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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큐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요 10:11~18)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4.07.21|조회수122 목록 댓글 0

* 오늘의 말씀 :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요한복음 10:11~18)

 

* 본문요약

 

    삯꾼은 자기의 양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면 버리고 달아나서 양들이 늑탈을 당하거나 흩어져 버리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신 예수님도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예수님도 양을 알고 양도 목자이신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 밖의 다른 양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한 무리가 되어 구원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이 명령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찬 양 : 453장(새 570)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191장(새 297) 양 아흔아홉 마리는

 

 

* 본문해설

 

1.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11~13절)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양 떼를 흩어 버리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 선한 목자(11절) : 칼로스

    ‘선한’에 해당하는 ‘칼로스’는

    ‘아름다운, 훌륭한, 뛰어난, 잘 들어맞는’의 뜻이나,

    여기에서는 ‘착한, 부드러운, 탁월한’의 뜻으로 표현되었습니다.

 

-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

    ‘양들을 위하여’는 ‘양들의 이익을 위하여’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입니다.

 

- 삯꾼(12절) :

    삯꾼은 품삯을 받고 고용된 사람으로, 악한 자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양이 맹수에 공격을 받았을 때 삯꾼은 임금을 받고 고용된 자이므로

    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걸지 않고 도망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 양들을 돌아보지 아니한다(13절) :

    ‘양에게 관심이 없다. 양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양 떼가 자기의 것이 아니며

    자기는 다만 품삯을 받고 정해진 시간 동안 양을 지키기만 할 뿐이므로

    맹수들이 오면 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2. 양과 목자와의 관계(14~18절)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한 목자 아래에) 있으리라.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혹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내가 스스로 바치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4절) : 야다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야다’에서 온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에서의 ‘앎’은 ‘단순한 깨달음’을 뜻합니다.

 

 

* 묵상 point

 

1.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

 

 1)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11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의 평강이 목적입니다.

    양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양을 향한 주님의 생각은 단순히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으로 생명을 얻고 건강하게 최고의 삶을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➀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➁ 우리에게 참 기쁨과 참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과 참 행복을 주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이 세상 것보다 훨씬 맛 좋은 포도주를 만드셔서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세상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즐거운 것임을 보이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주께서 주시는 행복이

       세상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고 풍성한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은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➂ 우리를 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늘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이미 주께서 여러 번 주께로 온 양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돌보시는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➃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멸망 받게 된 것이지만,

       주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은 참 좋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2) 삯꾼 목자(12절)

 

    삯꾼 목자는 품삯을 받고 정한 시간에 다른 사람의 양을 임시로 맡은 사람입니다.

    삯꾼의 마음에는 아예 양들을 돌볼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돈 받은 만큼 일하다 집으로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맹수에 공격을 받으면

    자기만 피하여 양들이 맹수에 공격을 받아 죽거나 흩어지게 합니다.

 

묵상 : 당신은 선한 목자인가 삯꾼인가?

 

    오늘날 주님을 섬기는 사역자들이 삯꾼인지 선한 목자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양들에 대한 자세에서 달라집니다.

 

    선한 목자는 오직 자기가 맡은 양 떼(성도)들의 믿음을 양육하는 데에만 마음을 쏟지만,

    삯꾼은 자기가 받는 급료(생활비)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혹 목회자들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내가 받는 생활비가 교회 형편에 비하여 적다고 여겨질지라도

    그 일에 마음을 쓰지 말고 오직 맡겨진 양을 돌보는 데에만 마음을 쓰십시오.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은 당회원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고

    세상일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오직 주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는 자가 되십시오.

    주께서 이런 자들을 찾으십니다.

 

 

2. 양과 목자와의 관계

 

 1) 나도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고(14~15절)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양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압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과 이런 관계를 맺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신비로운 연합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의 태아처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과 연결된 그 생명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 ‘야다’에서 나온 말인데,

    50년쯤 해로한 부부가 서로 아는 것과 같이 깊은 인간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주님과 이렇게 서로 아는 관계를 이루어

    주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받는 자들이 됩니다.

 

 2) 영지주의가 ‘아는 것’과의 차이

 

    초대교회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이단 중에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신령한 지식을 가지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그 신령한 지식을 아는 것에서 오는 것이니

    이 지식을 아는 자들은 그 육체로 무슨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범하였더라도 그가 아는 지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에서 ‘안다’는 것은 그 지식에 대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았으면

    그 깨달음이 곧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안다고 하신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격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므로

    영지주의의 ‘안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임을 기억합시다.

 

묵상 : 혹시 영지주의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신앙이 혹시 영지주의와 같은 것인지 각자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성경을 몇 번 읽었으니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든지,

    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이 곧 영지주의와 같은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며 예배하고 섬기는 자,

    이런 자들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3.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게 하신 예수님(16절)

 

    예수님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가족이 됩니다.

 

    누구든 자신의 신분이나 과거에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절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아 놓았던

    모든 이념의 벽, 신분의 벽을 허무셨습니다.

 

묵상 :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느냐에 따라

    나의 영원한 삶의 운명이 결정되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님의 풍성한 생명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되십시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서 아직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는 분이 있다면

    가까운 교회(정식 교단에 등록된 건전한 교회)에 나가셔서 주께 예배를 드리십시오.

    당신도 주께서 피 흘려 세우신 하나님 거룩한 백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4.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1)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으려는 것이니(17절)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얻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우리들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사람은 일단 한 번 목숨을 잃으면 다시 그 목숨이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목숨을 버리셨더라도

    그 목숨을 다시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아무리 이러한 능력을 가지셨더라도

    목숨을 잃는 그 순간에는 우리와 똑같이 사람으로서 죽음을 경험하시는 것이니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모든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왜 이렇게 하십니까?

    바로 우리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2)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라(18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께서 죽으셔야 하기에 목숨을 버리시는 것이지,

    누군가 예수님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이가 있어서

    예수님이 그에게 패배하여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실 때에도

    당장이라도 내려오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 고난을 끝까지 이기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께서 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3)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8절)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그 목숨을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다시 회복할 권세를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회복시킬 힘과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라(18절)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만 하는 이 일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그를 통하여 세상 만민을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께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그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묵상 :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잃는 아픔을 겪으셨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직접 그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구원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주께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 기도제목

 

1.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오니

   나의 삶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2. 주님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안에 아직 고쳐야 것들을

   선하고 아름답게 고쳐주옵소서.

 

3.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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