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누가복음 22:54~62)
* 본문요약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붙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자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갑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모닥불을 쬐는 사람들 틈에 앉아 있다가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세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펄쩍 뜁니다.
그때 닭이 울었고,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찬 양 : 337장(새 279) 인애하신 구세주여
12장(새 33) 고난받은 주를 보라(영광스런 주를 보라)
* 본문해설
1.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54~55절)
54)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자
베드로가 멀찍이 뒤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둘러앉아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함께 앉았더니
2.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56~60절)
56) 그때에 한 여종이 베드로가 불을 쬐고 앉은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며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는 그의 말을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당신도 그들과 한패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하더라.
59) 한 시간쯤 지나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더욱 강경하게) 가로되,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보니(갈릴리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 사람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것이 틀림없소”하고 말하자
60) 베드로가 가로되“이보시오, 나는 당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고, 베드로가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닭이 울더라.
- 한 여종(56절) :
베드로를 첫 번째로 알아본 사람은 어린 여종이었습니다.
마가는 이 여종이 대제사장의 여종이라 했고(막 14:66),
요한은 문 지키는 여종이라 했습니다(요 18:17).
- 베드로는 그의 말을 부인하여(57절) :
베드로는 첫 번째 폭로자의 말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자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
이 말로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59절) : 디이스퀴리제토
세 번째 폭로자를 요한은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렸던 ‘말고’의 친척이었다고 밝힙니다(요 18:26).
말고의 친척은 자신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현장에서
베드로를 분명히 목격했다며 장담하며 폭로합니다.
여기에서 ‘장담하다’에 해당하는 ‘디이스퀴리제토’는
‘확실하게 주장한다, 장담하며 주장한다’는 것으로,
베드로가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3. 심히 통곡하는 베드로(61~62절)
61) 주께서 돌이켜(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쳐다보시니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묵상 point
1. 구경꾼과 방관자가 된 베드로
1)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54절)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붙잡히시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십니다.
이제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의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틈에서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갑니다.
구경꾼들 틈에서 철저히 방관자가 되어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마치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를 하며
그저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2) 방관자, 구경꾼의 위험
많은 사람이 이때의 베드로처럼 구경꾼으로, 방관자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에 감동을 줄 만한 것을 찾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시험에 들 만한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곧 그 일을 중단하거나 아예 그 자리를 떠납니다.
● 묵상 :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말을 들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구경꾼이요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고난받으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기꺼이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됩시다.
2.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1) 베드로가 첫 번째로 한 부인(56~57절)
베드로를 첫 번째로 알아본 사람은 어린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베드로가 들어올 때부터 빤히 그 얼굴을 주목해서 보더니
베드로에게 “이 사람도 저 사람과 함께 있던 자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합니다.
당시 여종은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던 보잘것없는 자였는데,
베드로는 그런 여종 앞에서 두려워 떨며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로 한 부인(否認)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로 베드로는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2) 베드로가 두 번째로 한 부인(58절)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직접 심문하듯
“너도 그 도당이다”라고 폭로합니다.
두 번째 사람이 한 이 말은“너도 그 사람의 제자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라”라고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두 번째로 한 부인(否認)은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의 자리에서 끊어졌습니다.
3) 베드로가 세 번째로 한 부인(59절)
한 시간쯤 후 또 다른 사람이 확실하게 장담을 하면서
이 사람이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니 저 사람과 한패임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바로 베드로가 귀를 잘랐던 말고의 친척이었다고 밝히며,
자신이 그 현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 옆에 있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노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도대체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펄쩍 뛰면서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라고 완전하게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로 한 부인(否認)은
자신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로 베드로는 예수께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의 자리에서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4)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눅 12:8~9)
베드로는 고난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시련 앞에서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처럼 주님을 배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유형의 사람을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싹이 나기는 하지만 가시떨기에 막혀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시련이나 환난이 닥치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시련 앞에 맥없이 무너진 것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평안할 때는 믿음이 연약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는 시련이 닥치면
이기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어떤 환난이 어떤 방법으로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시련이 닥치든 이길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3. 베드로는 바라보시는 예수님
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똑바로 쳐다보시니(61절)
베드로가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며 펄쩍 뛰면서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던 바로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뒤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신 것은
주께서 조금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가룟 유다를 잃으신 예수께서 베드로까지 잃지 않으려고
베드로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바라보신 것입니다.
2) 징계는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의 초청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우리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주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 징계가 때로는 시련으로, 때로는 질병이나 갈등으로,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내려집니다.
지혜가 있는 자들은 그 시련이
주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신 것처럼 나를 바라보시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 시련 속에서 회개를 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징계를 받더라도 주께로 돌아오는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않고 비극으로 끝냈습니다.
● 묵상 :
시련이나 고통이 다 징계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날 기회를 얻는다면
그 시련은 우리에게 전화위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있든 고통이 있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됩시다.
4. 베드로의 통곡
1)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함(62절)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닭이 울자
베드로는 조금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통곡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보면 주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 물으실 때까지
베드로는 주님의 은혜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21장 참조).
2) 회개 없는 신앙생활 : 의미 없는 의식의 반복일 뿐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기 전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공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통곡하고 자신의 잘못을 크게 후회는 하고 있으나
아직 주님의 은혜를 회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 신앙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주님을 섬기는 기쁨이 없습니다.
밤새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음에도 고기 잡는 일을 계속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처음부터 고기 잡기 위해 그 짓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답답하니 뭐라도 한 것입니다.
이런 답답하고 무료한 삶은 시험 들기 아주 좋은 상황입니다.
빨리 이 답답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회개와 후회의 눈물을 구별하십시오.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기 연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서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며
뼈가 녹듯 애통하며 아파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을 섬기는 자의 자리로 들어가게 해 주실 것을
주께 간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4) 베드로의 회개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베드로는 요한이 ‘주님이시다’하는 말을 하자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주께로 달려갑니다.
주께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자
“주께서 이미 알고 계시나이다”하고 대답합니다.
주님 앞에 머리 곳곳이 들고 당당했던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
아픈 마음으로, 애끓는 심정으로, 그저 처분만을 바란다는 뜻으로
겸손하게“주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하고 대답할 뿐입니다.
주께서 그의 애통하는 마음과 겸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을 치라는 말씀으로
그의 제자의 위치를 다시 회복하시리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5)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결정적 차이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똑같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가룟 유다가 있는 지옥 맨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은 것은,
그가 회개하기 전 답답한 갈증의 시간을 지날 때에도
다른 사도들과의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가룟 유다는 통곡만 하고 끝났지만,
베드로는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니고 세상에 빠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답답하고 고민되는 시간을 지나면서도 다른 사도들 틈에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께서 “얘들아 뭘 좀 잡았느냐?”하고 물으실 때
요한이 “주님이시다”하고 말하는 순간 곧바로 헤엄을 쳐 달려가서 주님을 만났고,
그때 주께서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는 기회를 만납니다.
그때 베드로는 참된 회개를 했고,
이로써 주님의 제자로서의 모든 영광과 권세와 그 기쁨을 다 회복했습니다.
● 묵상 :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통곡은 회개가 아닙니다.
이것을 결단 마십시오.
당신이 어느 집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는 정도는
단순한 감정놀음이지 결코 회개가 아닙니다.
이런 통곡이나 슬픔에서 머물지 마십시오.
그런 정도의 슬픔은 영화나 노래를 듣고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신앙의 감정놀음에 속지 마시고,
내 안에 주님을 진정으로 모시는 참된 회개를 하십시오.
진정한 회개를 하고 싶다면 차라리 그런 억지 춘향극을 하지 말고,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십시오.
* 기도제목
1. 구경꾼이나 방관자로서의
거짓된 신앙인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어떤 시련이나 고난이 와도
주님을 섬기는 사명과 신앙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3. 감정놀음으로서의
슬픔이나 자기연민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하여 그 은혜를 회복하는
참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