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세례요한의 질문, 장터의 비유(누가복음 7:18~35)
* 본문요약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며 오실 그이가 예수님이신지를 묻게 합니다.
예수님은 보고들은 대로 전하라고 하시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예수님은
그 앞에 모인 무리에게 무엇을 보러 광야에 갔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어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구약 시대의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무리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지 않아,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장터에 있는 아이들이
놀이를 하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놀이판을 깨뜨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거부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찬 양 : 219장(새 540)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412장(새 290)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 본문해설
1. 세례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8~23절)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어보게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와서 이르되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볼 수 있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소경이 다시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시니라.
-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23절) : 스칸달리조
‘실족한다’에 해당하는 ‘스칸달리조’는 ‘걸어 넘어뜨리다, 함정에 빠뜨리다’로,
이 말은 미끼를 놓은 덫에 걸려서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탄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져 죄에 빠져 멸망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만,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아
주님을 떠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2.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24~28절)
24) 요한의 보낸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아니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호사스럽게) 지내는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위대한(훌륭한) 자니라.
27)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되었다. ‘보라,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말 3:1)라고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더 크니라” 하시니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24절) :
권력의 향배에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움직이는 정치가들을 의미합니다.
-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은 자들(25절) :
부드러운 옷은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세상의 돈과 권세를 가진 그 시대의 권력의 핵심층들을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
화려한 연예인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28절) :
세례요한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셨으나,
이제 곧 시작될 하나님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가
구약 시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인 자와 거부한 자(29~30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이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고 말하며 그 뜻을 받아들였으나,
30)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니라(저버리니라).
4.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31~35절)
31) 또 이르시되 “ 이 세대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서 편을 갈라 앉아 서로 부르며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장송곡을 불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함과 같으니라.
33)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는 ‘저 사람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는도다.
35) 그러나 지혜는 그 지혜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는 그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에 의하여 옳다는 것이 입증 되느니라.)
-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32절) :
당시 장터에서 아이들이 하는 결혼식 놀이입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 한 편이 피리를 부는 흉내를 내면
다른 편은 그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놀이로 결혼식 피로연을 흉내 내는 놀이입니다.
-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32절) :
당시 장터에서 아이들이 하는 장례식 놀이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한 편이 애곡(장송곡)을 부르면
다른 편에서 통곡을 하는 것으로, 장례식 장면을 흉내 내는 놀이입니다.
* 묵상 point
1. 세례요한의 질문 :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19~20절)
1) 세례요한의 의문 : 로마에 대하여 저항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께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 마을로 퍼져서
옥에 갇혀 있던 세례요한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회복될 줄 알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메시야 같은데,
도무지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예수님이 보내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맞는지를 물어보게 합니다.
요한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메시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메시야는 오랑캐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다시 다윗의 시대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 전통에 따르면 오랑캐인 로마를 물리치고 위대한 이스라엘을 건설해야 할 터인데
예수님이 그대로 계시니 세례요한이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2) 내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시험 문제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라”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고재식 박사님이 낸 시험문제였는데,
아마도 당시 로마의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자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가장 강한 저항이 아니었나 하는 뜻으로 낸 시험문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단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은 생각에
“이런 시험문제에는 답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썼다가
낙제를 겨우 면한 61점인가를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동료 신학생들 중에도 민중신학적인 입장으로 보면
예수님이 이런 점이 잘못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소위 예수님의 사상을 비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한신대학이 진보적인 학교라 이런 류의 일들이 있었겠지만,
반대로 보수 신학교에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을 판단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보수 진영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세리와 창기와 가까이 하셨던 예수님을
이해하기 어려워했을 것입니다.
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예수님을 축소 해석하여
권력층에 빌붙는 자들을 복 있는 자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가 앞장서서 권력에 아부하는 일까지 있으니 말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간에
각자 자기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은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내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면
즉시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묵상 : 변화되어야 할 자는 바로 나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인지,
아니면 사회학적으로 예수님의 사상과 생각을 알아보려는 자인지를 분명히 하십시오.
공자나 마호메트나 석가모니의 사상을 공부하듯
그저 훌륭한 분들의 사상을 공부하는 자라면 그렇게 하든 말든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주님을 믿는 자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분문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는 따지고 판단하고 분별해야 하겠습니다만,
일단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나의 왕께서 하신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할 자는 나이지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생각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23절)
예수님은 대답 대신 주변의 상황을 본 대로 말하라 하시면서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자기 생각이 예수님과 다른 것을 의심하여
예수님이 메시야가 맞는지를 물어본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 묵상 : 말씀을 듣고 실족하지 마십시오.
내 생각과 말씀이 다를 때 어떻게 하십니까?
혹 내 생각과 맞는 것이 나오면 기뻐하고,
내 생각과 맞지 않는 것이 나오면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이 내 생각과 맞는 것이 나올 때
그것을 듣고 기뻐하며 감동을 받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종교적인 감정놀음에 불과합니다.
참된 믿음은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다가 핍박과 박해가 와도
그 말씀대로 사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혹 말씀을 보다가 내 생각과 다른 것이 있으면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나의 새로운 신조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족하지 마십시오.
말씀과 내 생각이 다르면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자에게 주께서 복을 내리십니다.
3.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무리들을 향하여
전에 세례요한이 광야에 있을 때에 무엇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갔었냐고 물으십니다.
1) 흔들리는 갈대냐(24절)
흔들리는 갈대란 세상에서의 부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시대의 흐름을 타는 자를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런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난 자로 그저 그 시대의 흐름에 조용히 따르기만 해도
세상에서의 부귀와 명예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삶을 버리고 광야로 나가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흔들리는 갈대가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훌륭하게 성공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세상의 흐름을 타서 얻은 부귀와 명예에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며 환호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부흥하기 위해 세상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흥한 교회가 복 받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본질에 대해서까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말씀에 서 있는 교회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2) 화려하고 사치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25절)
부드러운 옷은 귀족이나 정치가, 왕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잘 타서 소위 성공한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시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스타가 된 자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의 잘못을 공격하지만 않았어도
그 시대의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충성된 자가 되기 위해 그 시대의 영웅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3) 선지자냐? 옳다(26절)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십니다.
“선지자냐?, 옳다” 그들이 광야에 선지자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면 옳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만 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들은 거친 땅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부흥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어도
참된 말씀을 전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묵상 :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교회에 다닙니까?
그렇다면 나는 무슨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봅시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는 교회를 찾아다닙니까?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교회보다 세상이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단순히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등산이나 낚시나 자전거 동호회와 같은 곳에서 더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과 함께 하는 인간관계나 다른 모임들이
세상보다 더 나을 수는 있으나 이런 것을 위해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나갑니까? 옳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세상의 유일한 기관입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께 예배하고,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교회의 모든 활동에 예수님이 함께 하고,
그 활동들을 통해 예수님과 사귀기 위해 우리는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의 편안한 휴식처를 만들기 위해
휴식공간이나 까페들을 교회 안에 이곳저곳에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체육시설을 갖추기도 합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리 아래에서
교회가 점차 그 본래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교회가 주께서 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4.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28절)
1) 구약 시대의 특징 : 죄를 용서받는 제사 의식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구약의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찬하시면서,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사람이지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으로 끝이 난 구약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죄를 용서받는 ‘제사의식’에 있습니다.
구약은 죄를 짓고 난 후에 제물을 주께 드려
그 죄를 용서받는 것이 구약의 예배 의식입니다.
2) 신약 시대의 특징 :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은혜의 시대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의를 갖고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의를 갖지는 못했으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복음 안에 있는 자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묵상 :
모세보다, 다윗보다, 세례요한보다 형편없는 삶을 살았던 우리를
그들보다 더 큰 자가 되게 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합시다.
5.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한 이 말씀을 하시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무리들은
다 그 말씀을 옳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그 말씀을 시큰둥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들을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31~32절)
당시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 중에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가 있었습니다.
두 놀이는 둘 다 비슷하게 두 편을 나누어 한 편에서 피리를 불거나 장송곡을 부르면
다른 편에서 그 피리 소리나 장송곡 소리에 따라
춤을 추든지 통곡을 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때 피리를 부는 것과 장송곡을 부르는 것이 그 놀이를 주관하는 것이 되어
아이들은 저마다 피리를 불거나 장송곡을 부르는 편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자기가 다른 아이의 부르는 노래 박자에 맞추어 춤추고 통곡하는 편에 들면
그 놀이의 판을 깨버리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그 놀이의 주관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놀이판을 깨뜨리는 자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이렇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놀이판을 깨버리는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는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
장례식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니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욕했습니다.
결혼식 놀이판을 깨뜨린 것입니다.
● 묵상 : 주님의 놀이판을 깨뜨리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이 주도권을 잡지 않으면
이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독선과 오만에 사로잡힌 자들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자신을 조심합시다.
저 사람이 먼저 제안했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말을 했으면
나도 그 모임에 참여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거부하면
그들처럼 나도 하나님께 거부를 당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손길을 거절한 사람들
1)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29절)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구약성서에서 예언한 메시야(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를 받을 때 마음의 벽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말씀임을 믿고 받아들여
초대교회를 일으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2)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30절)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에게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 그들 눈에 보기에 갈릴리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보였으니
거부할 수 있겠다 싶지만,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니 자연스럽게 세례요한 역시 제사장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들이 세례요한의 요구를 거부할 명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그들이 세례요한의 요구에 따라 죄 사람의 세례를 받았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받아들이게 되어 그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구경만 한 자들의 비극적인 결말
그런데 바리새인들뿐 많은 사람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그 광경을 구경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이
후일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이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내미신 구원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 묵상 :
오늘도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수많은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그 일들 중에 적어도 어느 한 부분은 우리도 참여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그냥 지켜만 보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스스로 거절하는 사람들이 되지 맙시다.
* 기도제목
1. 우리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드립니다.
2.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마당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게 하옵소서.
3. 내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4.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족하지 않게 하옵소서.
5.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들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