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사무쳐 움직이면 법을 넘어설 수 있다
여러분, 가을에 밤나무에 밤이 가뜩 열려 가지고 누릿누릿하게 익은 알밤들이 `내 얼굴 좀 보소' 하는 듯이 아가리를 쫙 벌려 가지고 주렁주렁 달려 있다면 아무리 신사요, 도를 닦는 도인이라 하더라도 `아이고, 저 놈 돌이라도 한번 집어 던지면 와스스 떨어지겠구만' 하며 관망하다가 도인 체면도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돌을 들어 던지는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죄예요, 죄가 아니예요? 「아닙니다」 알고 했을 때는? 죄입니다. 자신도 모르고 했을 때는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죽을 자리에서 구함을 받을 때에는 자기가 알게 구함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구함을 받는 거예요. 제일 심각한 자리에 들어갔을 때 무사통과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해버리는 수가 많아요. 그럴 때에는 하나님 법에도 안 걸리고 사탄 법에도 안 걸립니다. 갖다 붙일 말이 지천이예요. `그 얼마나 밤을 사랑했으면 그랬을꼬'하는 용서가 나올 수 있는 거라구요. 그 얼마나 밤을 그리워했으면 그랬을꼬… 그 주인보다 천 배 더 그리워해 가지고 그렇게 했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구요.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동정의 요인이
있다는 거예요. `그 나무의 주인은 백정놈보다 더 악한 사람이었는데 그거 잘했지'할 수도 있다구요. 악당들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런 것을 중심삼고 본다면, 하나님은 말이예요. 하나님이 보좌에 떡 앉아 계신다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모시는 데 얼마나 엄중한 천법이 있겠어요? 그것도 모르고 그저 그리움에 취해 가지고 어떻게 할 때는 그것이 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법을 넘을 수 있는, 그분에 대한 사무침이 극해 가지고 그분을 위하는 마음이 전체를 덮고도 남을 수 있는, 공인될 수 있는 입장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얼마든지 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옛날에는 누워서는 기도 안 했어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드러누워서도 기도를 곧잘 합니다. 눈을 슥 감고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신비로운 경지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드러누워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정색을 하고 예법을 갖추어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될 텐데 드러누웠다' 하는 인식이 있을 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러누웠다는 인식이 없는 경지, 별천지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하여 무엇을 먹자고도 이야기할 수 있고, 어디로 가자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몸뚱이는 드러누워 있지만 무사통과 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왜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경지에서는 모든 것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은 사망선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49권 49-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