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부제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설교본문 : 히브리서 11:1~10, 시편 8편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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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문은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다 읽기가 어려우신 분은
‘제3부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예배입니다’부분만이라도 꼭 읽어주십시오.
서 론 : 지난주 설교 요약
서론 부분에 넣으려 했던 몇 가지 용어입니다.
이동식 성전, 시간신학, 생명의 시간
고정식 성전, 공간신학, 멸망의 시간
발등상
설교 내용이 많아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을 설교문 끝에 부록으로 첨가합니다.
제 1 부 : 환난과 고난 중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히브리서를 하나의 산으로 본다면
그 산의 정상(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 히브리서 11:1~3입니다.
그동안 히브리서는 이 말씀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 앞서 살펴볼 히브리서 10:32~39은 그 산 정상의 9부 능선쯤 되는 말씀으로,
여기에는 히브리서를 처음 받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주님을 믿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소개합니다.
1. 더 나은 영구한 산업을 얻기 위하여(히 10:33~34)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참은 것(심한 고난을 많이 견디어 냈던 것)을 생각하라.
33. 혹은(때로는) 비방과 환난을 당함으로 공개적인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런 처지에 놓인 자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으니,
34. 너희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동정하고(갇힌 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자기의 소유를(재산을) 빼앗기는 것도 기쁨으로 감당한 것은
그보다 더 낫고(더 좋고) 영원한 소유가(재산이) 있는 줄 앎이라(알았기 때문이라).
히브리서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엄청난 핍박과 어려움을 당했으나
그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34절은 그들이 핍박 중에도 믿음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증거합니다.
1) 비방과 환난을 당함으로 구경거리가 되고
대부분 환난과 핍박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구경거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매를 맞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힘을 당할 때에
로마 시민들이 관람석에 앉아서
핍박을 당하는 기독교인들을 조롱하고 모욕을 하였습니다.
2) 그런 처지에 놓인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갇힌 자들을 동정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붙들려서 핍박을 당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주님을 믿다가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는 자들을 동정하였습니다.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은 본인 자신도 그들처럼 곤욕을 당할 우려가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그들은 주님의 백성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3) 소유를 빼앗기고 약탈을 당해도
네로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죽여도 살인이 안 되고,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도 약탈이나 절도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기독교인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비방과 환난을 당하고,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옥에 갇혔고, 가진 재산을 모두 다 빼앗기고 약탈을 당했습니다.
4)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보다 더 영구한 산업을 얻기 위하여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핍박 받는 것을 기뻐했고,
또 핍박당하는 자를 돕다가 자신도 덩달아 어려움을 당해도
함께 기뻐하며 그 일을 당연한 일 당하듯 당하였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생각하고 기억하십시오.
1) 큰 어려움을 이기고 난 후에 나태함에 빠진 자들에 대한 경고와 호소(히 10:25, 32)
25. 모이기를 폐하는(중단하는, 소홀히 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격려하여(권면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더욱 모이기에 힘쓰자).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참은 것(심한 고난을 많이 견디어 냈던 것)을 생각하라.
그러나 그동안 이런 시련에도 잘 견디었던 사람들이
한 차례의 핍박이 폭풍처럼 지나간 후에 잠시 조용해지는 때를 만나자
점점 나태해지고 심지어 믿음을 떠나는 배교의 위험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지난날 더 나은 산업이 있음을 믿고 그 어려움을 잘 견디었듯
앞으로도 더욱더 믿음의 담대함과 인내를 잃지 말자고 호소합니다.
2) 그러므로 담대함과 인내를 버리지 마십시오(35~37절)
35. 그러므로 너희의 담대함을(용기를) 버리지 말라.
이것이(그 담대함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왜냐하면)“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히브리서도 그의 성도들에게
그 어려운 핍박의 시간을 어떻게 인내하며 지냈는지를 생각하고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때에는 잘 견뎠는데,
한 차례의 어려움이 지나고 잠시 평안의 때를 만나자
어려운 때에 잘 간직했던 담대함과 믿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나태함에 자꾸만 빠져들어 가는 히브리서의 성도들을 향하여
그들이 전에 어떻게 하였는지를 기억하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 묵상 : 어려운 때가 지나고 평안한 때를 만났을 때 조심하십시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때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다가,
생활 형편이 나아져서 어려움이 사라지게 되면
신앙이 나태해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런 때 다시 신앙의 열심을 회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신앙의 열심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다시 이전처럼 어려움을 주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38절)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박국 2:3~4) 하셨느니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은 그 어떤 재앙이나 핍박이나 고통이 올지라도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의인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 그 은혜의 자리를 지키는 자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 지적인 동의 :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예수님이 나를 구원할 구원자이심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서 믿음은 시작됩니다.
2) 신뢰 : 주님이 나를 지켜줄 능력과 사랑을 가지신 분임을 신뢰하는 것
또한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실 능력과 사랑을 가지신 분임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을 믿고,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신뢰합니다.
그를 신뢰하기에 그가 하신 말씀을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3) 소망의 인내 : 이 믿음과 신뢰로 주께 변함없는 신실함을 보이는 것
인내는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며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과 환난 중에도
마땅히 해야 할 일(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세상보다 더 크신 분임을 믿기에 주께서 명하신 일들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인내입니다.
4) 충성 :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
이런 일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지속하여 행합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마음으로 믿고,
그 믿음을 주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고백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께서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통해
믿음을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착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통해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임을 사람들 앞에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 묵상 :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이런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
끝까지 충성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끝까지 충성하여 주께서 주시는 큰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됩시다.
제 2 부 : 고난 중에도 주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믿음(시편 8편)
(시편 8편 성경구절은 성경을 참조하십시오)
그러나 이렇게 지치고 힘들고 답답한 중에 환난까지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우리의 의지력만으로 믿음을 지켜낼 수는 없습니다.
주께서 오시기 전 마지막 때에는 욥이 당했던
일고여덟 가지의 고난과 아픔이 거센 물결처럼 엄청나게 몰려올 텐데,
그 거센 물결을 나의 의지력만으로는 결단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또 하나의 본문인 시편 8편을 통해 살펴봅시다.
• 시편 7편과 시편 8편과의 관계
다윗이 시편 7편을 기록하고 곧이어 8편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
후일 시편 편집자들이 다윗의 여러 시들을 편집할 때 시편 7편 뒤에 8편을 둔 것입니다.
시편 편집자들이 시편 8편을 시편 7편 다음에 둔 것은
시편 8편의 감동적인 노래가
시편 7편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나온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 시편 7편의 자리에서 시편 8편을 보십시오. 그러면 다윗이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시편 7편의 고통의 자리에서 시편 8편을 노래한 다윗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다윗을 보고 완전한 자라 평하신 이유를
보다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➀ 큰 고통 중에 있던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와 그 고통을 고백하며 탄식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돌보시리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➁ 그러다 자기를 도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다윗은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됩니다.
➂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모든 것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감격의 노래를 부릅니다.
1. 하나님의 뛰어난 능력과 주의 아름다운 이름
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다가
세상을 이처럼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아름다운 분이실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 중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답지 못한 것들은 본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 아니라
사람이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아서 생긴 것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저주를 받아 본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라 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다윗은 이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2) 주의 영광이 하늘 위에까지 이르렀나이다(1절)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 만물에 가득하고 넘쳐서
하늘 위에까지 이르렀다고 노래합니다.
이 세상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천사가 하나님께 시중을 들고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저 하늘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를 묵상합니다.
3)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셔서 대적을 꺾으시는 이(2절)
세상의 권력자들은 모두 힘 있는 자들과 함께합니다.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힘을 합해야 그 권세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정사와 권세를 친히 갖고 계시므로 세상의 권력자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힘과 권세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니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기만 하면
그들이 어린아이와 젖먹이일지라도 그들에게 힘을 주셔서 강한 자를 물리치게 하십니다.
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과 달과 별들(3절)
지극히 작고 나약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을 통해
세상의 권세자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은
또한 이 장엄한 우주를 만드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저 엄청난 우주의 별들을 바라봅니다.
이 엄청난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2.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1)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4절)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답고 장엄한 이 세상과 저 하늘의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 우주의 중심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세상과 저 하늘의 별들이 다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도록 모든 것을 다 마련해 놓으신 후에
제일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2)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5절)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천사보다도 더 뛰어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담 이후로 저주를 받아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다만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이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3)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된 사람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엄청난 영광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순결하고, 하나님처럼 의로우며,
하나님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담의 잘못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그 영화와 존귀의 관을 잃어버렸습니다만,
본래 우리는 그처럼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4)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6~8절)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사람은
주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아담이 아직 마귀에게 속아 죄를 범하기 전에, 그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제 3 부 :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힘과 능력으로
우리는 답답함과 환난을 이기고 믿음의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내 힘으로 이긴 것을 주님 앞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무너진 그 자리에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한국 교회의 잘못된 해석)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 전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히브리서 11:1은 히브리서 전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가장 엉터리로 해석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잘 읽어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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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믿음의 선조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줄을 우리가 아나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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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히브리서 11:1의 이 말씀이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어떻게 잘못 해석되고 이해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절)
➠ 한국 교회의 잘못된 해석 : ‘바라는 것’에 중점을 해석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가장 흔하게 들리는 말이 ‘비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비전들이 누가 계획한 누구를 위한 비전인가,
누구의 비전인가, 누구의 꿈이며 누구의 계획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동안 많은 경우에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들러리가 되고,
오직 사람들만을 위한 종교적 감상놀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만족, 자기 욕구를 채우는 교회로 타락한 것은
이 구절의 중심점을 ‘바라는 것’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한글 번역을 그대로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내 앞에 구체적 실체로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인데,
많은 경우에 한국 교회는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구할 때
구체적 실체가 있다고 믿고 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2) 그 결과 ➠ 잘못된 성공주의, 적극적 사고방식에 따른 엉터리 비전들이 난립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나는 폭스바겐을 원합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폭스바겐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그 폭스바겐이 어떤 색깔이고,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구체적인 그림을 내 마음에 그리고 그것이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믿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성도가 한 명뿐이라도 교회 안에 성도가 가득한 것으로 믿고 구하고
자신 있게 설교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며 본문 히브리서 11:1을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을 정반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구약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위대하다는 것을 강조했고,
광야 사막이나 토굴속을 전전할지라도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살라는 말씀이 히브리서 11:1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내가 원하는 나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는 기도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방식의 목회가 교회를 망치고 있고,
이런 방식의 비전이 교인들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본문의 바른 해석)
이렇게 히 11:1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 먼저 단어해설부터 하겠습니다.
-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절) : 엘피조메논, 휘포스타시스
• ‘바라는 것들’에 해당하는 ‘엘피조메논’은 현재분사로
계속해서 줄곧 소망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 ‘실상’에 해당하는 ‘휘포스타시스’는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하게 구축된 객관적인 실체,
사람의 생각에 따라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객관적인 실체,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3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할 때
‘본체’의 뜻으로 휘포스타시스가 사용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우리의 믿음의 실체이며 본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계속해서 간절히 소망하며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분명히 믿고
줄곧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절) : 프라그마톤, 엘렝코스
•‘보지 못하는 것들’에 해당하는‘프라그마톤’은 ‘사실, 행위, 사건, 업무’로
하나님 나라나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사건으로 장차 다가올 주님의 재림과 심판의 때를 뜻하고,
• ‘증거’에 해당하는 ‘엘렝코스’는 법률 용어로,
‘그것이 객관적인 실체임을 증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였다’의 뜻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치 실험을 통해 얻은 확실한 증거처럼, 분명한 증거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확실한 증거물처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 말씀을 한글 번역으로 보면 내가 바라고 구하는 것이
마치 내 앞에 구체적 실체로 있는 듯 믿고 구하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실상’은
우리의 믿음의 본체이며 실상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계속해서, 줄곧 간절히 소망하며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인 실체로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믿고 계속해서 구하며 사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꿈에도 바라고 소망하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의심할 수 없이 확고한 실체로 믿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어서 내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확실히 믿으면서
간절히 소망하며 구하는 일을 계속해서 줄곧 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1절)
우리가 믿는 모든 것들은 다 장래의 일이므로 지금은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는 것도,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들어가게 될 지옥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주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이 모든 말씀들을
분명한 증거를 가진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단순히 그럴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장차 들어가게 될 그 하나님 나라가 지금 나의 현재 속에 함께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자들, 주께로부터 그 믿음을 인정받은 자들은
주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그 의를 인정받아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실체적인 현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가 뜻하는 의미합니다.
예배드릴 때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자처럼,
그 천국이 오늘 예배드리는 이 현장에 우리와 함께하는 것처럼 믿고
그 기쁨을 주님께 표현합니다. ➠ 이것이 믿음이고 예배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눈앞에 펼처진 실체적 사건으로 믿는
그 두려움으로 주께 회개하며, 주님을 섬깁니다. ➠ 이것이 믿음이고 경외입니다.
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절)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저 우주의 별들까지
모든 세계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 묵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보다 더 확실히 믿고 의지합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은 곧 낡아져서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미래의 일을 확신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미래의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13).
그것을 바라며 마음속에 항상 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로마서 8:24~25)
3.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2절)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등 구약의 선조들이
이 믿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고,
믿음으로 주께서 가지신 완전한 의를 선물로 받으며,
믿음으로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할 만한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말하기 전에 일반적인 믿음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1)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만 하는 믿음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만 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멈춘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수준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지식을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는 믿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니 위의 경우보다는 조금 나은 것입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만 믿고,
그 사랑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내 문제를 간구하고 응답받는 것에만 익숙해 있습니다.
주께 나를 드려 헌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3)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믿음
정통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무조건 ‘이단(異端)’으로 몰아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 때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믿음과 같은 것인지,
내가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데,
이런 자들은 자기 생각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신앙입니다.
마치 이슬람의 과격주의자들처럼 파괴적인 자들이 되기 쉽습니다.
4)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나를 드려 헌신하는 믿음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며 영광 돌리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참된 믿음입니다.
내가 주께서 말씀하신 그 믿음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항상 자기 생각을 말씀에 비추어 보고 묵상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항상 그때그때 회개하여 자기의 영을 정결하게 유지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께 찬양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절)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을 찾고 또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주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찾고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말씀만을 믿고 행동하는 신앙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10)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유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가라는 명령만을 받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약속하신 땅에서 마치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세우신 견고한 터 위에 있는)
하늘의 도성을 바랐음이라(기대하였음이라).
➠ 왜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 그 이유는 이곳 가나안 땅에서는
단 하루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
도대체 안전을 보장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곳이니
이곳 가나안 땅에서는 절박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에서는 모든 것이 다 있으니 기도가 필요 없는 곳입니다,
거기에서는 기도를 해도 형식적인 기도를 하게 되지만,
이곳 가나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야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절박하게 기도하고,
또 불안하니 안전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땅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고 의지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묵상 :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가나안보다는 갈대아 우르를 더 원합니다.
그곳에 가는 것을 인생의 성공이라 여깁니다. 불안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셋집보다는 작더라도 내 집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과의 동행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척박하고 위험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하나님께서 나를 불안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하더라도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줄 알고 기뻐하며 감사하십시오.
(그 다음은 히브리서 11장 큐티부분을 참조하십시오.)
➠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를 다시 살펴봅시다.
잘못된 해석은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에게
바벨론의 갈대아 우리를 향한 비전과 꿈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꿈에 대한 실체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잘못된 해석을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습니다.
결 론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1)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38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도다(세상은 그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땅굴) 등에서 떠돌며 살았느니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의 원어의 뜻은
이 세상은 그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려 하는데
세상은 그들에게 죄와 짝하며 살라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 살지 않다가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2) 그 모진 고난과 고통에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은 사람들
비록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떠돌며 살지언정
세상은 그들이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고
조롱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으나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믿음 때문에 죽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결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핍박도 없고 조롱과 모욕하는 일도 없는데
믿음의 길을 스스로 제한하여 신앙의 나태함에 빠지고 있습니다.
● 묵상 : 믿음의 본체, 믿음의 실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주님의 심판을 바라보기에
이런 아픔과 환난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마지막 때는 히브리서가 기록되던 때보다 환난과 아픔과 갈등이 훨씬 심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그 고난을 기쁨으로 견디고 이기자고 말하는
히브리서의 간절한 호소를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면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사는 자들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말씀과 권면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경청하여 들으며 사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만일 그 권면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부하면
하나님의 돌봐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도 중단되고 단절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께서 주시는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항상 가까이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그 손을 이끌어 주님의 나라에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
더 나은 영구한 산업을 얻기 위해 살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승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바르게 깨닫게 하옵소서.
믿음 안에서 인생을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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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록 : 지난주 설교 요약
서론 부분에 넣으려 했던 몇 가지 용어 설명입니다.
이동식 성전 시간신학 생명의 시간
고정식 성전 공간신학 멸망의 시간
1) 이동식 성전과 고정식 성전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 40년을 지내는 동안 계속 움직여야 했으므로
그때의 성전은 ‘상막’으로 된 이동식 성전이었고,
후일 가나안에 정착한 후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움직이지 않는 고정식 성전입니다.
이동식 성전과 고정식 성전은 단지 이동하고 고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동식 성전인 성막이었을 때는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온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였고,
구름기둥이 내려앉으면 그곳에 성막과 장막을 치고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성전에 놓고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에만 거룩한 척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보였습니다.
2) 시간신학 공간신학
이렇게 특별한 공간을 성역화해서 그 공간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공간신학’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명당과 흉가의 개념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도 흉가에 있으면 망하고,
아무리 흉악한 놈이라도 명당에 있으면 부흥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땅에 복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땅이 아니라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시편 1:1)
사람에게 복이 있고, 복 있는 사람이 있는 땅에 복 있는 땅이 됩니다.
그가 집에 있든 밖에 있든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곳, 그곳이 복 있는 땅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땅이 아니라 시간에 지배를 받습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이 되게 하는 영의 질서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똑같이 땅의 시간을 살면서
그 시간을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으로 사는 것을 ‘시간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3) 생명의 시간과 멸망의 시간
이것을 정리하면 이동식 성전의 개념을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을 사는 자들은 생명의 시간을 사는 것이고,
고정식 성전의 개념을 따라 자기가 차지한 땅을 믿고
이중적 신앙을 가진 자들은 멸망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소유했으니, 할례를 받았으니,
내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니, 내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기는 것이 고정식 성전, 공간 신학이고 멸망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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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브리서 10:13)
주께서 재림하여 오실 때가 언제일까요? 이 세상이 너무 악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마귀와 사탄을 박멸하여 발등상(발판)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가 도저히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히 악한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자고 호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