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나는 양의 문이요, 나는 선한 목자라
설교본문 : 요한복음 10:1~18(참고, 욥기 6~7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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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욥기부터 먼저 합니다.
오늘 욥기 6~7장은 하나님을 향한 욥의 절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양의 문이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말씀을 요약하면 애통하는 자, 자기의 죄에 대하여
욥처럼 간절하게 구하고 찾는 자를 구하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제 1 부 : 욥의 절규
1.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절망감
엘리바스가 욥을 공박하자 욥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러나 대답이라기보다는 자기 독백에 가깝습니다.
1) 계속되는 고통에 지쳐가는 욥(욥 6:1~4, 11~13)
1. (엘리바스가 말을 끝내자)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분한(괴로움)을 달아볼 수만 있다면,
내가 겪고 있는 이 재앙(비참함, 고통)을 모두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3. 그것은 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내 말이 경솔하였다면(거칠었다면) 바로 이 때문이네.'
4. 전능하신 이가 나를 과녁으로 삼고 (독이 묻은) 화살들을 쏘시니,
그 화살이 내게 박혀서 내 영이 그 독을 마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휘몰아치시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내게 엄습하여 오는구나.
11. 그러나 내게 무슨 기력이 있어서 더 견뎌내겠으며,
마지막에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더 버텨내겠는가?
(무슨 좋은 일을 더 보겠다고 더 버티며 살겠는가?)
12. 나의 기력이 바위의 기력이라도 된단 말인가?
내 몸이 놋쇠라도 된다는 말인가?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으니(의지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으니)
나의 지혜가(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설명 : 앞으로 살아갈 길이 아득하다는 것)
욥은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괴로움과 고통과 비참함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아마도 바다의 모래들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이 괴로워하는 것은 그가 1주일이 넘게 앓고 있는 악성 종기의 고통보다
지금의 현실이 앞으로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의 미래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11~13절).
2) 욥을 더 절망스럽게 하는 외로움 : 하나님의 두려움이 내게(4절)
(4절 성경구절 위에)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현실을 겪고 있는 데다
미래까지 어둡기만 한 욥을 더욱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욥이 하나님에게까지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과녁으로 삼아 독이 묻은 화살들을 쏘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독이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두려움을 갖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욥을 도우실 뜻이 없으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욥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견딜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아둘람 굴에서 지낼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 절대고독 :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셨다는 느낌
이런 절대고독에서 욥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셨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닌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절대고독을 느끼셨습니다.
3)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가는 욥(5, 12~13절)
5. 뜯을 풀이 있는데 나귀가 어찌 울겠으며,
먹을 꼴이 있는데 소가 어찌 울겠는가?
(12~13절 성경구절 위에)
“나의 기력이 바위의 기력이라도 된단 말인가? 내 몸이 놋쇠라도 된다는 말인가?
나 이제 의지할 곳도 없고 도움을 구하러 갈 곳도 없으니
그저 앞으로 살아갈 길이 아득하다네.”
“뜯을 풀이 있는데 나귀가 어찌 울겠으며, 먹을 꼴이 있는데 소가 어찌 울겠는가?”
현실의 고통도 죽음만큼 힘들고, 앞으로 미래도 보이지 않고,
거기에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신 것 같은 철저한 절망 속에서
욥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2. 한순간도 쉼이 없는 고달픈 인생에 대한 한탄
1) 한순간도 쉬지 못하는 고달픈 인생(욥 7:1~6)
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설명 : 사람이 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이 고된 종살이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인생의 삶이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아니한가?
2. 종은 저물기를(해가 지기를) 몹시 기다리고, 품꾼이 하루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나도 그렇게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고통 속에서, 허무와 허탈 속에서 지내고 있으니)
수고로운(고달픈, 비참한) 밤이 나에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이 밤이 지나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였고,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다시 곪아서 터지는구나.
6. 나의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가니
아무런 소망(희망)도 없이 (내 인생을) 이렇게 보내고 있구나.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종들도 밤이 되면 쉴 수 있습니다.
품꾼도 해 질 녘이 되면 품삯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러나 욥은 밤이 되면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밤이 되면 몸은 더욱 예민해지고 통증은 더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을 맞이하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온몸이 의복 대신에 구더기와 흙먼지로 덮여 있습니다.
욥은 그런 자신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호통만 치는 친구들에 대한 원망과 함께,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하는 고달픈 인생을 한탄합니다.
2) 날마다 악몽에 시달려 잠자는 중에도 고통당하는 욥(욥 7:13~14)
13. 내가 말하기를 ‘잠자리에라도 들면 좀 나아질까,
깊은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좀 덜해질까’하였으나
14. 주께서는 꿈속에서도 나를 놀라게 하시고,
이상(환상)으로도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빚을 얻은 사람이 빚쟁이를 만나러 갈 때 버스 안에서 잠이 오는 것은
졸려서 자는 잠이 아니라고 합니다.
빚쟁이에게 시달릴 것을 걱정하는 내 몸이 잠을 통해서라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잠이 들게 하는 일종의 ‘자기 보호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잠을 통해서
잠시라도 극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잠을 통한 자기 보호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밤마다 아주 무서운 악몽을 꾸기 때문입니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보려고 눈을 감으면
아주 두려운 환상에 놀라 다시 눈을 뜨곤 합니다.
3) 환상과 환청과 악몽의 고통
오늘 욥기의 이 고백을 읽는 자들은 욥이 어떤 악몽을 꾸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시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욥에게 내려진 재앙이 욥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욥기 1장에서 이미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에서는 쉬지 않고 흉한 환청이 들리고
눈만 감으면 흉한 환상이 들리며
날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욥의 입장에서는 두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기는 이런 정도로 환상과 환청과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저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악몽도 꾸고 두려운 환상을 보는 일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꿈이나 환상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특별한 꿈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매사에 꿈으로 오늘 하루의 일을 점치려 하는 행위는 우상숭배만큼이나 나쁜 버릇입니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신 13:3)
3. 내가 바다입니까, 내가 용입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대단하게 여기시고...
1) 내가 바다입니까, 내가 용이니이까(욥 7:12)
12. 내가 바다입니이까, 내가 용이니이까(혹은, 바다의 괴물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감시하시나이까)?
욥은 가나안의 우가릿 신화의 내용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욥을 부당하게 처우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불평합니다.
우가릿에는 바다에 ‘얌’이란 괴물과 ‘탄닌’이란 괴물이 있었는데,
이 두 괴물을 바알신이 정복하여 꼼짝 못하게 하였다는 신화가 있었습니다.
욥은 이 신화를 이용하여,
자신이 바다의 괴물 ‘얌’이나 ‘탄닌’이라도 되는 것이냐고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래서 바알이 얌과 탄닌을 정복했다고 하듯,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복하여 날마다 괴로움을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대단하게) 여기시고(17절)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대단하게)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두시나이까(그를 주목하시나이까)?
욥은 자신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목하실만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기도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아침마다 찾아오시고, 분초마다 자신을 감시하며 시험하실만한
그렇게 큰 인물이 못 된다고 기도합니다.
도대체 자신을 단련하여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이리 호되게 단련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혹시 자신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 치더라도,
그 범죄로 하나님께 얼마나 손해가 된다고 이리 큰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냐고 따집니다.
➠ 그러나 우리의 죄가 주께 무슨 손해가 되어
주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와 하늘의 세계까지 다스리시는 주께
우리가 손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우리가 멸망을 당하게 되니까
주께서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욥처럼 주께서 나를 주목하시고 내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으나,
그 모든 일이 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혹시 욥처럼 고통과 시련 속에 있을지라도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악한 영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4. 아침마다 찾아오시고, 분초마다 단련하시는 하나님
1) 어찌하여 아침마다 권징하시고,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욥 7:18~19)
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권징하시고(찾아오시고),
분초마다(잠시도 쉬지 않고) 시험하시나이까?
19. 주께서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밤새 고통에 시달릴 때는 새벽이 오면 좀 나아지겠지 싶은 마음에
날이 새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도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욥은 이것을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신다고 표현했습니다.
단 1초도 쉴 틈이 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그를 분초마다 단련하신다고 표현했습니다.
19절의 ‘침을 삼킬 동안’은 아주 짧은 시간으로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조차 쉬지 않고 고통이 찾아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욥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하는 말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이 절규는 욥이 극심한 재앙의 고통 중에 부르짖는 절규의 기도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고 고통을 주시기 위해 분초마다
우리를 주목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기 위해 단 1초도 쉬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이토록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우리를 살피시니
우리가 이 혼란된 세상 속에서도 평안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5. 사랑이 없는 경건은 가짜 경건
1) 벗이라면 마땅히 그 고난 받는 친구를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닌가(욥 6:14)
(14절 성경구절 아래)
욥은 자기가 혹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버리는 불경한 언어를 하였을지라도
벗이라면 마땅히 고난받는 친구 욥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지금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신앙적인 충고보다
그 고통에 동정하는 마음을 보이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2) 엘리바스를 물이 말라버린 허망한 시냇물에 비유하는 욥(14~20절)
14. 비록 피곤한(낙심한) 자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전능하신 이를 경외하는 마음을 저버렸을지라도
벗이라면 마땅히 그 고난 받는 친구를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어늘
15. 그러나 내 형제들은(나의 친구라는 자들은) 성실치 아니함이(변덕스러움이)
넘쳐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또다시 흐르는 시냇물 같구나.
16. 얼음이 녹아 흐르면 흙탕물이 되어 검어지고, 그 물속에 눈이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17. 날이 따뜻해지면 물이 마르고,
더워지면 그곳에 물이 흘렀다는 그 자취마저 사라져 아주 없어지나니
18. 떼를 지어 가는 대상(隊商, caravan)들이
그들의 정해진 여행로를 벗어나서 물을 찾아다니다가 광야로 가서 죽고
19. 데마의 상인들도 물을 찾으려 했고
스바의 행인들도 개울을 찾으려고 사모하다가(애를 태우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설명 : 거기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말라버린 개울을 찾아서 이렇게 헤매고
다녔나” 싶은 생각에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욥은 자신의 친구들을 사막의 시냇물 와디에 비유합니다.
와디는 봄에 눈이 녹으면 개울이 넘치도록 물이 흐르다가도
날씨가 더워져서 눈이 다 녹으면 물이 있었던 흔적조차 사라지는 사막의 개울입니다.
사막을 지나던 자들이 혹시 개울에 가면 물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찾았다가
바싹 말라서 물이 흘렀던 흔적조차 사라진 것을 보고 실망하는 와디처럼,
욥의 친구들도 낙심한 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동정은 하지 않고 욥의 잘못만 들추어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나는 주변의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이 되고 있지 않았는지
우리들 자신을 살펴봅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의 아픔은 무엇인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지,
오래 쌓인 아픔과 상처로 하루하루 견디기도 힘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는 않고
그들의 흠집만 찾아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어떤 습관이 눈에 거슬린다거나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다는 둥 입방아만 찧고 있지는 않았는지.
물이 없는 개울을 개울이라 말할 수 없듯, 사랑이 없는 경건은 가짜 경건입니다.
● 묵상 :
돕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아픔을 주는 말은 하지 않는 자가 되기로 결심을 합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성도들끼리 나눈 말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납니다.
6.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
1) 엘리바스의 헛된 경건(욥 6:14)
(14절 성경구절 위에)
욥은 친구들에게 “비록 낙심한 자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전능하신 이를 경외하는 마음을 저버렸을지라도, 벗이라면 마땅히
그 고난 받는 친구에게 동정을 베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하고 말합니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경건은 율법의 규칙보다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에게
왜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외치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살리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규칙은 그가 회복된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고통 중에 절규하며 외치는 말들이나,
절망에 빠진 사람이 삶에 지쳐서 내뱉는 의미 없는 말들을 듣고
그 말꼬리를 잡아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2) 물 없는 시냇물 ➠ 그 능력을 상실한 헛된 경건, 바리새인의 경건(15~20절)
18. 떼를 지어 가는 대상(隊商, caravan)들이
그들의 정해진 여행로를 벗어나서 물을 찾아다니다가 광야로 가서 죽고
19. 데마의 상인들도 물을 찾으려 했고
스바의 행인들도 개울을 찾으려고 사모하다가(애를 태우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설명 : 거기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말라버린 개울을 찾아서 이렇게 헤매고
다녔나” 싶은 생각에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욥은 이런 그의 친구들을 가리켜 물 없는 개울처럼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련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없고 오직 교리만 강조는 율법주의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저 그들이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만 주목하며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를 반복하여 말씀하시면서
가장 무서운 진노를 보이셨습니다.
● 묵상 :
교회가 이렇게 교리만 내세우며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면,
그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께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교리를 내세우기보다 먼저 낙심한 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갖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7. 주께서 나를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1) 내가 이제 죽어 저 흙 속에 누우면(욥 7:21)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죽어 저 흙 속에 누우면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이 땅에)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은 자신의 현재의 병의 상태를 보니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하시니 욥은 절규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이제 죽어 저 흙 속에 누우면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이 땅에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2) 자기의 고통을 가지고 장난감처럼 놀이를 하고 있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욥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욥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그를 장난감으로 여기시고 놀이를 하고 있다고 절규합니다.
욥은 자기를 자기도 놀이를 하시니 재미있으시냐고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임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지고 놀이를 하시는 분이 아닌 것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같은 고통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미 몇 달이나 계속되니
이런 절규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 역설적이게도 성경은 바로 이런 극심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하여 증거합니다.
엘리야 역시 로뎀나무 아래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기도한 후
지쳐서 잠이 들었을 때
천사가 와서 그의 머리를 만지며 떡과 물을 주었습니다(왕상 19:4~5).
모세 역시 끊임없이 불평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지쳐서
차라리 죽게 해 주실 것을 간구했을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 앞에서 모세의 권위를 친히 세워주셨고
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주셨습니다(민 11:4~30).
● 묵상 :
그러므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있더라도
주님 앞에서 절규를 할지언정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께 절규를 하는 것은 기도이지만,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픔을 겪더라도 주님과 함께 겪으십시오.
제 2 부 : 양의 문이시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1. 나는 양의 문이라
1) 양의 문이신 예수님(요 10:7)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위의 본문 해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러 종류의 양의 우리가 있었지만,
공통적인 것은 반드시 그 출입문은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입문에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우리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목자가 그 출입문에서 자기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나오고
목자는 그 양들을 데리고 가서 꼴을 먹인 다음에 저녁에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2)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매일 보는 이 양의 우리를 이용하여
오직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을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에덴동산 동편에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영검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했습니다(창 3:24).
이것은 죄를 범한 사람은 결단코 낙원(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화영검으로 막혀 있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생겼습니다.
누구든 그 문으로 들어가면 낙원(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 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주께서 주시는 주의 이름을 가지고 그 문에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3)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신 예수님(9절)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팔레스틴의 양의 우리의 담은 높이가 3미터나 되어서
아주 힘 있는 자가 아니면 그 담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면 어린아이도 장애인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이십니다.
벽이 아니라 문이므로 누구나 그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병든 자도, 죄를 지은 흉악한 자도,
누구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천국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갑니다.
2.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
1) 목자도 자기 양을 알고 양도 자기의 목자를 알고(요 10:2~4)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어주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불러낸) 후에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가 각각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나와서 그를 따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며 참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열망을 마음에 품고 있는 자들에게는
영의 눈을 뜨게 해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자신을 돌볼 참 목자의 음성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2) 그의 양을 인도하시는 목자이신 예수님(7~9절)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이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당시 목자들은 돌팔매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돌팔매는 짐승을 쫓기 위해서 사용하지만,
때로는 양들이 위험한 길로 가려 할 때
양의 앞에 돌팔매를 던져 양들이 잘못된 길을 가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당신을 돌보십니다.
그러다 당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우리 앞에 고난이라는 돌팔매를 던져 위험한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십니다.
3. 양과 목자와의 관계
1) 나도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고(요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양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압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과 이런 관계를 맺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신비로운 연합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의 태아처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 ‘야다’에서 나온 말인데,
50년쯤 해로한 부부가 서로 아는 것과 같이 깊은 인간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주님과 이렇게 서로 아는 관계를 이루어
주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받는 자들이 됩니다.
2) 영지주의가 ‘아는 것’과의 차이
초대교회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이단 중에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신령한 지식을 가지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그 신령한 지식을 아는 것에서 오는 것이니
이 지식을 아는 자들은 그 육체로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범하였더라도 그가 아는 지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에서 ‘안다’는 것은 그 지식에 대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았으면
그 깨달음이 곧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안다고 하신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격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므로
영지주의의 ‘안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임을 기억합시다.
● 묵상 : 혹시 영지주의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신앙이 혹시 영지주의와 같은 것인지 각자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성경을 몇 번 읽었으니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든지,
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이 곧 영지주의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예배하고 섬기는 자,
이런 자들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결 론 :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1)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영의 생명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욥처럼 절박하게 주님을 찾고 부르는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신 것은,
부자는 하늘나라를 욥처럼 절박하게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에도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눈이 먼 자였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라고 말씀하신 것 역시
그들이 스스로 본다고 하며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으므로 그들의 죄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잃지 않게 하십시오.
성경에서 말하는‘사망’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잃어버리면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살아있지만 사실상 심판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일에 쫓겨 분주하게 사는 일이든지, 혹은 어딘가에 마음을 빼앗겼든지 무엇이든 간에
주님을 향한 간절함, 절박함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주님
주님이 나를 알고, 나도 주님을 아는
신비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나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아직 고쳐야 것들을
선하고 아름답게 고쳐주옵소서.
결국은 끝까지 이겨서
주님의 평강의 복을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