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부제 : 주께서 마련하신 안전지대
설교본문 : 히브리서 13:7~17(참고, 히브리서 12장, 시편 12편)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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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여기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믿음의 실체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바라며 구하는 일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해서 하는 것을 뜻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는 마지막 날에 주께서 행하실 최후의 심판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확실한 증거로 믿는 것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고,
이 두려움으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더 큰 것으로 여기고 세상 것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1이 말하는 믿음이라고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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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히브리서가 전하는 마지막 애절한 호소의 외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러므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3:12~13)
제 1 부 : 주께서 연약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안전지대
1. 우리 앞에 당한 경주
•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히 12:1)
1. 이처럼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경주하며
(인내하고 참으면서 우리의 달려가야 할 길을 달려가며).
히브리서는 11:1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전한 후 11장의 그 이하 말씀에서
구약 성경에 나온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언급한 사람들 말고도
우리 앞에 구름같이 허다한 신앙의 증인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가 순교의 반열에까지 올라간 훌륭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 그 전에 먼저 잡초를 제거해야
히브리서가 11장에서 구약 성서 중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나열한 것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들이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원에서 꽃과 식물을 번성케 하려면 먼저 잡초를 뽑아야 하듯
우리가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건강한 영을 가진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우리 안에 있는 못된 것들, 못된 잡초들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1)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무거운 것은 마라톤 선수가 달리는데 방해가 되는 체중이나 옷 따위를 뜻합니다.
그 당시 그리스의 마라톤 선수들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달리기 위해 아예 옷을 벗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체중도 많이 나가는 사람이 옷이나 짐까지 들고 있다면
마라톤 경주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일반 마라톤 선수들도 달리기를 하기 위해 옷까지도 다 벗어버리는데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달리는 자들은
더욱 방해 거리들을 벗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➀ 마음만 먹으면 제거할 수 있는 것들 : 그러나 그냥 가지고 있는 것들
여기에서 말하는 무거운 것은 옷처럼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으나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으려 하는 것을 뜻합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겠다는 욕심,
또 친구 모임이나 동아리 모임과 같은 것
이런 것들은 우리를 분주하게 하여
말씀을 보고 묵상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합니다.
➁ 이렇게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면
마치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려워집니다.
이런 소소한 일과 관련된 부담들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중에 일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일을 놓지 못하면
이런 일에 분주하여 주님 섬기는 일을 미루고 있는 동안
마귀가 내 마음에 완악한 독을 심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섬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2)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는
하나님을 섬기기 힘들게 만드는 못된 습관들을 말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악하고 부패한 습관과 생각과 행동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이 일들이 나를 점점 더 타락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몸과 마음과 영이 완전히 죄에 빠지는 자가 되고 맙니다.
➠ 그러므로 지금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멈추십시오.
그 악하고 부패한 행동이나 생각들이
이미 나에게 습관이 되어서 고치기가 어려우면
주께 이 못된 것을 벗겨주시기를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3)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경주합시다.
그동안 우리는 관람석에서 11장에 나오는 구약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의 경주를 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제는 이 지구의 시간에 우리가 서 있고,
이제는 우리가 경주의 자리에 섰습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처럼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라톤 선수들이 지칠 때마다 다시 또 달려 승리하는 것처럼
우리도 또 일어서고 또 도전하여 믿음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얽매이기 쉬운 죄를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이 신앙의 경주에 참여합시다.
2. 쓴 뿌리를 조심하라(히 12:14~15)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문제를 일으켜서)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두려워하고,
쓴 뿌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는
내 안에 숨겨진 악의 습관들을 말합니다.
1) 화평함을 파괴하는 쓴 뿌리
화평함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쓴 뿌리는
교회에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탐욕이나, 이기심, 고집과 같이 내 마음속에 못된 쓴 뿌리들이 있어서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과 싸움과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거룩한 공회, 즉 주께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그 자체가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쓴 뿌리 노릇을 해서 나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끄러워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직접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일임을 기억하십시오.
● 묵상 : 예언자와 쓴 뿌리를 구별하십시오.
흔히 교회를 분란에 빠뜨리면서
자기는 예언자적인 심정에서 교회를 책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예언자적인 심정에서 했다면 그 결과 회개와 주께 대한 헌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이기심과 고집 때문에 싸움을 일으키고 있으면서 예언자 운운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2) 거룩함을 파괴하는 쓴 뿌리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쓴 뿌리는
우상숭배와 세상의 죄의 즐거움에 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를 핑계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은 죄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가령 성도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겠다며 술집에 갈 수는 없습니다.
또 교회의 부흥을 위해 제사를 도입하겠다는 것도 잘못된 일입니다.
● 묵상 : 쓴 뿌리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쓴 뿌리가 교회를 파괴합니다.
쓴 뿌리가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고 고통을 심습니다.
이 쓴 뿌리가 화평함과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바뀌어지도록
주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3.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시 12:2)
2. 그들이 이웃에서 서로 거짓말만 하고
아첨하는 입술로 두 마음을 품고 말하는도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마음에 쓴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를 고통에 빠뜨리고 나를 구렁에 몰아넣는 쓴뿌리가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 두 마음이란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과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다른 것을 뜻합니다.
마음에는 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두 마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두 마음을 우상숭배만큼이나 싫어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서
두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결단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본래 우리의 모습입니다.
➠ 이런 연약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께서 오셔서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자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셔서
연약한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의 길을 걷는 자와 거부하는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는 다음 세 종류의 사람 중에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각자 자신을 살펴봅시다.
1) 한 마음(세상을 향한 마음)만 품고 있는 자들 : 믿음 없는 자들
첫째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담이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저주를 받아
하나님과 세상의 연결이 끊어져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데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으니
이 세상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사망을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시 하늘의 신령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과 끊어진 연결 고리를 다시 회복하는 길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이 회복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오직 자기 생각대로만 살아가는 자들, 세상 것을 얻는 것에만 마음을 쏟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없으므로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 그 하나의 마음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생명을 공급받을 길도 막혔습니다.
이런 자들은 길가에 뿌린 씨와 같은 자로, 이미 멸망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살지만 사실상 멸망의 심판을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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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은 그 마음에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가지고 있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세상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벗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마음을 품은 사람도
그 마음의 자세에 따라 다시 둘로 나누어집니다.
2) 두 마음 첫째 : 믿음의 길에 들어왔지만, 죄를 즐기는 마음도 그대로 갖고 있는 상황
➠ 그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두 마음을 고착시키는 자들
➀ 세상에 속한 자가 믿음을 가지면 두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죄를 좋아하는 하나의 마음만 갖고 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죄를 좋아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렇게 두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➁ 피할 수 없는 갈등 ➠ 꼼수를 찾아낸 사람들
그런데 자석의 S극과 N극이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죄를 좋아하는 마음을 싫어하므로
이 두 마음에 내 안에서 서로 대적하여 갈등을 하게 되는데
이 갈등의 과정이 아주 힘이 들다 보니 많은 사람이 꼼수를 씁니다.
갈등은 하지 않고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는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사람들이 찾아낸 꼼수는
그냥 두 마음 그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래 본능적으로 그렇게 생겨 먹은 걸 난들 어쩌겠느냐 하면서,
세상에서는 죄 속에서 살다가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척하는 겁니다.
➂ 죄책감의 자리를 없앤 자들 : 멋진 예배 의식으로 억지로 만들어 낸 마음의 평안
이들은 세상에서는 죄에 속한 마음 하나로 살다가
교회로 들어오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 하나로 각각 분리된 삶을 살기에
죄를 범할 때나 신앙생활을 할 때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회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이 완전히 분리되어
세상에서 엉망으로 살더라도 죄책감이나 갈등이 없고,
그런 상태에서 주일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는 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다 교회에 오면 세상 것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갖습니다.
세상에서는 죄를 범하면서“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갈등을 하지도 않고
어제 세상에서 무슨 짓을 했든 간에 전혀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에도 아무 불편이 없습니다.
지금은 오직 이 멋진 예배 의식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좋을 뿐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거룩한 은혜의 감정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 그러나 이런 것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혼합주의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세상의 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있으므로 혼합주의입니다.
두 마음, 즉 두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 자들은
위 1)번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 이런 자들이 교회 안의 무신론자들입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만
그가 구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즐거움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교회 안의 무신론자들입니다.
3) 두 마음 둘째 : 두 마음 가졌음을 부끄러워하며 주께 도움을 청하는 자들
➀ 두 마음의 갈등과 번민은 육신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운명
믿음 없이 자기만의 세상을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새로운 생명이 들어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전에 갖고 있던 육신의 마음, 죄의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신의 마음, 죄의 마음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놈은 아주 고약한 놈이라 우리가 조금만 영적으로 게으름을 피우면 곧바로 나와서
마치 내가 처음부터 죄에 속한 사람인 것처럼 나를 욕망에 빠진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갈등과 번민을 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지려는데 죄의 욕망이 자꾸만 나를 삼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➁ 이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그 죽음 같은 갈등을 해결한 방법이 없으니
하나님께 구합니다.
내가 이대로 죄 가운데 살다 죽으면 지옥 백성이 될 것 같다며
나를 좀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면 주의 은혜로 그 갈등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죄의 습관을 벗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 죄에 억압된 사람들의
간절한 호소를 주께서 들으시고 우리를 도우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또다시 그 고약한 놈이 나와서 죄의 본능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는 평생 이렇게 죄와 싸우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 이런 자들은 주께서 마련하신 안전지대에 들어가게 됩니다(시 12:5).
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련한 자들이 억압당하고(짓밟히고) 궁핍한 자들이 탄식하니(신음하며 부르짖으니)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간절히 갈망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우리가 그렇게 죄와 싸우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주께서 정하신 심판의 기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형편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오셔서 새로운 심판의 기준을 정하셨습니다.
이렇게 주의 은혜 속에 살면서 평생 죄와 싸우며 사는 자들은
주님의 안전지대에 들어가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안전지대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의 시민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안전지대라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니 언제 죽더라도 그대로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 천국의 시민권은 여권같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생명이 계속 이어져야만 천국 백성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 살아가는 동안 이 새로운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 주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계속 주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 ➠ 이것이 가장 확실한 안전지대입니다.
제 2 부 :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1. 하늘의 도성,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1) 처음 땅과 하늘이 진동했을 때(히 12:26)
(26절 성경구절 아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을 때
땅이 흔들리고 산이 진동하였습니다(출애굽기 19:18).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모세조차도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21절, 신명기 9:19).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땅이 흔들렸고,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땅이 진동하며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또 예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워 말씀을 전하도록 보내셨을 때
사단이 하늘에서부터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18).
2) 내가 한 번 더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 진동하리라(26~27절)
26. 그 때에는 그 음성이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번에는 그가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번 더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하리라”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말씀하신 것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진동하는 것들)의 변동 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설명 : 이 ‘한 번 더’라고 말씀하신 것은
진동하는 것들(흔들리는 것들, 피조물들)을 제거하여
진동하지(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영존하게(남겨 두시려는) 것이라.]
28.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니,
그 은혜를 받자(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길지니(하나님께 예배를 드릴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심판하시는 분)이심이라
그런데 또 한 번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리라고 말씀하시고는,
한 번 더 땅과 하늘을 진동시킨다는 것은
진동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설명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땅과 하늘이 완전히 멸망되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3)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것을 남겨 두기 위하여
➠ 우리는 영원히 진동하지 않는 나라에 속했습니다(26~29절)
(26~29절 성경구절 위에)
주께서 다시 재림하여 오실 때에 이 땅과 하늘을 진동시켜 모두 사라지게 하는 것은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것을 남겨 두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28절).
우리는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나라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 만물을 멸하실 때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나라에 속한 자들은 주와 함께 그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4)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22~24절)
22. 그러나 너희가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그곳은 천만 천사와(수많은 천사들의 무리와)
23. 하늘에 기록된(등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예수께서 뿌리신 피니라.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
주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아온 바로 그 자리,
주와 동행하며 교제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주를 섬기는 바로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은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하늘의 교회와,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예수님과 그의 뿌린 피가 있는 곳입니다.
● 묵상 : 이 은혜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히브리서는 이 은혜의 자리를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호소합니다.
히브리서의 이 간절한 호소는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최근에 코로나 19로 신앙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일이 올지라도 주께서 주시는 이 은혜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2.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갑시다(히 13:11~13)
11. 이는 죄를 위한 그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태워지기 때문이라.
12.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써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러므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영문 밖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을 의미하고,
영문 안은 나의 삶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믿음이 없을 때에는 영문 안에서만 머물렀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 살았습니다.
나를 위해 분주했고, 내 것을 채우기 위해 바빴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믿는 백성이 되었으니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영문 밖으로 우리도 나아가자고 히브리서는 호소합니다.
주께서 치욕을 받으셨던 영문 밖으로 가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치욕과 능욕, 수고의 땀과 헌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나아가서 주를 위해 수고의 땀을 흘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묵상 :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영문 안에 머무르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사명의 자리인 영문 밖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나를 위한 삶의 자리인 영문 안에서 모든 일을 하려 합니다.
기도의 내용도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는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섬기고 봉사하기 보다는 그저 내 마음 편하게 해 달라는 기도뿐입니다.
이렇게 영문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계속 영문 안에서만 머무르면서
신앙의 형식만 그럴듯하게 갖추는 것은 결코 믿음도, 신앙도 아닙니다.
주께로부터 은혜를 받았음을 깨달았다면
이제 주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제사, 착하고 선한 삶으로 드리는 제사,
서로 나눠주는 제사를 드릴 장소인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자가 됩시다.
결 론 : 신실한 영적 지도자가 되고, 신실한 성도들이 됩시다.
저 역시 목사로 영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있으면서,
영적 지도자에 복종하라는 이 말씀을 오늘 설교의 결론부분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참으로 민망하고 불편합니다.
그러나 어찌 됐은 잘났건 못났건
목사님과 장로님을 포함한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서 교회는 이끌어져 가고 있고,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양육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시그러워도 목사와 장로(당회)가 바로 서 있으면 교회가 바로 서는데,
교회가 조용해도 목사와 장로(당회)가 흔들리면 교회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해야 하고,
성도들은 이들의 지도를 잘 받아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1) 여러분을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십시오(17절)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항상 깨어 있기를)
마치 자기들이 청산할 자인 것처럼(마치 자기들이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 것처럼,
혹은 마치 자기들이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진 사람인 것처럼)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즐거움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괴로움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마틴 루터는 이 구절 때문에 종교개혁을 무척이나 망설였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을 하는 것이
교회의 지도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가끔 교회의 지도자가 나를 인도할 때,
내가 그것을 거부하면 혹시 주께서 진노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할 때가 있습니다.
• 그러나 영적인 지도자를 믿고 따르고 그의 말에 순종하라는 것은
그가 나를 영적으로 인도할 때 따르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곧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도자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존중하여야 합니다.
➠ 그러므로 지도자가 말씀에 합당하지 않을 때에는
더 큰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교회뿐 아니라 직장이나 학교에서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지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면
우리는 더 큰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명령에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그러나 그 지도자가 주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나를 인도할 때에는
내가 그 지도자의 말을 주님의 말로 여기고 따릅니다.
나를 양육하고 인도하는 영적인 지도자가 말씀에 합당하게 인도하고 있을 때에
그 지도에 거부하여 그 지도자들을 슬프거나 외롭다고 느끼게 하면
결단코 나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의 영을 마치 자신이 책임진 사람처럼 그렇게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 묵상 : 이 땅의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오늘날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의 직분자들이나 성도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심한 경우 목사님들이 마치 사회의 고용사장처럼 교회의 평신도 지도집단에 이끌려
말씀 선포조차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또 반대로 삯꾼 목사들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시험들고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목사님들이건 성도님들이건
신실한 자는 누구든 외롭고 고통받는 시대입니다.
이 땅의 영적 지도자들이 신실한 주님의 종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성도들도 누가 참된 지도자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성도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주님
죽은 낙엽처럼 넋 놓고 살다가
세상에 휩쓸려 사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장차 어떤 혼란이 오더라도
주님의 은혜의 자리를 결단코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영문 안에만 머무르려 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리인
영문 밖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중보기도 :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우리를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