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1901~1943)
이상화는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첫째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교남학교로 발전했다가
현재 대구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가 되었다.)에서 수학하였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 어학원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도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하거나 칼럼과 글을 국내의 잡지사로 송고하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으나
극적으로 어느 일본인의 배려로 은신해 있었다.
얼마 뒤 분장하고 집주인인 일본인이 준 여비를 받고 관동 대지진의 수난을 피해 귀국했다.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위키백과사전에서)
오늘부터 이상화 시인님의 시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상화 시인의 본관이 경주이며 계보상 적토마(이장우) 보다 한 학렬이 낮더군요. 하하.
이상화 시인의 부친이 이시우 ("우"자 돌림).
이 분도 1943년 위암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당시 43세였지요.
천재 시인님들은 왜 이렇게 일찍 부르시는지?
"나는 참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여러번 하게 됩니다.
일제치하,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목숨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이는 불가능 한것이였지요.
참으로 안타깝고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 나라를 지키시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독립운동가,
6.25사변(동란)으로 젊음을 바쳐 구한 이 나라, 대한민국!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편한 저녁 되시길 빕니다.
=적토마 올림=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미짱 작성시간 21.07.13 앞선시대에살면서 나라와 글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서러운 이야기를 저렇듯 시로 마음을 풀어 적은 이상화 시인의 애국의 마음이 참으로 소중함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적토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7.13 미짱님, 많이 덥지요.
제가 요즘 감상하고 있는 시는
365 하루에 한편씩 읽는 한국의 명시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그대 그리고 나의 시
삶과벗 출판사 입니다.
이 시대의 시인들의 삶을 알고 나니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