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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문

두 고백의 차이(7월 7일; 요 9:1~41)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4.07.09|조회수74 목록 댓글 0

설교제목 : 두 고백의 차이

설교본문 : 요한복음 9:1~41(참고, 욥기 3~5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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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는 두 사람의 고백의 차이를 통해서

    주께서 인정하실만한 참된 믿음의 고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욥기의 말씀을 통해서는 절규하는 욥의 믿음의 태도를 지적하는 엘리바스를 통해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 눈먼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보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이 사람이 눈이 먼 것은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 눈먼 자 본인의 죄 때문인지를 묻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제자들의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1) 병든 자와 장애인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요 9:1~2)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유대인들은 병이 든 자, 가난한 자, 연약한 자들을

    모두 그의 죄든 그의 부모의 죄든 간에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그들을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들과 분리, 격리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결과로 병이 들거나 장애인이 되었으니

    그들을 돕거나 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런 태도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병든 자들이나 장애인들과 같이 연약한 자들을 자기들과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그들과 벽을 쌓고 단절된 삶을 사는 자들을 아주 미워하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괴롭게 하면 하나님 자신을 괴롭게 한 것으로 여기시고,

    그들을 섬기면 하나님 자신을 섬긴 것으로 여긴다고 하실 만큼

    연약한 자를 돕는 것을 중요한 일로 보십니다.

 

 3) 연약한 자는 사랑이 필요한 섬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병든 자를 평가하는 그 잣대로

    장차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2)

 

    그러므로 우리도 연약한 자들을 죄 가운데 있는 자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섬기는 것을 주께서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여기십니다(마태복음 25:34~46).

 

묵상 :

 

    우리나라에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으면서

    임대아파트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을 차별하는 자들은

    장차 주께로부터 엄청난 차별을 당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저주받을 일에 절대로 참여하지 마십시오.

 

 

2. 눈먼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예수님

 

 1)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요 9:3)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이 사람이 눈먼 자가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자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소경을 치유하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신 것도

    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2)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6절)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께서 이 눈먼 자를 고치실 때 굳이 땅에 침을 밷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 하신 것은

    예수께서 세상 만민의 죄를 씻어 정결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것을 알리시려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심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절)

 

    이에 그 눈먼 자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었더니 밝은 눈이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연못의 물로 눈을 씻었더니 눈이 떠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2 : 두 고백의 차이

 

    예수께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치료해 주셔서

    세상을 자기 눈으로 마음껏 보는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본문에서는 바리새인)은 이 일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필 그의 눈을 안식일에 치료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눈멀었던 자와 그의 부모가 산헤드린에 심문을 받습니다.

 

 

1. 산헤드린의 심문

 

1) 1차 심문 : 눈먼 자였던 걸인에게(요 9:13~17)

 

           13. 그들이 전에 눈먼 자였던 그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분쟁이 일어났더니)

           17. 이에 눈먼 자였던 그 사람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예수께서 눈먼 자를 안식일이 치료한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웃 사람들이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끌고 가듯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에서 ‘데리고 갔다’로 사용된 ‘아구신’은

    당시 유대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로 끌고 갔다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평범한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입니다.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은 대부분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바리새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눈을 뜨는 것을 본 이웃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간 것은

    그가 눈을 뜨기 위해 행한 일들(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랐고,

    그는 그것을 씻기 위해 실로암 못에 간 행위들)이

    안식일 법에 저촉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으니 선지자일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걸인에게 “너는 그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묻습니다.

    걸인은 “선지자니이다”하고 대답합니다.

 

 2) 2차 심문 : 걸인의 부모에게(요 9:18~22)

 

           18.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자였다는 너희의 아들이 틀림없이 맞느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고백)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보시오’ 하였더라.

 

    걸인이 그 무서운 바리새인(산헤드린) 앞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자,

    바리새인들은 걸인의 부모를 데려다가 그가 정말 눈먼 자였는지를 심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가 자기의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말하지만,

    그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 아들이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며 대답을 아들에게 넘겼습니다.

 

 

2. 두 고백의 차이

 

1) 소경이었던 자의 고백(요 9:17)

 

            (17절 성경구절 위에)

 

    바리새인(산헤드린 의원)들이 소경이었던 자에게

   “너는 그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선지자니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는 출교한다는 것을 그도 이미 알고 있으나,

    그에게 주님의 빛이 왔으므로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합니다.

 

    그가 아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는 않았으나,

    조금 전에 예수님을 그저 조금 능력이 있는 사람 정도로 보았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그 신앙이 발전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고백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2) 그의 부모의 고백(20~23절)

 

            (20~23절 성경구절 위에)

 

    그러나 그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눈이 떠지는 기적을 보았음에도

    산헤드린의 출교를 두려워하여

    모든 것을 아들에게 미루고 자기들은 적당히 얼버무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고백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일은

    주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참되게 믿고 고백하는 길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이렇게 예수께 대하여 적당히 얼버무려서

    자기들의 죄를 전혀 용서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바리새인들처럼 죄 가운데서 죽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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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설명 22절 출교)

 - 출교(22절) :

    출교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➀ 첫 번째 : 30일 동안의 출교

       첫 번째 출교는 30일 동안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들이나 아내에게 4규빗(약 1.8m)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➁ 두 번째 : 영구한 출교

       두 번째 출교는 회당의 예배에 영원히 참석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과의 교제가 일체 금지됩니다.

       또한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리라는 산헤드린의 선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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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는 두 번째 출교를 뜻하는 것으로,

       눈먼 사람이었던 자의 부모는 이 출교를 두려워하여

       자세한 사항은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얼버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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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을 가질 때 손해보는 일이 있더도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묵상 : 당신은 주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주님의 나의 구세주요 나의 왕이라 믿고 있다면

    예배드릴 때 왕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도록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십시오.

    그리고 세상에서 그가 나의 왕이심을 당당히 밝히고 고백하십시오.

 

 

3.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9:35~38)

 

           35. 예수께서 그들이(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바로 그이니라.”

           38. 그러자 그가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는 예수께 엎드려 절하는지라.

 

    눈먼 사람이었던 자가 산헤드린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즉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산헤드린으로부터 출교 처분을 받으면

    친구는 물론 가족들과도 대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의 고난 당함을 아시고 곧바로 찾아오셨습니다.

 

묵상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주께서 우리 곁에 오십니다.

    그와 우리와의 차이는 그에게는 주께서 보이게 오셨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게 오신다는 차이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차이는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점에서는 그와 우리가 똑같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고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3 : 욥의 절규

 

1. 욥의 절규와 울부짖음

 

    우리가 욥기를 볼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욥기에 나온 모든 사람들 중에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정결한 자로 인정받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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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소유를 잃고 자녀까지 모두 잃었을 때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었던 욥이었습니다.

 

    그러나 온몸에 악성 종기가 생겨서

    가려움과 통증에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1주일이 넘어서자

    드디어 욥이 절규하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1) 내가 태어난 날이 없었더라면(욥 3:1~3)

 

            1. 그 후에 마침내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울부짖으며) 이르되

            3. “내가 태어난 그날이 사라져 버렸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좋아하며 말하던 그 밤도 없었더라면,

 

    욥은 자기 자신의 생일을 저주함으로써

    자신이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절규합니다.

 

 2) 자신을 잉태한 밤이 공포의 밤이 되어 잉태할 수 없는 밤이 되었더라면(욥 3:4~5)

 

            4. 그날이 캄캄하였더라면(그날이 어두움이 되었더라면),

               그래서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날을 돌아보지(신경도 쓰지) 않으시고

               빛도 그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그날에 아예 동이 트지도 않았더라면),

            5. 유암(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검은 구름이

                그날을 덮어 버리고 흑암이 그날을 덮어서 그날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더라면,

            6. 그 밤도 흑암에 사로잡혔더라면,

               그날 밤이 아예 한 해의 어떤 날이나 달의 수에도 들지 않아 그날이 없었더라면,

            7. 아, 그 밤이 아무도 잉태할 수 없는 밤이었더라면,

               그 밤이 아무도 즐거운 기쁨의 소리를 낼 수 없는 밤이었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바다의 큰 악어(리워야단)을 깨워서

               격동시킬 수 있는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욥은 자신을 잉태한 그 밤이 공포의 밤이 되어

    도저히 자신을 잉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탄식합니다.

    아예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더 깊은 절망입니다.

    죽음이란 육신만 죽는 것이지 영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지만,

    욥은 아예 육이든 영이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환난도 없었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3) 그 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이전의 혼돈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더라면(5~8절)

 

            (5~8절 성경구절 위에)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셔서 그를 잉태하게 하신 것조차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자신을 잉태하던 날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이전의 흑암(절대 어둠)에 빠져

    온 세상이 혼돈과 두려움에 빠졌었다면

    자신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꼼짝 못 하게 붙들어서 어디엔가 가두셨다는

    바다의 큰 괴물 리워야단을 그날에 누군가가 다시 풀어서

    이 세상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었다면

    자신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4) 그동안의 욥의 신앙의 특징 : 이런 일이 올까봐 자식들 수대로 번제를 드렸었는데(욥 3:25)

 

           25.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것이 내게 임하였고,

                내가 무서워하던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내게 일어났구나).

 

    이런 재앙이 올까 봐 혹 자녀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했을지 모를 죄를 위해

    자녀 수대로 번제를 드렸었는데

    그럼에도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고 탄식합니다.

 

 5) 그러나 그 재앙이 자신의 몸에까지 고통을 받는 데까지 이르게 되자

    욥의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재앙이 자신의 몸에까지 와서 큰 물소리와도 같은 신음소리를 내고,

    어두움의 환상이 보이고 저주의 환청까지 들리는 지경이 되니

    욥은 자신에게 오는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으려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번제도 드렸던 것인데

    누가 봐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할만한 재앙이 오니

    그동안 그가 했던 모든 신앙의 행위들이 소용없는 것이 되어

    욥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2. 욥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울타리가 오히려 욥을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1) 하나님께 대한 서운함이 복받쳐 오르는 욥(욥 3:20~26)

 

           20. 그런데 어찌하여 이 고달픈(비참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바라도(기다려도) 죽음이 오지 아니하니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땅을 파며 죽음을 구하다가

           22. 묘지의 돌만 보여도 반갑고,

               마침내 무덤에 이르게 되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울타리로 나를 둘러싸서 인생의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인생의 미래가 없이 비탄에 빠진 사람에게) 빛을 주셨는고.

           24. 음식을 앞에 놓고서도 나오느니 탄식뿐이요,

               나의 앓는 소리가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것이 내게 임하였고,

               내가 무서워하던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내게 일어났구나).

           26. 나에게는 평안도 없고 안일(안식, 안정)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고통과 두려움만 있구나.”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런 재앙이 오고야 말았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을 향한 서운한 감정이 복받쳐 오릅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렇게 자신에게 재앙을 주실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21절).

 

 2)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울타리로 나를 둘러싸서 … 빛을 주셨는고(23절)

 

            (23절 성경구절 위에)

 

    하지만 죽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하나님의 빛이 자신에게 오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주셨다면 최소한 이런 고통은 더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고통 중에도 생명이 이어지니

    욥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쳐 놓으신 하나님의 보호의 울타리가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하나님의 빛은 무슨 소용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다 무엇이냐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욱 빛과 생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전혀 고맙지 않습니다(20~23절)

 

            (20~23절 성경구절 위에)

 

    전에는 그에게 빛과 생명을 주시는 것이 감사했는데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 괴로움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규와 고통의 울부짖음 속에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3. 욥의 절규는 자신에게 환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

 

 1) 우리는 앞으로 욥이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절규를 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욥에게 그의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한다는 말이

    어떻게 욥을 더 힘들게 하는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이러한 절규와 부르짖음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2) 그러나 욥은 절규를 할 망정 결코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욥이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 괴로움을 절규하듯 토해내지만,

    결코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고,

    자살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괴로움을 하나님께 절규하고 외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시도를 결단코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시련과 고통 속에 있는 성도들이 주목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4. 죽음은 결코 현실의 아픔을 달래줄 도피처가 아니다.

 

 1) 죽으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욥(욥 3:13~19)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지금쯤은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잠들어 쉬고 있을 텐데.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거친 터, 폐허 위에 성을 건축하여 세운)

                세상 임금들과 모사(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그렇지 않다면 금과 은으로 집을 가득 채운

                고관(성주, 귀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땅에 묻혀서 빛을 보지도 못한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도 않은 자가 되었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사람들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못하며,

                삶에 지친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사람들도 다 함께 평화를 누리며,

                노예를 부리는 감독자의 호통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낮은 자와 높은 자의 구별이 없고

                종도 그 주인에게서 놓이느니라(주인에게서 놓여 자유를 얻는 곳이라).

 

    욥은 죽음을 자신에게 평안을 줄 참된 안식처라고 노래합니다.

    그곳에는 노예를 부리는 주인들의 고함 소리도 없고,

    그곳에는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분도 없는 곳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욥의 이 고백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게 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의 현실이 괴로우니 차라리

    죽으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감상적인 고백입니다.

 

 2) 욥이 말한 이런 평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은 자들에게만 허용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주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게 되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죄의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단코 이런 평안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큰 고통의 길로 들어가는 멸망의 길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자들에게는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죽인 죄에 대한 회개를 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상적인 생각에 스스로 삶을 마감합니다.

 

    많은 사람이 본문의 욥과 같은 감상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내가 심판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일단 죽고 나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4 : 엘리바스의 1차 공격

 

1. 주변 사람을 동원하여 신실한 자를 무너지게 하는 사탄의 계략

 

  • 사탄의 공격 제 3 라운드 : 친구들을 통하여 욥을 무너뜨리려는 전략

 

    1차 공격으로 욥의 모든 소유물과 자녀들을 잃게 한 사탄은,

    2차 공격으로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악성 종기가 나도록 했습니다.

    욥은 집에서 쫓겨나 쓰레기 더미에서 기와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사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제 3차 공격에서 교활한 친구들을 욥에게 보내어

    욥의 마음에 아주 심각한 상처를 주게 합니다.

 

    -----------------

 

  • 엘리바스의 공격

 

    까닭 없이 자신에게 찾아온 재앙에 대하여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욥의 절규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세 친구 중에 제일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말을 시작합니다.

 

    욥의 나이를 50대로 본다면,

    엘리바스는 그보다 한참 연장자이니 나이가 70~80쯤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지나온 삶의 경험을 비추어서 욥을 공격합니다.

 

 1) 욥은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니까 견디지 못해 한다는 것(욥 4:1~5)

 

            1. 그러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을 걸면 (충고를 하려고 하면) 너는 싫증을 내며 귀찮아하겠지.

               그러나 너의 이 기막힌 말을 듣고도 참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설명 :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뜻.)

            3. 생각해 보아라. 전에 네가 많은 사람을 가르쳤고(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낙심과 절망에 빠진) 자를 굳세게 붙들어 주었으며,

            4.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자를 말로 격려하여 일어나게 하였고,

               무릎이 연약해져서 흔들리는 자들에게 힘을 주었거늘

            5. 그런데 정작 이 일이 자신에게 닥치게 되니 네가 힘들어하고(짜증을 내고),

               이 일이 네게 닥치니 놀라는구나(낙담하는구나).

 

    전에 욥은 다른 사람이 낙심과 절망에 빠져 힘을 잃었을 때

    그를 격려하며 붙들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시험에 들어 넘어진 자들을 붙들어서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니까

    그것을 견디지 못해 한다고 엘리바스가 공격합니다.

 

 2) 욥은 남에게 훈계는 잘하면서 정작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니 낙심한다는 것(3~5절)

 

            (3~5절 성경구절 위에)

 

    또 욥은 전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니 이렇게 낙심하고 있다면

    전에 그가 남을 가르치고 훈계했던 그 경건함은 다 어디에 갔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3) 경건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악독한 사람이었다는 것(욥 4:6~11)

 

            6.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네 자랑이 아니었나?

              (너의 자신만만하던 그 경건은 다 어찌 되었나?)

               흠 없는 온전한 사람을 사는 것이 너의 소망이 아니었나?

            7. 잘 생각하여 보라. 죄 없는 자가 망하는 일이 있더냐?

               정직한 자가 멸망을 당하는 일을 본 일이 있느냐?

            8. 내가 본 바로는 악의 밭을 갈고 그곳에 죄를(독을) 심은 자들은,

               그대로 거두나니(자기가 심은 독을 자신이 그대로 받게 되나니)

            9.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입김에 멸망하고, 하나님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난폭한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도, 젊은 사자의 으르렁대는 소리도 그치는 날이 있고,

               힘센 사자도 이빨이 부러지며

           11. 사자도 늙어서 먹이를 잡지 못하면 죽어가고,

               어미를 따르던 암사자의 새끼들은 다 흩어지느니라.

 

    엘리바스의 앞의 논쟁은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논쟁이라기보다 충고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그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욥을 아주 지독한 악에 빠진 자로 묘사를 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의 잘못된 일을 확인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욥에게 이런 지독한 일을 당한 것을 보니

    욥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아주 흉악한 죄를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 마련인데,

    욥에게 이런 재앙이 내려진 것을 보니

    욥은 틀림없이 죄인 중에서도 아주 중한 죄인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4) 악을 밭 갈고 독을 심는 자는 반드시 그대로 거두게 되리라는 것(8절)

 

            (8절 성경구절 위에)

 

    욥이 악을 저지른 자일 것이라고 추정을 하던 엘리바스는

    곧바로 말을 바꾸어

    지금까지의 욥의 삶은 악을 밭 갈고 독을 심는 자였다고 공격합니다.

 

    욥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고,

    욥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는 언제나 죄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뿌린 죄의 대가를 이렇게 혹독하게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 하늘에 있는 거룩한 자들 중에 누가 너 같은 자의 기도를 응답하겠는가(욥 5:1)

 

            1. “어디 한번 부르짖어 보아라. 네가 응답할 자가 있겠는가?

               하늘에 있는 거룩한 자들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네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느냐,

               하늘에 있는 거룩한 자들 중에 누가 너를 돌아보겠느냐?)

 

    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재앙을 보고 처음부터 욥을 악한 자로 단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그가 욥에게 한 첫 마디가

   “어디 한 번 기도를 해볼 테면 해보라” 입니다.

 

    너 같은 악한 자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욥 같은 자는 아무리 간절히 구하고 구해도 그에게 도움을 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6) 욥을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로 몰아가는 엘리바스(2~3절)

 

            2. 미련한 자는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시기(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니라.

            3. 내가 어리석은 자가 뿌리내리는 것을 보고 그 집을 저주하였노라.

              [혹은, 내가 전에 미련한(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사람이

                       잠시 성공하여 뿌리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기는 하네만,

                       그 집 역시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당장에(순식간에) 망하고 말더라.]

 

    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재앙을 보고 욥을

    자기 분노 때문에 죽는 어리석은 자로 몰아갑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걸핏하면 화를 내고, 항상 시기와 질투에 빠져 사는 자인 것을

    옆에서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합니다.

    부나비가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욥이 자기 분노에 못 이겨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7) 모든 재앙은 악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엘리바스(욥 5:6~7)

 

            6. 재앙은 티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며, 고난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니

            7. 마치 불티가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모든 재앙은 사람(특히 악한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네.

 

    엘리바스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욥이 이토록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아주 확실하게 결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욥이 지금 재앙을 당했다는 것 한 가지 뿐입니다.

    그 한 가지로 세상의 모든 악을 욥에게 가져다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 엘리바스의 논리 :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재앙은 없다 것

 

    엘리바스는 재앙이 땅의 티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고난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재앙이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그가 한 그 악에서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이렇게 큰 재앙을 만난 것을 보면

    그가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임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재앙을 만났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

    소설을 써가며 욥을 함께 마주하지 못할 형편없이 미련하고 모자란 놈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묵상 :

 

    내 눈에 보이는 한두 가지 현실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함부로 평가하지 마십시오.

    내가 판단한 그 판단으로 하나님께 내가 도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2. 사탄의 전략 : 말씀에서 시작하나 그 끝이 다르다

 

    그러면 내가 경험한 신비한 일들이 바른 것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역시 말씀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습니다.

 

 1) 사탄에 대한 것을 모든 천사들에 대한 것으로 일반화하였다(욥 4:17~18)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어찌 자신을 창조하신 이보다 더 깨끗할 수 있겠느냐?

           18.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않으시고,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허물이 있다) 하시는데,

 

    엘리바스가 만난 영이 전한 말을 살펴보십시오.

    처음 그 영이 말한 17절은 성경 말씀과 일치합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더 정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다음 18절에서 확 달라집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믿지 않고,

    그의 천사들도 허물이 많은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곳에서 있기는 합니다.

    과거에 천사였던 사탄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천사였던 사탄을 믿지 않고 사탄이 허물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을

    사탄이 지금 모든 천사들에게 일반화하였습니다.

 

 2) 인간의 허망함을 강조하여 더욱 절망감에 빠져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 한다(욥 4:19~21)

 

           19. 하물며 흙으로 만든 집에 살며 (혹은,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살며),

                티끌(흙먼지) 위에 기초를 두며 하루살이에게도 눌려 죽을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20. 사람은 아침에는 살아 있다가도, 저녁이 오기 전에 예고도 없이 죽는 것,

                그렇게 멸망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라네.

           21. 장막 줄이(생명줄이) 끊기면 사람은 그냥 죽고 마는 것,

                그 줄이 끊기면 사람은 지혜도 없이 죽고 마는 것이라네.’”

        - 21절의 다른 번역(류형기 주석)

               사람이 짐승보다 탁월하다고 자랑을 한다마는,

               그 탁월하다는 감각이 죽음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네.

              (그 탁월하다는 사람도 죽을 때에는 지혜 없는 짐승처럼 허망한 것이라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천사들도 잘 믿지 않으시고

    그 천사들조차 허물이 있다고 여기신다고 말한 후에

    하물며 사람들은 오죽하겠느냐고 하면서 사람의 연약함과 허망함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엘리바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이 연약하고 허망한 존재라는 것은 성경말씀과 일치합니다.

    성경에도 인생을 가리켜 아침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사람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비록 연약하고 허망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렇게 연약하고 허망한 사람이 어찌 감히 하나님을 넘보느냐며

    하나님과 사람과의 철저한 단절을 꾀하려 합니다.

    바로 이 점에 성경말씀과 다릅니다.

 

    그렇게 악한 영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좌절감에 빠져 영영 회복되지 못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만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묵상 :

 

    모든 이단들이 이처럼 성경말씀으로 시작하나

    중간에서 교묘하게 말씀과 다르게 말합니다.

    그러다 끝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의 혼란을 이길 수 있습니다.

 

 

결 론 : 바른 믿음을 가진 자가 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을 나의 왕으로 내 마음 깊은 곳에 모시고,
    내 말과 행동을 통해 주님이 나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고

    요한복음 1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욥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록 절규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나의 왕이시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출교당할 줄 알면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눈멀었던 쟈,

    극심한 고통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욥같은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여

주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죄의 억압에서 해방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게 하옵소서.

 

편견과 무지함으로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영을 분별할 능력을 주셔서

성령의 하시는 일과 악한 영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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