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3 : 요한계시록 4~22장, ‘오늘’이라는 시간의 의미
1. 요한계시록 4장 이하의 예언 부분을 보는 법
• 요한계시록 2~3장과, 4장 이하인 예언 부분과의 관계
앞서 부록 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그가 목회하던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격려와 위로와 경고의 편지이고,
그 모든 내용이 요한계시록 2~3장에 있습니다.
만일 요한이 요한계시록 중에서 아주 일부분만 편지로 보낼 수 있었다면
요한은 1~3장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왜 2~3장에서 이미 할 말을 다 했으면서
훨씬 길게 4~22장에서
인류의 마지막 때를 연상하는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까요?
다음 몇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모든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극도로 공포에 싸여 있는 사도 요한의 성도들(일곱 교회)
사도 요한이 목회를 하던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지금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의 엄청난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전에 우리나라도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여파로
사람들이 많이 붐비던 관광지마저 인파가 뚝 끊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피해가 적었음에도
초기에는 병을 옮긴 사람에 대하여
나라 전체가 다 흥분하여 비난할 정도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주께 예배드린다는 이유만으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확률로도 그렇게 두려워하였는데
요한 시대의 사람들은 붙잡히면 곧 죽음이었습니다.
2) 이 두려움 속에서 믿음을 포기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믿음마저 변질되고
이 두려움 속에서 많은 사람이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나마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여 변질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곧 오신다는 것입니다.
3) 이 상태로 주께서 오시면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가 죽는 때를 맞춰서 오실 계획이셨으니
그 계획대로 오셨다면 정말 긴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또 주께서 받으실만한 신실한 믿음을 갖기에 힘쓰라는 말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4) 이에 요한은 성도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전합니다.
➠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가 가는 천국에 대하여, 그리고 주의 다시 오심에 대하여
요한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다 순교를 당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천국(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곳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마지막에 있을 주님과의 혼인잔치(메시야잔치)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증거합니다.
5) 그 과정에서 있을 혼란과 핍박을 일곱 인(印),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설명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시점의 기준점을
도미티안 황제의 죽음에 두고 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가 죽은 후 주께서 오실 때까지의 시간을
‘1000년 왕국’이라는 비밀 은어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날까지 모든 핍박과 재앙이
지구의 4/1, 지구의 3/1, 지구 전체로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간다는 것을
일곱 인(印),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구 전체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지구 전체가 아니라,
도미티안 시절 로마가 점령한 세상 전체를 뜻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로마가 점령한 세상이 지구 전체인 줄 알고 있었고,
그 끝에 있는 스페인을 지구 끝에 있는 나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주의 재림의 때가 연기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로켓이 발사되기 전에 카운트다운을 하다가 멈춘 것과 같습니다.
만일 중간의 어느 곳에서 문제가 있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카운트다운을 할 것이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냥 멈춘 것이라면 멈춘 그 지점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의 때 도미티안까지 죽어 모든 것이 다 끝이 났지만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 어디까지가 요한의 때이고, 어디까지가 마지막 때인가? ●
그러면 주님의 재림의 때는 요한계시록의 어느 부분에서 멈춘 것일까요?
우리들 중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➀ 요한계시록에 대한 여러 학파가 있으나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여러 학파가 있고
각 학파마다 나름대로 인류 종말에 대한 시나리오를 말하지만
그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부분에서 정확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➁ 그러므로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며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요한의 때처럼 일곱 인(印),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과정을
모두 진행하시면서 재림의 때를 맞이하실지,
아니면 멈춘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 도적처럼 갑자기 오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모든 것이 요한의 때에 다 끝나고
주님 오시는 것, 이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최악의 경우입니다.
준비할 시간이 없이 느닷없이 그날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볼 때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요한의 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고 이 말씀을 대하여야 합니다.
이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주님 오실 날도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고 세상에만 빠져 있다가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멸망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주님 오시는 일뿐입니다.
그날이 오늘이 될 수도 있는 영적인 긴장감으로 살아가십시오.
2. ‘오늘’이라는 시간의 의미
우리가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이 지구에서 사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오늘의 시간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오늘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의 시간
지금도 하나님 보시기에 말할 수 없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만,
전에 어느 때에는 하나님 앞에 더욱 부족한 때가 있었습니다.
늘 불평과 원망에 빠져 있었고,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지던 그때
만일 그때 그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면
저는 지금쯤 멸망의 자리에서 영원한 고통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도 이 땅에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그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아직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았다는 것은
주께 그 죄를 치유 받을 기회가 여전히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 오늘은 나의 영원한 호적을 바꿀 수 있는 시간
내가 용서받고 주께 그 믿음을 인정받는다면
‘지옥’으로 되어 있던 나의 호적이 ‘천국’으로 바뀝니다.
나의 영원한 호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땅의 시간, 즉 ‘오늘’뿐입니다.
내일은 나의 호적을 바꿀 시간이 나에게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지옥으로 되어 있는 나의 호적을 바꿀 시간은 오직 오늘뿐입니다.
어느 날 주께서 부르셔서 오늘의 시간이 마감되면
나는 영원히 호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내가 살아있습니다.
아직 나의 호적을 바꿀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 내가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사랑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나고 감사한 일입니까?
3) 오늘은 나의 이웃인 저 사람의 호적도 바꿀 수 있는 시간
오늘은 나의 호적뿐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저 사람의 호적도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여 그도 죄를 용서받고 그 믿음을 인정받으면
그의 호적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주의 부르심을 받아 오늘의 시간이 마감되면
아무리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내가 아직 저 사람들을 바꿀 시간 속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직 주를 위해 일할 시간 속에 내가 남아 있습니다.
이 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 묵상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땅의 일을 하느라 이 은혜와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이 땅의 일을 하느라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담긴
이 엄청난 보석 같은 일들을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땅의 일 때문에 근심과 절망에 빠져
아직 자신이 저 영원한 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까?
그때 주님 앞에서 “주님 용서해주세요”하고 말할 때
주께서 “네가 땅에서 그 말을 했더라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신다면
그 절망감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바꿀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 날이 내일 끝날지 모레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날마다 오늘 밤이 나의 마지막 밤이라 여기고
매일 그날그날을 주님 앞에서 정리하고
날마다 내 안에 신령한 것을 채우며 사는 건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