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생명의 시간을 사는 자와 멸망의 시간을 사는 자
설교분문 : 히브리서 10:11~29(참고, 히브리서 9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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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1) 이동식 성전(성막) :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
고정식 성전(예루살렘 성전) : 도리어 형식적인 예식만 남음
➠ 지난주 설교 마지막 부분
광야에 있을 때의 성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이동식 성전이고,
후일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한곳에 고정된 고정식 성전입니다.
이동식 성전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의미를 가졌고,
고정식 성전은 사람이 그곳에 모여 예식을 행하는 장소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다 이방 신앙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고정된 성전 안에 갇혀계신 것과 같이 생각하여
그 성전에서 예식을 행할 때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성전에서 나온 후에는 세상 사람처럼 행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후 타락하여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망하는 원인 제공자가 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막의 의미를 잊지 마십시오.
본래 하나님께서 원하신 성전은 솔로몬의 화려한 고정식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막의 이동식 성전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2) 공간신학, 시간신학
하나님을 고정된 공간에 가두어 놓고 그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공간신학이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으로 믿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을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시간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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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생명의 시간인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멸망의 시간인가
오늘과 다음 주에 살펴볼 히브리서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한 말씀의 첫 번째이고,
다음 주에 이 주제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제 1 부 : 더 좋은 언약을 위하여 피 흘리신 예수님
1. 더 좋은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신 예수님
➠ 히브리서 : 하나님을 섬기기 어려운 때를 살고 있는 히브리서의 성도들에게 주는 편지
그 핍박과 고난의 성도들에게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의 자리를 떠나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1) 지금까지의 히브리서 : ~보다 더 뛰어나신 예수님
히브리서를 처음 읽은 첫 독자들은
로마의 네로 황제에 의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위기의 때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처절한 위기의 시간을 사는 자들에게
히브리서는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계속 말합니다.
처음에는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말하더니
그다음에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
그다음에는 여호수아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여
구약 시대의 그 어떤 사람보다 예수님이 더 뛰어나신 분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아론의 계열에 속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뛰어나신 분임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된 대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
2) 히브리서는 긴급한 위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왜 이런 말을 이렇게도 길게 하는가?
그런데 히브리서를 처음 읽은 첫 독자들이
지금 매우 긴급한 위기의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히브리서가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무려 8장에 걸쳐서 길게 언급하는 것이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오늘 본문인 9장 11절 이하에서 비로소 밝혀집니다.
11절 이하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초대하신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3) 구약의 때보다 더 좋은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구약의 예배보다 더 뛰어난 예배를 만드시고
그 예배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새로 만드신 새로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
무려 8장에 걸쳐서 길게 누구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이라고 열거했던 것입니다.
최근 우리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예배드리기가 힘든 시간을 지났습니다만,
히브리서는 이보다 더 힘든 때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예수님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며 강조합니다.
2.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히 9:15~22)
15. 그러므로 이를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그는 첫 언약 아래에서 저지른 죄들을 속량하시려고(용서받게 하시려고) 죽으셔서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영원한 유산)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유언이 효력을 내려면 그 유언한 사람이 죽었다는 확인이 있어야만 하나니,
17.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그 효력을 나타내는 것인즉,
유언한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유언은 아무 효력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워진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언약 책)와 모든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하고 말하였고
21. 또 같은 방식으로 장막과 섬기는 일(제사 의식)에 쓰이는 모든 그릇(기구)에도
피를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율법을 따라서) 거의 모든 것이 피로 정결하게 되나니,
그러므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느니라.
1) 구약의 율법 ➠ 죄를 지은 자를 대신하여 짐승이 죽어 용서받게 하신 것(16~18)
유대인들은 중요한 계약을 할 때 짐승을 쪼개어 그 사이로 지나갑니다.
그 약속을 어기면 어긴 자가 반이 쪼개져서 죽은 짐승처럼 죽게 된다는 것으로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의미를 담아 다소 끔찍한 방법으로 계약(약속)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는 이 언약의 방법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셔서
모세에게 소로 번제를 드리게 하고
그 피를 양푼에 담아 절반은 제단에 뿌리고
절반은 백성에게 뿌려 피의 언약식을 하셨습니다(출애굽기 24:3~8).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본문의 한글 성경에서 ‘언약’이라고 번역된
‘디아데케’가 ‘언약’과 ‘유언’의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그들의 이런 약속의 습관을 따라서
‘유언이 사람이 죽어야만 효력을 보게 되듯
하나님과 사람 간의 약속도 반드시 피가 있어야만 그 계약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3) 그런데 주께서 피 흘리심으로 첫 언약보다 더 좋은 새 언약을 우리와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언약은 짐승의 피로 된 것이어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의 순결하고 거룩하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첫 언약 아래에서 범한 죄를 용서하시려고 죽으셔서 피 흘리심으로
약속된 영원한 유업을 받게 하셨습니다.
➠ 새 계약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계약이 맺어졌으므로
우리가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 죄를 모두 용서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주께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제 2 부 : 더 좋은 언약 ➠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
1.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예수님
1)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려고(9:27~28)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그리고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죄와 상관없이(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기다리는(갈망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다시 오시리라).
새 언약의 특징은 무엇을 하는 자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구원의 상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사랑하는 자를 바라보며 사는 연인들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간에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2)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주께서 다시 오십니다(28절)
전에 오셨을 때는 십자가로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 오셨지만
다시 오실 때에는 주의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때에는 복음을 붙잡은 자와 붙잡지 않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십니다.
2.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9:27)
(27절 성경구절 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이 땅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에는 우리가 모두 다 겪게 될 일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행한 모든 말과 행동이 우리의 머릿속에 다 입력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을지라도 우리 안에 입력된 것은
지워지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가 우리가 죽어 심판을 받을 때
우리 입으로 스스로 자신이 행하였던 죄와 허물을 모두 낱낱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2) 일단 그렇게 심판을 받은 이후에는 다시는 자신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일단 심판을 받은 후에는 신분의 상승을 위한 그 어떤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 순간의 결정이 영원토록 유지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 묵상 : 그러나 우리가 땅의 시간 속에 있을 동안에는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심판 이후에는 영원히 변화될 가능성이 없지만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갖고 있는 이 땅에서는 기회가 있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옥 백성에서 천국의 백성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당신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땅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시간이 많이 있으려니 하며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3. 그의 백성들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오직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10:12, 17)
12.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기 위하여
오직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17. 또 “내가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1:34)라고 말씀하셨으니.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그 일로
우리가 지은 죄는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주께서 모두 없애시고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그래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께서 이 모든 일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다시 성자 하나님의 위치로 오르셨습니다.
2) 그 후에 자기의 원수들을 발등상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13절)
13. 그 후에 자기의 원수들을 발등상 되게 하실 때까지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애래 굴복될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주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사명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그 후에 자기의 원수들을 발등상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발등상은 발판을 의미하는데, 원수들을 발등상 되게 했다는 것은
원수들의 목을 발판처럼 발로 밟았다는 것으로, 완전한 승리를 뜻합니다.
주께서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원수들을 완전히 물리치시는 날이 오기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3) 왜냐하면 단 한 번의 제사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14절)
14. (왜냐하면)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거룩하게 되어져 가고 있는 자들)을 단
한 번의 제사로(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심으로)
영원히 온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라.
주께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거룩하신 피로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렇게 주의 백성이 주의 피로 이미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주께서는 원수들을 발등상 되게 하실 때,
즉 원수들을 완전히 박멸시킬 때를 기다리십니다.
세상의 죄가 너무 심해져서
“이제 이 사람들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하고 주께서 느끼실 때,
그때가 바로 주께서 재림하여 오실 때인 것입니다.
이미 그의 백성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만드셨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원수들을 밟아 멸망시킬 일만 남았습니다.
주께서는 지금 그때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만드셨다는 뜻은? ●
➀ 거룩하게 된 자들 : ‘이미’와 ‘아직 아니’의 중간 상태에 있는 자들
‘거룩하게 된 자’는 현재시제로,
지금 현재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이미 죄를 모두 용서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간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미 죄를 용서받은 상태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 이미’와 ‘아직 아니’의 중간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➁ 영원히 온전하게 만드셨다 : 이미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이 되었다는 뜻
지금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중간 상태를 살아가면서
계속 거룩해져 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주께서 원하시는 수준에는 형편없이 모자랍니다.
그럴지라도 주께서 이미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으므로
그 피의 권세가 우리를 영원히 온전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➂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그 은혜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피로 이미 영원히 온전한 자가 되었지만
아직 우리가 이 땅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 모든 은혜를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이 땅의 시간을 마칠 때까지
계속 주님의 은혜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계속 그 피의 권세 아래에서 주와 동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 3 부 : 멸망의 시간을 사는 자와 생명의 시간을 사는 자
1. 주님의 피로도 용서받지 못할 자 : 멸망의 시간을 사는 자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10:14에서 우리가 이미 주의 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주의 은혜를 잃고 다시 멸망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26절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은 무서운 말로 경고합니다.
1) 용서받지 못하는 죄 : 짐짓·고의로 저지른 죄(26절, 참조 : 민수기 15:30~31)
26. 만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가르침을 받아서 진리를 깨닫고도)
짐짓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고의로, 일부러 계속하여
죄를 범한다면 다시는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드릴 수 있는 제사가 없고)
본문 26절의 ‘짐짓 죄를 범하면’의 헬라어의 뜻은
‘그것이 죄인 줄 알고 있으면서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를 뜻합니다만,
민수기 15:30에 기록된 ‘짐짓, 고의로’에 해당하는 ‘베야드 라마’는
‘높은 손으로, 손을 높이 들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본문 히브리서 10:26과 민수기 15:30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고의로 죄를 범하는 ‘고범죄’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저지른 죄와,
죄를 짓고 난 후에도 전혀 두려움이나 슬픔이 없고,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도
죄에 대한 수치심도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 앞에 당당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자는 그가 저지른 죄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훼손한 자로 여김 받아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자가 됩니다.
2) 그 차이는 죄를 범한 후의 태도입니다.
용서를 받는 죄와 용서받지 못하는 죄의 차이는
처음부터 그 죄를 계획적으로 범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계획적으로 죄를 범하였더라도
그 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게 되지만,
자신이 연약하여 유혹을 받아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 죄를 당연하게 여기고, “뭐 나만 이러나?”하면서
하나님 앞에 당당한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3)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은
이런 자를 다시 용서하게 하는 또 다른 희생 제사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서도 신앙을 멀리하였으니,
이런 자들이 용서받으려면 하나님께서 또다시 예수님을 보내셔서
또다시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해야 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마지막 은혜이니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물론 이런 자들도 회개하고 주께로 다시 나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주님의 은혜의 자리를 멀리하고 있으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주님을 멀리했으니 예수님의 피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5. 지금 우리의 시간 ➠ 성화(聖化) : 생명의 시간을 사는 자
점점 거룩해져 가는 주의 은혜의 시간 속에 있으면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도 않으시고
주의 법과 말씀을 우리 마음과 생각에 두십니다.
1)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예수님(10:17)
17. 또 “내가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1:34)라고 말씀하으니.
‘죄를 사하셨다’, ‘죄가 속량 되었다’는 뜻은 빚이 다 갚아졌다는 뜻입니다.
빚이 다 갚아졌으니 다시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가 전에 빚을 진 경력이 있다는 것은 남게 마련인데,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아예 예수님의 기억에서조차 완전히 지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컴퓨터를 아무리 추적해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지우는 것처럼
그렇게 완전히 지우시겠다는 것입니다.
2)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기록할 것이라(16절)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이후로 내가 그들과 새로 맺은 언약은 이것이다.
나는 내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생각에 새겨 둘 것이라)”(예레미야 31:33)
하신 후에
이렇게 우리의 죄를 완전히 지우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법을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돌판에 새기듯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넣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우리와 마음과 생각 속에 넣어 주셔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지키는 자가 되도록 변화시키기까지 하십니다.
3) 성령께서 이 모든 일을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이 모든 일을 하시니,
우리는 한편으로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또 한편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이 두 가지 일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온 말씀으로 나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결 론 : 그러므로 더욱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자
1)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19절)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담대한 마음)을 얻었나니
주께서 우리가 받을 벌을 모두 다 받으셨으므로
죄에 대한 모든 빚이 다 갚아졌습니다.
우리의 죄는 모두 용서되었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하신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로 인정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는데,
우리는 그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2)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20절)
20. 그 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휘장을 뚫고)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살아있는 길)이요,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졌습니다.
꼭꼭 닫힌 대문이 열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누구든, 어떤 죄를 지은 자이든 상관없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3)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할 인도자가 예비 되었습니다 : 새롭고 산 길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도 얻었고, 그 앞으로 나아갈 길도 열렸으나
여전히 우리는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잘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할 아주 훌륭한 인도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새롭고 산 길입니다.
살아있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주의 성령께서 우리 손을 붙잡고 가시니 살아있는 길입니다.
● 묵상 :
예수님의 피로 우리 앞에 가로막혔던 장애물이 다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불난 집에 소방대원이 길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그 길을 향하여 달려 나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열어 놓으신 신앙의 대로를 행하여 힘써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으므로
그의 백성들(성도들)은 결코 신앙의 나태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더욱 힘써 주님을 찾고 부르십시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만나는 생활을 하십시오.
서로 돌아보고,
서로 선한 일을 격려하며(24절)
무엇보다도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25절)
이렇게 사는 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동식 성전에 있는 자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주님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고
주께서 피 흘리셨음을 기억하고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서
주님의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영원히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로 살게 하옵소서.
힘써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신앙의 나태함과 게으름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모이기에 힘쓰며
서로 돕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건강하고 신실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