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요나의 불평(요나서 4:1~11)
* 본문요약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심판을 내리시지 않자 요나가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는 니느웨가 망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성 밖에 초막을 치고 앉아 성읍을 지켜봅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요나를 시원하게 하자 기뻐하던 요나는
다시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 넝쿨을 시들게 하시자
다시 차라리 죽여 달라며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한낱 박 넝쿨도 아끼는 요나에게
저 큰 성읍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시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찬 양 : 274장(새 497) 주 예수 넓은 사랑
277장(새 499) 흑암에 사는 백성들을 보라
* 본문해설
1.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하는 요나(1~4절)
1)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스페인)로 도망하려 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시 145:8, 출 34:6)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았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이 생명을 취하소서(거두어 가소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나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 심히 싫어하고 성내며(1절) : 바예라, 바이하르
‘심히 싫어했다’에 대항하는 ‘바예라’는
직역하면 ‘그것이 큰 불쾌함으로 요나를 불쾌하게 했다’라는 뜻이고,
‘성내며’에 해당하는 ‘바이하르’는 ‘뜨겁다, 타다’라는 뜻으로,
요나의 분노가 온몸을 태울 정도로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했습니다.
-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2절) : 하눈, 라훔
‘은혜로우시며’에 해당하는 ‘하눈’은
‘조건 없이 베푸는 일방적은 은혜와 배려’를 뜻하고,
‘자비로우시며’에 해당하는 ‘라훔’은 ‘여인의 자궁,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동정과 연민과 긍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 두 단어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끓는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시편 145:8, 출애굽기 34:6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시 145:8)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2.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5~8절)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조막을 짓고,
그 그늘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라.
7) 그러나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갉아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나이다.”
3.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9~11절)
9)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네가 재배한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도 네가 아꼈더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11절) :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는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리킵니다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 묵상 point
1.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하는 요나
1)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성내어(1절)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한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분노하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가 온몸을 태울 정도로,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분노(2~3절)
요나는 자기가 고국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전한 그 말을 통해서 니느웨 백성들을 회개시키실 것이고,
그러면 니느웨 백성들이 용서받고 재앙도 받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이 못마땅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도착해서도
가능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적게 전하려 애를 썼던 것인데,
그가 불과 다섯 마디의 말씀만 전했음에도
니느웨의 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요나는 분노를 느꼈고,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재앙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자비하심에 극도의 분노를 느낍니다.
3)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4절)
이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하고 물으십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을 멸망시키시는 권한이 없겠습니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요나가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누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두고 분노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합당하냐?”
● 묵상 : 요나의 불평을 통해서 본 거짓 그리스도인, 잘못된 경건
요나는 기도하는 사람이요(2절)
하나님을 향한 정기적인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시편 145:8과 출애굽기 34:6의 말씀을 인용할 정도로
말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이런 일들을 근거로
자신을 스스로 충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그가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지옥의 자식이라고 증거합니다.
우리는 요나의 불평을 통해서 거짓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봅니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교회에 다니기만 할 뿐
실제는 지옥에 속한 멸망의 자식들이 누구인지를 요나는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반대하는 자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이신 것은 알지만
그 뜻에 반대합니다.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있으니 지옥의 자식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을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적인 이단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➁ 독점욕과 이기심 : 타인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음
요나는 말끝마다 자기는 여호와의 성전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말 자체로만 보면
이 세상에 요나처럼 신실한 사람은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과시했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 대하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기는커녕 혹시
그들이 단 한 명이라도 구원을 받게 될까 봐 염려하기까지 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오직 자기들만 받아 누려야 한다는 이 영적인 독점욕에서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봅니다.
➂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음에도 자신은 경건한 자라고 생각하는 자
요나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있음에도
자기는 경건한 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실상 지옥의 자식이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나는 혹시 요나와 같은 자는 아닌지 늘 자신을 살피고 또 살펴야 하겠습니다.
➃ 형식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 바리새적인 신앙
요나처럼 기도를 하거나 성경 말씀을 인용할 줄 아는 등
경건의 형식만 갖추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칫 요나와 같은 잘못된 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꾸려 했고,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하시지 않자 분노하기까지 했습니다.
요나처럼 거짓된 신앙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도 잘못된 죄의 때가 낄 수 있음을 깨닫고
늘 겸손하게 말씀으로 나를 비추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박 넝쿨과 벌레
1)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려는 요나의 헛된 열심(5절)
요나서 전체를 통해서 요나가 이렇게 열심을 낸 적은 없었습니다.
배가 큰 풍랑을 만나 깨어질 듯할 때에도 그는 배 밑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었고,
니느웨 성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에도 사흘 길 중에서 하루만 다녔고,
그것도 다섯 마디만 전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성이 망하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성을 가로질러서 사흘 길을 걸어 초막을 짓고 38일을 더 기다립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책망하심에도 니느웨성이 망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망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성(城)을 가로질러서
성 동편 밖에 있는 동산 위에 올라가서 초막을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라 하신 말씀을 전할 때에는 사흘 길 중 하루만 걷더니,
니느웨 성이 망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사흘 길을 온전히 다 걸어서 성 동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루도 견디기 힘든 태양빛을 받으며 남은 38일을 더 기다립니다.
2)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과 요나의 기쁨(6절)
요나가 햇볕의 뜨거움에 견디기 힘들어 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시원한 그늘을 만드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을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크기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즐겁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3) 벌레가 박 넝쿨을 갉아 먹으니 요나가 다시 분노(7~8절)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그 박 넝쿨이 시들게 하시자
요나는 다시 차라리 죽게 해 달라며 또다시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벌레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내리신 그 벌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자기를 불쾌하게 했다며 하나님을 향하여 또다시 분노할 뿐입니다.
● 묵상 : 요나의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본 거짓 그리스도인
➀ 요나처럼 파괴적인 일에 열심인 사람들
오늘날에도 요나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는 데에는 게으른 사람들이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에는 열심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파괴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요나처럼 자기와 같은 뜻은 정의라고 하고,
자기와 다른 뜻은 모두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➁ 자기 생각과 다르면 모두 악이라 규정하는 사람들
요나는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자기 뜻에 동조하지 않는다며
하나님이 악을 행하셨다고 공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검사가 피고인을 추궁하듯 요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호령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신앙관이
바로 이런 자기중심적인 신앙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기중심적인 신앙관을 대단히 싫어하십니다.
혹시 내 안에는 요나나 가룟 유다와 같은
이런 파괴적인 열심이 있지 않은지 나를 돌아봅시다.
➂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에만 열심을 내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에만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바로 요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가령 바울이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에만 열심을 내었다면
그렇게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내가 원치 않는 일이라도 했기에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설교만 듣기를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찬송만 부르기를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봉사하고,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만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한 신앙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렇게 회개 없는 은혜,
용서받지 않은 자의 즐거움을 조장하는 행위는
은혜가 아니라 종교적 감정놀음에 불과합니다.
➃ 종교적 감정놀음에 빠진 자들
이렇게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에만 열심을 내는 자들은
이런 종교적 감정놀음을 하나님의 은혜라 착각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처음부터 자기만족에 있기 때문에
분위기가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참지를 못합니다.
요나처럼 그 일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 감정놀음에 대하여는 디모데전서 3:14~4:5 큐티의 묵상포인트 5번
‘거짓된 경건, 위장된 경건을 조심하십시오’를 참조하십시오).
3.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1) 네가 수고도 하지 않은 것을 그렇게 아꼈다면(9~10절)
박 넝쿨이 자기를 시원하게 할 때에는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리가 없지”하며 만족해하던 그가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단 하루 만에 박 넝쿨을 시들게 하시자
차라리 죽여 달라며 다시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그 박 넝쿨을 위해 요나가 수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씨를 뿌리지도 않았고, 재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시들게 하신다 할지라도
그가 불평할 이유는 없습니다.
2) 12만 명이 넘는 저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1절)
이렇게 그가 단 한 번도 수고한 일이 없는 박 넝쿨에 대하여도
그가 그렇게 아끼며 사랑했다면,
하나님께서 12만 명이 넘는 저 니느웨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 묵상 : 박 넝쿨과 벌레에 모두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박 넝쿨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라면
벌레는 때때로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슬픔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벌레를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때때로 우리의 삶에 고난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나 요나가 벌레를 두고 원망했던 것처럼 삶의 아픔을 불평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윗처럼 아픔과 슬픔에 대하여도 감사합시다.
그래야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기도제목
1. 요나와 같은
자기중심적 신앙태도를
갖지 않게 되도록
늘 말씀에 나를 비추게 하옵소서.
2. 요나와 같이
신앙에 대한 몇 가지 형식만 갖춘 것으로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인 양 여기지 말게 하시고,
다윗같이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3. 세상 모든 만민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