결
• 선지자 하나냐의 예언(렘 27:1~4)
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서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나 예레미야에게 이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얹고
3. 유다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신들의 손에도 그것을 붙여(나누어 주어)
에돔 왕과 암몬 자손의 왕과 두로 왕과 시돈 왕에게 보내며
4. 그들에게 명하여 각각 자기의 군주들에게 이렇게 전하게 하여라.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너희는 너희의 왕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예레미야는 줄과 멍에를 자기 목에 걸고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유다 주변 나라의 사신들에게도 보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호야김 왕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줄과 멍에를 만들어 그의 목에 얹고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민족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멍에를 매고 그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 살게 되겠지만,
끝까지 그의 멍에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시리라는 것을 전합니다.
그리고 후에 유다 왕 시드기야를 보러
유다의 인근의 나라(3절에 열거된)의 사신들이 오면,
그들에게도 예레미야의 목에 맨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나누어주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연도를 보면 여호야김 왕이 즉위한 때와,
유다 인근의 나라들이 시드기야 왕을 보러 온 때는 약 15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자신의 목에 줄과 멍에를 맨 채로 15년을 다니면서
유다 인근의 나라들에서 사신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시드기야 왕 4년에 이들이 모이자
자신이 맨 것과 동일한 것을 그들에게도 나누어준 것입니다.
1. 두 선지자의 대결에서 진리의 편에 선 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분하나?
1) 선지자 하나냐의 예언(렘 28:1~4)
1. 그 해(年), 곧 유다 왕 시드기야가 즉위한 지 4년째 되던 해 5월에
기브온 사람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나(예레미야)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두 해가 가기 전에 내가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의 모든 포로들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하고 말씀하셨다” 하는지라.
예레미야가 바벨론을 대적하기 위한 협의를 하기 위해 모인
외국의 사신들과 시드기야 왕에게 멍에를 주며
그들이 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을 섬기는 일뿐이라고 말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때의 일입니다.
선지자 하나냐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내고 꺾어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바벨론의 멍에를 꺾으실 것이므로
이미 포로가 된 자들과 바벨론에 빼앗긴 성전의 모든 기구들이
2년이 안 되어 모두 다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외칩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반대의 예언을 하는 두 선지자
하나냐와 예레미야 두 선지자는 서로 정반대의 것을 예언하면서 둘이 다 같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언을 합니다.
정반대의 두 예언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어느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무슨 근거로 어떻게 바르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 둘 다 미래의 일인데 어떻게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둘 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는 어느 것이 참된 예언인지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그때 가보아야 어느 말이 참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선택은 지금 해야 합니다.
예언이란 이렇게 미래를 말하는 것인데,
그 미래의 일은 지금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택은 지금 하는데, 그 선택의 결과가 미래에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미래의 일을 오늘 어떻게 선택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진리의 길을 찾으면 됩니다.
그 진리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그 뜻을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바른 뜻을 깨닫기를 간절히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길이 참된 길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있으면
어떤 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씀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분별의 지혜, 분별의 영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2. 하나냐의 예언이 거짓인 이유
➠ 사람이 듣기에는 하나냐의 설교가 예레미야보다 훨씬 더 감동적입니다(렘 28:2~4)
(2~4절 성경구절 위에)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냐의 예언과 설교가 훨씬 더 신앙적으로 들립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반하여
하나냐는 바벨론 왕의 멍에를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언의 형식을 갖추어 아주 엄숙하게 선포되고 있었으므로
모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하나냐의 예언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숙한 집회에서 엄숙한 표정과 엄숙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예언의 모든 격식을 아주 잘 갖추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하는 하나냐의 예언이 거짓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첫째 이유 : 왕과 귀족들이 원하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일을 알기 위해 그때의 상황을 좀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초기 4년간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귀족들이 친 애굽 사람들이었는데,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년이 되던 해에 주변 나라의 사신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바벨론을 반대하는 일을 주도하면서
시드기야는 유다 사회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냐는 시드기야가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에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귀족들이 듣고자 하는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럴듯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 이유 : 성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는 설교였으므로
그러므로 하나냐의 예언은
유다 백성을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게 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예언이 아니라,
왕과 귀족들의 환심을 사서
자기에게 있는 기득권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예언입니다.
이처럼 그 동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예언(설교)을
거짓 예언(거짓 설교)라고 말합니다.
3) 셋째 이유 : 회개 없는 평화를 말하고 있으므로
예레미야는 ‘아멘’이라고 응수하며
자신도 하나냐의 말이 이루어져서 남왕국 유다가 속히 회복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유다가 회복되기를 원해서 선포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냐가 말한 대로 바벨론 포로지에서 2년 만에 속히 돌아오려면
지금 당장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 땅 어디에서도 회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는 평화를 외치는 하나냐의 예언은 거짓 예언입니다.
➠ 이런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회개 없는 축복의 남발입니다.
회개도 하지 않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지리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4)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가 말한 대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렘 28:9)
9.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대로 그 평화가 이루어진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
예레미야는 지금까지 증거한 선배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유다의 폐망을 예언하였었는데
지금 하나냐는 선배 예언자들과 정반대의 예언을 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2년이 지나면 그의 말이 참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가 말한 대로 평화가 이루어져야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참선지자라는 것을 인정받게 됩니다.
3. 하나냐의 거짓 예언의 결과
1) 하나냐가 꺾은 나무 멍에 대신 쇠 멍에를 만드신 하나님(렘 28:12~14)
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14.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쇠 멍에를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주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나무 멍에를 벗겨서
부러뜨린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하나냐에게 보내셔서
그가 부러뜨린 나무 멍에 대신 하나님께서 쇠 멍에를 만드셨다고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쇠 멍에를 모든 나라에 메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섬기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 하나냐의 죽음(15~17절)
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하는(거역하는) 말을 하였음이라.
네가 올해 안에 죽으리라’”하시더니
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年) 7월에 죽었더라.
예레미야는 선지자 하나냐에게 그가 백성들에게 거짓 것을 믿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쳐서 죽게 하리라고 전하게 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하나냐는 그 일이 있은 지 두 달 만에 죽습니다.
제 2 부 : 바울과 유대주의 기독교의 대결
갈라디아서에 또 다른 두 그룹의 대결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구원의 문제를 두고 바울과 유대주의 기독교 사이에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1. 갈라디아서 소개
1) 바울이 가장 큰 고난 속에 세운 갈리디아 교회(갈 1:2)
2.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나와 함께 있는 모든 믿음의 식구)와 더불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쓰노니,
1차 전도 여행 때에 돌에 맞아 거의 죽은 자가 되어 버려졌다가
곧 일어나 다음 날 다시 가서 복음을 전했던 곳이
바로 갈라디아(루스드라)입니다.
이런 시련 속에서 복음을 전했기에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습니다.
2)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 : 유대주의 기독교(6절)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너희가 그렇게도 쉽게 떠나
다른 복음을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그렇게도 쉽게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노라).
그런데 바울이 그토록 애착을 가진 갈리디아 교회에 거짓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근거지는 둔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살며시 들어와 거짓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의 교만과 방자함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도 제어하기 힘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며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이들을 묵인했고,
베드로도 이들의 눈치를 살필 정도입니다.
➠ 갈라디아서 : 유대주의 기독교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참된 복음을 선포한 것
이들은 갈라디아에까지 와서 예수님을 믿더라도
할례와 같은 구약의 율법의 모든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아주 격렬한 어조로 이들을 비난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 때문에 믿음을 포기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할례를 폐기 처분하시고
그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하셨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다 자란 성인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두려움에 믿음을 포기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참믿음과 참 자유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2. 다른 복음은 없다.
1)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4절)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으로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우리에게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만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참된 복음이고 참된 진리입니다.
➠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복음
이 악한 세대는 믿음의 질서 속에 있지 않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허망하고 덧없고 무가치한 세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연약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건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건져서 주께서 계신 저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가 언약궤의 속죄소에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거룩하신 피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처럼 완전한 의를 가진 자로 여김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를 의지하며,
그를 섬기며 살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2) 이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6~7절)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너희가 그렇게도 쉽게 떠나
다른 복음을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그렇게도 쉽게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노라).
7. 사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왜곡시키려) 함이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보여도 예수님 이외의 길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떨쳐 버리기 위해 산에서 몇십 년간 수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전에 지은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뜨거운 돌 위를 맨발로 걷고,
매일 몇 시간씩 거꾸로 서서 걷는 수행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외의 다른 복음이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3) 다만 교란하여 변하게 하려는 것들이 있을 뿐(7절)
(7절 성경구절 위에)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 살며시 들어온 거짓 교사들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신앙에 큰 혼란을 겪습니다.
7절의‘교란한다’는 말은
큰 풍랑을 만난 배 안의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을 의미합니다.
그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
큰 풍랑을 만난 것처럼 큰 혼란을 겪고 있는 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 다시 구약의 율법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으로 안 되니 예수께서 오신 것인데,
다시 이전의 법으로 가겠다고 하니 스스로 멸망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혼란이나 교란되지 마십시오.
사교 집단이 성도들에게 접근하여 첫 번째로 하는 작업이
바로 마음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있는 곳이니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교 집단들은 교회의 문제점들을 과장하며 지적하여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의 마음에 큰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혼란을 일으키더라도
여기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만일 내 마음에 혼란이 일어났다면
그 문제에 대하여 말씀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를 살피십시오.
말씀과 다르면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머뭇거리면 결국 사자에게 잡아먹히듯 사탄의 밥이 되고 맙니다.
제 3 부 :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고안해 낸 복음이 아니다
1. 바울이 전한 것을 가짜 복음이라고 공격하는 무리들
1) 거짓 교사들이 바울은 사도도 아니며 바울이 전한 복음도 가짜라고 했으므로(20절)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바울은 갈라디아에 살며시 들어온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바울의 말을
가짜 복음이라며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할례나 제사 의식과 같은 구약의 의식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런 주장을 믿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사도도 아니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가짜 복음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2) 바울은 자신을 위한 변호가 아니라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변호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씁니다(11~12)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고안하여 만들어 내 것이 아니라.)
12. 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나에게 전해주신 것이라.)
바울이 서둘러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들이 바울을 비난하고 다니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던 자들이 할례받는 일을 두려워하여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정하신 복음의 말씀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들이
예수께서 이미 폐기 처분하신 구약의 의식을 지키지 못해
신앙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자 서둘러 편지를 한 것입니다.
2. 사람이 고안해 낸 복음이 아니다
갈라디아에 살며시 들어온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짜이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가짜라고 말했습니다.
그 증거로 바울은 예수께서 세우신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께서 자신을 직접 세우셨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증명합니다.
1) 나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이다(15~17절)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16. 그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널리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내 혈육(내 주변 사람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나오자,
곧바로 바울은 자기는 사람들이 뽑아서 세운 사도가 아니고,
누가 임명하여 세운 사도도 아니며,
예수께서 직접 택하여 세우신 사도임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변론하고 나온 것은
그들이 자기의 사도직을 의심한 것으로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직을 인정받는 문제는 바울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받으면
그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까지 의심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전하는 말씀이
예수께서 주신 참된 복음의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자신이 주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11~12절)
(11~12절 성경구절 위에)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자기들이 믿는 바를 정리하여 만들어 낸 인간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자기가 전하는 말씀은 자신을 포함하여
그 어떤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만일 어떤 종교적인 천재가 고안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구원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주께서 주신 복음과 일치합니다.
그것을 주님의 사도들이 인정하고 확증하였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자기가 고안하여 만들어낸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정말 종교적인 천재 몇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바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초기 시절부터 엄청난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수께 직접 전달 받은 복음임을 증명하는 바울
• 기독교는 결코 바울이 고안해 낸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바울을 기독교의 실질적인 창시자라고 말합니다.
가말리엘에게 유대교의 교리를 배우고,
길리기아 다소에서 헬라 철학과 학문을 두루 익힌 바울이 있었기에
기독교의 교리가 체계화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배움이 없는 자였는데
학문에 능한 바울이 기독교를 세계의 종교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바울에 의해 만들어지고 체계화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우신 구원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저 주께서 주신 이 복음의 말씀을 전했을 뿐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주께서 주신 말씀을 전한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1) 바울은 예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13~14절)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때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아예 없애버리려고까지 하였고)
14. 그때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더욱 앞장서서)
내 조상의 유전(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이 기독교의 창시자도 아니고
기독교를 체계화시킨 종교적인 천재도 아니라는 첫 번째 증거는,
바울은 본래 기독교를 아주 싫어했던 자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싫어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였고,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붙잡아서 죽이기까지 했던 자였습니다.
2)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15~17절)
(15~17절 성경구절 위에)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다메섹도 그가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바울을 피하여 다메섹으로 도망한 성도들을 붙잡아 일망타진하기 위해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거의 도착했을 때
대낮에 길에서 하늘로부터 강하게 비치는 빛을 보았고,
그때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됐습니다.
3) 그 후 바울은 곧바로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다(17~18절)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지낼 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곧바로 아라비아 광야로 갔습니다.
고린도후서 11:32을 보면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는 나바티아 왕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레다 왕에게 쫓겼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들을 포함하여 아무도 만난 일이 없는데,
그가 이미 복음의 말씀을 완전히 알아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본문 12절에서 그가 고백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단독 선생님이 되어 복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 배웠거나 자기가 고안하여 만들어 낸 교리가 아니라,
이렇게 예수께로부터 받아서 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4) 그 후 3년 만에 베드로를 만났으나 15일간 함께 있었을 뿐입니다(17~18절)
(17~18절 성경구절 위에)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난 후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사도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15일을 지냈습니다.
이것 역시 베드로에게 무슨 말씀을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친교를 나누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5) 그 후 다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습니다(21절)
21. 그 후 나는 수리아(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으나
그리고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만 만났을 뿐 다른 사도들을 일절 만나지 않고,
곧바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전도여행을 하며 14년을 보냅니다(갈 2:1).
➠ 그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만난 후
그가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받습니다(갈 2:7~8).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셔서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셔서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신 것을 그들이 깨달은 것이라.
14년 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쳤을 때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예루살렘 총회가 열려 예루살렘에 왔다가
사도들로부터 그가 전한 복음의 말씀을 점검받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들이 주께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과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고,
바울을 이방인을 위해 세운 주님의 사도임을
예루살렘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 묵상 :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말씀을 누군가로부터 배우지도 않았고,
그 자신이 고안하여 낸 교리도 아니며, 오직 예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가르쳐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이 참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이 복음서의 말씀과 같고, 주님의 성령도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가 전하는 말이 참된 것임을 증거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 론 :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 1: 10)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사람들이 기뻐할 만한 것을 구하려 애쓰고,
사람들의 환심이나 사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냐)?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사람들의 환심이나 사려고 애썼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조차 눈치를 살피는 큰 힘을 가진 자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근거지로 둔 자들입니다.
이들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조차 이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2)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까?
만일 바울이 사람들의 환심이나 사는 자였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이들의 눈치를 살폈을 것입니다.
이들과 등지고는 그 세대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말 듣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묻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 묵상 : 마지막 큰 혼란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참 복음의 말씀과 거짓을 분별할 지혜를 구하십시오.
예레미야와 하나냐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지만
하나냐이 예언은 거짓이었습니다.
바울과 유대주의 기독교인들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지만,
유대주의 기독교인은 거짓 복음이었습니다.
마지막 때는 더욱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무엇보다도 기뻐하십니다.
주께 바른 복음의 말씀을 분별할 지혜를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바로 알고 깨닫게 하옵소서.
거짓된 가짜 복음에 속지 말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참된 진리의 길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주님이 주신 지혜대로 바른길을 선택할
용기와 결단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