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요압이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을 책망함(사무엘하 19:1~8)
* 본문요약
압살롬의 군사들을 무찌르고 승리한 모든 군사들이 마하나임 성으로 들어올 때에도
다윗은 계속해서 그 성문의 다락방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그의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군사들이 마치 전쟁에 패한 사람들처럼 슬며시 들어옵니다.
요압이 다윗 왕의 거처로 들어가 어찌하여 왕을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고
왕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고 계신 것이냐고 책망합니다.
만일 지금 부하들을 위로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왕이 자기들을 미워하는 줄 알고 그들이 모두 왕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에 다윗이 성문에 앉으니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옵니다.
찬 양 : 364장(새 338)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492장(새 435) 나의 영원하신 기업
* 본문해설
1. 슬픔을 절제하지 못하는 다윗(1~4절)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왕께서 압살롬 때문에 통곡하며 슬퍼하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자
2) 왕이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한다는 소식이 모든 군인에게 알려지니
그날의 승리가 그 모든 군인에게도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3) 그날 군사들은 마치 싸움에서 쫓겨나올 때에 부끄러워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슬며시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4) 왕은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큰 소리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하고 울부짖었습니다.
2. 다윗을 책망하는 요압(5~7절)
5) 그때 요압이 집으로(왕의 거처로) 들어가서 왕께 말했습니다.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와
왕의 처첩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의 얼굴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셨나이다.
6) 왕께서 왕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왕을 사랑하는 자는 오히려 미워하시니,
이는 왕께서 오늘 왕의 장군들과 부하들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니이까?
오늘 압살롬이 살고 우리가 모두 죽었더라면
왕께서 오히려 더 기뻐하셨으리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나이다.
7) 그러니 이제라도 밖으로 나가셔서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말씀을 해 주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께서 만일 나가지 않으시면
오늘 밤이 오기 전에 왕 곁에 남아 있는 군사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니이다.
그러면 왕께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한 모든 재앙보다
더 심한 환난을 당하시게 될 것이니이다.”
3. 다윗이 백성 앞에 나타남(8절)
8) 이에 왕이 일어나 성문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군사들은 “왕께서 성문에 앉아 계신다”하는 말을 듣고 모두 그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 사람(압살롬의 군사)들은 모두 도망하여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 묵상 point
1.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다윗
1) 다윗으로 인하여 승리를 도리어 부끄러워하는 다윗의 군사들(1~3절)
압살롬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다윗의 군사들이 승리의 기쁨을 안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하나임 성문을 들어오면서 마치 패잔병처럼 마음이 바뀝니다.
그 마하나임 성문의 다락방에서 다윗이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내 일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를 외치며 울부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보다 백성들의 죽음을 더 슬퍼해야 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뿐 아니라 압살롬의 군사 2만 명도 죽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다윗의 백성들입니다.
압살롬 군사들만 죽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윗의 군사들도 얼마는 죽었을 것이고,
그들 모두가 다 다윗의 백성들이요, 다윗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는 저 안에 들어가서 혼자 슬퍼하고,
백성들 앞에서는 그들의 아픔을 아우르는 자가 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 자기 슬픔에 빠져 백성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요압의 책망
그러자 요압이 왕의 거처에 들어와서 왕을 책망합니다.
1) 왕은 왕 자신과 왕의 가족을 구원해 준 부하들을 부끄럽게 하였다(5절)
요압은 다윗이 왕 자신과 왕의 가족과 왕의 처첩들을 구원해 준
그의 부하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요압의 말대로 다윗의 부하들은 지금
마치 자기들이 무슨 죄를 짓고 온 것처럼 부끄러움을 가지고
슬며시 마하나임 성문을 들어왔습니다.
2) 왕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자를 미워한다(6절)
요압은 왕이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이것 역시 맞는 말입니다.
반란군의 수괴(首魁)인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반란군을 물리친 부하들에게는 부끄러움을 주고 있으니
요압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3) 왕은 압살롬이 살고 다윗에게 충성하는 자가 다 죽었다면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다(6절)
요압은 마지막으로 다윗에게 결정타를 날립니다.
반란군인 압살롬이 살고 다윗의 부하인 자기들이 모두 죽었다면
오히려 왕이 기뻐했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4) 그러므로 지금 나가서 신하들을 위로하는 말을 하라(7절)
요압은 이제 슬픔을 거두고 백성들 앞에 나가서
잘 싸워 이긴 그의 부하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인 슬픔을 거두고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 묵상 :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아픔입니다.
자기도 아픔을 겪고 있으면서도 백성들의 마음을 더 헤아려야 하는 것,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혹시 이 나라의 지도자에 속한 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다윗처럼 이런저런 아픔이 있을지라도
먼저 백성들의 아픔을 헤아리십시오.
그것이 지도자 된 이의 바른 모습입니다.
3. 다윗의 슬픔을 공유하지 못하는 요압
그러나 다윗은 지도자이기 이전에 그 역시 사람입니다.
그 역시 자식을 잃고 슬퍼할 줄 아는 한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다 죽은 그의 저주받은 압살롬이기에
다윗의 슬픔 속에는 멸망 속으로 들어간 아들에 대한 절규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이런 다윗의 슬픔을 전혀 공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1) 요압은 다윗의 슬픔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다윗은 그저 자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왕에 죽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었어야 했는데,
압살롬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다 죽었으니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슬퍼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가 죽었다면 압살롬이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자기가 왕권을 더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다윗의 이런 슬픔을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압살롬을 너그럽게 해 달라고 다윗이 명령하였는데,
그를 죽인 것에 대한 다윗의 공격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마음에 그런 것이 있기도 했겠지만,
다윗도 압살롬이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압을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요압은 슬퍼하는 다윗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요압은 슬퍼하는 다윗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어찌하여 왕을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고 왕을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느냐고 말합니다.
차라리 자기들이 모두 죽고 반란군의 수괴 압살롬이 살았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거친 저항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자기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위협이요 협박입니다.
3) 요압은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 더욱 심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다윗이 계속 슬퍼하자 요압은,
다윗이 만일 백성들에게 나가서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면 그들 모두 다윗 곁을 떠나서
오늘 밤에 다윗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한 모든 환난보다
더 큰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요압 혼자의 생각이고, 요압 혼자만 하는 말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그저 다윗의 슬픔에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있을 뿐입니다.
● 묵상 : 합리적인 조언을 해 주는 냉철한 사람보다
마음을 공유하는 자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는,
합리적인 조언을 해주는 냉철한 사람보다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는 자가 더 필요합니다.
자기도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가 더 잘 압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 슬픔이 절규로 나오는데 어찌 절제가 되겠습니까?
이런 때는 이런저런 말보다도 그저 그 슬픔에 함께 할 때 그의 마음이 치유됩니다.
그런 때 오히려 그가 더 자기의 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4. 슬퍼하는 자와 그 슬픔을 함께하는 자가 되십시오.
1) 슬픔을 공유할 때 그 슬픔은 치유됩니다.
슬픔을 공유할 때 그 슬픔은 치유됩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이런저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만으로 그가 힘을 얻게 됩니다.
슬퍼하는 자 옆에서 함께 울 때 그의 마음이 치유되고,
그가 자기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2) 슬퍼하는 자의 마음에 소금을 뿌리면 주께서 진노하십니다.
슬퍼하는 자에게 너무 심하다고 하는 자들이여, 주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렇게 남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면
주께서 더 심한 슬픔을 당신들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고,
이웃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잠잠하고 침묵하십시오.
5. 가슴 아픈 이야기 한 토막
몇 년 전 충무로에서 어린 시절 제가 다녔던 교회의 후배를 만났습니다.
제 기억에 그는 아주 성실하게 교회를 잘 다니던 자였는데,
교회를 떠난 지 오래됐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서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절대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경고를 해서
중국집 일도 다른 가족들에게만 맡기고 조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에서 주차 관리 요원으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심장병이 더욱 심해져서 더욱 조심하고 있었으므로
3부 예배 때에만 봉사를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입니다.
1부 예배 때 주차 봉사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일을 맡을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해야 한다면서
추운 겨울에 밖에서 그 바람을 다 맞아가며 주차 봉사를 하다가
쓰러져서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와서 한다는 말이
“주를 위해 일하다 그리됐으니 분명히 천국 갔을 것이다.”하고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교회 일을 하다 죽은 자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냐며,
그때부터 교회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보고 목사님이 아니라 형이라 부르겠다고 하면서,
“형도 나에게 교회 가라고 말한다면 나, 형 다시는 안 만나”하고 말합니다.
그 친구가 바란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아버지가 하다 돌아가셨네”하는 말 한마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아무 말 하지 말고
그저 옆에서 함께 슬퍼하는 모습만 보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 묵상 :
슬픔을 공유하지 못하는 말은
그 말이 합리적이고 합당한 말일지라도
오히려 진노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다윗 역시 나중에 죽을 때
솔로몬에게 요압을 절대로 평안히 죽게 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기본적인 일부터 회복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 기도제목
1.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2. 슬퍼하는 자에게 내 할 말만 하는
냉철한 사람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