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Ⅳ, 잠시만이라도 평안하게 하옵소서
(욥기 10:13~22)
* 본문요약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친히 만드시고 생명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사실은 속마음으로는 벌써부터 욥을 죄인으로 몰아갈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자신을 지켜보았다가 죄를 지으면 용서하시지 않을 작정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죄 없는 의로운 자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부끄러운 고통이 계속되고 있어서
도무지 머리를 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군대를 번갈아 가며 공격하듯 욥을 괴롭게 하시니
차라리 모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옮겨지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이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잠시 만이라도 좀 평안하게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찬 양 : 431장(새 549) 내 주여 뜻대로
438장(새 71) 예부터 도움 되시고
* 본문해설
1. 욥을 죄인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탄식(13~17절)
13)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하시고도
(주께서 나를 친히 만드시고 생명과 은혜를 주셨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으셨나이다(속으로는 나를 해칠 생각을 품고 계셨나이다).
주께서 이런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음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보시다가 내가 범죄하면(죄를 짓기라도 하면)
주께서는 용서해 주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계셨나이다.
15) 내가 악하면(내가 죄를 지었다면)
내가 화를(재앙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오며,
그러나 내가 의로울지라도(내가 죄가 없을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겠나이다.
주께서 이 부끄러움이 가득한 환난을 지긋지긋하도록 내게 내리시는 것을
내가 보고 있기 때문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들면(내 일이 조금이라도 잘 되기라도 하면),
주께서 사나운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고(나를 덮치시고),
기적과 권능을 나타내 보이시면서까지
내게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내게 상처를 주려고 하시나이다).
17) 주께서 자주자주(번갈아서) 나를 대적하는(내게 불리한) 증인들을 세우시고,
나를 향한 노여움을 키우시며, 군대가 번갈아서 공격하는 것처럼 나를 몰아치시나이다.
- 나를 대적하는 증인들(17절) :
욥의 친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이 겪고 있는 재앙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욥의 입장에서 친구들의 공격 따위는 재앙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욥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의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은데,
이런 끔찍한 재앙들이 자꾸만 일어나니
그 재앙들이 욥을 죄인이라고 증거하는 증인들처럼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2.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18~19절)
18)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실 작정이셨다면,
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셨나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차라리 내가 모태에서 죽어서 나왔더라면)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마치 생기지도 않은 사람처럼(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모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더라면 좋았겠나이다.
3. 잠시만이라도 편안하게 하옵소서(20~22절)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이제 내가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즉 제발 얼마 동안 만이라도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두옵소서.
잠시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옵소서.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22) 그 땅은 흑암처럼 캄캄하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서
빛조차도 어둠과 같은 그런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해 주옵소서.”
-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21~22절) :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욥은 죽으면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태초에 빛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삶처럼
어둡고 캄캄한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스올’이라고 하고, 개역성경에서는 ‘음부(陰府)라고 번역했습니다.
* 묵상 point
1. 너무나도 솔직한 고백에서 느껴지는 당혹감
본문에서도 역시 욥의 기도 속에
절망과 낙심에 빠진 자들이 하는 처절한 절규를 합니다.
우리도 이런 감정들을 가질 수 있으므로
욥의 고백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사랑의 가면 뒤에서 사람을 잔인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십니까(13~14절)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재앙은 내리시면서
그 재앙이 왜 욥에게 찾아왔는지에 대하여는
왜 한마디도 말씀해 주지 않으시냐고 기도하다가 점점 지쳐갑니다.
그러다 ‘본래 이것이 본래 하나님의 모습이셨다’,
‘하나님은 본래 사랑의 하나님의 아니셨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셨으나
실상은 사람들을 아주 잔인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셨다’는
다소 도발적인 고백을 합니다.
겉으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말씀하시지만,
실상은 사람들이 재앙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냐고 질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만큼 의로운 자였던 욥이
이런 정도의 도발적인 언사를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갖습니다.
2) 어찌하여 군대가 번갈아 공격하듯 나를 공격하시나이까(15~17절)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내리셨다고 믿고 있는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외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번갈아서 나에게 불리한 증인들을 세우시고,
나를 향한 노여움을 키우시시나이까?”,
“어찌하여 군대가 번갈아서 공격하는 것처럼 나를 몰아치시나이까?”
욥에게 불리한 증인들을 번갈아 세우신다는 것은
친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닥친 재앙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잔인하게 공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는 욥에게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3) 내가 머리를 들면 주께서 사나운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나이다.
욥이 머리를 들면
주께서 사나운 사자처럼 욥을 사냥하신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욥의 일이 조금이라도 잘 되는 기미가 보일라치면
하나님께서 곧 그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욥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욥에게 재앙을 내리시려 작정을 하시고는
욥이 어떤 죄를 짓나 살피셨다가 죄를 지으니 “옳지 걸려들었구나” 하시고는
욥에게 미리 준비하신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처럼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재앙이나 내리는 흉악한 괴물처럼 고백하고 있다는 것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4) 내가 의인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움이 가득한 환난으로 머리를 들 수 없나이다(15절)
온몸이 구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인 채 기와로 긁고 있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욥이
이제 사람들을 향하여 얼굴도 들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누가 봐도 지금 욥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가득한 재앙을 아주 지긋지긋하게 내리셔서
도무지 얼굴을 들 수 없노라고 고백합니다.
욥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은
고난과 환난 중에도 항상 감사만 할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로서
욥이 이처럼 감사라고는 조금도 없고,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이 가득 담긴 절규를 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5) 이렇게 하실 작정이셨다면 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살아서 나오게 하셨나이까(18절)
욥은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재앙이나 내리실 작정이셨다면
처음 그가 모태에서 나올 때 살려두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습니다.
욥에게 은혜를 베푸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처음부터 은혜를 주시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죽음의 침묵 속에 있을지언정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천국과 지옥을 모르니
욥은 죽음을 깊은 어두움의 침묵으로만 여기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욥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며
계속해서 자신을 죽여 달라는 기도만 하고 있는 것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6)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잠시만이라도 평안히 쉴 수 있게 하옵소서(20~22절)
욥은 다른 사람 같으면
이 병으로 벌써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병으로 벌써 몇 달이나 살아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것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고통을 받고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욥은
자기를 빨리 죽여주시되,
죽기 전에 아주 잠시만이라도 평안히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욥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주 잠시 동안의 평안조차 주시지 않을 만큼
아주 흉악한 분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7) 차라리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옵소서(20절)
욥은 자신을 도와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게 내버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용서해 주실 생각도 없으시면서
그에게 생명은 왜 주셔서 고통만 안겨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욥을 향한 은혜를 중단하시면 자신이 곧바로 죽게 될 터이니
제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셔서 죽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치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환자에게서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내면 곧 죽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시는 은혜를 중단하시면
욥은 지금 당장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은혜도 싫고 사랑도 싫으니
제발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욥이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싫고
오직 죽음만 구하고 있다는 것에 아주 큰 당혹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1) 상한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표현하십시오.
본문에서 나타난 욥의 절규는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속은 죽을 것 같은데 기도할 때는 자기감정과는 다르게
거룩한 표현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2) 그는 우리의 친 아버지, 우리의 친 아빠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때로 절규를 하고, 때로 원망도 하고,
때로 투정도 부리고, 때로 이럴 수 있냐며 따져 묻기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저 이렇게 해도 좋으니 기도를 중단하지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중단하는 순간 마귀가 우리 마음에 있는 감정에 불을 붙여
더욱 절망과 좌절과 미움과 원망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있는 감정을 그대로 주께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주께서 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평강을 내리십니다.
● 묵상 :
하나님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간직만 하고 있다가
절망을 키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종종 듣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친근한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가장 친근한 친구로 여긴다면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시는
가슴 따뜻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 기도제목
1. 내 속마음의 상처들을
주께 있는 그대로 아뢰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시는
가슴 따뜻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3.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려는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