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1:17~37)
* 본문요약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뒤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예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기에
나사로가 죽은 것이라며 예수님께 섭섭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며,
믿는 자에게는 부활과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자 마리아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마르다가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하며 슬퍼합니다.
예수님은 그녀와 다른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십니다.
찬 양 : 342장(새 543) 어려운 일 당할 때
93장(새 93) 예수는 나의 힘이요
* 본문해설
1. 마르다와 마리아를 찾은 문상객들(17~19절)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15 스타디온, 약 3km)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 예수님을 향한 마르다의 원망(20~22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을 아나이다.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3~27절)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다시 살아날 것이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4. 마리아의 슬픔과 예수님의 분노(28~37절)
28) 이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께서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가 나사로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33절) : 엠브리마오마이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의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embrimaomai)’는
분노, 격분과 함께 슬퍼하는 마음이 혼합된 복잡한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 민망히 여기사(33절) : 타랏소
‘민망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타랏소’는 ‘불쌍히 여기다, 괴로워하다’이나,
여기에서는 ‘깊은 내면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뒤흔들렸다’는 의미입니다.
심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
감정적으로 극단적인 흥분과 혼란으로 심적 동요가 일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 묵상 point
1. 마리아와 마르다를 찾은 문상객들(17~19절)
예수께서 계셨던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집이 있는 유대 지방의 베다니까지는 약 32km로 꼬박 하룻길입니다.
예수께서 요강 동편 베다니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던 예수님의 일행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촌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4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께 사람을 보낸 바로 그날에 죽은 것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7km 떨어진 곳으로 매우 가까웠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문상을 왔습니다.
● 나사로의 부활 :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 ●
1) 십자가로 향하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서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가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후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신 후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나사로의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로 향하는 분수령이 된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나사로의 삼 남매가 그 지역에 꽤 알려진 사람들이었고,
그곳에 예루살렘에서 불과 3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아주 가까운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문상을 온 상황에서
예수께서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사람을 살려내셨으니
그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삽시간에 퍼졌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 중에 일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며 찬양하고,
반대편에서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구체적으로 꾸미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2) 사랑하는 자들의 아픔을 보며 결심하시는 예수님(28~35절)
누구보다도 이 일을 잘 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나사로를 살리면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것임을
예수님 자신이 더 잘 아십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시지만 조금은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일 이후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그 고난을 당하셔야만 하고,
그 불안감도 우리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는 결심하십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33절의 말씀은 분노와 슬픔이 함께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에게 사망이 임하게 된 일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슬퍼하시는
복잡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세상 만민을 위해 고난받기로 확실하게 결심을 하시고
그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 결심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로 결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만민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1절과 15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라고 하며
두 번이나 “그러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두 자매의 서운함과 그 차이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자 마르다는 한걸음에 뛰어가
마을 입구에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집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은 상을 당하면
상주들은 대략 7일간 집에 그대로 있고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가 위로를 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예수님을 집에서 조용히 기다린 것이고,
마르다는 활동적인 그녀의 성격대로 기다리지 못하고 한걸음에 뛰어간 것입니다.
1) 예수께 대하여 불평한 마르다(20~22절)
마르다는 예수님을 뵙자마자 그때 함께 계셨더라면
오빠인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섭섭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한 것에 비하여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말했고,
그의 말에는 서운함을 넘어서
어째서 빨리 오시지 않았느냐는 불평의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소 불평과 원망을 담아 서운함을 표현했던 마르다는 조금 미안했는지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하고 예수님을 아직 의지하고 있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믿음 속에서도 죽은 지 이미 4일이나 지나버린 현실은
소망과 믿음의 빛보다는 절망의 어두움이 더 짙게 드리워지게 합니다.
마르다는 끝내 예수께 대한 서운함과
서둘러 오시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풀지 못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을 경배하는 태도로 맞이한 마리아(32절)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서운함을 표현한 마르다는
곧바로 집으로 가서 마리아에게 선생님께서 너를 찾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곧바로 주께로 뛰어나가
그 발 앞에 엎드려서 마르다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말은 똑같지만 마르다는 왜 빨리 오시지 않았느냐는 투의 말이었으나,
마리아의 말은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에 대한 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니 만사를 제쳐두고
당연히 여기부터 왔어야 했는데 어째서 오시지 않았느냐는 책망이 섞인 말이고,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에 오셨다면 자신에게는 참으로 좋은 일이었겠지만,
그러나 주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신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선지자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서서 말하고 있는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있으므로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 묵상 :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우리의 왕이시라고 믿고 있는가?
예수께서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그리스도)시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마리아처럼 행하여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우리가 참으로 좋고 행복하겠지만,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하는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하는 주님의 종인 것임을 잊지 맙시다.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네가 이것을 믿느냐(23~27절)
마르다의 퉁명스러운 불평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자기도 알고 있다며
역시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그 모든 것들을 지금까지 보존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도 이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생명을 다하고 죽은 후에
다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가게 하실 분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처럼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니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믿으며 주와 동행하며 주께 경배하며 산 자들은
죽더라도 다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바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믿고 사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들 역시 육신은 죽겠지만,
그 영은 계속 살아서 주님이 계신 그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주님을 믿어 이 땅에서부터 영을 소유한 자들은
마치 잠을 자고 난 후에 아침에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죽음도 그렇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잠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영생의 나라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4) 네가 이것을 믿느냐?
생명의 근원이신 주께서 옆에 계신데도
여전히 불안해하며 불평만 하고 있는 마르다를 향하여
주께서 답답하신 마음으로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주께서 원하시면 나사로가 죽은 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서둘러 믿는다고 대답했으나
39절에서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난다며 다시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 말은 믿음의 고백이라기보다 주께서 책망하시니
마리아에게로 가기 위해 서둘러 적당히 답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묵상 :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제 주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주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는다면
인간의 최고의 고민인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시는 주님을 믿는 자답게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죽음의 문제도 해결 받은 마당에
사소한 문제로 죽을 것처럼 고민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4.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서(33절)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하며
마리아와 마르다가 울고, 문상하러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통분히(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1) 통분히 여기심(엠브리오마이) : 분노, 책망
‘통분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엠브리오마이’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분노, 책망’으로 번역됩니다.
분노도 그냥 분노가 아니라 격분에 가까운 분노입니다.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분노하고 격분할 일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예수께서 분노하신 것은 사람에게 분노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슬픔을 주는 ‘죽음’에 대하여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감정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민망히 여기사(타랏소) : 불쌍히 여기다, 심적인 동요가 심하게 일어나다.
‘타랏소’는 ‘불쌍히 여기다, 괴로워하다’로도 번역하지만,
여기에서는 ‘깊은 내면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뒤흔들렸다’는 의미입니다.
심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
감정적으로 극단적인 흥분과 혼란으로 심적 동요가 일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심한 심적 동요를 느끼고 계신 것을 의미합니다.
3) 십자가를 향하여 방향을 전환하신 예수님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이 세 사람에게서 일어난 이 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방향 전환하십니다.
* 기도제목
1.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강하고 담대하게 살게 하옵소서.
2. 이 고백이 입술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통해
온전히 고백하는 믿음에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