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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문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3월 2일; 삼상 13:1~23)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14.03.02|조회수639 목록 댓글 0

설교제목 :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

설교본문 : 사무엘상 13:1~23(참조, 사무엘상 14)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432

 

 

 사울이 왕이 된 지 1년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가 왕이 된 것을 최소하시고,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일이 일어납니다.(삼상 13:1에 개역성경에서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쯤 됐을 때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어에는 1년쯤 되었을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해부터 1년으로 치니, 이것은 사울이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사울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가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그의 당대에서 왕이 끊어지게 하시며, 심지어 하나님과 그와 모든 관계가 단절됐다는 선언까지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실질적인 심판입니다. 그는 살아있으나 이 땅에서 이미 심판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울이 이런 저주의 심판을 받은 것이 그가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므로, 우리는 사울의 심판에 대한 이 말씀은 자세히 드려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그를 심판하시는 선언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 때문에 저주를 받은 사울

 

  이야기는 사울이 블레셋을 침공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울이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블레셋을 침공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이 군사 3,000명을 소집하여 자기에게 2,000명이, 아들 요나단에게는 1,000명이 있게 하고는 요나단으로 하여금 블레셋 수비대를 치게 합니다.

 

  더 많은 군사들이 왔었으나 사울은 3,000명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나머지는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블레셋에 알려지면서 블레셋이 크게 진노하고 병거 3만 대, 기마병 6천 명, 보명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블레셋의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사울이 있는 길갈이 블레셋의 군사들에게 거의 포위되다시피 했습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사울은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사울은 하나님께 구하기로 합니다. 상황이 너무나도 어려우니 보통 기도가지고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 중에 가장 큰 제사인 번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있어야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오기로 한 7일의 시간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오지를 않습니다. 이에 조급해진 사울이 번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사울이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번제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며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정한 7일의 기간이 끝나가고 있는데도 사무엘은 오지 않고, 블레셋은 길갈까지 집어삼킬 기세이니 두려움에 그만 먼저 번제를 드렸노라고 말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망령된 짓을 하였다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심판을 선포합니다(13~14). 이스라엘은 해가 진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이 되는데,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 한 7일이 다 지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사울의 예배는 왜 가인의 예배가 됐나?

 

 사무엘에게 책망을 받는 사울의 입장을 좀더 살펴봅시다. 바다의 모래알처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사들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기세로 믹마스에 저렇게 진을 치고 있는데, 사울을 따르는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모두 다 흩어지고 600명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창과 칼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만이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했고, 그래서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한 7일의 시간이 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울의 죄는 그저 이것뿐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관계는 개와 고양이처럼 앙숙이고, 왕이 된 자로서 블레셋을 먼저 침공하는 일은 그리 잘못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사울이 제사장이 아닌 신분에서 번제를 드린 잘못이 있으나, 그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우상 숭배한 것도 아닌 마당에, 사울을 완전히 버리시겠다고 하실 만큼 그렇게 엄중한 심판을 하실 만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아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바로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는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왕의 자리가 길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관계가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토록 진노하시게 한 일이 무엇일까요?

 

1)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사소한 일로 보이는 일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는 이유를 바로 이해하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독특한 관계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이 백성으로 택하여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2) 이스라엘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왕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왕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면, 이스라엘 역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이방인과 다름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도 왕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할 때 사무엘은, 단순히 왕 하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번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어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왕인 사울을 그들 위에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진노하시는 죄를 범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미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가령 내 자녀가 나를 아버지라 여기지 않고 생판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을 아버지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의 생사화복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왕이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왕이라 하겠다고 했으니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죄들은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복하고 회개한다는 것은, 여전히 내가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는 자가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했으므로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의 왕이 아니시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이유도 없고, 당연히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구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자를 왕으로 세우는 일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끊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인이나 간음이나 그 어떤 죄보다도 더 큰 죄입니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자신이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유지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사울 왕을 세워놓고는, 그들이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 건기인 밀 베는 때에 하루 종일 천둥도 치고 비도 내리게 했습니다. 그제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그동안 지은 죄 위에 왕을 세우는 죄를 더하였다며 사무엘에게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그 크신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외에 또 다른 왕을 세웠으니, 이 일에 대하여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인간의 왕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들이 첫째로는 그 믿음 없는 왕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고, 그러다 백성들까지 왕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떠나면 그들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5)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 마치 절대군주가 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제일 못마땅하신 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왕이 생겼다는 것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입니다. 사울이 이것을 알았다면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게 행동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는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번제까지 드렸습니다.

 

 가령 이제 막 결혼하여 시집에 들어간 어느 며느리를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처음부터 이 며느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하도 원하니 결혼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으로는 죽을 때까지 너를 며느리로 여기지 않겠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며느리가 있다면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조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시집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곳간 열쇠를 달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과거 조선시대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주면 그때부터 명실공히 안방마님이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 같은 며느리가 처음부터 곳간 열쇠를 요구했다면 그 후의 상황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지금 사울의 상황이 꼭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왕이 된 후에 행한 이 일을 사울이 하나님과 떠나 자기 왕국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적인 질서도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드리는 사울의 이 행위를, 이방인의 절대군주를 따라가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사울이 자신의 왕위를 무소불위의 강력한 권세로 여긴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울을 향하여 진노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왕이 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나의 왕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사울의 왕이 아니고, 사울 역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울은 형식적으로는 왕 위에 있으나, 하나님과는 완전히 끊어진 이방인과 같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사울은 39년이나 더 왕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이 회개할 기회를 39년이나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기간에 회개하지 않고 오직 자기 왕권을 지키려는 욕심만 부리다가 결국 비참하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범하는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 되심을 항상 고백하고,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을 자기의 왕으로 모시고 섬겼더라면, 사울의 왕위가 영원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사울이 죽지 않고 영원히 왕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왕위가 사울의 아들과 그 손자에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을 자기의 왕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왕이 됨으로써, 사울의 왕위는 그 당대에서 끝나고, 그의 아들 요나단은 그와 함께 죽고 맙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들 자신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치료하지 못할 병이 있고, 권세가 있어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를 도우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3. 사울과 요나단과의 믿음의 비교

 

  사무엘서는 크게 사울과 다윗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믿음을 비교하여 보겠습니다.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 사울이 이 전쟁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두려워만 하면서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서 지체하고 있는 모습에 답답했는지, 아버지에게는 일절 의논하지 않고 자기의 무기를 든 호위병 단 한 명만 데리고 적진으로 습격합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블레셋 진영 사이에 있는 길 양쪽으로 거의 절벽이나 다름없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서로 반대편으로 나 있는 그 바위 위에서 각각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이 블레셋의 전초기지를 습격하려면 그 큰 바위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만 합니다.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갈 때에 블레셋 군인들에게 자기와 병기 든 소년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 후에 그들이 이리로 올라오라하고 말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겠다는 표징으로 여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자신과 병기 든 소년의 모습을 블레셋 군인들에게 나타내 보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손과 발을 사용하여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블레셋 군인들은 절벽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화살 한 방이면 끝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고 절벽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 군인들 앞에 당당하게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며 올라갑니다.

 

  그러자 블레셋 군인들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저기 히브리인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하고 말하더니, “이리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하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그들의 이 말을 하나님의 싸인으로 여기고 블레셋 진영으로 진격합니다.

 

1) 요나단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

 

  또한 요나단은 자기가 조금 전에 한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저 불레셋 사람이 자기에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한 것은 우연히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서 요나단에게 말씀하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그 믿음대로 블레셋 진영으로 진격합니다. 요나단의 믿음은 첫째로는 자신이 블레셋으로 진격해도 좋은지를 묻는 믿음이고, 둘째로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을 때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2)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블레셋 군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자기는 무기를 들고 따르는 호위병과 자기 단 두 명뿐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진격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저들이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들고 있더라도 그 무기를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들에게 죽게 될 것이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두려움에 빠져 석류나무 아래서 지체하고 있으나,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있기에 그 믿음대로 행동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3) 저 할례 받지 않은 자들

 

  사울의 눈에는 블레셋의 강력한 무기와 그 수없이 많은 군대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눈에는 저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는 할례 없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한 마당에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과 요나단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다니지만 세상이 더 힘이 있다고 믿는다면, 세상의 원리대로 사는 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더 힘이 있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품고 있는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믿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요나단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에 들어간 후에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병기 든 소년도 뒤따르며 닥치는 대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 두 사람이 겨릿소(함께 멍에를 멘 한 쌍의 소)가 반나절 동안 갈아엎을 만한 정도의 작은 땅에서 삽시간에 블레셋 군사 20명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블레셋 군사 20명쯤 죽였을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블레셋 진영에 큰 두려움을 내리셨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두려움입니다. 블레셋 진영에 있는 자들이나, 싸움터에 있는 자들이나, 전초기지에 있는 특공대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블레셋 군사들에게 이 공포가 임하여, 저희들끼리 서로 칼로 찔러 죽이는 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들을 도우실 계획을 세우셨으나, 이 일은 요나단의 믿음 있는 행동이 있은 후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실 때 언제나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셨으나, 하나님의 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 요나단의 믿음 있는 행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이 블레셋 군사 20명쯤 죽였을 때부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때가 바로 요나단의 믿음이 확인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셨을지라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울과 요나단을 비교하면 그 차이점은 결국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 이것 하나입니다. 이것은 사울과 요나단뿐 아니라,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왕권을 지키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고, 요나단과 다윗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왕이심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십시오. 내가 나의 인생의 왕인 사람은 하나님과 끊어진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주님의 뜻을 구하였으면

그 뜻을 보이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께서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에 충성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요나단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요나단처럼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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