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사도들(사도행전 5:27~42)
* 본문요약
사도들이 다시 산헤드린 공회 앞으로 끌려오자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이 이 이름으로 다시는 가르치지 말라 엄히 명하였는데
어찌하여 이 가르침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느냐고 심문합니다.
베드로가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다고 말하며,
자기들과 성령이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크게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합니다.
그때 공회 회원이며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이
이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일이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것이니
이 일을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놓아 주자 사도들은 능욕 받음에 더욱 기뻐하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찬 양 : 381장(새 333) 충성하라 죽도록
384장(새 585)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본문해설
1.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27~32절)
27) 그들이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명하였으되
너희가 너희의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는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자기 오른편에 앉히시고) 왕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성령도 그 일의 증인이시니라)” 하더라.
2. 가말리엘의 충고(33~40절)
33) 그들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격분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죽이려고) 할새
34) 율법교사로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공의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나가게 한 후에,
35) 공회 의회원들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고 다니매)
약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나,
그가 죽임을 당하자 그를 추종하던 모든 사람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에 호적을 할 때에(인구 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많은 사람을 꾀어 자기를 따르게 한 일이 있었으나,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그러므로 내가 이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면 너희는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하니
40) 그들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다가 채찍질하여 때린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 가말리엘(34절) :
가말리엘은 유대학파의 창시자인 힐렐의 손자요 시몬의 아들입니다.
그는 가장 존경받는 율법학자(행 5:34)였고, 바울의 스승(행 22:3)이었습니다.
- 드다와 유다의 반란(36,37절) :
드다는 BC4년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사람으로,
그때 400명쯤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나 그가 죽자 모두 다 흩어졌습니다.
갈릴리 유다 역시 민중 봉기를 했다가 실패했습니다.
- 채찍질(40절) :
채찍질은 39대(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습니다.
채찍은 가죽끈을 세 줄로 꼬아 만들었고, 그 끝에 동물의 뼈나 쇠붙이가 붙어 있어
이 매를 맞으면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태형을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고후 11:24).
3. 가르치고 전하기를 쉬지 않는 사도들(41~42절)
41)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는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나니라.
42)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혹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41절) :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는 것을 기뻐한 것은,
사도들이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자(41절) :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이런 고난의 흔적을 내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 집집마다 다니면서(42절) :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 경비대의 감시가 있으므로 말씀 전하기가 쉽지 않게 되자,
사도들은 성도들의 집을 다니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들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초대교회의 ‘가정교회’가 시작됩니다.
* 묵상 point
1. 가말리엘의 합리적인 충고
사도들이 다시 산헤드린 공회에 불려 나왔습니다.
산헤드린 의장인 대제사장은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는 전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히 명하였는데,
어찌하여 이 가르침이 예루살렘에 가득 퍼지게 하였느냐고 심문합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사람의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우리의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극도로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합니다.
1) 가말리엘의 중재(33~40절)
바로 이때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며 바리새파의 거두인 가말리엘이 일어나서
그들을 진정시킵니다.
드다와 유다가 스스로 위대한 사람이라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꾀어 많은 사람들을 모았으나
그들이 죽은 후에 그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 일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면 곧 사라지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면 자칫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말리엘의 이 말을 듣고
산헤드린은 일단 진정하여 사도들을 죽이려는 일을 중단합니다.
2) 지식인의 함정에 빠진 가말리엘 : 비난만 피하려는 어정쩡한 태도
우리는 가말리엘에게서 소위 지식인의 합리성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봅니다.
지식인들은 교묘하게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구실을 찾습니다.
가말리엘 역시 사도들도 살리고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도 진정시키는 묘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것도 부인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으로 자기의 목숨을 걸기를 원하십니다.
3)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의 위험(38~39절) : 머뭇거림
당시 최고의 율법사였던 가말리엘이 이 말을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이실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말리엘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으면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그의 위치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처럼 백성들에게 존경과 주목을 받는 사람들은
확실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유대 사회에 나타날 파장이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에는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 묵상 :
➀ 이것이 바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든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사람에게 주목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처럼 너무 많이 가진 자는
그가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자기가 하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인 것을 알더라도 멈추지 못합니다.
그가 가진 것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➁ 예수님은 이런 미지근한 신앙 태도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혹시 가말리엘처럼 세상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적당히 숨겨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는 정도의 미지근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끄러워하면 그날에 주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2. 시기와 분노에 눈이 먼 사람들
1) 채찍질만 하고 놓아주는 산헤드린(40절)
가말리엘의 이 말에 금방이라도 사도들을 죽일 것같이 달려들던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 모두 잠잠해지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나 사도들을 그냥 놓아주지 않고 채찍질하여 내어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채찍질은 40에 하나 감한 39대를 때립니다.
채찍은 가죽을 세 가닥으로 꼬아 만든 것으로 그 끝에 동물의 뼈나 쇠붙이가 붙어 있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2) 놓아준다면서 채찍질은 왜 한 것인가?
이들이 가말리엘의 말에 설득이 되었다면, 사도들의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이들도 모두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 일에
이 무서운 채찍질을 39대나 때린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그들 안에 있는 시기와 분노와 증오 때문입니다.
자기들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것에 대한 시기,
그 시기에서 나온 분노와 증오가 가말리엘의 말에 동의를 하고 있었으면서도
사도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악을 행하고 맙니다.
3) 시기와 분노로 흐려진 판단력
시기와 분노와 증오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눈앞에 분명한 증거들이 보여도 시기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 증거를 보지 못합니다.
그 증거의 뜻을 옆에서 일일이 알려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부나비처럼 스스로 자기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끝장이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분노에 노예가 되었음을 알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분노와 증오의 노예가 되어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때
함께 처참하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시기와 분노와 증오가 나를 삼키기 전에 주께 기도하십시오.
일단 이런 악한 감정이 나를 사로잡으면 나 스스로 파멸로 몰아가는
위험한 게임을 하는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
1) 고난받음을 오히려 즐거워하는 사도들(41절)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기까지 하는 무서운 채찍질을
39대나 맞고 나온 사도들은 그 험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은 것에
기뻐하며 기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즐거워합니다.
2)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음을 기뻐하는 사도들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바울은 갈 6:17에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이 흔적은 헬라어로 ‘스티그마(stigma)’인데
당시 노예들에게 주인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표시하며 찍어 놓은 낙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채찍에 맞아 남은 자신의 몸의 흉터를
‘예수의 흔적(예수님의 스티그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지금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의 흔적이
자기들의 몸에도 남은 것을 기뻐하며 기뻐합니다.
● 묵상 : 주님은 믿되 예수님의 흔적은 싫어하는 사람들, 거짓 믿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에
주님의 고난의 흔적인 ‘스티그마’를 남기기를 싫어합니다.
그저 편안하고 안락하게 예수님을 믿으려 합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한 흔적이 없는 사람을
주님은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 여기지 않으십니다.
사랑이란 상대를 위해 내 몸에 상처가 남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몸에 주님을 사랑하는 흔적을 남기십시오.
사랑과 헌신, 이것이 우리가 남겨야 할 주님의 흔적입니다.
4. 집집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42절)
1)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채찍을 맡고 공회에서 나온 사도들은 성도들의 집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성전에서도 복음을 전하기는 했지만,
성전 경비대의 감시 때문에 그 일이 쉽지 않게 되자
이제 성도들의 집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부터 초대교회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의 가정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유행하는 가정교회가 아닙니다.
핍박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으니
성도들의 집 중에서 조금 큰 집에서 드리는 가정교회입니다.
2) 작지만 큰 열매를 맺은 초대교회
이런 이유로 초대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같은 큰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6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작은 교회로 역사상 가장 놀라운 부흥을 이룬 것은
이들의 심령 속에 주님의 성령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채찍에 맞고도 주님을 위해 능욕 받음을
오히려 기뻐했던 이들의 뜨거운 헌신과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 우리도 주님을 향한 이런 사랑과 열정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 기도제목
1. 가말리엘처럼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산헤드린 의원들처럼
시기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3.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과
열정이 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