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그리스도인의 자유(갈라디아서 5:1~12)
* 본문요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할례를 받겠다는 사람은
할례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자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율법을 지키는 일을 통해서 의를 이루려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주님의 은혜에서도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성도를 요란하게 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자는 차라리 스스로 교회를 떠나 멸망하는 자들에게 갔으면 좋겠습니다.
찬 양 : 427장(새 191) 내가 매일 기쁘게
495장(새 438) 내 영혼이 은총 입어
* 본문해설
1. 주께서 주시는 자유(1~4절)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런 자는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 시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뜻하므로,
이런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 그런 자는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자라(3절) :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는
할례 하나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율법 전체를 항상 다 지켜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할례를 받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만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4절)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할례나 안식일이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주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자가 됩니다.
2.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5~6절)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설명 :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얻는 의의 소망을(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이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로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3. 부패한 누룩을 제거하라(7~12절)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진리의 말씀을)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런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다른 아무 생각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혼란에 빠뜨리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그리하였다면 내가 전하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차라리 그 지체를 잘라 버렸으면 좋겠노라).
- 요동하게 하는 자(10절) :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복음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
- 차라리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절) :
그렇게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된 말을 할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교회를 떠나 우상에게로 갔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 묵상 point
1.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왜 할례에 집착하는가?
1)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방문하는 유대주의 기독교인들
갈라디아 지역은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넓은 지역입니다.
그 넓은 지역에 교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나마 우리가 보는 교회처럼 교회당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대개의 경우 성도들 중에서 조금 큰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형편이었고,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 된 상황도 아니니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모두 방문한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은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여 복음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열정과 열심입니다.
2) 이들이 이렇게 할례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구원을 단번에 끝내려는 것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할례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의를 얻는 표식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죄에도 변하지 않는 표식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할례는 일단 한 번 받으면 그 할례의 흔적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구원의 표적을 갖기를 원한 것입니다.
➠ 단 1회적 사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이유는
육체의 욕망의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이 욕망이 나와 나를 사로잡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과정, 구도자의 과정은
끝없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죄의 독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때로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이 과정을 우리는 평생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육체의 죄를 마음껏 범한다고 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의의 표적이 있다면,
그것도 단 한 번 만에 내가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기가 막힌 증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유혹이 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할례를 받으라 했고,
또 갈라디아의 많은 사람들이 그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 묵상 :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기독교 복음 침례회’라는 구원파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교주에게 재산을 바치면
구원을 받았다는 확증적인 날자와 시간을 제시하여 줍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는 확증을 받은 자들은 이미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육체로 범하는 죄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본문의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의 할례 문제와 같은 이유입니다.
육체적 욕망과 상관없는 의의 표식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파고든 거짓된 사술(邪術)인 것입니다.
2. 구원을 얻는 길의 첫째 : 죄사함
1)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 하나님의 신실하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처럼 죄가 하나도 없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지극히 작은 죄와 흠결만 있어도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서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지는 죄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2)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첫째 조건, 죄사함
이 땅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방법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용서받는 방법뿐입니다.
3) 죄사함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벌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그가 무슨 죄를 지었든 다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모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죄사함의 문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3. 구원을 얻는 길의 둘째 : 의를 이루는 것
그러나 한 가지가 남아있습니다.
의를 이루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두 가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 번째 잘못한 것을 용서받는 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가 남았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의(義)’입니다.
1) 의를 이루는 일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5절)
그런데 남은 한 가지 ‘의를 이루는 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의를 이룬 것으로 여기시겠다고 하나님의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예수께서 가지신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자격이 없지만,
예수께서 가지신 그 완벽한 의를 선물로 받아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의를 이룰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십니다(5절)
믿음이란
내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믿음입니다.
주께 예배를 드리고,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도록 도우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도록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십니다.
3) 믿음의 삶은 ➠ 이 땅의 것에 집착하게 하려는 악한 영과의 싸움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죄의 연약함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란 우리도 때때로 죄를 범하는 연약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땅의 것에 집착하려는 유혹을 뜻하기도 합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 이런 것들에 대한 유혹을 우리도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땅의 것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4) 성령께서 이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5절)
우리는 평생 이 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 싸움은 참으로 지독한 것이어서
우리가 단 며칠만 주님과 동행하기를 멈추어도 악한 영이 우리 안에 죄의 독을 넣어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고 죄를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셔서
의를 얻는 소망을 이룰 날, 영생을 얻는 그날을 바라보며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시며(딛 3:5~6)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되도록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십시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나의 영을 씻어 건강하고 신실한 영을 가진 성도가 되십시오.
● 묵상 : 주 안에서 주와 함께 교제하며 사는 것 ➠ 이것이 자유입니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주님을 믿음으로 의를 이룹니다.
이 믿음은 한 번만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이루어갑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 또한 율법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도우시니 우리는 그 속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니 자유입니다.
지금만 기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기쁨과 행복 가운데 있게 되니
참 자유인 것입니다.
4. 복음이 자유가 되는 것은
1) 할례야말로 부자유요, 억압인 이유 : 율법의 모든 것을 지켜야 하므로(3~4절)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은 일단 할례를 받으면 그가 후일 육체의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할례’라고 하는 의의 표징, 구원의 표적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들은 할례야 말로 자유라고 말합니다.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의 할례를 의로 인정하지 않으시니
그들이 범한 죄는 후일 모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할례야말로 부자유이고 억압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끊어지고 주님의 은혜에서 떨어졌으니,
그들에게 기쁨이 없고, 억압과 공허만 있고, 의심과 질투, 반복과 다툼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누가 죄를 범하는 이가 없나 하고 다른 사람을 감시합니다.
그러다 누군가 그들의 눈의 표적에 걸리면 동네방네 다 알려 수치를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서서히 서로 괴로움을 주다 파멸에 이르는 자가 됩니다.
2) 복음이 자유가 되는 이유 : 하나님께서 참 기쁨과 참 소망을 주시므로
주께서 주시는 자유는 이 자유는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방종의 자유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느끼는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경험하고 누릴 때 느끼는 자유입니다.
영생의 복을 소망하는 자가 느끼는 자유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의 평안을 주십니다.
복음이 자유가 되는 것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행복 안에서 느끼는 자유,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입니다.
주께서 내 안에 기쁨을 주셨으니 빵 한 조각만으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주께서 내게 행복을 주셨으니 시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5. 모든 불안감에서 해방되십시오.
1)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싸일 때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한 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에릭 프롬(Eric Fromm)은
사람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불안감이 생기고, 그때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2) 하지만 우리의 미래 자체가 불안 덩어리입니다.
에릭 프롬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들이 만들어 내는 불안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 자체가 불안 덩어리입니다.
세월호가 그렇게 참혹하게 넘어지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이태원 거리를 걷다가 그리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죽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불안한 것은 미래 그 자체입니다.
내일의 일을 모릅니다.
내일 우리가 헤쳐 나갈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불안합니다.
● 묵상 :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일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주께서 그날의 염려는 그날에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내일을 보장해 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안감을 떨쳐버리십시오.
주께서 당신을 인도하십니다.
6. 그러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 바울에 대한 오해 : 죄의 용서와 은혜를 방종으로 잘못 이해
우리는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도덕적 타락을 조장하는 말이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마음껏 살아도 된다고 오해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바울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경고합니다(1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다시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에는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그 죄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할 때마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씻는 것처럼
날마다 회개를 하여 영의 더러움을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영을 항상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 묵상 :
만일 이렇게 주님의 피로 우리의 영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죄가 우리에게 악한 독을 심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기를 싫어하고,
죄를 더욱 즐거워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귀찮은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고, 이 일로 우리가 영이 건강한 자가 됩니다.
7. 만일 할례를 전하였다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을 것이라, 그러나 ~
1) 유대인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을 가장 큰 수치와 저주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을 갖는 데 아주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2) 만일 바울이 이방인도 할례를 받도록 허락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그렇게 거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11절).
만일 바울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가 곧 그들의 자부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자는 왜 할례 문제를 집착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고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얻기 위해 할례를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할례를 허용하면 더 많은 유대인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울이 끝까지 할례를 거부한 것은,
할례를 허락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묵상 : 교회 부흥을 위해 우리가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에서 주초(술과 담배)를 허용하고 제사 지내는 것을 허용하니
가톨릭이 요즈음 크게 부흥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허락해야 한다는 말이 들립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부흥을 위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 일이 예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겠지만,
예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 기도제목
1.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2. 모든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날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만 열중하게 하옵소서.
3. 성과를 내기 위해서나 효율성을 핑계로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