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고엘의 사랑
설교본문 : 요한복음 13:31~38, 룻기 1:1~2:16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7월 28일
====================
서 론 :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믿어야 보이는 신앙의 세계
------------------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이 재난을 당한 것만 보고
욥을 큰 죄를 저지른 흉악범으로 몰아가며 공격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의 공격의 근거는 욥이 재앙을 당했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죄인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욥의 친구들의 인과응보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씀을 보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룻기에서 볼 ‘기업 무를 자, 고엘’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증거하는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역시 그러합니다.
기업 무를 자와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고난받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는 헌신 된 자들입니다.
제 1 부 : 나오미와 룻의 만남
1. 룻기 소개 : 다윗의 증조할머니에 관한 이야기
룻기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의 증조모 룻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룻기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살던 한 가족이
흉년을 당하여 모압으로 피신하였다가 그곳에서 세 남자가 모두 죽고
과부들은 몹시 가난해진 상태가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나오미는 친족이 있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두 며느리에게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때 두 며느리 중 하나인 룻이 늙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두 과부는 보리와 밀의 봄 추수가 시작될 때쯤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한 자비로운 농부가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줍니다.
룻은 얼마 뒤에 이 사람이 죽은 남편의 친족인 보아스인 것을 알게 됩니다.
룻은 그에게 청혼하고, 보아스가 이를 허락하여 둘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이 두 사람이 낳은 아들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입니다.
• 인간 왕을 거부한 도전적이고 저항의 책인 룻기
(이 부분은 룻기 이해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나
오늘 설교는 ‘기업 무를 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니
이 부분은 해당 큐티의 묵상포인트를 참조해 주십시오.)
2. 모압 땅으로 이주한 엘리멜렉 가족의 비극(룻 1:1~5)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그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던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가서 잠시 살게 되었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더라.
그들이 모압 땅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나오미의 두 아들은 모두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또 한 여자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그곳에 거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마저 다 죽었고,
나오미만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채 홀로 남았더라.
1) 모압 땅으로 이주한 엘리멜렉 가족(1~2절)
엘리멜렉은 모압 땅으로 피신하여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이 죽고 난 후에도 그의 두 아들과 나오미는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모압 여인을 두 아들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두 아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로 죽고 맙니다.
2) 이렇게 나오미가 털끝만큼의 희망도 없는 완전한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룻기의 출발점입니다.
두 아들이 모두 자식 없이 죽었으므로 이제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가진 재물도 없이 덩그러니 세 과부만 남았으니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절대 절망의 상태에서
어떻게 나오미가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가 되는지,
그리고 이 가문이 장차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가장 복된 가문이 되는지를 증거하는 책이 바로 룻기입니다.
3.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 룻
1)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한 나오미(1:6~7)
6. 그러던 어느 날 모압 지방에 살던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그 땅 백성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셨다는(그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모압 땅)을 떠나고 두 며느리도 나오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그때 그의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어 먹을 것이 많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나오미는 고향에 가면 이삭이라도 주어 연명을 할 수는 있겠다 싶은 생각에
모압을 더나 고향으로 가기로 합니다.
2) 두 며느리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한 나오미(8~13절)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 남편들과 나에게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허락하셔서 너희가 다시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원하노라”하고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입을 맞추자 그들이 소리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11. 그러나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돌아서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맞이하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고 할지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 아이들이 자라기를 가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니
고향으로 가기 전 나오미는 그의 집안에 드리워진 고통의 삶을 자기 홀로 담당하기로 작정하고
두 며느리에게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셨으므로 자신에게 고통이 온 것인데,
며느리들까지 그 고통을 받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3) 친정으로 돌아간 오르바와 나오미를 붙좇은 룻(14절)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며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고,
룻은 그를(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더라.
이때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오르바의 선택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행복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시어머니까지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는데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의 고통에 함께 하기로 합니다.
4. 복의 시작인 룻의 고백
나오미가 룻에게 “너의 동서 오르바처럼
너도 너의 백성과 너의 신에게로 돌아가라”하고 재차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룻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나오미에게 자기의 결심을 말합니다.
16~17절에 나오는 룻의 이 고백은
이방인인 모압 여인 룻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로열패밀리인
다윗 왕의 가문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1)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15~17절)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아라, 네 동서는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갔으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➀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 빠진 나오미
룻이 나오미에게 이 고백을 했을 때 나오미의 상태는 완전한 절망의 상태였습니다.
형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낳은 첫째 아들이
형의 아들이 되어 그 대를 이어주는 계대결혼 제도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나오미의 두 아들이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이미 죽었고,
갓난아이도 없는 상태에서 나오미의 달거리는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오미의 현재 상태가 단 1%의 가능성도 없는
완전한 절망의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➁ 이 절망의 자리에 룻이 함께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이 말의 시제는 미완료형으로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앞으로 계속해서 나오미와 함께하겠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늙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아픔을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2)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이렇게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하기 위해
룻은 자기의 민족 모압을 떠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자기의 민족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에게 몸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3)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어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이
바로 자기의 하나님이 되실 것임을 고백합니다.
룻이 이스라엘의 로열패밀리가 된 것은 바로 이 고백 때문입니다.
● 묵상 : 룻기는 효도를 위한 책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책입니다.
룻의 이 고백이 시어머니를 향한 감동적인 고백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가정주일 설교 본문으로 종종 사용됩니다만,
룻기는 효도를 강조하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룻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지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룻이 했던 고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 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제 2 부 : 기업 무를 자(고엘) 룻과 보아스
1.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움
1) 룻이 나오미에게 밭에 나가도록 허락을 구함(룻 2:2)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나가게 하소서.
혹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친절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내가 그를 따라서 떨어진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잘 갔다 오너라”하매
하루는 룻이 나오미에게 밭에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합니다.
혹시 뉘게 은혜를 입으면(친절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떨어진 이삭이라도 줍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추수하는 자들이
이삭을 적당히 떨어뜨려 놓도록 하였는데, 혹시 덕이 있는 친절한 사람을 만난다면
떨어진 이삭을 주워 올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룻은 아무 대책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그저 뭐라도 해야 하니 이렇게 무작정 나갔습니다.
2)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가다(3절)
3. 룻이 가서 베는 자(보리를 베는 일꾼들, 추수하는 자)를 따라다니며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공교롭게도) 룻이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더라.
나오미의 허락을 받은 룻은 그 근처에 있는 밭으로 갔는데,
우연히도 룻이 이삭을 주운 그 밭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돕기 위해 무작정 간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부터 룻기는
기업 무를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를 증거합니다.
2. 룻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 하나님의 복의 법칙
룻이 우연히 밭으로 나갔고,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진행된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룻과 나오미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룻의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복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1) 룻의 믿음 : 믿음으로 룻이 밭으로 나아감(2절)
(2절 성경구절 위에)
본문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복의 법칙 첫 번째는
룻이 믿음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2절),
룻은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덕이 있는 친절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밭으로 나갑니다.
2) 하나님의 섭리 : 하나님께서 룻을 보아스의 집으로 인도하심(3절)
(3절 성경구절 위에)
룻이 믿음으로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그를 보아스의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룻은 그저 막막한 심정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막연하게 가다 발길 닿은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3) 여호와 이레 :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
막막한 심정으로 갔으나
그곳에 하나님께서 먼저 가셔서 룻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룻을 보아스의 집으로 인도하셨고,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편안하게 이삭을 줍도록 하셨습니다.
4) 열심히 일하는 룻의 모습을 보아스가 보게 하신 하나님(5~7절)
5. 보아스가 추수하는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저 젊은 여자는 뉘 집의 소녀이냐?”
6. 추수하는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저 여자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저 소녀가 말하기를 ‘나로 추수하는 일꾼들의 뒤를 따라가며
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주소서’하더니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것 외에는 저렇게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룻은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삭을 하나라도 더 주워야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룻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일꾼들이 보았고,
그때 마침 베들레헴에서 돌아온 보아스가 열심히 일하는 룻의 모습을 보자
일꾼들이 룻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그에게 알려줍니다.
3. 룻에 대한 보아스의 친절한 배려
1)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보아스(8절)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를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우리 집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함께 있으라.
보아스는 젊은 일꾼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고 하면서
룻에게 다른 사람의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마음 놓고 계속 이삭을 주우라고 말합니다.
2) 일꾼들이 길어 온 물을 마음껏 마시도록 한 보아스(9~10절)
9. 우리 집 일꾼들이 베는(추수하는) 밭을 잘 보고 그 뒤를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그 젊은 일꾼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주저하지 말고 물 항아리 있는 곳으로 가서
일꾼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실지니라.”
10. 이에 룻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목이 마르면 언제든지 물 항아리 있는 곳으로 가서
일꾼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일꾼들이 길어 온 물을 마음껏 마시게 한 것은
엄청난 특권을 준 것입니다.
이에 룻은 얼굴이 땅에 닿을 정도로 엎드려 절하며 감사를 표현합니다.
3) 식사 때에 룻을 불러 함께 식사하게 하는 보아스(14절)
14. 식사할 때가 되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어 먹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옆에 앉으니
보아스가 볶은 곡식을 내주었고,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식사 시간이 되자 보아스는 룻을 불러 떡을 주며 초에 찍어 먹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초는 포도 식초에 몇 가지를 섞어
떡을 먹을 때 찍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소스를 가리킵니다.
룻이 일꾼들 곁에 앉자 보아스는 룻에게 볶은 곡식을 내어 줍니다.
4) 곡식 단에서 조금씩 뽑아 흘려 룻이 이삭을 줍게 하라 명하는 보아스(15~16절)
15. 룻이 다시 이삭을 주우려고 일어나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자기의 젊은 일꾼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저 여인이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저 여인을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흘려서
저 여인이 주워갈 수 있게 하고, 책망하지 말라” 하니라.
식사를 한 후에 룻이 이삭을 주우려 일어나자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흘려서
룻이 이삭을 더 많이 주울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하고,
룻이 이삭을 많이 줍더라도 책망하지 말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합니다.
3. 기업 무를 자(고엘)
‘기업 무를 자’의 기업은 오늘날 대기업, 중소기업을 말하는 ‘기업(企業)’이 아니라,
토지나 집과 같이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을 뜻하는 ‘기업(基業)’입니다.
그 집안의 삶의 기반이 되는 기초적인 재산을 잃어버리면 삶의 희망이 사라집니다.
이때 그의 가까운 친척 중에서 그가 잃어버린 그 기초적인 산업인
기업(基業)을 회복시켜 주는 자를 ‘기업 무를 자, 고엘’이라고 합니다.
기업 무를 자인 고엘 책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빚을 대신 갚아줌
가난한 사람이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을 때 가까운 친척이
그 빚을 갚음으로써 그를 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어야 했습니다(레 25:47-55).
이때 친척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자를 ‘고엘’이라고 합니다.
2) 남에게 넘어간 토지를 되돌려 받게 함
가난한 사람이 빚 때문에 자신의 토지를 팔았을 때
가까운 친척이 일정 기간 후에 그 토지의 값을 대신 치름으로써
다시 그 토지를 돌려받게 할 수 있었습니다(레25:23-28).
이때 친척의 빚을 대신 갚아서 토지를 돌려받게 한 자를 ‘고엘’이라고 합니다.
3) 죄의 값을 대신 갚아줌
죄를 지었으나 가난하여 그 죄의 값을 지불 할 능력이 없을 때
그의 가까운 친족이 그 죗값을 대신 갚을 의무를 집니다(민5:8).
이때 친척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는 자를 ‘고엘’이라고 합니다.
4) 대신 원수를 갚아주기도 하고
친족 중 한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을 경우
살해당한 자의 가까운 친척이 그를 위하여 피의 보수자가 됩니다(민35:19).
이때 살해당한 자의 친척이 대신 피의 보복을 하는 자를 ‘고엘’이라고 합니다.
5) 고엘 제도의 핵심 : 계대결혼제도
고엘의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는 일입니다.
형제가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
가까운 형제 순으로 남겨진 미망인과 결혼하여 죽은 형제의 기업을 이을 자를
낳게 해주는 계대결혼(繼代結婚) 제도가 고엘 제도의 핵심입니다(신 25:1~10).
이때 그 여인이 낳은 첫째 아들은 죽은 남편의 아들이 됩니다.
● 묵상 :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고엘과 고엘과의 만남입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고엘과 고엘과의 만납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아픔과 함께 한 룻은 나오미의 고엘이었고,
보아스는 그런 자비의 마음을 가진 룻의 고엘이었습니다.
룻이 며느리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시어머니를 향한 고엘의 사명을 잘 감당하자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고엘인 보아스를 룻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고엘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던 사람들끼리의 만남으로
복에 복이 더해져서 인류 역사상 가장 복이 있는 위대한 명가(名家)를 만들었습니다.
제 3 부 :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고엘의 사랑)
• 예수님은 고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의 아픔을 치료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예수께서 고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 갚아주기 위하여 고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1.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1)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요 12:11~16)
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자기들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예수님을 믿음이러라.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시 118:25,26)라고 하더라.
14. 예수께서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그 위에 올라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슥 9:9)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깨닫게 되었더라).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이때는 나사로의 가족이 예수께 잔치를 베풀어주신 바로 그 이튿날입니다(11절).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위해 들어가시지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에는 이 땅과 하늘의 왕의 자격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을 지옥의 멸망으로 미혹하려는 저 악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승리의 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십니다.
2) 그러나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
그러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하신 모습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축하하며 주께 충성하리라는 축하와 충성의 표지가
고작 낡은 겉옷(마 21:8)과 나뭇가지(12절)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개선장군처럼 늠름한 흰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3) 그러나 이 모습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보기에 한없이 초라하게만 보이는 예수님이
실상은 이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 하늘과 땅의 왕이십니다.
오합지졸로 보이는 그의 백성들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고 관장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처럼 독재와 강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과 겸손함으로 다스리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2. 이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1)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탄의 세력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서 영광의 가장 절정의 순간은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순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세상 임금, 곧 사탄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상 사람들을 향한 모든 권세와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사탄이 그 힘을 잃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달되는 곳에 사탄은 그 힘을 잃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제 곧 이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어두움의 권세로 이 세상을 움켜쥐고 있는 저 사탄의 세력을
주께서 주신 복음의 말씀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까지
세상 임금(사탄)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쫓아 내보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한 복음 증거의 사역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 사역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 묵상 :
누군가 우리가 전한 복음의 말씀으로 주님을 믿는 고백을 하고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면
그것이 바로 그를 지배하고 있던 세상의 임금인 사탄과 어두움을
그에게서 내쫓은 일이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과 그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됩시다.
3. 빛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1)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요 12:25)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자기의 생명을 영생하도록 지키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사탄의 힘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으므로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이 결정됩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그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절)
세상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주님을 섬기는 일을 붙잡기 위해 세상일을 손해 보는 것을 각오하는 자들은
세상에서는 잠시 어려움을 당하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가 됩니다.
2) 빛이 있을 동안에 빛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35절)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 빛이 있을 동안이란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허락되어 있는 동안’을 뜻합니다.
사람이 육신의 생명을 다하여 죽거나,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면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믿음을 떠나 어둠 가운데 있는 자는
오직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이든지, 혹은 주께서 재림하여 오시기 전에 주님을 믿어
그 빛 가운데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둠에 붙잡히지 않는 자가 됩니다.
3)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넣어 줌(12:6, 13:2, 26~27)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이렇게 낭비하였느냐?” 하니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넣었더니
--------------------------------------------------------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 사람이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그가 빵 한 조각을 받자(그가 빵 조각을 한 입 먹은 후에)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는 해당 큐티를 참조해주십시오.)
4) 어둠에 다니는 자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35절)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빛이신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은 자들은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빛도 아니고 어두움도 아닌 그 중간 지역이란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곧 어둠입니다.
어둠에 속한 자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자기들이 영원토록 얼마나 고통을 당하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일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그렇게도 마음이 태평한 것입니다.
● 묵상 : 빛이 있을 동안에 그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빛의 아들이 되리라(36절)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직 닫히지 않았을 때
서둘러 빛이신 주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십시오.
이제 곧 주께서 오시면 그 문이 닫힙니다.
4.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예수님
1)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 13: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유월절 전에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여기에서 ‘때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 만민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는데,
그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2) 자기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➀ 우리의 지상의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첫째는 우리의 지상의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홀로 걸어갈 때
그때까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충분하게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충분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크기에 혹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
주께서 우리의 앞길에 장애물을 놓기도 합니다.
그러다 우리가 바른길을 가기에 힘쓰는 자가 되면
크게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더욱 힘써 도우십니다.
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서 말한 새 계명이란
이전의 계명을 완성하는 새롭고도 신선한 명령을 뜻합니다
아담 이래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새로운 명령입니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것이 곧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계명이 결국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사랑하되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희생을 하신 것처럼
우리도 피차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 내가 손해를 보고,
저 사람이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 내가 고난받는 것을 감당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2~3세기에 위대한 교부이며 신학자였던 터틀리안은
2세기 말에 이교도들이 한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는 모습을!”
터틀리안의 글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서로에게 준 것은 물론,
서로를 위해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에게 주님의 성령이 들어오셔서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도 주님처럼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 이런 사랑은 훈련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주님처럼 변화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의 성령 받기를 구하십시오.
성령을 구하되 성령의 능력을 구하지 말고
성령의 사랑의 성품을 갖게 되기를 구하십시오.
결 론 :
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기업 무를 자(고엘)의 사랑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마서 13:8)
바울은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주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은 고엘의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하는 고엘의 사랑, 이런 사랑을 하는 자는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이사야 42:1~17 큐티 마지막 부록 참조)
고엘의 사랑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이 나옵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은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민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이 거부했습니다.
둘째는 이사야를 포함한 선지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 민민을 구원하는 일을 거부하자 하나님께서 명하신
믿음과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라고 촉구한 자들이 예언자, 선지자들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의 간절한 호소와 경고도 듣지 않고 끝내 거부하자
예수께서 친히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기 전 마지막 때에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로 버림받게 됩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로
세상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묵상 : 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 이것이 고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엘의 사랑이나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감당한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은 예수께서 감당하셨고,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 일로 그 책임을 감당합니다.
나는 이 일로, 저 사람은 저 일로 그 책임을 각자 감당합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달란트)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께 간구하십시오.
주님
날마다 주께 발을 내어놓아
세상에서 묻은 죄의 때를 벗기게 하옵소서.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욕심, 미움, 탐욕, 갈등 들을 처리하여 주셔서
마귀가 어떤 생각을 넣어 주어도
그것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도 룻과 보아스처럼
주께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