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마가복음 14:66~72)
* 본문요약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안뜰 아래쪽에 있을 때에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베드로도 예수님과 같이 있던 자였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그의 말을 부인합니다.
베드로가 문밖의 바깥뜰로 나가자, 그 여종이 베드로를 따라오면서
이 사람도 그들과 한패라고 말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다시 그의 말을 부인합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가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패임이 틀림없다고 말하자,
만일 자기가 예수님과 한패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자기에게 저주를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때 닭이 두 번째로 울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엎드러져 울었습니다.
찬 양 : 412장(새 290)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416장(새 294) 하나님은 외아들을
* 본문해설
1.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66~70절)
66) 베드로가 집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제사장의 비자(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주목하여) 바라보면서 가로되
“너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그러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하고 말하고는 문밖으로(바깥뜰로) 나갈새
(일부 사본에 이 부분에
“베드로가 문밖으로 나오니 곧 닭이 울더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69) 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이 사람은 저 사람과 한패라)” 하되
70) 베드로가 또다시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인 것을 보니(네가 갈릴리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니)
너도 저들과 한패임이 틀림없다.”
- 여종 하나가 와서(66절) :
헬라어 원어에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가서’로 돼 있습니다.
여종이 베드로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베드로의 앞으로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68절) :
베드로는 예수님을 첫 번째로 부인할 때 ‘알지도 못한다, 깨닫지도 못한다’라는
두 가지 부정적인 말을 계속해서 사용합니다.
그 여종이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말입니다.
2. 베드로의 통곡(71~72절)
71)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까지 하고 맹세하며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노라.
(내가 만일 저 사람을 알면서 지금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하고 말하니
72) 바로 그때 닭이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
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러져 울었더라.
- 저주까지 하고 맹세하며(71절) :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가장 강한 형태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묵상 point
1.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1) 첫 번째 부인否認(66~68절)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안뜰 아래쪽에서
그 집 하인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을 때입니다.
누군가 모닥불에 장작을 더 집어넣어 베드로가 있던 아래 뜰이 환하게 되자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다가옵니다.
그 여종은 베드로에게 바짝 다가와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당신이 저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을 내가 보았는데,
당신 저 사람과 한패 맞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 하겠다”라고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하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인합니다.
그리고는 바깥뜰로 나갔습니다.
이때 일부의 사본에서는 베드로가 그 집의 바깥뜰로 나갈 때에
곧 닭이 첫 번째로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부인否認(69~70절)
베드로가 바깥뜰로 나가자 그 여종이 베드로를 따라오면서
바깥뜰에 있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도 저 사람과 한패라.”
아까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던 이 여종이
베드로가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과 한패라는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여자가 확실하게 베드로가 예수님과 한패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주어서 아니라고 그의 말을 부인합니다.
3) 세 번째 부인否認(71절)
베드로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바깥뜰에 있는 모닥불을 쬐고 있는데,
곁에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말합니다.
“당신이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저 사람과 한패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만일 저 사람과 한패가 맞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이다”하며
저주를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때 닭이 두 번째로 울었습니다.
4) 이로써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을 배반한 자가 됐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10:33)
단 한 번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해도
주께서 심판하시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무려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만일 자기가 예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와 같은 처지가 됐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차라리 나지 않은 것만 못한 자가 됐을 것입니다.
● 묵상 :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매주일마다 주께 예배를 드리며, 주님께 봉사를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며 동시에 다른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 신앙,
예배 의식에만 참여할 뿐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 형식주의 신앙,
본문의 베드로처럼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거짓된 행동을 하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나에게는 혹시 이런 일들이 없는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2. 베드로의 실패의 이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날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는 일이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한낱 계집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며 부인하는 자가 됐을까요?
1) 위기의 경고를 무시했다.
예수께서 그날 밤 그가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그런 위기를 맞을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때
자기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실 것을 간구했어야 했습니다.
그 경고의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이고,
주님의 명령대로 그 시간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주님의 그 경고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런 위기쯤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묵상 :
신약성경은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전체가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날에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겠느냐고 탄식까지 하시면서 그날을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그 환난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그 경고를 가볍게 여겼다가 망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날을 두렵게 여기고 준비하는 자가 되십시오.
2) 위기의 때를 준비하지 않았다 : 믿음과 게으름을 구별하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경고를 가볍게 여겼으니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능히 그 위기를 이기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은
오히려 눈앞에 다가오는 위기를 위해 아주 절박하게 기도하고 계시는데,
정작 그 위기에 대하여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베드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자가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잠을 자는 것은 믿음이라 할 수 있지만,
베드로처럼 전혀 준비되지 않은 자가
그날의 위기를 위해 준비하지는 않고 잠에 빠진 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3) 근거 없는 자신감의 위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 잘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근거 없는, 대책 없는 게으름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그곳에 있던 여부스 사람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지리적 특성만 믿고
그 누구도 자기들을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가오는 위기를 위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순식간에 다윗에게 망하여,
그 도성이 다윗의 도성인 시온성이 됩니다.
주일 예배도 드리지 않고 있으면서, 말씀 묵상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봉사도 하지 않으며,
아주 작은 시험 거리만 있어도 어김없이 시험에 들고,
시도 때도 없이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고 있으면서
그날에 대한 준비가 다 된 것처럼 여기고 안심하는 자들은
참으로 대책 없는 자신감입니다.
주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그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그것을 도와주실 것을 주께 간구하지도 않고 있으면서 맥 놓고 사는 자들 역시
정신없는 자의 미련한 자신감입니다.
● 묵상 :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사고에 대하여 전혀 준비하지 않은 자들이 술에 취하거나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대책 없는 자의 게으름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환난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수도 없이 경고하고 또 경고한 그날의 위기를
베드로처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날을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는
졸지에 그날을 맞아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 슬픔의 통곡의 함정 : 베드로의 통곡은 회개가 아니다
1) 베드로의 통곡(72절)
베드로가 세 번째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한 후에
곧바로 닭이 두 번째로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엎드러져 울었습니다.
눅 22:62에서는 그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2) 그러나 자기 연민에 따른 통곡은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의 슬픔이나 통곡은 결코 회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다가 눈물이 나는 것을 회개로 착각해서는 큰 낭패를 당합니다.
그것은 그저 눈물이고 슬픔입니다.
만일 눈물이 회개라면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회개일 것입니다.
이런 슬픔을 회개로 몰아가는 헛된 종교적 감정놀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3) 이후로 주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적 의식에만 참여한 베드로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를 만나
세 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실 때까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기까지 마음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고기 한 마리 잡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의미 없이 밤새도록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일을 계속했습니다(요 21:1~3).
이렇게 슬퍼하며 울다가 다시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 의미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을 회개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슬퍼하며 울다가 다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슬퍼하며 울다가 다시 죄의 즐거움에 빠지며,
슬퍼하며 울다가 다시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세상 사람들처럼 광란의 춤판을 벌인다면 그것이 어찌 회개이겠습니까?
● 묵상 :
➀ 진정한 회개 없는 단순한 슬픔이나 통곡은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말씀을 듣거나 찬송을 부를 때
슬픔의 눈물을 흘렸거나 기쁨의 감동을 받았을 때
이것을 은혜받은 증거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일 뿐입니다.
물론 슬픔의 눈물이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슬픔없는 회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로 나아가지 않고 그 슬픈 감정에만 머문다면
슬픈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쁜 감동을 받았을 때에도
그 기쁜 감동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참된 예배와 찬양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감정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➁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 절박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애통이란
뼈가 녹아내릴 것 같은 아픔을 동반하는 슬픔입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통증을 느끼는 그런 슬픔과 애통입니다.
내가 그런 죄를 범한 자라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견딜 수 없는 그런 슬픔과 애통입니다.
그저 베드로처럼 자신의 일을 후회하며 통곡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죄의 습관들을 이처람 아파하십시오.
그리고 그 저주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을 간절하게 기도드리십시오.
마가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열망과 열정’입니다.
중풍병자의 열망, 수로보니게 여인의 그 간절한 열망,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그 간절한 기도를 배우십시오.
베드로가 실패한 것은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그 죄의 습관을 고치지 못하더라도 이 간절한 기도는 있어야 합니다.
당장 그 죄를 멈출 힘도 없으면서
주께 간절히 기도도 하지 않는다면, 이 간절한 기도조차 없다면
망하는 길로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➂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 :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들 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음이 공허하고 답답한 중에도 제자들 틈에 머물렀고,
가룟 유다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제자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그들 틈에 머물렀다면,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그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면,
가룟 유다 역시 베드로처럼 사도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공허하고 답답할지라도 믿음의 자리,
성도들과의 친교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그렇게 믿음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베드로처럼 영을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 기도제목
1. 마지막 때에 대한
주님이 경고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2. 베드로처럼 그날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졸지에 망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3. 아직 고치지 못하고 있는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절함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