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사람의 때와 하나님의 때
설교본문 : 요한복음 11:38~57(참고, 요한복음 11:1~37, 욥기 8~10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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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믿어야 보이는 신앙의 세계
제 1 부 : 욥을 공격하는 빌닷
오늘 설교는 욥의 두 번째 친구 빌닷이 욥을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빗대어 욥을 공격하는 빌닷
빌닷은 욥의 절규를 듣고 마음이 몹시 상하여 처음부터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가 외치는 절규를 듣고
빌닷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1) 욥이 당한 재앙을 보고 욥을 악인으로 단정하는 빌닷(욥 8:1~4)
1.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절규하는 소리를 듣고)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언제까지 이런 말을 계속하려는가?
언제까지 광풍(거센 바람) 같은 말을 하려는가?
3. 하나님께서 심판을 잘못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전능하신 이가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옳은 것을 틀렸다고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은 것이 있기에
주께서 마땅히 그 죄로 인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닌가?
빌닷은 단지 욥에게 재앙이 일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욥이 엄청난 죄를 지은 것으로 단정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자신의 이런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욥이 그의 자녀들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번제를 드린 것(1:5)도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욥의 번제가 참된 것이었다면
욥에게 이런 재앙이 내려질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 번제로 해결될 정도의 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 빌닷은 눈에 보이는 한두 가지 사실만으로 욥을 치명적인 범죄인 취급 합니다.
• 빌닷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욥이 드린 번제와 예배도 모두 무시합니다.
2.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네 나중이 심히 창대하리라
1) 빌닷은 하나님께서 먼저 욥을 찾아주시기를 바라지 말고
욥이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욥 8:5)
5. 그러니 이제라도 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한다면(은총을, 자비를 구한다면)
빌닷은 욥이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죄를 고백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의 지금의 현실은 참으로 보잘것없으나
그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가 그랬던 것처럼 빌닷 역시 욥에게 그럴듯한 희망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나 빌닷 모두 욥을 복이라고는 전혀 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범죄인이라 여기고 있으므로 이것 역시 입바른 소리에 불과합니다.
겉으로는 욥이 죄를 회개하고 은총을 빌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네가 아무리 빌고 빌어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복은 조금도 없을 것”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네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절) : 이 말은 욥을 조롱한 말
7. 그러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네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보잘것없을지라도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이라.)
(설명 : 그러나 욥이 죄가 많으므로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조롱의 뜻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일단 뜻이 좋지 않습니까?
시작은 보잘것없더라도 나중이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싫어할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빌닷이 ‘너는 아무리 빌고 빌어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했던
조롱 섞인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3. 조상들의 지혜에서 배우라
1) 조상들의 지혜를 동원하여 욥을 공격하는 빌닷(8~10절)
8. 청컨대(부디) 너는 옛 시대 사람들의 말을 기억하고,
조상들이 터득한 일들을(지혜를) 배우게 되기를 바라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우리는 태어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자와 같아서)
망매하니(아는 것이 없으니)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인생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네.
10. 조상들이 네게 가르쳐 주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선조들이 그 마음에 깨달은 바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빌닷은 욥이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오는 오랜 지혜의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조상들로부터 전해 오는 지혜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는 항상 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는 항상 저주를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욥이 지금 재앙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하니,
조상으로부터 전해오는 전통 지혜를 욥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의인은 복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교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자리는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입니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의 복과 저주는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400년 가까이 노예로 살았던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10년간 쫓겨 다닌 것도 역시 죄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아주 비참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순교는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죽기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악할 때에는 선한 사람이 오히려 시련과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경건’이란 말과 ‘가난’이란 말이 동의어처럼 사용됩니다.
4. 욥을 향한 빌닷의 공격 : 세 가지 비유
빌닷은 욥을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경건한 자로 단정하면서,
욥처럼 저속한 자들은 그 삶이 허망한 것밖에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을
다음 세 가지 비유로 말합니다.
1) 물 없는 곳에서 자라는 왕골과 갈대(욥 8:11~13)
11. “왕골이 진펄(늪)이 아닌 곳에서 어떻게 자라겠으며,
물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갈대가 자라겠는가?
12. 이런 것은(물 없는 곳에서 자란 왕골과 갈대는) 새순이 돋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벨 때가 멀었음에도 다른 풀보다 먼저 시들어 말라 죽고 말지.
13. 하나님을 잊고 사는 자의 길이 다 이와 같고,
저속한(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의 소망도 이와 같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네.
왕골과 갈대는 물이 없으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마른 땅에서는 새순이 돋더라도 베기도 전에 곧 말라버립니다.
빌닷은 욥과 같이 하나님을 잊고 사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저속한 자는
물 없는 곳에 자란 왕골이나 갈대처럼 곧 그 근본이 드러나서말라 죽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2) 거미줄로 만든 집(14~15절)
14. 그런 자가 믿는(바라는) 것은 곧 끊어지고 말 실오라기에 불과하고,
그런 자가 의지하는 것은 거미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네.
15. 그런 자가 기대어 살고 있는 집도 오래 서 있지 못하며,
그가 혹시 집을 굳게 붙잡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고 만다네.
욥과 같이 불경한 자들은 혹시 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마치 거미줄로 만든 집과 같아서 그 집에 기댈 수도 없고,
그가 집을 지키려고 애를 써도 곧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3) 뿌리째 뽑힌 식물(16~19절)
16. 비록 식물이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싱싱한 가지가 무성하게 동산에 뻗으며,
17. 돌무더기 위에까지 그 뿌리가 엉기어서 돌 사이에 뿌리를 내린다고 할지라도
18. 그곳에서 뽑히면(거두어버리면) 그 서 있던 자리마저 모르는체하며 이르기를
‘나도 너를 본 일이 없다’할 것이네.
19. 그러면 그 흙에서는 또 다른 식물이 돋아나겠지.
그런 자가 누리는 희락(기쁨이나 즐거움)이 다 이와 같다네.
빌닷은 세 번째로 정원에서 햇빛과 물을 잘 공급받아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까지 뻗은 싱싱하게 잘 자란 식물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물도 뿌리까지 뽑히고 나면
그 정원에 그 식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자가 아무도 없고,
그 식물이 있던 자리에는 다른 식물이 자란다고 말합니다.
물 없는 곳에서 자란 왕골과 갈대, 거미줄로 만든 집, 뿌리째 뽑힌 식물
이것은 욥이 한때 부유한 자였으나
그 자녀와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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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닷은 욥에게 일어난 현상을 보고
욥을 하나님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주 저속하고 불경건한 자로 규정합니다.
그의 말은 욥을 돕기 위한 말이 아니라,
욥을 더욱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충고입니다.
제 2 부 : 욥의 절규
1. 하나님과 맞설 수 없는 인생
1) 욥의 답답함 : 하나님 앞에 감히 논쟁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욥 9:1~4)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도 네 말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3. 사람이 하나님과 논쟁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천 마디 말씀하실 때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네.
4. 제아무리 머리가 좋고 힘이 강하다고 하여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거슬러 완악하게 행하고도(하나님을 거역하고도)
형통할 자(온전할 자)가 있겠는가?
욥이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엄청난 재앙을 당할 만큼은 아니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럴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만나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따져 묻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령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는 그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천 마디 말씀 하실 때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겠느냐며 한탄합니다.
2) 혹시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불러낼지라도(욥 9:19~20)
19. 강한 쪽은 그분이신데 힘으로 겨룬다고 한들 어떻게 그를 이기겠으며,
재판으로 부친다고 한들 누가 그분을 재판정으로 불러올 수 있겠는가?
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내가 순전할지라도, 내가 죄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는 내 입을 열어 나 스스로 나를 정죄하게 하실 것이고,
내가 죄 있는 자라고 선언하실 것이네.”
욥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법정 소송을 벌이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그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실제로 재판이 벌어져서 하나님께서 그 재판정에 나오셨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욥의 입을 열어
욥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자기 입으로 스스로 말하게 하시고는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선언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령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앞에서 또박또박 말대꾸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 욥은 이렇게 고통만 주지 말고 속 시원하게 죄가 무엇인지 말씀해달라는 것입니다.
2. 재앙보다 더 두려운 것 : 내가 정말 심판 받을 죄인이면 어쩌나!
1) 점점 심해지는 병증 ➠ 이 모습이 정녕 나의 죄를 나타내는 것이란 말인가(욥 9:30~31)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다시 시궁창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인들 나를 좋아하겠나이까?”
욥의 고민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최종적으로 심판을 내리실지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죽음보다도 더한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2) 병증으로 보아 욥이 생각해도 분명히 죄로 인한 재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설령 욥이 앓고 있는 병증이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일지라도
욥이 간절히 회개의 기도를 할 때마다 조금이라도 병의 차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병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회개의 기도를 전혀 듣고 있지 않으시는 증거라고
욥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욥은 아마도 자기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죄가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죄라도 있는 것인가?”
● 묵상 :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죄인이다”하는 판결을 듣는 것,
이것이 두려워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서 영적 긴장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욥의 두려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3. 만일 하나님과 나 사이를 중재할 자가 있다면 나는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을 텐데
1) 욥은 하나님께서 속 시원히 욥의 죄를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욥 9:32)
32. “만일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이시기만 하다면,
내가 그에게 대답하고, 그와 함께 법정에 들어가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으련만,
(설명 :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하다는 말)
그렇다면 이보다 더한 질병이라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과 욥이 함께 재판정에 들어서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 재판정에서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고발합니다.
그러면 욥은 하나님께서 고발하시는 죄에 대해 자기 변론을 합니다.
2) 그러나 누가 나를 위해 하나님께 중재를 해줄 것인가(33~35절)
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자가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자가 없구나.
34. 제발 주께서 나를 치시는 그 막대기로 내게서 거두시고,
하나님의 그 위엄(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나를 더 놀라게 하지 않으신다면 좋으련만,
35. 그리하시면 내가 아무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어디 그런 일이 나에게 있겠는가?
(혹은,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줄 나도 이미 알고 있네).”
그러나 이것은 상상에 불과하다고 욥은 생각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소환할 수 있습니까?
또 하나님을 소환한다고 해도 감히 뉘 앞이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말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욥의 죄를 논하시면
누가 그 말씀에 ‘아니라’고 반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3) 만일 중재할 자가 있다면 나는 아무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누가 하나님과 욥 사이를 중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중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할 자는 없습니다.
모세 시대에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중재하기는 했으나
그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 안에서 그가 사는 동안 잠시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친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4. 너무나도 솔직한 고백에서 느껴지는 당혹감
그러다 욥은 다시 절망과 낙심에 빠진 자들이 하는 처절한 절규를 합니다.
우리도 이런 감정들을 가질 수 있으므로
욥의 고백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사랑의 가면 뒤에서 사람을 잔인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까(욥 10:13~14)
13.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하시고도
(주께서 나를 친히 만드시고 생명과 은혜를 주셨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으셨나이다(속으로는 나를 해칠 생각을 품고 계셨나이다).
주께서 이런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음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보시다가 내가 범죄하면(죄를 짓기라도 하면)
주께서는 용서해 주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계셨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재앙은 내리시면서
그 재앙이 왜 욥에게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도 말씀해 주지 않으시냐고 기도하다가 점점 지쳐갑니다.
그러다 ‘본래 이것이 본래 하나님의 모습이셨다’,
‘하나님은 본래 사랑의 하나님의 아니셨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셨으나
실상은 사람들을 아주 잔인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셨다’는
다소 도발적인 고백을 합니다.
겉으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말씀하시지만,
실상은 사람들이 재앙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냐고 질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만큼 의로운 자였던 욥이
이런 정도의 도발적인 언사를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갖습니다.
2) 어찌하여 군대가 번갈아 공격하듯 나를 공격하시나이까(욥 10:15~17)
15. 내가 악하면(내가 죄를 지었다면) 내가 화를(재앙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오며,
그러나 내가 의로울지라도(내가 죄가 없을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겠나이다.
주께서 이 부끄러움이 가득한 환난을 지긋지긋하도록 내게 내리시는 것을
내가 보고 있기 때문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들면(내 일이 조금이라도 잘 되기라도 하면), 주께서 사나운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고(나를 덮치시고), 기적과 권능을 나타내 보이시면서까지
내게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내게 상처를 주려고 하시나이다).
17. 주께서 자주자주(번갈아서) 나를 대적하는(내게 불리한) 증인들을 세우시고,
나를 향한 노여움을 키우시며,
군대가 번갈아서 공격하는 것처럼 나를 몰아치시나이다.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내리셨다고 믿고 있는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외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번갈아서 나에게 불리한 증인들을 세우시고,
나를 향한 노여움을 키우시시나이까?”,
“어찌하여 군대가 번갈아서 공격하는 것처럼 나를 몰아치시나이까?”
욥에게 불리한 증인들을 번갈아 세우신다는 것은
친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닥친 재앙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잔인하게 공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는 욥에게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3) 내가 머리를 들면 주께서 사나운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나이다.
욥이 머리를 들면
주께서 사나운 사자처럼 욥을 사냥하신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욥의 일이 조금이라도 잘 되는 기미가 보일라치면
하나님께서 곧 그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욥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욥에게 재앙을 내리시려 작정을 하시고는
욥이 어떤 죄를 짓나 살피셨다가 죄를 지으니 “옳지 걸려들었구나” 하시고는
욥에게 미리 준비하신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처럼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재앙이나 내리는 흉악한 괴물처럼 고백하고 있다는 것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4) 내가 의인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움이 가득한 환난으로 머리를 들 수 없나이다
온몸이 구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인 채 기와로 긁고 있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욥이
이제 사람들을 향하여 얼굴도 들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욥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은
고난과 환난 중에도 항상 감사만 할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로서
욥이 이처럼 감사라고는 조금도 없고,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이 가득 담긴 절규를 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5) 이렇게 하실 작정이셨다면 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살아서 나오게 하셨나이까(18절)
18.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실 작정이셨다면,
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셨나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차라리 내가 모태에서 죽어서 나왔더라면)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욥은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재앙이나 내리실 작정이셨다면
처음 그가 모태에서 나올 때 살려두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습니다.
욥에게 은혜를 베푸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처음부터 은혜를 주시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죽음의 침묵 속에 있을지언정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천국과 지옥을 모르니
욥은 죽음을 깊은 어두움의 침묵으로만 여기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욥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며
계속해서 자신을 죽여 달라는 기도만 하고 있는 것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6)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잠시만이라도 평안히 쉴 수 있게 하옵소서(20~22절)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이제 내가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즉 제발 얼마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두옵소서.
잠시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옵소서.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그 땅은 흑암처럼 캄캄하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서
빛조차도 어둠과 같은 그런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해 주옵소서.”
욥은 다른 사람 같으면
이 병으로 벌써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병으로 벌써 몇 달이나 살아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고통을 받고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욥은
자기를 빨리 죽여주시되,
죽기 전에 아주 잠시만이라도 평안히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욥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주 잠시 동안의 평안조차 주시지 않을 만큼
아주 흉악한 분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7) 차라리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옵소서
욥은 자신을 도와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게 내버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용서해 주실 생각도 없으시면서
그에게 생명은 왜 주셔서 고통만 안겨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욥을 향한 은혜를 중단하시면 자신이 곧바로 죽게 될 터이니
제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셔서 죽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치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환자에게서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내면 곧 죽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시는 은혜를 중단하시면
욥은 지금 당장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은혜도 싫고 사랑도 싫으니
제발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욥이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싫고
오직 죽음만 구하고 있다는 것에 아주 큰 당혹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묵상 :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간직만 하고 있다가
절망을 키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친근한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가장 친근한 친구로 여긴다면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시는
가슴 따뜻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제 3 부 :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며 양의 목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지금까지 공생애 3년 동안 내내 말씀하셨던
그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한 마지막 일을 하려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한 그 첫 과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
바로 이 일이 예수님이 십자가로 향하는 그 첫 관문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 말고도 많은 사람을 살리셨는데,
왜 나사로를 살리신 이 일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결정적인 일이 되었을까요?
1.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
1)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예수께 긴급하게 전함(요 11:1~3)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나사로의 가족은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친분을 가진 사이였습니다.
그런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던 나사로의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즉시 예수께 사람을 보내 상황의 긴급함을 알렸습니다.
2) 그러나 예수께서 이틀을 더 지체하심(4~6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고
마리아와 마르다는 평소 예수님과 그들과의 관계로 보아
예수께서 말씀을 듣자마자 즉시 한걸음에 달려오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예수님은
오빠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도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십니다.
그렇게 지체하는 사이에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가 죽고 맙니다.
2. 예수님의 시간
1)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신 이유 : 가장 극적인 시간을 위하여
예수께서 주목하시는 시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극대화되는 시간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어야 구원을 받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까지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법을 훈련하십시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봅니다.
우리를 시련과 고난에 처하게 하는 일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그거 그 고통의 현장에서 빠져나오기만을 바랍니다.
나사로의 가족은 나사로의 병이 빨리 낫기만을 바라지만
주님은 나사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가장 명확하게 나타날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 일을 위하여 주님은 나사로가 죽어
소생이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 묵상 : 주님의 시간이 나의 시간보다 더 확실한 시간임을 믿으십시오.
주님의 시간이 나의 시간보다 더 확실한 시간이고,
주님의 방법이 나의 방법보다 훨씬 더 좋은 열매를 맺는 방법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알 수 없는 고난이 나에게 다가올지라도 주님의 뜻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3. 마리아와 마르다를 찾은 문상객들(요 11:17~19)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15 스타디온, 약 3km)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서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가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후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신 후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 나사로의 부활 :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 ●
1) 십자가로 향하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
나사로의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로 향하는 분수령이 된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나사로의 삼 남매가 그 지역에 꽤 알려진 사람들이었고,
그곳에 예루살렘에서 불과 3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아주 가까운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문상을 온 상황에서
예수께서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사람을 살려내셨으니
그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삽시간에 퍼졌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 중에 일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며 찬양하고,
반대편에서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구체적으로 꾸미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2) 사랑하는 자들의 아픔을 보며 결심하시는 예수님(요 11:28~35)
28. 이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께서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결심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로 결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만민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하나님의 시간의 의미를 알게 하는 아래 괄호 부분을 참조해 주십시오.
(예레미야 18:1~12 큐티의 묵상포인트 3번 ‘하나님의 심판은 운명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와
요한복음 12:20~36 큐티 묵상포인트 1번 중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참조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공생애 활동 3년을 지내신 후 마지막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만,
이 기간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위의 수난예고(요한복음 12장 )에서 살펴 보았듯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만한 환경을 기다리셨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몰라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 주님의 복음을 전할 자들도 있어야 하니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속이라도 다 내보이실 정도로 주님이 누구이신지 밝히였습니다.
이 조건을 다 이루신 때가 나사로 사건이 있을 무렵이었고,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 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고난의 현장으로 곧바로 들어가셨습니다.
4. 나사로야 나오너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하시니(요 11:39~40)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41~42절)
41.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아버지께서는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를 드리신 다음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부르시니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이심을 보이신 예수님
그동안 예수께서 많은 기적을 보이셨으나
유대인의 대부분이 아직도 예수님을
그저 능력이 많은 선지자쯤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는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요,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로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알고 있으니 결정적인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지나
무덤 밖에서도 그 시체 썩은 냄새가 나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간혹 죽은 줄 알았던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 같은 상황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처럼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 자가 다시 살아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2) 사망의 권세를 향하여 호령하시는 예수님(43절)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부르시니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아주 큰 소리로 호령하며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호령 소리는
한편으로는 나사로를 깨우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망의 권세를 향하여 호령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나사로를 죽게 만든 사망을 향하여
호령하며 나사로를 깨우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바다도 잔잔케 하시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신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향하여도 호령하십니다.
그러자 이미 그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까지 나던 자가 살아서 걸어 나옵니다.
3) 죽은 자를 살리실 부활의 능력을 보이신 예수님(44절)
44. 죽은 자가 손발이 베로 묶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던 자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5.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1) 이 기적을 보고 주님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확실히 믿은 자(요 11:45)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2) 기적을 보고도 믿기를 거부한 자들(46~53절)
46. 그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고하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러자 그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자기 생각으로 말한 것이) 아니요,
그가 그 해(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날, 이 기적을 본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음에 반감이 커져서
곧바로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따라 유대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됩니다.
그들의 이 보고로 인하여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 묵상 : 믿음이 있어야 영적 실체가 보입니다.
죽은 지 4일이나 지난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믿음을 갖지 않고
오히려 반감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면 행할수록 반감이 더욱 커집니다.
그들 마음속에 이미 다른 것이 가득 채워져 있으므로
예수께서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도 믿음은커녕 감동조차 받지 않습니다.
그저 미움만 커질 뿐입니다.
출애굽 때에 바로왕도 그랬고,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 가룟 유다도 그랬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습니까?
세상 것이 채워지기 전에 먼저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채우십시오.
결 론 :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믿어야 보이는 신앙의 세계.
주님
선악을 바로 분별할 수 있도록
참된 지혜를 주옵소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주님 앞에 나의 모습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통해 이루려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