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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18~25)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3.04.29|조회수345 목록 댓글 0

* 오늘의 말씀 :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18~25)

 

* 본문요약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찬 양 : 274장(새 497) 주 예수 넓은 사랑

         138장(새 151) 만왕의 왕 내 주께서

 

 

* 본문해설

 

1.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18~21절)

 

18) 십자가의 도(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이치)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한낱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성경에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지혜를 없애버리고),

     총명하다고 하는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똑똑하다고 하는 자들의 지식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리라)(사 29:14)”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학자)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이론가)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느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어리석게 보이는 말씀 선포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작정하셨도다).

     (혹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어리석다고 느끼도록 만드신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섭리이니라.)

 

- 멸망하는 자들에게는(18절) : 아폴뤼메노이스

    ‘멸망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아폴뤼메노이스’는

    ‘자신을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시제는 현재형으로

    현재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 인간의 힘만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18절) :

    현재형, 지금 바로 이 순간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

 

- 지혜 있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20절) :

    당시에는 사람들이 신령한 지식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깨닫는 것 자체가 구원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지혜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21절) : 케뤼그마토스

    ‘전도의’에 해당하는 ‘케뤼그마토스’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말씀을 뜻합니다.

    기적을 통한 능력의 방식이나, 현란한 지식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그저 복음을 전하는 소박한 설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을 어리석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이는 이런 말씀 선포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2. 복음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도 전파된다(22~25절)

 

22) 유대인은 표적(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마음에 걸리는 것, 걸림돌)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 어리석게 보여도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여도

            사람의 힘보다 강하니라.)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22절) : 세메이야

    ‘표적’에 해당하는 ‘세메이야’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기적’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이를테면 엘리야가 죽지 않고 산 채로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과 같은

    그런 이적을 요구했습니다.

 

-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22절) :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철학적인 심오함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씀은

    철학적인 심오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믿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23절) : 스칸달론

    ‘거리낌’에 해당하는 ‘스칸달론’은

    ‘실족하게 하는 것,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를 저주받은 자로 생각했습니다(신 21:22~23).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나약함, 무력함(無力함)의 표시로 여겼습니다.

 

-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절) :

     십자가는 옷을 모두 벗긴 채로 죽을 때까지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로,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형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실없는 소리, 미련한 자의 헛소리로 여겼습니다.

 

 

* 묵상 point

 

1.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18절)

 

 1) 멸망과 구원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한낱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이 말씀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구원받는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이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멸망과 구원은 장차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에 나타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래형으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일로 되어 있습니다.

 

 2)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멸망과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멸망과 구원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것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멸망의 시간, 혹은 구원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일상생활 속에 멸망과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직장에서 어떤 사람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 :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이 말씀처럼 같은 자리에서 맷돌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멸망의 시간을, 한 사람은 구원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으로

    구원과 멸망이 이 땅에 함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18절)

 

 1) 멸망과 구원 : 지금 어떤 시간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

 

    구약의 사람들은 구원을 장소와 혈연의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들의 나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으니

    그 성전의 능력으로 자기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멸망과 구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전에 있으면 구원이요 성전 밖에 있으면 멸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멸망과 구원은 시간의 개념입니다.

    어떤 시간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멸망과 구원을 구분 짓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가 살아가는 시간이 멸망이 되기도 하고 구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2)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22~23절)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는 주님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세상 사람들이 놀랄만한 이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으나

    유대인들은 그 기적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결정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엘리야가 죽지 않고

    산 채로 불 병거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과 같은

    환상적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이적은 끝내 보여주시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겼으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3)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절)

 

    헬라인들이 원하는 것은 마음에 감동을 주는 철학적인 심오한 말들입니다.

    자기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에서

    그들은 철학적인 심오함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옷을 모두 벗긴 채로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형벌을 당한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소리를

    실없는 소리, 미련한 자의 헛소리로 여긴 것입니다.

 

묵상 : 구원의 말씀을 걸림돌로 여긴 사람들

 

    이렇게 십자가가 유대인과 헬라인들 모두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나약하고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십자가가 걸림돌이 된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보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가 되십시오.

 

 

3.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니라(24절)

 

 1)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가 되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더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이 내 손아귀에 들어와야 안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님의 약속을 더 신뢰합니다.

 

    약속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2) 십자가의 도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이미 천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21절)

 

 1)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말씀은 이 땅의 사람들을 하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에게 천국의 시간을 살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말씀이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전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회자의 설교가 세상 사람들의 강연보다 훨씬 못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강연을 단 5분만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고 마음에 감동이 생깁니다.

    그러나 설교는 졸리기도 하고,

    뭐 저런 설교가 다 있나 싶은 정도로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2) 소박한 말씀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만일 설교가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엄청난 기적을 행하면서 설교한다면

    그야말로 시청각 교육이 되어 더 많은 사람이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유창한 강연가들처럼 화려한 솜씨로 설교를 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명의 유명한 설교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소박한 설교를 합니다.

 

 3)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21절)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소박하게 전파되는 바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세상의 화려한 것을 찾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지혜를 만날 수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자,

    바로 이런 자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묵상 :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진 자들은

    소박한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자들은

    오직 자기 마음에 감동이 되는 화려한 설교만을 찾습니다.

    당신이 설교를 듣는 자세는 어떻습니까?

 

 

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다들 자기 호주머니 채우기에 바쁜 세상에

    남을 섬기자고 하니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휴일조차 일하고,

    혹은 휴일에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휴식을 취해야

    더 나은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데,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일이 평일보다 더 바쁘니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더라도

    우직하게 오직 하나님만 믿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앙의 질서를 지키며 사는 자들,

    이들이 바로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시간, 천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묵상 :

 

    나는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인지 천국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인지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6. 더 위험한 유혹 :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

 

    흔히 ‘유혹’하면 도덕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유혹은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한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지키는 것과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일이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이 잘 안될 때 내 마음이 괴로운지,

    어떤 것은 잘 안돼도 그저 그렇게 지내게 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은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항상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신령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을 주께 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은

    이 세상의 것에 대하여 항상 관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어떤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묵상 :

 

    마귀는 우리가 세상일에 집착하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유혹입니다.

    소리 없이 살며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단지 관심을 갖기만 하는 것이니 이것은

    죄짓는 것도 유혹에 빠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한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세상일에 분주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 기도제목

 

1. 멸망의 시간이 아니라

   구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2.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더라도

   오직 주님의 말씀만 붙잡고

   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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