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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큐티

엘리바스의 첫 번째 논쟁Ⅳ :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욥 5:17~27)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4.07.19|조회수48 목록 댓글 0

* 오늘의 말씀 : 엘리바스의 첫 번째 논쟁Ⅳ,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

                   (욥기 5:17~27)

 

* 본문요약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은 그래도 복이 있는 것이니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다가도 싸매시고, 상하게 하다가도 고치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의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욥이 만난 여섯 가지나 일곱 가지 재앙도 모두 다 물리쳐주실 것이며,

    이전보다 더 복된 삶이 되어 욥이 장수하다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말을 잘 새겨들어서 욥의 삶에 유익을 얻으라고 충고합니다.

 

찬 양 : 470장(새 413) 내 평생에 가는 길

         444장(새 390) 예수가 거느리시니

 

 

* 본문해설

 

1.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17~18절)

 

17) “이보게,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는 그래도 복이 있는 자이니

    (오히려 내가 징계를 받는 것은 즐거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러니 전능하신 자의 징계(훈계)를 업신여기지 말게.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도 그의 손으로 고쳐주시는 분이시니

 

 

2. 징계 후에 주시는 복(19~26절)

 

19) 그가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너에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속에서도 너를 죽지 않게 하시고

     전쟁에서도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것인즉

21) 너는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저주가 너에게 쏟아져도 막아주실 것이고),

     멸망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네.

22) 너는 멸망과 기근(약탈과 굶주림) 쯤은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고,

     땅의 들짐승들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네.

23) 네가 들에 있는 돌과도 계약을 맺으며,

     들짐승들도 너와 화친할(평화롭게 잘 어울려 지내게 될) 것이니 말이네.

24) 그래서 너는 집안이 두루 평안한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가축의 우리를 살펴보아도 잃은 것이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25) 또 네 자손이 많아져서 네 후손이 땅의 풀같이 번성하게 될 것을 보게 될 것이네.

26) 때가 되면 곡식이 영글어 타작마당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들어가게 될 것이네.

27) 보게나,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해 본 바가 이와 같으니 틀림없이 맞을 것이니

     너는 부디 이 말을 잘 새겨들어서 너의 유익을 얻게 되기를 바라네.

 

- 혀의 채찍을 피하여(21절) :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저주의 말은 사라지지 않고

    허공을 떠돌다가 언젠가는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는 저주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욥이 하나님께 회개하면 그 어떤 사람이 욥에게 저주를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아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묵상 point

 

1.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충고

 

    욥을 향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을 다 저지른 사람처럼 강하게 몰아붙였던 엘리바스는

    이제 그가 제기한 첫 번째 논쟁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합니다.

 

 1) 징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 주시는(17~26절)

 

    엘리바스는 욥에게

    그래도 하나님의 재앙을 받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심판을 내리실 작정이셨다면

    아예 멸망을 내리시기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을 주셨다는 것은

    복을 받을 여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기로 작정하신 자에게는

    재앙도 내리지 않고 그 죄 가운데서 살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가 아직 남았다는 뜻이고,

    회개하면 그 재앙을 거두고 다시 복을 내리신다는 뜻이니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는 그래도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엘리바스는 만일 욥이 조용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일곱 가지의 재앙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실 것이고,

    기근이나 전쟁에서도 죽지 않게 하실 것이며,

    세상 모든 자들이 욥을 저주한다고 할지라도 그 저주가 임하지 않게 하시고,

    약탈과 굶주림쯤은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욥의 자손이 들의 풀처럼 많이 번성하게 되고,

    욥으로 하여금 그 수명대로 장수하여 무덤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은 헨델의 오라트리오 메시야를 듣는 것만큼이나 감동적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여기에서 충고를 멈추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17절)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이 재앙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데

    너는 왜 그 은혜를 저버리고 회개도 거부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하라고 촉구하는 의미로 재앙을 주신 것이니

    조용히 회개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리게 될 터인데,

    욥은 왜 자기에게 이런 재앙을 주셨냐며 절규를 했으니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고,

    조용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3) 그러니 자신을 포함한 세 친구의 말을 잘 새겨들어서 유익함을 얻으라(27절)

 

    엘리바스는 자신이 한 말은 욥을 찾아온 세 친구가 함께 연구한 결과물이니

    틀림없이 맞는 말일 것이라 말하면서,

    그러니 자기가 한 말을 잘 새겨들어서 자신의 유익함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2. 엘리바스의 충고의 문제점

 

  • 엘리바스의 감동적인 이 말에서 무엇이 문제일까요?

 

    엘리바스의 첫 번째 논쟁의 마지막 부분인 본문의 충고들은

    문제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이 땅에서 재앙을 받는 자들은

    그래도 복이 있는 자라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진짜 심판을 받을 자들은 죄를 지어도 재앙을 받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재앙이라도 받는 자들은

    이 땅에서 회개할 기회라도 얻는 자들이라는 엘리바스의 말은

    성경 말씀과도 일치하는 바른 말이고 바른 충고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라고

    그가 열거한 말들 또한 하나도 틀리지 않은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충고는 완벽하게 잘못된 끔찍한 충고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1)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소유물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있는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 말했었습니다(욥 5:1).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의 기도는 들으시지만

    욥이 받을 것은 오직 재앙뿐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욥 5:5~7, 16).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다 들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것일까요?

    조금 전에 욥이 어떤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리라 말했던 것은 누구의 뜻이며,

    지금 기도하면 들으시리라고 한 것은 또 누구 뜻입니까?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자기 소유물처럼

    이리저리 바꿔가며 욥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있습니다.

 

 2) 자기들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 지혜자들의 교만(27절).

 

    엘리바스는 충고 마지막 말에,

    자기들이 연구하여 도출해 낸 것이니 틀림없이 맞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자기들이 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연구하여 낸 것이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 여기에서 우리는 학자들과 지혜자들의 교만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사상’이라고 말하면서,

    혹은 사회학적 기준으로, 혹은 민중사관적 입장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제 경험을 하나 올립니다. 신학교 시절 기독교 윤리학 중간고사 때로 기억합니다.

    시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비판하라.”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로마와 당시 유대 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라는 답을 기대한 것 같은데

    저는 도저히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서

   “이런 황당한 질문에는 도저히 답을 할 수가 없다”는 말만 적었습니다.]

 

  • 사람의 생각이 다르니 말씀을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처럼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고의로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주관을 마음대로 찬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3) 내 뜻 내 생각대로 만물을 판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엘리바스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상대가 잘못된 것이라고

    곧바로 상대를 무자비하게 정죄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나와 다른 패션을 가진 자들은 촌스러운 것이고,

    나와 다른 말을 하는 자들은 말버릇이 고약한 것이며,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은 보수 내지는 종북으로, 심지어는 빨갱이로 몰아붙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치고

    교회마저 하나님의 말씀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 생각대로 상대를 정죄하기에 바쁜 이 현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묵상 :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가치관이나 내가 속한 조직의 강령 따위가

    더 소중하다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성공을 위해 말씀이 경고하는 일쯤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고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는 아닌지….

 

 

* 기도제목

 

1. 내 뜻이나 내 가치관으로

   남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게 하옵소서.

 

2. 내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훼손하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죄를 범하지 말게 하옵소서.

 

3.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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