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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큐티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자(히 10:19~31)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4.05.13|조회수108 목록 댓글 0

* 오늘의 말씀 :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자

                     (히브리서 10:19~31)

 

* 본문요약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께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주님의 피가 뿌려지고 우리의 몸이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모이기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진리를 받은 후 고의로 죄를 범하면 더욱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찬 양 : 184장(새 252) 나의 죄를 씻기는

          444장(새 390) 예수가 거느리시니

 

 

* 본문해설

 

1.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자(19~25절)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담대한 마음)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휘장을 뚫고)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살아있는 길)이요,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큰(위대한)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죄악 된 양심, 죄에 오염된 악한 양심)의 악을 깨닫고(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신실하신 분이시니),

     움직이지 말고(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아(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키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한 일들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중단하는, 소홀히 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격려하여(권면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더욱 모이기에 힘쓰자).

 

-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절) :

    성소는 구약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휘장 안의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으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이 곧 지성소입니다.

 

- 새롭고(20절) : 프로스파토스

    ‘새롭고’에 해당하는 ‘프로스파토스’는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 새로 건립된’으로

    예수님의 희생과 새 언약으로 주어진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산 길 :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손을 붙잡고 그 나라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길입니다

 

- 산 길(20절) : 조산

    ‘산 길’에 해당하는 ‘조산’은 ‘살아있는 길’을 뜻합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살 길’로 앞으로 살 길이라는 미래형으로 번역했으나

    현재형으로 ‘살아있는 길’이 더 합당한 번역입니다.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손을 붙잡고 그 나라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 참 마음(22절) : 순전한 마음.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간절한 마음.

- 온전한 믿음(22절) :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 그리스도를 확실히 신뢰하는 믿음.

 

- 굳게 붙잡아(23절) :

    있어야 할 자리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주님을 믿는 믿음과 주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합니다.

 

- 서로 돌아보아(24절) :

    저 사람에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지, 내가 도울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서로 생각하고, 서로 관찰하라는 뜻입니다.

 

 

2. 불경건에 대한 심판(26~31절)

 

26) 만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가르침을 받아서 진리를 깨닫고도)

     짐짓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고의로, 일부러 계속하여

     죄를 범한다면 다시는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드릴 수 있는 제사가 없고)

27) (남은 것은) 오직 무서운(두려운)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반역자)들을 삼켜버릴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도)

     두세 증인만 있으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모독한)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거운(무서운, 가혹한) 것이 될 것인지를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신 32:35)라고 말씀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리라”(신 32:36)

     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아노니

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 가는 것(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무서울진저(정말 무서운 일이라).

 

-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26절) :

    히브리서 6:4~6의 본문해설을 참조하십시오.

 

- 짐짓 죄를 범하면(26절) : 헤크시오스, 하마르타노

    ‘짐짓’에 해당하는 ‘헤크시오스’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고의로, 의도적으로’이고

    ‘죄를 범하다’에 해당하는 ‘하마르타노’는

    ‘표적을 놓치다, 실수하다, 잘못 행동하다, 위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고의로 하나님이 규정하신 것을 위반하고 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15:30에서 ‘짐짓, 고의로’에 해당하는 ‘베야드 라마’는

    ‘높은 손으로, 손을 높이 들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고의로 죄를 범하는 ‘고범죄’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저지른 죄와,

    죄를 짓고 난 후에도 전혀 두려움이나 슬픔이 없고

    회개하지 않고도 당당한 죄를 가리킵니다.

 

-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6절) :

    이렇게 죄를 범하고도 그 어떤 두려움이나 슬픔도 없고, 회개도 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 죄를 당당하게 여기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를 용서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심하게 멸하고 훼방하는 자이니,

    그런 자에게 예수님 이외의 또 다른 희생 제사는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마지막 은혜인데,

    그 은혜를 스스로 버렸으니 이미 심판을 받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 묵상 point

 

1. 그러므로 더욱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1)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19절)

 

    주께서 우리가 받을 벌을 모두 다 받으셨으므로

    죄에 대한 모든 빚이 다 갚아졌습니다.

 

    우리의 죄는 모두 용서되었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하신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로 인정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는데,

    우리는 그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2)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20절)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졌습니다.

    꼭꼭 닫힌 대문이 열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누구든, 어떤 죄를 지은 자이든 상관없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3)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할 인도자가 예비 되었습니다 : 새롭고 산 길(20절)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도 얻었고,

    그 앞으로 나아갈 길도 열렸으나

 

    여전히 우리는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잘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할 아주 훌륭한 인도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새롭고 산 길입니다.

    살아있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주의 성령께서 우리 손을 붙잡고 가시니 살아있는 길입니다.

 

묵상 :

 

    예수님의 피로 우리 앞에 가로막혔던 장애물이 다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가령 불난 집에 소방대원이 길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그 길을 향하여 달려 나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열어 놓으신 신앙의 대로를 행하여 힘써 달려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으므로

    그의 백성들(성도들)은 결코 신앙의 나태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더욱 힘써 주님을 찾고 부르십시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만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2.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이 세상은 물론

    신앙의 세계도 대단히 혼탁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점점 시끄러워질 것이고, 믿는 자들의 생활태도가 점점 나태해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고 멍하니 있다가는

   “저 사람도 그러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휩쓸려 믿음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모이기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1) 서로 돌아보고(24절)

 

    성도들끼리 서로 관찰합니다.

    무슨 죄를 범했는지를 서로 감시하고 살피라는 말이 아닙니다.

    혹시 누가 힘들어하는 사람은 없는지,

    혹시 내가 무엇을 도와줄 일은 없는지 서로 살피고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걱정해 주고 살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또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혼란의 때에는 결코 혼자서는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 여기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서로 선한 일을 격려하며(24절)

 

    주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함께하십시오.

    나 혼자 하면 “아무개가 한 일이다”하며 그 일을 한 그 사람에게만 영광이 되지만,

    성도들이 함께 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런 일도 하네”하고 말하니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착하고 선한 일을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십시오.

    전도는 선하고 착한 일로 하는 것입니다.

    전도지 몇 장으로 전도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착하고 선한 일을 지속해서 하십시오.

 

 3)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25절)

 

    교회(에클레시아)는 ‘모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함께 주님을 섬기는 그 모임 자체가 교회입니다.

    건물은 ‘예배당(禮拜堂)’일 뿐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잘 모이면 믿음도 자랍니다. 잘 모여야 공동체도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기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3. 신앙의 타락은 나태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앙의 타락은 나태함에서, 모이기를 싫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짐짓 죄를 범하는 일도

    결국 모이기를 폐하는 대단히 잘못된 습관에서 비롯됩니다(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은

    대개 다음과 같은 일들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1) 인터넷 예배의 위험

 

    일부의 사람들이 공동예배 없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에는 코로나 19사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만,

    코로나와 같은 상황이 아닐 때에도 아예 공동예배를 거부하고

    다른 교회의 예배 실황을 집에서 편안히 예배드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귀찮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도 섬김을 받는 것도 싫고 그저 혼자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신앙 습관입니다.

    주께 드리는 예배는 함께 모여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든지 감옥에 있든지 최근 코로나로 모이기에 힘들었던 경우처럼

    주께서 인정하실 만한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혼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께 예배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주님의 백성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2) 개인적인 불쾌감 때문에

 

    교회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간섭하기도 싫고 간섭받는 것도 싫어

    그저 나 혼자 조용히 신앙생활 하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인들 역시 육신을 입은 사람들이라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인간관계로 인한 여러 문제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의 환경이나 인간관계로 인한 개인적인 불쾌감 때문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 역시 위험한 신앙 습관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을 속상하게 해 드리는 일이고,

    마귀만 즐겁게 하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저 사람을 위해서도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내 개인감정보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받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고

    나를 이 교회에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

    단지 내가 저 사람 보기 싫은 것 때문에 함께 예배드리는 자리를 피하는 것은,

    예배는 드리고 싶은데 예수님은 싫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3) 신앙을 고상한 취미로 여기는 태도

 

    신앙생활을 그저 고상한 취미 정도로 여기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서

    기분 내키면 가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도

    아주 위험한 신앙 습관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모두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4) 주변의 강요에 의하여

 

    히브리서 공동체의 경우 박해나 핍박으로 인하여

    모이기를 두려워하다가 신앙의 나태에 빠졌습니다.

 

    주일에도 일하는 직장이라면 직장을 그만두십시오.

    주께서 새로운 일거리를 주실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 목숨까지도 거는 마당에

    직장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코로나 19 사태때 모이기 힘들었던 그 습관으로

    여전히 교회마다 모이기에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신앙이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믿음 지키는 사람이 되십시오.

 

 5) 세상일에 분주하여

 

    또는 자신의 일로 분주하여 주님을 만날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결국 신앙의 나태함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일이 바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주께 향해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밥은 먹고 잠은 잡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중요한 모임에는 참석합니다.

    그러면서 사사건건 예배에 빠지고 주님 섬기는 일에만 바쁜 일 핑계를 댄다면

    주님께로부터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묵상 :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주께 드리는 예배는

    항상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공동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성도들이 함께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인의 감정이나 마음의 불편함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4.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14절에서 우리가 이미 주의 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주의 은혜를 잃고 다시 멸망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26절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은 무서운 말로 경고합니다.

 

 1) 용서받지 못하는 죄 : 짐짓·고의로 저지른 죄(26절, 참조 : 민수기 15:30~31)

 

    본문 26절의 ‘짐짓 죄를 범하면’의 헬라어의 뜻은

    ‘그것이 죄인 줄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범하는 죄’를 뜻합니다만,

 

    민수기 15:30에 기록된 ‘짐짓, 고의로’에 해당하는 ‘베야드 라마’는

    ‘높은 손으로, 손을 높이 들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본문 히브리서 10:26과 민수기 15:30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고의로 죄를 범하는 ‘고범죄’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저지른 죄와,

    죄를 짓고 난 후에도 전혀 두려움이나 슬픔이 없고,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도

    죄에 대한 수치심도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 앞에 당당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자는 그가 저지른 죄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훼손한 자로 여김 받아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자가 됩니다.

 

 2) 그 차이는 죄를 범한 후의 태도입니다.

 

    용서를 받는 죄와 용서받지 못하는 죄의 차이는

    처음부터 그 죄를 계획적으로 범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계획적으로 죄를 범하였더라도

    그 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게 되지만,

    자신이 연약하여 유혹을 받아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 죄를 당연하게 여기고, “뭐 나만 이러나?”하면서

    하나님 앞에 당당한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3)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6절)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은

    이런 자를 다시 용서하게 하는 또 다른 희생 제사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서도 신앙을 멀리하였으니,

    이런 자들이 용서받으려면 하나님께서 또다시 예수님을 보내셔서

    또다시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해야 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마지막 은혜이니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물론 이런 자들도 회개하고 주께로 다시 나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주님의 은혜의 자리를 멀리하고 있으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주님을 멀리했으니 예수님의 피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29절)

 

    짓밟는다는 것은 멸시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였고,

    죄를 범한 후에도 그 구원의 말씀을 멸시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짓밟는 행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5)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29절)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신앙생활도 게을리하고,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의 말씀도 가볍게 여기면

    예수님의 피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를 속된 것,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가 받을 벌은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가 받을 벌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6) 은혜의 성령을 모독하고 욕되게 하는 자(29절)

 

    신앙생활을 게을리하고 구원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는 일입니다.

 

묵상 :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이런 자가 받을 벌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받을 벌보다 더 큽니다.

    크신 은혜를 거절했으니 은혜가 큰 만큼 벌도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더욱 담대히 나아가는 자가 됩시다.

 

 

5.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20절에서는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실’이라고 했습니다.

 

 1)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20절)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계신 지성소와 성소를 나눈 휘장을

    주께서 두 폭으로 찢으셨습니다. 단순히 휘장만 찢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성도가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2) 새롭게 산 길(20절)

 

    그런데 19절은 이것을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 때에는 없던 것이니 새로운 길이고,

    그 길이 우리를 인도하니 산 길(살아있는 길)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살 길’이라고 해서

    ‘우리가 영원히 살아가야 할 길’이라는 뜻으로 번역했으나,

    원어의 뜻은 그 길 자체가 살아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심혼 골수를 찔러 쪼개듯,

    주께서 열어 놓으신 그 길이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묵상 : 그 길이 살아있는 길이니

           우리가 그 길에 있기만 하면 그 길이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합니다.

 

    그 길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말씀을 놓지 마십시오.

    주께 예배드리는 일과 주께서 나에게 명하신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지 마십시오.

 

 

* 기도제목

 

1. 힘써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2. 신앙의 나태함과 게으름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3. 모이기에 힘쓰며

   서로 돕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건강하고 신실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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