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요한복음 21:1~14)
* 본문요약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바닷가에 나갔으나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때 해변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다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고 해변으로 올라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나눕니다.
찬 양 : 500장(새 446) 주 음성 외에는
408장(새 302)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 본문해설
1. 고기를 잡는 제자들(1~4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쌍둥이)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노라” 하고 말하자
그들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밝아올 무렵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나
제자들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2. 만선의 기적(5~8절)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한 마리도 못 잡았나이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주님이시다)” 하니
시몬 베드로가 옷을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라는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相距, 거리)가 불과 한 오십 간(200규빗, 약 90m)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3. 제자들을 위해 조반을 준비하신 예수님(9~14절)
9) 육지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매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153마리(11절) :
숫자가 정확히 언급된 것은 아주 드물게 보는 큰 수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 자신이
이 장면을 분명히 목격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숫자를 정확히 언급했습니다.
* 묵상 point
1.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의 공허한 움직임
1) 공허한 열정 : 의미 없이 밤새 그물을 던지기만 한 베드로(1~3절)
불과 얼마 전에 예수께서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후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이니 한밤중의 바닷바람은 아직 차갑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옷을 벗고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후 주님과의 신령한 관계를 잃어버린 베드로는
그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했고,
그래서 한 일이 고기를 잡는 일입니다.
고기 잡는 일은 그가 평생 한 일이니
이처럼 공허하고 답답한 마음일 때에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도 몰두할 수 없습니다. 고기가 잡히는지 안 잡히는지도 모른 채
추운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그물을 던지기만 할 뿐입니다.
2) 절망과 좌절을 벗지 못한 제자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제자들은
아직도 좌절과 절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직접 뵈었으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은 갖고 있으나,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믿음은 지식에 머문 믿음입니다.
단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 아직 그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소망 없는 삶입니다.
● 묵상 :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을 가지십시오.
혹시 이때의 제자들처럼 신앙을 단지 지식으로만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대로 내가 움직일 때 믿음의 능력이 나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2. 실패 속에서 발견한 은혜
1) 예수께서 그들 곁에 오셨으나 오직 요한 한 사람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4~7절).
무기력한 삶이 더욱 심해져 좌절감을 경험하게 될 즈음에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얘들아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좌절감에 빠진 때였기에 그들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말씀대로 했더니
일곱 명의 장정들이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바로 그때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는 바다로 뛰어들어 예수님께로 헤엄쳐 갔습니다.
2) 실패 속에서 만난 은혜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때 잡은 물고기가 153마리였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이 일을 직접 목격한 장본인임을 밝혔습니다.
실패 속에서 만난 엄청나게 많은 고기들은
삶 속에서 경험하는 작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그 기적을 통해 바닷가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나의 삶에 새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실패 속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실패 속에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된 이유
우리가 보기에는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보다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베드로의 죄가 훨씬 가볍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1장 본문에서 베드로가 다시 용서받고
예수님의 제자의 지위를 회복한 것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므로
가룟 유다와 똑같이 베드로도 예수님과 완전히 단절된 자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은 만 못한 멸망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복했고, 가룟 유다는 끝내 멸망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인지,
베드로는 영생의 사람이 되었고,
가룟 유다는 영원한 멸망의 사람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베드로가 실패한 후에도 믿음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었으므로
베드로가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이후 답답하고 공허한 중에도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의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 역시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령한 영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답답하고 공허한 상태가 매우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은 후 곧바로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특히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시켜달라고 간곡히 간구합니다(시편 51편 참조).
그러나 가룟 유다는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회복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2) 만일 베드로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갔다면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
공허하고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갔다면
베드로 역시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은 것만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은 잠시 즐거움을 주지만,
그 즐거움 후에는 그 공허함과 답답함이 더욱 커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답답함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도 그의 답답함을 세상에서 해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일 제자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 부끄러움을 참고 그 제자들 틈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다시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아무리 답답하고 공허하고 힘든 상태에 있더라도
결코 은혜를 받을만한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것은
절벽을 오르는 자가 힘들다고 손에서 밧줄을 놓아버리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4. 예수님 안에서의 풍성한 삶(11절)
제자들이 매일 오늘처럼 153마리나 되는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된다면
이 세상을 풍요롭게 여유 있게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의미 없는 삶입니다.
예수께서 그날 그들에게 풍성한 고기를 잡은 기적을 보이신 것은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더 풍성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친히 숯불을 준비하셔서
제자들에게 떡과 고기를 구워 주셨습니다.
1) 153마리는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153마리의 기적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한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153마리의 기적에만 집착합니다.
➠ 당신은 어떤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153마리의 고기를 잡는 풍요로운 삶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기를 153마리나 잡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까?
예수님 안에는 그보다 더 풍성한 기쁨의 삶이 있습니다.
나에게 더 풍성한 것을 주실 수 있으신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2) 광야의 만나, 오병이어의 기적 때의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지날 때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더 좋은 만나와 더 맛있는 고기를 내려주기만을 바랬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고
그 자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를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12 바구니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다음 날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반복되기만을 바라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물고기와 보리떡의 풍요만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을 피하십니다.
3) 물고기 153마리가 아니라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하는 요한의 소리를 듣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바다 위로 뛰어듭니다.
바다를 헤엄쳐 가려면 오히려 옷을 벗어야 하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니 옷을 다 갖춰 입고 헤엄을 쳐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머리에는 153마리는 그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보일 뿐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그 여인도 예수님을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의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모습입니다.
● 묵상 :
➀ 이처럼 주님을 바로 찾고 바로 만나는 자가 되십시오.
주님을 만나기 위한 도구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면 주께서 떠나십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주님의 호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하십시오.
➁ 153마리의 영적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때 잡은 153마리에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지를 찾으려 합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무려 153마리나 잡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반한 후 마음의 공허감에 빠졌던 베드로가
이 일로 예수님도 만나고 그의 영적 위치도 회복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153마리나 잡았다고 한다든지,
153마리는 마지막 때의 어떤 징조라고 한다든지,
마지막 때의 153개국을 의미한다느니, 이런 해석을 하느라
본문에 담긴 중요한 영적 의미를 잃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5.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예수님(9~14절)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생선과 떡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만 하시고
예수님이 잡수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4:30에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저녁을 잡수셨고,
누가복음 24:42~43에서는 예수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다고 증명함으로써
예수께서 영이 아니라 육신으로 부활하셨음을 증거합니다.
● 묵상 :
이처럼 우리도 장차 영이 아니라 육신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물론 그때 우리가 입을 육신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신이 아니고
예수께서 부활 후에 보여주셨던 그 영광의 육신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려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큰 선물을 주신 주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 기도제목
1. 지식만 갖는 믿음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신령한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2. 풍성한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을
더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3. 이 땅의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주님을 간절히 구하고 찾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