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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큐티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와 요한(행 3:1~10)

작성자송호영|작성시간24.09.29|조회수49 목록 댓글 0

* 오늘의 말씀 :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와 요한(사도행전 3:1~10)

 

* 본문요약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의 오후 기도시간(오후 3시)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가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을 만납니다.

 

    그는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을까 싶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고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그가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를 본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크게 놀랍니다.

 

찬 양 : 94장(새 96) 예수님은 누구신가

         92장(새 398) 어둠의 권세에서(곡이 조금 다름)

 

 

* 본문해설

 

1.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장애인(1~3절)

 

1) 어느 날 9(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갈새

2)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구걸하거늘

 

- 제9시 기도 시간(1절) :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습관을 따라 하루 세 번 기도했습니다.

  • 아침 기도 : 제 삼시(오전 9시) 아침 제물을 바칠 때

  •    낮 기도 : 제 육시(낯 12시)

  • 오후 기도 : 제 구시(오후 3시) 저녁 제물을 바칠 때

    그중에 오후 기도 시간은 희생제사를 드린 후 제사장이 향을 피우는 동안

    공중기도 시간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오후 기도 시간에 가장 많이 참석했습니다.

 

- 미문(美門)(2절) :

    성전 밖에서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을 말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문은 고린도 건축 양식을 빌어 아름답게 지었으므로

    ‘미문(아름다운 문)’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2절) :

    하체가 마비된 채 태어난 후 지금까지 그 상태로 살아온 자를 가리킵니다.

 

 

2.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나(4~8절)

 

4) 그러자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주목하여 보며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두 사람을 바라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7)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즉시 그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벌떡 일어나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3.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장애인(9~10절)

 

9) 모든 백성이 그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10절) : 에플레스쎄산, 담보스, 엑스타시스

  • ‘여기며’에 해당하는 ‘에플레스쎄산’은

     ‘가득 채워졌다,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이고.

  • ‘심히 기이히’에 해당하는 ‘담보스’는 ‘두려움, 경악, 놀람’의 뜻이며,

  • ‘놀랐다’에 해당하는 ‘엑스타시스’는 ‘황홀, 경악, 놀람’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는 것은

    두려운 마음과 놀라는 마음이 충만하게 가득 채워졌다는 것으로,

    황홀경에 빠질 만큼 크게 놀랐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놀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 묵상 point

 

1.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에 참여하는 베드로와 요한

 

 1) 유대인들의 저녁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1절)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의 오후 기도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갑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간 것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 앞부분에 당시 사도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첫 번째 기적을 말하면서

    그들이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에 참여한 것을 기록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2) 이것은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교회와 이어진 것임을 보여준 것

 

    누가가 사도행전 앞부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기도 시간에 참여한 것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교와 연결된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은 구약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유대교와 동떨어진 전혀 다른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유대교는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지 않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이단이라 할 수밖에 없겠지만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적 전통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시대의 사람이지만

    구약의 말씀도 함께 읽고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 : 기독교는 역사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날 가끔 어떤 교회가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송두리째 부인하고

    자기들만이 신령한 교회라며 말하고 있으나,

    이런 말 하는 자들은 100% 가짜이고 이단이니 조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십니다.

 

 

2. 세상의 능력의 한계

 

 1) 앉은뱅이를 미문 앞에 데려다 놓는 사람들(2절)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들어가려다가 미문 앞에 있는 한 걸인을 주목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선천적인 앉은뱅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구걸할 수 있도록 매일 아침에 그를 떠메어 미문 앞에 데려다 놓고

    저녁에는 다시 집으로 데려가기를 반복했습니다.

 

 2) 기껏해야 구걸하는 것을 돕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

 

    이것은 세상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이 걸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가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세상은 그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그가 먹고 살 것을 마련하기 위해 구걸이라도 할 수 있도록

    떠메어 데려다 놓고 다시 데려가기를 반복하는 일 외에는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 세상의 한계 :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늘날 인간의 과학과 의술이 발달 되어 그때보다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그래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때보다 조금 삶을 더 연장하는 것과,

    그때보다 질병을 조금 더 치료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3. 무엇을 얻을까 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는 걸인

 

 1) 거지의 간절함을 본 베드로와 요한(4절)

 

    당시 매일 세 차례의 기도 시간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으므로

    미문 앞에는 이 걸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미문 앞에 있는 걸인들 중에서

    이 걸인을 아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이 사람의 눈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간절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자기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기대하며 간절히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이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2) 우리도 주께 성령을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누가가 이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면서

    베드로가 이 사람의 간절함을 주목하여 보았다는 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에도 같은 방법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며 간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저 이 걸인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달라고 간구하기만 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3)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베드로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말하고는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 그가 일어나 걷고 뛰는 자가 되었습니다.

 

묵상 :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께 성령을 구하면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사람처럼 병이 낫기도 하고, 마음의 병이 치료되기도 하고,

    신령한 능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무엇이 되었든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확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령을 구하고 또 구하십시오.

 

 

4. 오늘 우리가 가진 것은 금과 은인가,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인가?

 

    베드로는 금과 은은 자기에게 없으나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주겠다면서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금과 은은 가졌으나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상보다 많지 않습니다.

    또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사람을 구원시킬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시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원의 능력을 위해 주께서 주신 주님의 이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묵상 : 우리들 자신은 어떤지 살펴봅시다.

 

    나는 세상의 금과 은을 찾기에 분주한 사람인지,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을 구하고 또 구하는 사람인지.

    주님의 이름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부흥한 교회라고 자랑해도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회가 됩니다.

 

 

* 기도제목

 

1. 걸인처럼 우리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2. 금과 은을 얻기 위해 집착하지 말고

   주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얻기에

   힘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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