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시 모음방

백치 애인/신달자

작성자적토마(이장우)|작성시간24.01.06|조회수209 목록 댓글 0

백치 애인/신달자
 
  나에겐 백치 애인이 있다.
  그 바보의 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를, 그리워하는지를 그는 모른다. 별 볼일 없이 우연히,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나게 될까 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 찻집에서 찻집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또는 버스 속에서 시장에서, 행여 어떤 곳에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며, 내게 한마디 말도 해오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나를 떠난 그 어디서나 총명하고 과감하면서, 내게 와서 너는 백치가 되고 바보가 되는가.
  그러나 나는 백치인 너를 사랑하며 바보인 너를 좋아한다. 우리가 불로 만나 타오를 수 없고 물로 만나 합쳐 흐를 수 없을 때, 너는 차라리 백치임이 다행이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 것이다.
  바보 애인아. 너는 그 허허로운 결과를 알고 먼저 네 마음을 돌처럼 굳혔는가. 그 돌 같은 침묵 속으로 네 감정을 가두어 두면서 스스로 너는 백치가 되어서 사랑을 영원하게 하는가.
  바보 애인아. 세상은 날로 적막하여 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큰 과업처럼 야단스럽고 또한 그처럼도 못 하는 자는 절로 바보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그래, 바보가 되자. 바보인 너를 내가 사랑하고 백치인 네 영혼에 나를 묻으리라.
  바보 애인아. 거듭 부르는 나의 백치 애인아. 잠에 빠지고 그 마지막 순간에 너를 부르며 잠에서 깬 그 첫 여명의 밝음을 비벼 집고 너의 환상을 좇는 것을 너는 모른다. 너는 너무 모른다. 정말이지 너는 바보, 백치인가.
  그래 백치이다. 우리는 바보가 되자. 이 세상에 아주 제일가는 바보가 되어서 모르는 척하며 살자. 기억 속의 사람은 되지 말며 잊혀진 사람도 되지 말며 이렇게 모르는 척 살아 가자. 우리가 언제 악수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언제 마주 앉아 차를 마셨던가. 길을 걷다가 어깨를 부딪고 지나가는 아무 상관없는 행인처럼 그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는 거다.
  바보 애인아. 아무 상관없는 그런 관계에선 우리에게 결코 이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애인이다. 백치 애인이다. 
 
===[사랑하니까, 괜찮아, 나라원]===
신달자(1943년 12월 25일~, 경남 거창군 출신)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1997년부터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여상〉을 통해 시 〈환상의 밤〉으로 여류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뒤,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발〉, 〈처음 목소리〉가 추천되면서 재등단했다.
신달자의 시는 평이한 어법으로 일상사의 이야기를 하거나 대상을 관찰하고 있지만, 결코 평이한 시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순간적 깨달음을 시인 특유의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백과에서 발췌>
--------------------------------------------------
 
'사랑하니까, 괜찮아' 시집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설레는 봄_내가 늘 그리던 사랑이 저만치서 옵니다.
2. 행복한 여름_ 그대와 나의 사람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3. 아픈 가을_ 돌아서서 걷는 마음에 바람이 붑니다.
4. 그리운 겨울_ 그대 그리운 마음이 노래가 됩니다.
 
백치 애인은 4장 '그리운 겨울' 중 첫번째 시입니다.
지금의 계절이 겨울이기에 4장부터 시작합니다.
 
이 시를 감상하면서
바보, 백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보처럼 사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 으뜸이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런 사람.
필요할 때는 꼭 있는 사람.
그런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적토마 올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