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사무엘하 18:16~33)
* 본문요약
압살롬이 죽자 요압이 나팔을 불어 전쟁을 중단시킵니다.
군사들이 압살롬을 숲속의 큰 구덩이에 던져 넣고 아주 큰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압살롬이 생전에 왕의 골짜기에 자기 이름을 기념에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기념비가 그의 비참한 죽음을 알리는 수치와 저주를 상징하는 것이 됐습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려 왕께 달려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요압은 거절하고 구스(에디오피아)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가 거듭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 갑니다.
다윗은 마하나임의 두 성문(성의 안쪽 문과 바깥쪽 문) 사이에 앉아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파수꾼이 다윗에게 아히마아스가 오고 있다고 말하자
다윗은 그는 좋은 사람이니 틀림없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승전 소식만 알리고 압살롬의 안부는 모른다고 둘러댑니다.
이어 구스 사람이 와서 압살롬의 죽음을 알립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은 마음이 아파 성문 위 다락방에 올라가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찬 양 : 434장(새 384)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447장(새 393) 오 신실하신 주
* 본문해설
1. 압살롬의 무덤(16~18절)
16) 그 후에(요압이 압살롬을 죽인 후에) 요압이 나팔을 불어 군사들을 멈추게 하자
군사들이 이스라엘군(압살롬의 군대)를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17) 그들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숲속의 큰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위에 아주 큰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이스라엘군(압살롬의 군대)는 각기 자기 장막으로 도망쳤습니다.
18) 압살롬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을 기념할(이어갈) 아들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 이름을 기념할 비석을 왕의 골짜기에 세웠습니다.
그가 이 비석에 자기 이름을 붙였으므로 오늘까지도(사무엘서가 기록될 때까지도)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고 부릅니다.
- 돌무더기(17절) :
돌무더기는 약속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기념비로도 사용되지만,
이 경우에는 사형 선고를 받아 죽은 자의 무덤으로,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 됩니다.
2. 승리의 소식을 전하려는 아히마아스(19~23절)
19) 그때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빨리 왕께로 달려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20) 그러자 요압이 말렸습니다. “너는 오늘 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는 다른 날에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하라.
왕의 아들이 죽었으니 오늘은 네가 이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21) 그리고는 요압이 구스(에디오피아)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왕께 네가 본 것을 말씀드려라.”
그러자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을 하고 달려갔습니다.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말했습니다.
“아무쪼록(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저도 저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해 주옵소서.”
그러나 요압이 또 말렸습니다. “내 아들아, 이 소식을 가지고 가 봐야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할 텐데, 왜 자꾸 가겠다고 하느냐?”
23) 아히마아스가 또 다시 말했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저도 가게 해 주옵소서.”
그가 이렇게 한사코 달려가겠다고 하자 요압이 더 말리지 않고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아히마아스는 들길(요단 계속을 지나는 길)로 달려서 구스 사람을 앞질렀습니다.
- 내 아들아 … 왜 자꾸 가겠다고 하느냐(22절) :
요압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전한 자(삼하 1장)와
이스보셋의 사망 소식을 전한 자(삼하 3장)가 다 다윗의 칼에 죽은 것을 기억하고,
혹시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도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전하다가 죽을 것을 염려하여
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22절) :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요압이 염려한 대로
자기가 이 소식을 전한 일로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기쁜 소식을 자기가 전하게 해 달라고 재차 요청합니다.
3. 압살롬의 소식을 기다리는 다윗(24~27절)
24) 그때 다윗은 두 성문(성의 안쪽 문과 바깥쪽 문) 사이에 앉아 있었는데,
파수꾼이 성문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 눈을 들러 보니
어떤 사람이 혼자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25) 파수꾼이 큰 소리로 이 사실을 왕께 알리자
왕은 “그가 혼자 오는 것이라면 그 입에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26) 파수꾼이 보니 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파수꾼이 큰 소리로 문지기에게 “또 한 사람이 달려온다”하고 외치니
“그도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다”하고 말했습니다.
27) 파수꾼이 다시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달리는 모습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 같으니이다.”
그러자 왕은 “그는 좋은 사람이니
틀림없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4. 압살롬의 소식을 묻는 다윗(28~30절)
28) 아히마아스가 왕 앞에 가까이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한 뒤
큰소리로 왕께 말했습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 찬양을 드립니다.
여호와께서 왕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물리치셨나이다.”
29) 왕이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하고 묻자 아히마아스가 대답했습니다.
“요압이 왕의 종인 저를 보낼 때 큰 소동이 있는 것을 보았사오나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나이다.”
30) 왕이 “이쪽으로 물러나서 곁에 서 있으라.” 하고 말하니,
그는 곁으로 한발 물러나 서 있었습니다.
5.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31~33절)
31) 바로 그때 구스(에디오피아) 사람이 들어와서 왕께 아뢰었습니다.
“내 주 왕께 아뢸 좋은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32) 왕이 구스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내 주 왕의 원수들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다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33) 이 말을 듣고 왕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서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울었습니다.
그가 올라갈 때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고 울부짖었습니다.
* 묵상 point
1. 압살롬의 죽음
암논이 죽었으므로 이제 압살롬이 다윗의 맏아들이 됐으니
다윗이 죽으면 그가 왕이 될 터이지만,
압살롬은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리지 못해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의 군사령관 요압의 창에 맞아 죽고 맙니다.
1) 압살롬을 죽인 이유 : 압살롬이 죽어야 동족 간의 전쟁이 끝이 나므로(16절)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여달라는 명령을 하였음에도
요압이 압살롬을 죽인 것은 압살롬이 반란군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낸 요압은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죽기 전에는
동족 간의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기 임의로 압살롬을 죽입니다.
2) 그러나 수치와 저주의 방식으로 죽은 압살롬(16~17절)
하지만 압살롬을 죽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요압은 압살롬은 너무나도 끔찍한 방법으로 죽입니다.
여기에는 다음 세 가지의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보면 요압이 압살롬의 처벌을 아주 감정적으로 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나무에 달려 죽은 자(14절)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를 뜻합니다(신 21:22~23).
그러므로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죽인 것은,
압살롬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음을 나타내려는 요압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② 죄인을 둘러서서 집단으로 쳐서 죽이는 것(15절)
요압이 압살롬에게 치명상을 입힌 후에 여전히 나무에 달린 상태에서
요압의 무기 든 병사들 10명이 압살롬을 둘러서서 그를 쳐서 죽입니다.
이것은 증인이 돌을 던지고,
이어서 주변에 있는 자들이 함께 쳐서 죽이는 사형집행 형식을 따른 것입니다.
③ 돌무더기를 쌓음(17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압살롬을 왕의 가족의 묘에 묻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서 큰 돌무더기를 만든 것은 죽은
압살롬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 됩니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이야 자기 무덤이 어떻게 됐든 상관없겠지만,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버지 다윗을 생각하면
압살롬의 무덤이 돌무더기라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아간이
여리고 성의 금덩이 은덩이와 외투 한 벌을 숨겼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아간과 그 가족이 돌에 맞아 죽은 후에 그곳에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수 7:26).
그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
돌무더기는 나무에 달려 죽은 것 못지않은 저주의 상징이 됩니다.
3) 자기감정대로 압살롬을 죽인 요압
법을 집행할 때는 그 사람이 받아야 할 벌만을 바르게 집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압살롬이 자기 밭에 불을 질렀다는 것과
자기가 다윗의 군사령관인데 아랫사람 대하듯 오라 가라 하며
자기를 함부로 대하였다는 것으로 압살롬을 미워했고,
그 일로 압살롬을 이토록 수치스럽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가 가진 권력을
적당하고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공의이고 정의입니다.
그러나 요압처럼 자기가 가진 권력을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면
사울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압살롬은 자기 죄로 죽었지만, 압살롬을 그가 받을 벌보다 더 과하게 처벌한 요압 역시
나중에 저주를 받아 죽게 됩니다.
● 묵상 :
그러므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가 가진 권력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자가 되도록 항상 자신을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권력을 잘 사용하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지만,
권력을 남용하면 사울이나 압살롬이나 요압처럼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2. 자기를 위해 세운 기념비가 수치와 저주의 기념비가 됐다(18절)
압살롬이 살았을 때 자기 이름을 이어갈 아들이 없는 것을 한하며
자기 이름을 기념할 비석을 왕의 골짜기에 세웠습니다.
사무엘하 14:27에는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일인지 모르나 이때에는
자기 이름을 남길 아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라고
압살롬이라는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웠습니다.
압살롬의 기념비가 세워진 왕의 골까지가 어디인지 밝히고 있지 않아
구체적인 장소는 알지 못하나 18절을 잘 보면 그 비석이
압살롬을 묻은 큰 돌무더기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기념하는 비석이,
그가 수치와 저주로 죽었음을 알리는 부끄러운 비석이 된 것입니다.
● 묵상 :
이 세상에서 나를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모든 일이
압살롬의 경우처럼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주님을 섬기는 자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이 세상을 떠날 때
주님 앞에서 나를 기념할 만한 일이 남아 있게 됩니다.
3.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아히마아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빨리 왕께 달려가서 이 기쁜 승리의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그래서 요압에게 자기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거절하고 그 대신 구스(에디오피아) 사람을 보냅니다.
1) 요압의 만류 : 너는 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19~20절)
이히마아스가 왕께 달려가겠다는 것을 요압이 만류한 이유는,
사울의 사망 소식을 전한 자(삼하 1장)와 이스보셋의 사망 소식을 전한 자(삼하 3장)가
모두 다윗의 칼에 죽은 것처럼 혹시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도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전하다가 죽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이들이 사울이나 이스보셋을 자기들이 죽였다고 말하여 죽은 것이었으나,
요압은 단지 그 소식을 전하기만 했는데도 다윗이 죽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일 역시 다윗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니
요압이 아들처럼 아끼는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에게 가지 말라고
반복하여 만류하는 것입니다.
2)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아히마아스의 열정(23절)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가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소식을 전하다가 다윗의 칼에 맞아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오직 전쟁에서 이겼다는 그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왕과 백성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저 이 기쁜 소식을 빨리 달려가서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히마아스는 구스 사람이 간 길이 아닌 지름길로 달려가서
구스 사람보다 빨리 다윗 왕께 도착합니다.
그러다 죽어도 좋습니다. 그저 이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묵상 : 우리도 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는 아히마아스가 전하려는 그 소식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은 누구라도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 백성이 된다는 소식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입니다.
단지 전쟁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자기 목숨을 걸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소식을 가졌으니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4. 압살롬의 소식을 기다리는 다윗
1) 두 성문 사이에서 앉아 기다리는 다윗(24~27절)
다윗은 마하나임의 두 성문(성의 안쪽 문과 바깥쪽 문) 사이에 앉아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은 성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지나는 곳으로 왕이 앉아 있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무지 초조해서 그의 거처에서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령이 오면 제일 먼저 도착할 성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저 멀리서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고 하자,
“혼자 오는 것이면 아마도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겠지”하고 말하고,
그다음에 또 한 사람이 달려온다고 하자
“그도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일 거야”하고 말합니다.
그러다 앞에 오는 사람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라고 하자
“그는 좋은 사람이니 틀림없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을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좋은 소식이 오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에게 압살롬의 안부부터 묻는 다윗(28~32절)
이윽고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먼저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하고 묻습니다.
아히마아스가 승전에 대한 소식만 전하고 압살롬에 대한 말은 적당히 얼버무리자
바로 곁에 서 있으라고 하고는,
곧 도착한 구스 사람에게도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다윗은 승전에 대한 소식이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그저 압살롬이 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묵상 : 우리를 기다리는 주님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눅 15:20).
자기를 죽이려 했던 못된 자신 압살롬이지만
아버지 다윗은 그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압살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기는 시골에서 조용히 살 걸 그랬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립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유산을 받아서 갔다가 허랑방탕하여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반겨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특히 눅 15:20에는 아버지가 혹시 내 아들이 오나 보려고
항상 저 먼 곳을 응시하며 지내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압살롬의 소식을 기다리는 다윗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모습이 우리를 기다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빠져 신령한 영의 생명을 잃었을 때나, 영이 병들었을 때
우리가 바른 믿음의 길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5.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1) 그 소식을 듣고 성문 위 다락방에 오르며 울부짖는 다윗(33절)
구스 사람으로부터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곧바로 그 성문 위에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울부짖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조용히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우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절규하며 우는 것입니다.
2) 전에 죽은 아이(삼하 12:19~23)보다 슬퍼하는 이유
다윗의 아들이 죽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난 갓난아이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아이가 죽어갈 때에는 슬퍼 울다가,
막상 죽자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목욕을 하고 머리에 기름까지 바른 후에 음식을 차려오게 하여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압살롬에 대한 소식을 기다릴 때에는 울지 않고 초조해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절규합니다.
그 이유는 전에 아이는 비록 죽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었기에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삼하 12:23에서 다윗은 자신이 그 아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었고,
그러므로 장차 자기가 가는 그 나라에 그 아이가 먼저 갔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슬퍼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은 장차 다윗이 가게 될 곳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저주의 자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차라리 내가 죽었다라면
압살롬이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 묵상 :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다윗은 차라리 자기가 죽고 아들 압살롬이 살았어야 했다고 울부짖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신도 죄를 지은 자이므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죽는다면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지 압살롬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저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하며 슬퍼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하지 못한 바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 중에 유일하게 죄 없는 참 인간이셨으므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다”하는 그 간절한 사랑을
실제로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셨습니다.
* 기도제목
1. 압살롬처럼 이 땅의 것만을 위해 일하다
허망하게 죽는 자가 되지 말고
다윗처럼 주를 힘써 섬기다가
주께 복을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2. 우리도 아히마아스와 같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열망을 가진 자가 되게 하옵소서.
3.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4.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5.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