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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10월 13일; 행 6:1~7, 7:54~60)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4.10.14|조회수46 목록 댓글 0

설교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

설교본문 : 사도행전 6:1~7, 7:54~60(참고, 시편 53편)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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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바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먼저 시편 53편을 통해 교회 안의 무신론자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이어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스데반 집사와,

    그 믿음의 의인을 죽이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라 자처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사도행전 6~7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 교회 안의 무신론자의 위험(시편 53)

 

    시편 53편에서 다윗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으므로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방인과 같이 되었는데,

    정작 자기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 중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주 이상하게 여기며 이 시를 노래합니다.

 

    오늘은 시편 53편에서

    다윗이 경고하고 있는 교회 안의 무신론자들에 대한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두 가지 무신론자

 

 1) 교회 밖의 무신론자 : 주님을 믿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이방인)

 

    시편 53편에서 다윗이 지적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 중에서 제일 먼저 살펴볼 자들은

    지식으로나 마음으로나 전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지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지적 무신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전혀 믿지 않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심판의 말씀을 하신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마음에 찔림을 받지도 않습니다.

 

    자기들이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그 죄의 일로 마음에 번민이나 갈등 역시 전혀 하지 않습니다.

    혹시 번민을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명예가 실추될까 염려할 때뿐입니다.

 

 2) 교회 안의 무신론자 :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53:1)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러나 시편 53편에서 다윗이 지적하는 자는

    신앙생활은 하는데 그 마음에 하나님은 없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고 있고 그 입으로도 주님을 믿고 있다고 고백도 하는데,

    그가 하는 짓을 보면 교회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무신론자(실천적 무신론자)의 전형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예배와 봉사는 물론 성경 공부 모임이나 기도 모임까지

       빠짐없이 참여하는 사람 중에도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고상한 취미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새로운 학문을 깨우칠 때 기쁨을 얻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 벅찬 기쁨을 느끼지만,

       그저 그것뿐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일은 일이고 신앙은 신앙입니다. 일과 신앙이 완전히 별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든지, 자기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그저 일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고,

       신앙은 좋은 음악을 들을 때처럼 자신에게 고상한 품격을 주니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무신론자입니다.

 

    ➁ 그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그의 일에서뿐 아니라 그가 바라고 계획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앞으로의 꿈과 계획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는 하지만 땅의 것을 구할 뿐입니다.

 

    ➂ 그가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처음부터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으므로

       그가 신앙에 대한 갈등이나 죄책감,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나 슬픔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이러다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는 끝났으니,

       더 이상 자기의 사생활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투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람이 등산이나 달리기와 같이 취미활동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 아쉬울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취미활동 하듯 하는 사람들,

       죄를 범했을 때도 그저 조금 아쉬울 뿐인 사람들,

       신앙과 생활을 별개의 일로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 역시 무신론자입니다.

 

 

2. 교회 안의 무신론자의 위험 : 자기가 그리스도인인 줄 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적어도 머리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적 무신론자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아주 많은 사람이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회개 없는 은혜를 원합니다.

    회개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갈등과 번민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냥 은혜받은 감동만 받기를 원합니다.

    소위 종교적 감상주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1)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 없도다(시 53:1)

 

            (1절 성경구절 위에)

 

    일과 신앙을 별개로 여기고 있으니 죄책감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그저 고상한 감상에 젖기 위해 하는 것이었으므로

    공연히 마음 불편하게 하는 회개나 뉘우침 따위는 하지 않기로 합니다.

 

    이런 자들은 진심으로 애통하며 회개한 적이 없으니 죄를 그냥 갖고 살아갑니다.

    죄를 그냥 갖고 있으니 믿음 없는 자와 똑같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형식은 갖고 있으니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런 부패한 신앙인의 위험입니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2)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2절)

 

            2.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시며

               지각이 있는 (지혜로운)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신앙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찾는다고 할지라도 자기 개인의 일을 위해서만 찾습니다.

    질병이나 돈이나 직장이나 가정의 일과 같은 것을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주시는데,

    그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인 하나님이 없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행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하니

    그 능력이 많으신 분께 이 땅의 것을 달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많지만, 그에게는 하나님도 천국도 없습니다.

 

 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3절)

 

            3. 각기 물러가(제각기 등을 돌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모두 하나같이 썩었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세상에서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죄 가운데 살더라도

    신앙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후회나 죄책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거룩한 마음을 갖고,

    교회 밖을 나가는 순간 더러운 마음에 가득한 상태가 됩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참으로 편리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회개와 갈등이 부담감이 없으니 참으로 편리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된 하나같이 썩은 자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너희가 무지하여 그런 못된 짓을 하는 것이냐(4절)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하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나 깨달으랴, 이 무식한 자들아!

    그들이 떡 먹듯이 죄를 범하면서도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도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거룩한 감정을 얻기만을 바라는 자들,

    천국에는 가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세상을 사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은혜로운 자라는 평가를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무식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결국 믿지 않는 자와 똑같이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의인의 피난처가 되시는 여호와

 

 1) 너를 대하여 진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시 53:5)

 

            5.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두려워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두려워 떨 것이니),

               너를 대하여 진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고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들을 대하여 진을 치고 그들을 핍박하며 공격한 악인의 뼈를 흩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참되게 섬기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악인들에게 짓눌려 괴로움을 당하는 그들의 가련한 처지를 주께서 살피십니다.

 

    지금은 이들이 세상에서 힘도 없는 나약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실 것입니다.

 

 2)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가 누구인고(6절)

 

            6.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온이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천국의 생명을 내리십니다.

    바로 그 참된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옵니다.

 

 3)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십니다.

    여기에서 ‘포로’는 전쟁에서의 포로가 아니라

    세상의 악한 자들로부터 억압과 핍박을 받는 고난의 자리를 가리키거나,

    혹은 죄를 벗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 가련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죄를 범하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자들은 악인이지만,

    똑같이 죄를 범했더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통스러워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포로 되어 억압된 자리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4)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그렇게 죄를 고통스러워하고 애통하며 부르짖는 중에

    주께서 그들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주께 용서받은 자가 느끼는 참된 기쁨입니다.

    단지 육체의 욕망만 만족시키는 기쁨이 아니라

    영혼까지 만족하게 하는 깊고 충만한 기쁨입니다.

 

묵상 :

 

    그러나 이런 충만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죄를 고통스러워하며 애통해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우리는 죽음 같은 번민과 근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픔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갈등이라는 광야를 지난 후에 얻게 되는 참된 기쁨을 생각하고 참고 견디십시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주께 맡기십시오.

    주께서 나를 포로 된 곳에서 건지십니다.

 

 

2 : 일곱 집사의 선출(사도행전 6)

 

1. 성장의 후유증 : 갈등과 원망이 일어나다

 

  • 채찍으로 맞고 강제 투옥이 되는 상황에서도 제자의 수가 더욱 많이 늘어났습니다(행 6:1)

 

            1. 그때에 제자(성도)들의 수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헬라말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소홀이 여김을 받게 되므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니

 

    고난 중에도 사도들이 힘써 복음을 전하자

    주를 믿는 자의 수가 더욱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자

    교회 안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헬라말을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매일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게 되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원망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1) 헬라파 유대인

 

    외국에서 사는 유대인 교포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나이가 많은 디아스포라(교포) 유대인들이

    인생 말년에 성전 근처에서 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의 대부분은 남편이 먼저 죽어 과부가 되어

    생계에 도움을 받을 길이 거의 없는 가난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교회의 구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초대교회의 구제(1절)

 

            (1절 성경구절 위에)

 

    초대교회에는 광주리 기금(Kuppah)과 쟁반기금(Tamhui)의

    두 가지 구제가 있었습니다.

 

    광주리 기금은 매주 금요일 아침에 돈이나 물품을 거두어서

    일주일의 분량을 분배하는 것이고,

    쟁반기금은 그날 먹을 양식을 그날 분배하는 구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2끼씩을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구제는 그들의 관습을 따라 하루 두 끼를 기준으로 제공됩니다.

 

 3) 헬라파 유대인들의 원망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연스럽게 히브리어(아람어)로 드리는 예배와,

    헬라어로 드리는 예배로 나뉘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나눠지게 되었는데,

    헬라말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구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불평과 원망하는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났습니다.

 

 4) 일곱 집사의 선출(2~3절)

 

            2)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제쳐두고

               공궤(음식 분배하는 일, 혹은 재정 출납하는 일)에만 힘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그러면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성도들이 너무 많아져서 자신들만으로는

    이 일을 원활하게 행할 수 없다고 여기고,

    성도들 중에 일곱 명의 집사를 택하여 그들에게 구제의 일을 맡기고

    자기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합니다.

 

 

2. 기도와 말씀에 더욱 힘쓰기 위해(6:3~4)

 

 1) 일곱 집사를 뽑은 이유 :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그러면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말씀 전하는 일에 힘쓰리라.”

 

    교회에 대한 가장 흔한 착각 중의 하나가

    교회는 합리적이고 조직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론에 대한 근거로 본문에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뽑은 것을 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뽑은 것은

    교회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조직화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를 뽑았노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궤의 일이 결코 예배와 말씀 사역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곱 집사를 뽑아 교회가 보다 조직화 되었고,

    더 원활하게 움직이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표를 처음부터 합리성, 원활한 운영, 조직화에 두면,

    오직 그 일의 전문성에만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행정력과 조직력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만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결과만을 중시하는 세상의 방식으로 흘러가고

    그 안에 예배와 말씀의 자리가 없게 됩니다.

    이런 교회들은 예배와 말씀조차도 교회 부흥을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습니다.

 

 2) 교회는 예배와 말씀을 위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도는 ‘프로슈케’로

    성도들이 모두 함께 드리는 ‘공동예배’이고,

    말씀 전하는 것은 설교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직분자를 뽑아 세우는 것은

    예배와 설교와 말씀 가르치는 일이 잘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위해 교회가 있습니다.

    구제와 봉사와 그 외에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예배와 말씀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3 : 스데반 집사(사도행전 6~7)

 

1.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

 

 1) 일곱 집사 중에 스데반과 빌립, 두 사람을 소개하는 사도행전(7~9장)

 

    사도행전은 최초의 일곱 집사 중에 두 사람, 스데반과 빌립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7~9장에서 이 두 사람을 소개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대부분 이 두 사람과 같이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빌립 두 사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대부분 스데반과 빌립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2) 그중에서 먼저 스데반 집사를 소개합니다(행 6:8~10)

 

            8. 스데반이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민간에(백성 가운데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9. 그때에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와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자유인의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몇이

               들고 일어나서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들이 능히 스데반을 감당하지 못하여

 

    그중에 첫 번째 사람인 스데반은 본래 구제와 재정 출납을 위해 뽑힌 사람이었지만

    말씀에 대한 이해나 복음을 증거하려는 열정이

    사도들에 전혀 뒤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대부분 16명도 채 되지 않은 작은 교회들이었음에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을 이룬 것은

    성도들 하나하나가 이렇게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2. 스데반을 공회에 고발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스데반이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여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니,

    예루살렘에 이주하여 사는 디아스포라(교포) 유대인들이

    이를 시기하여 스데반에게 시비를 겁니다.

 

 1) 스데반에게 시비를 거는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들(행 6:9)

 

            (9절 성경구절 위에)

 

    스데반에게 시비를 건 사람들은

    주전 53년 폼페이 장군에 의해 로마에 노예로 잡혀갔다가 석방된 자유인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이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등지에서 살다가

    신앙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이들은 외국에서 살다 온 교포들이었으므로 유대인의 공동체에 잘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과거 로마의 노예로 있던 자들이었으므로

    유대 사회에 합류하려는 열망이 그 누구보다도 강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유대인의 사회의 주류인 산헤드린 공회의 미움을 받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워낙에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

    감히 상대하기가 어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스데반 집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스데반이 사도가 아니라 집사이니 상대하기 쉬울 것이라 여기고

    스데반에게 시비를 걸로 나온 것입니다.

 

 2)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10절)

 

           (10절 성경구절 위에)

 

    그러나 이들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말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집사라고 가볍게 보았는데 스데반 역시 사도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만큼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은혜가 충만하여 말하는 그 영적인 권위에 눌렸습니다.

 

 3)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거짓으로 공회에 고발함(11절)

 

           11. 사람들을 가르쳐(선동하여,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하게 하고,

 

    말로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들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거짓으로 고발하게 합니다.

 

    이들에게 돈으로 매수를 당한 사람들은

    스데반이 거룩한 곳인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험담하는 말을 계속했다고

    여기저기에서 선동하고, 그를 붙잡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했습니다.

 

 

3. 공회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

 

 1)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당한 스데반(행 6:12~14)

 

           12. 그들이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충동시켜(부추겨)

                스데반에게로 몰려가 그를 붙잡아 공회로 끌고 가서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그들이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에 대하여

                거슬러 말하기를(험담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도다.

           14. 그가 말하기를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고칠 것이라’하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거짓으로 고발을 당해 심문을 받으셨던 것처럼

    스데반도 거짓으로 고발을 당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스데반을 제물로 바치고 그 대신 자기들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더욱 흥분하여 스데반을 고발합니다.

 

 2)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더라(15절)

 

           15. 그때 공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더라.

 

    그러나 그때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 스데반을 보니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백성들이 시련과 고통 속에 있을 때

    그만큼 성령의 위로도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스데반을 고발하는 교활한 무리들 틈에서도

    스데반의 마음속에는 성령의 위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의 거짓 고발이 스데반의 마음을 위축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스데반은 더욱 평화로웠고,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던 것입니다.

 

 

4. 마음에 찔려 격앙된 마음에 이를 갈고

 

 1)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으나 도리어 화를 낸 사람들(행 7:54)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격분하여)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2~53의 스데반의 말을 듣고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과 무리가 모두 마음에 찔렸습니다.

    마치 톱으로 마음을 두 개로 나누듯, 심장이 터지듯 그렇게 마음에 아픔을 느낀 것입니다.

 

    사도행전 2:37에서는 이 마음을 느낀 자들이 회개를 하여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 마음을 가진 자들이

    모두 하나같이 격앙된 마음이 되어 이를 갈며 스데반을 바라보았습니다.

 

 2) 마음에 찔려 회개한 자와, 마음에 찔려 격분한 자

 

    어떻게 같은 마음에 이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것은 사랑과 두려움의 차이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다르고 두려워하는 것이 다르니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른 사람이 사랑하는 이라면,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의 사랑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다면

    그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가 내 마음을 찔러 이렇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

    그저 그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는 생각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분노와 증오로 바뀝니다.

    이들처럼 격앙된 마음으로 이를 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무관심하거나 격분하는 자도 이와 같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고

    심지어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을 때

    마음이 찔려 회개를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왕이었던 사울은

    그의 마음을 찔러 불편하게 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렇게 아모스도 죽었고 예레미야도 죽었으며, 여기 스데반도 죽었습니다.

 

묵상 :

 

    우리도 평소에 항상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이 찔렸을 때 회개하여 복을 얻는 자가 되지만,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마음을 찌르는 일을 당할 때 이들처럼 이를 갈면서 증오하는 자가 되든지,

    혹은 아예 그 말씀을 무시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이 일을 멈추면 은혜받을 만한 때를 저주의 때로 바꾸는 자가 되고 맙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스데반

 

➠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와 죄의 즐거움에 사로잡힌 자(54~55절)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격분하여)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격앙된 마음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봅니다.

 

    이들은 같은 자리에서 정반대의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죄의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결정됩니다.

 

묵상 :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6.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시에 달려들어(7:57)

 

           57. 그러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다고 하니

    그 앞에 있는 무리가 더욱 견디지 못해합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시에 그에게 달려듭니다.

    귀를 막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은

    스데반의 말을 단 한마디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묵상 : 이들처럼 악한 영에 충만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으면서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악한 영에 충만한 상태입니다.

    악에 완전히 오염 된 상태이며, 악에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스런 말씀이 듣기 싫은 말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아주 듣기 싫은 고약한 말로 들립니다.

 

    이런 마음을 성경은 화인 받은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양심까지 악에 오염이 되어 하나님의 선한 것을 아주 싫어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화인 받는 양심을 가진 자가 되지 않도록

    항상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십시오.

 

 

7.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58~60)

 

           58. 그를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하고

           60.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손을 등 뒤로 묶인 채 적어도 4미터가 넘는 절벽 아래로 내쳐졌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있자 사람들이 그가 죽을 때까지 돌을 던집니다.

 

    스데반은 피를 흘리며 자기의 영혼을 받아주실 것과,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기도를 하고는 숨을 거둡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나도 많이 닮았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긴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의 영혼을 주께 맡겼습니다.

    예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고 있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실 것을 아버지께 간구하신 것처럼

    스데반 역시 같은 기도를 주께 드립니다.

 

묵상 :

 

    우리도 마지막 죽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죽게 되기를 간구합시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죽는 것처럼 복된 것은 없습니다.

 

 

결 론 :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삶은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그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순간 우리의 영은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시선이 땅에 일을 향하게 하려 합니다.

 

    다윗처럼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만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되든 오늘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 신실하게 사는 성도가 됩시다.

 

주님

 

어려운 시련과 핍박 속에서도

복음 증거에 힘을 다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도 말씀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게 하옵소서.

 

오직 예배와 말씀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던 초대교회처럼

우리도 예배와 말씀을 세우는 신령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성장하는

건강한 믿음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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