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가복음 2:13~22)
* 본문요약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레위(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하고 말씀하시자 그가 곧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자
수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바리새인에 속한 서기관들이 이 장면을 보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쓸 데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자제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혼인집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고,
생베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기울 수 없으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찬 양 : 410장(새 310) 아 하나님의 은혜로
408장(새 302)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 본문해설
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13~17절)
13)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가시매
큰 무리가 다 예수께로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하시니 그가 곧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니라.
15) 예수께서 그(레위)의 집에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한자리에 함께 앉아 있으니
이는 그들이 많이 있어서(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이 예수님을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에 속한 서기관(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음식을 먹는가?”
17)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레위(13절) :
마태가 주님을 만나기 전의 히브리식 이름이 레위입니다.
주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마태’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 함께 앉아 있으니(15절) :
옆 사람의 허벅지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함께 들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항상 옆 사람에게 기대로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습니다.
- 함께 음식을 먹느냐(16절) :
고대 사본에는 ‘함께 먹고 마시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2. 금식 문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8~22절)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할 수 있겠느냐?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천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헤어짐이 더 심하게(더 심하게 찢어지게) 되느니라.
22)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던 어느 날(18절) :
유대인들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유대 종교력으로 7월 10일)에 한 번 금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해가 뜬 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금식을 했습니다.
-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절)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에는 금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금식일인 대속죄일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을 금식일로 지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에는
그 슬픔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자연히 금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2절)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여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리게 됩니다.
그러면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되므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발효를 이기고 터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신앙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뜻합니다(묵상포인트 4번 참조).
(포도주의 새 부대와 헌 부대의 그림)
* 묵상 point
1.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1) 레위(마태)를 부르신 예수님(14절)
예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하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마태(레위)가 곧바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당시 세리는 살인자나 우상숭배자나 간음자와 같이 취급받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는 자들을 주께서 부르십니다.
2)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15절)
그리고 그날 마태(레위)의 집으로 가셔서 그와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때 마태뿐 아니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왼쪽에 있는 사람에게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바로 예수님이 그들의 허벅지를 베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허벅지를 벤 상태로
그렇게 서로 비스듬히 누워 그렇게 함께 식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계신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2.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17절)
예수께서 세이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이 장면을
바리새인에 속한 서기관(율법학자)들이 보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의 선생은 어찌하여
저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냐”며 비난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쓸 데 있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여기에서 ‘건강한 자’는 ‘자기 힘으로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켜서
하나님의 그 어떤 도움도 필요 없다고 여기는
바리새인 같은 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에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기의 의와 자기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신앙의 엘리트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 병든 자라야 쓸데 있느니라
‘병든 자’는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조차도 지킬 힘이 없는 연약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미 죄에 중독이 되어 죄와 허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죄악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반복해서 짓는 그 죄의 억압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이런 신앙의 실패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3)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기들이 의롭다고 여기고 주께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의에 빠져
주께 도움을 청하지 않는 자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주님 앞에 나와 그 죄를 자백하며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구하는 자들을 주께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의 억압에서 벗어날 힘이 없는 신앙의 실패자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주님 앞에 나와서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회개하며 부르짖는 일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도움을 청하는 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자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처럼
자기의 의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당당한 자들에게는 진노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 묵상 :
➀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고 주의 도우심을 청하는 자들을 주께서 도우십니다.
로마 정부로부터 청부받아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온갖 수탈을 일삼던 살인한 자와 다름없는 세리 마태도
예수께서 부르셔서 제자 삼으셨습니다.
여섯 남자와 사귀고도 모자라 또 다른 남자를 탐색하던
수가성 우물가의 그 부정한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됐습니다.
음란한 삶을 살다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 정결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됐습니다.
➁ 그러나 주께 도움을 청하지 않는 자들은 버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자라 할지라도,
사람들끼리 비교할 때 깨끗한 것이지
하나님의 수준에까지 이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깨끗할 수도 정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를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금식 문제
1) 바리새인들의 금식 : 외식(外飾)하는 신앙(18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던 어느 날
몇몇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찌 금식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금식은 대속죄일(유대 종교력으로 7월 10일)에 하루 금식합니다.
대제사장이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해가 뜨는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낮 동안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간절함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금식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금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허기진 사람처럼 행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신앙을
외식하는 신앙이라 하여 크게 진노하며 책망하셨습니다.
2)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겠느냐(19절)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어찌 금식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마지막 때 주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그리스도인과 예수님 간의 마지막 혼인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를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잔치 중에서 혼인잔치가 가장 기쁘고 행복한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이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왕의 잔치에 참여할 때 그날의 감격과 기쁨과 행복을
혼인잔치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를 그 기쁨의 나라로 인도할 주님이 옆에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 슬픈 사람들처럼 금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 백성 삼으셨는데 슬퍼할 까닭이 없습니다.
3)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인데,
그날에는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고,
그날에는 제자들이 슬픔에 자연히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금식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찌 금식할 수 있겠느냐?”하고 다시 질문하신 예수님은
다음 두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1) 생 베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이 없나니(21절)
첫째 비유는 생 베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천 조각이 헌 옷을 잡아당겨
그 찢어짐이 더 심해져서 결국 옷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옷 자체를 바꾸어야지
헤어진 부분만 적당히 깁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2절)
둘째 비유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 작용 때문에 아주 강하게 부풀게 되는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면 그 발효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서
결국 가죽 부대도 버리고 그 안에 담긴 포도주도 버리게 됩니다.
3) 단순히 금식일이 대속죄일에서 성금요일로 날자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위의 두 비유는 예수께서 주신 복음의 말씀은
구약의 율법과는 그 근본부터 다른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금식일을 대속죄일에서 성금요일로 바꾼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토요일 안식일에서 일요일인 주일로 예배드리는 날만 바꾼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모든 율법을 지켜야 했으나
이제는 예수께서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회개를 도우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도우십니다.
주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신실하게 살도록 도우십니다.
4) 새 포도주 : 신앙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 기쁨과 감사의 종교로
무엇을 지켜야만 하는 율법의 종교에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복음의 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께 대한 갈망과 사랑입니다.
간절히 그분을 구하고 찾으면 주께서 다 이루십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죄일에 하던 금식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에 금식하는 것으로 바뀐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내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구하는 자에게 주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5) 기독교는 기쁨과 감사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기쁨과 감사의 종교입니다.
죄 사함의 기쁨, 구원받음에 대한 기쁨,
영생을 주셨음에 대한 즐거움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는 종교입니다.
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부활의 기쁨보다 사순절의 슬픔이 가득한 교회가 됐습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을 성령강림절까지 50일을 지켰는데,
요즘엔 부활절은 단 하루만 하고
사순절을 40일간(주일까지 합하면 46일간) 지킵니다.
예배가 부활의 기쁨이 아니라 장례식 분위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쁨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슬픔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 묵상 :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와 은총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기쁨과 감사와 사랑을 채우십니다.
그래야 그 기쁨의 능력으로 마지막 때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신앙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성령을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오직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이 일 이외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다른 길은 없습니다.
* 기도제목
1. 주님의 성령을
우리에게도 충만하게 내려 주옵소서.
2. 그래서 우리도 주께서 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경배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3. 내 의를 자랑하는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와 함께 동행하는
건강하고 신실한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