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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전 (버림받은 하나님 아버지 제2부 10장)

작성자훈독왕|작성시간22.02.06|조회수55 목록 댓글 0

버림받은 하나님 아버지

 

제 10장

성 전

(Holy War)

 

전쟁은 실제로 무엇이 잘못인가? 죽게 될 사람들은 결국은 죽게 되는데, 그러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평화롭게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인가? 겁쟁이는 이것을 불평하나, 그것은 종교인들을 괴롭히지는 않는다. 아니다. 전쟁 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악한 행위들은 피해, 복수의 잔인함, 정신의 황폐함, 반란의 야만성, 지배 욕망과 그런 다른 것들을 손상시키려고 하는 욕구이다. 실제로 아주 선한 사람들이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 이런 것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하나님 혹은 법률상의 통치자로부터 전쟁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인간의 여러 문제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명령하거나 혹은 그런 명령에 바로 복종하도록 강요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이 세례를 받기위해 요한에게 다가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면 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너의 무기를 버려라, 임무를 그만두라, 사람을 치거나 부상시키지 말라 혹은 장애자로 만들지 말라.” 그러나 요한은 알았다. 군사적 임무에서 이런 것을 하는 경우에는, 그들은 살인자로서 혹은 사적인 잘못에 대한 복수자로서가 아니라 법 집행자와 공공안전의 방어자로서 행동했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틴(Saint Augustine: 354-430) 『하나님의 도성24)

 

몇 백 년에 걸쳐 무슬림과 같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성전’의 개념을 지지해오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꿈(사사기 7:13-14), 주사위 점, 점의 수단으로 우림과 둠빔(유대인 대제사장이 재판할 때 가슴에 차던 물건, 사무엘상 28:6) 그리고 예언가들의 선언(열왕기상 22:5-8) 등을 통해서 무장한 전투에 대한 자신의 허락을 인간에게 전달했다. 군사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로 간주되는 약속의 법궤 앞에 서서 그들의 전투 계획이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하는 지를 묻곤 했다. 어떤 답변도 부정적인 것으로 의미 되지 않았으며(사무엘상 14:36-37), 한편 긍정적인 대답은 상세한 지시를 포함했다(사무엘하 5:23-24). ①

 

일단 성전이 선포되면,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군대지도자에게 그의 권위를 전달했다. 지도자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즉 적이 패배할 때까지 성관계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② 전쟁 후에 그들은 하나님이란 ‘신성한 두려움의 대상’에 대한 감사제로 전리품을 하나님에게 할당했다.③

 

전투 중 하나님의 존재

 

법궤는 하나님이 적을 물리치는데 참가하도록 사사에 의해 전투장으로 옮겨졌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한 사사는 히브리 군대에 다음과 같이 의무적으로 연설하는 것이 신명기 20:2-4에 기록되어 있다.

“들으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아! 오늘 그대들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투장으로 가게 되오. 약한 마음을 갖지 말고, 그들에게서 겁을 먹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주 너의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기 위해 너의 적을 물리치고 너에게 승리를 주기 위해 너와 함께 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인에게 승리를 제공하는 것을 강요받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이스라엘인들이 하나님이 승인하지 않은 전투인 에베니즈 지역의 블레셋인들에게 보내진 후에, 그들은 법궤를 실로(팔레스타인의 한 도시)에서 가져오게 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법궤의 도착을 환영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인은 다시 패배했고 블레셋인은 법궤를 억류했다 (사무엘상 4:3-5, 10-11). 법궤의 억류 소식이 즉시 ‘옷은 찢어지고 흙이 머리에 묻은 모습으로’ 전령에 의해 실로에 전달되었다. 고령인 사사 엘은 그 소식을 듣고 넘어져 죽었으며, 법궤 억류소식이 전해진 그 때에 출산을 한 그의 며느리는 자식을 ‘이가봇’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지나갔다’는 의미다 (사무엘상 4:12-22). ④

 

콘스탄틴 황제와 십자가

 

성전의 개념은 기독교 시대를 거쳐 지속되었다. 312년에 콘스탄틴 황제는 그가 밀비안 다리에서 로마 제국의 경쟁자를 괴멸시켰을 때 하나님이 임명한 존재가 되었다. 그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개입 덕분으로 이뤄졌다. 운명을 건 전투를 하기 전에, 콘스탄틴 황제는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하늘에서 십자가의 어떤 환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이 표지에 의해서, 그대는 승리를 얻으리라.’라는 문구로 해석된다. 그는 병사들의 방패에 십자가를 새겨넣고 그의 적에게로 전진하여 제국을 재통일했던 영광스러운 승리를 이룩했다. 가톨릭의 어떤 대변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군사적인 학살을 위해 사용된 깃발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 공포 혹은 격분을 표시하지 않았다. ⑤

 

정당한 학살

 

성 아우구스틴(St. Augustine)은 『군대조직에서 기독교인』에서 아래와 같이 성전의 개념을 지지했다.

 

누구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계속되는 전쟁의 올바름에 대해 의문을 제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탐욕으로 행해지는 것은 부패하지 않은 신 혹은 그의 신성한 모습의 어느 것에든 어떤 실질적인 해로움을 끼칠 수 있음으로 어떤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자존심을 몰아내고, 부숴버리거나 혹은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명령한다. 고통스러운 전쟁은 성인들의 인내심을 자아내며,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교정행위를 받아드리도록 도와준다. 누구도 그것이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 위에서 어떤 힘을 소유하지 않는다. 모든 힘은 하나님의 명령 혹은 허락에서 나온다.

그래서, 공정한 사람은 비록 그 자신이 비종교적인 지배자의 명령을 받아 근무할지라도 공공의 평화 질서를 위해 정당하게 싸울 수도 있다. 그가 하도록 명령받은 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율에 반대적인 것이나 혹은 분명하게 반대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명령을 내리는 악함은 왕을 유죄로 만들 수도 있으나, 복종하라는 그 명령은 병사를 죄가 없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 얼마만큼 죄가 없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그가 결코 어떤 것을 부당하게 명령할 수 없는 하나님에 의해 싸우라고 명령받았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사람이 실현하는 것을 실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⑥

 

이 가르침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지한 것으로, 그는 『신학대전』(1269-1272)에서 아래와 같이 전쟁이 정당하게 될 수 있는 3가지를 나열했다.

 

첫째, 전쟁이 누구의 명령으로 계속되어야 하는지 주권자의 권위가 필요하다. 전쟁을 선언하는 것은 개별적인 개인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초월자의 재판소로부터 그의 권리에 대한 보상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공격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어떤 잘못 때문에 그것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음으로 공격을 당해야 한다.

 

셋째, 교전국들은 정당한 의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선을 향상시키거나 혹은 악을 피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⑦

 

신께서 바라신다(데우스 로 볼트)

 

637년에,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무슬림이 최초로 성지를 침략했을 때 성전의 개념을 그의 신하들에게 설파했다. 헤라클리우스는 그리스 교회의 부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대주교 세르기우스의 지원을 받았다. 7년간의 군사행동 후에 헤리클리우스는 무슬림 집단을 정복하고 환호하며 콘스탄티노플로⑧ 돌아갔다. 성전의 개념은 교황 어반 2세가 셀주크 터어키의 수중에 떨어진 성지의 재탈환을 선포한 1095년에 완전하게 표현되었다. 터키인들은 1070년에 파티미드 족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았을 때, 순례자들은 기독교인 박해와 신성한 신전에 대한 신성모독의 무서운 이야기들을 로마로 퍼트리기 시작했다. 어반 2세는 클레몬트 의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달했던 잔혹 행위들을 아래와 같이 설교 시간에도 언급했다.

 

“신의 아들들이여, 비록 여러분이 평화를 지키고 교회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어느 때 보다도 더 굳세게 약속해 오고 있지만, 여러분이 여전히 해야 될 중요한 일이 남아있습니다. 신성한 교정행위에 새롭고 빠르게 조치를 취하여, 여러분들은 공정함의 힘을 신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관계가 있는 다른 일에 적용해야 합니다. 긴급하게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동쪽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 여러분은 그들에게 약속되어진 도움을 주는 것을 서둘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가 들은 것처럼, 터어키와 아랍인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지중해와 성조오지의 팔이라 불리는 헬레스폰트 해안선 서쪽에 있는 로마의 영토인 그리스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땅을 점점 더 많이 차지하고 일곱 번의 전투에서 기독교들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고 교회를 파괴하고 제국을 황폐하게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들이 벌을 받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을 계속 허용한다면 하나님의 신앙자들은 훨씬 더 많이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리스도의 전령으로서 여러분들이 도처에 이것을 알리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보병, 기사, 가난한자나 부자- 설득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신속하게 도움을 제공하고 우리 동족의 땅에서 지극히 사악한 무리를 물리칠 것을 간청합니다. 나는 여기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이것은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또한 해당됩니다. 덧붙이면, 그리스도는 이것을 명령합니다. ⑨

 

어반의 간청은 아주 강력하여 클레멘트에 참석한 수천명의 기사들이 ‘신께서 바라신다’라고 하며 천둥치듯이 응답했다. 기사와 귀족들은 그들의 웃옷에 붉은 십자가를 새기고 즉시 장대한 원정을 위한 계획을 짰다. ⑩

 

신성화된 병사들

 

그 원정은 250년 동안 계속되어 교황의 목적을 크게 이루었다. 봉건 영주들도 공통의 명분에 서로 단결했다. 예루살렘이 1099년 6월 7일 십자군에25) 함락되어, 중동에 기독교 왕국이 설립되었다. ⑪ 게다가 중세 귀족과 기사들이 그리스도의 병사로 변화되어, 그들은 무기를 지니는 것을 종교적인 경험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기사작위 입회와 관련된 여러 의식들이 신성한 의식의 측면으로 간주되었으며, 후보자들이 신의 안내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기대되고 그들이 작위수여 전에 온 밤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졌다. 성직자들은 병사들과 무기를 꼭 같이 축복하였으며, 기사의 미덕에 관한 설교가 이뤄졌다. 군사훈련은 정밀하고 아주 이상화된 규범을 실천했으며, 기사의 행동에 관한 높은 수준을 강조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기사도 시대의 발흥을 가져왔다. ⑫

 

전사 교황들

 

피를 흘리는 행위가 정당하고 성스러울 수도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사제들은 자주 전투 말에 올라타고 전쟁터로 향했다. 최초의 전사 교황은 위대한 개혁가인 레오 9세(1048-1054)였다. 1052년, 독일황제 헨리2세는 베네벤토 공작 영지를 교황권에 기부했다. 그러나 베네벤토 거주 공작인 팬덜프는 이 기증을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에 대한 조치로 교황 레오는 황제에게 팬덜프와 노르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독일 군대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교황은 헨리 황제로부터 단지 700명의 병사를 지원받은 상황에서, 이런 수적 열세로 인해 레오는 수백명의 훈련되지 않은 이탈리아인들을 군사적인 업무에 참여하게 했다. 그 군사 행동은 비극적인 실패였다. 레오 군사는 노르만 군대에게 빠르게 괴멸됐으며, 노르만 군대는 교황을 포로로 잡고 무릎을 꿇게 하고 그의 병사들을 죽인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게 했다. ⑬

 

가장 유명한 전사 교황은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의 후견인인 줄리어스 2세였다. 그가 교황 자리에 올랐을 때, 줄리어스는 교황권 국가들이 지역의 독재자들의 수중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교황은 프랑스, 독일과 스페인에서 군대를 소환하여, 강력한 군대의 선두에서 말에 올랐다. 교황군은 페루지아를 탈환한 후, 볼로냐 공격을 시작하고 그의 군대에 저항한 자는 누구든지 파문하는 기세로 그리고 그의 적을 죽인 자에 대해서는 대사면의 제안을 하면서 공격을 강화했다. ⑭ 이것은 새로운 전투의 형태가 되어 그의 적들은 재빨리 백기를 들었다. 같은 전략이 베니스에서도 작용하여, 베니스는 1510년에 교황에게 항복했다. ⑮ 줄리어스 교황 2세는 교황 임기의 남아있는 3년을 프랑스군과 전투를 하면서 보냈는데, 프랑스군은 그들이 교황권 깃발 아래 점령했던 이탈리아 영토를 버리는 것을 거부했다. ⑯

 

위대한 전쟁

 

성전의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서도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위대한 성전』에서 역사학자 필립 젠킨스(Philip Jenkin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전쟁이다. 왜냐하면 압도적으로 기독교 국가들이 성전, 즉 영적 전쟁으로 간주된 상태에서 서로서로 싸웠다는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전쟁을 이해하고, 왜 사람들이 전쟁터로 가고 그들은 전쟁에서 무엇을 바라는지 그리고 왜 전쟁터에 머무는 지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중세 혹은 종교개혁 시대에서가 아니라 항공기와 기관총의 시대에서도, 세계 기독교인들의 다수는 실제로 수천만명 이상이 희생되면서 성전에 종사했다. 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의 성직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성서의 말씀을 변화시켜서 아니면 새로운 성령강림절의 관점에서 국민적인 분위기를 이해해야 될지를 논쟁했다. 투린지안 목사 애덤 리츠하우프트(Adam Ritzhaupt)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일찍이 평화시대에서 우리가 전쟁에서 실감하는 하늘에서 부여하는 것 같은 기쁨을 언제 우리에게 제공했습니까?”⑱ 모든 주요 전투 참가자들은 성전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했는데, 특히 국가 설립의 오랜 전통을 지닌 나라의 군주들뿐만 아니라-러시아,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토만 터어키-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국가적으로 세속적인 공화국에서도 그러했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전쟁이 신의 전쟁인가?

 

미국이 1917년에 전쟁에 들어갔을 때, 예수공헌절 워싱턴 교회의 성공회 목사인 랜돌프 맥킴(Randolph McKim)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전쟁에 우리를 소환한 것은 바로 다름아닌 하나님이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신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사실은 십자군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가장 성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가장 심오하고 가장 진실된 하나의 성전이다. 이렇게 추악하고 불경스러운 국가 독일과 생사를 건 전투에서 우리를 고심하며 싸우라고 부른 이는 다름아닌 공의의 왕인 그리스도이다.”⑲

전쟁 중에 짐작컨대 천사들이 포위된 영국 군대를 구하기 위해서 개입했으며 즉 성처녀 마리아가 아우구스토보의 러시아 군대에 나타났으며, 독일군은 천사장 미가엘을 따를 것을 선언했다. ⑳ 그런 이야기들이 전쟁 시작 처음 7일 이후에 회자되었으며, 전체 전투 기간을 통해서 계속 주장했으며, 한참 뒤에 우리는 그 군대가 최일선 전선 생활의 냉엄한 현실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춰 주길 기대했을 수도 있다.

독일군이 1918년 마지막 최대 공격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미가엘 작전이라 불렸다. 동맹국으로서, 중동에서의 커다란 상징적인 승리와 더불어 종교적이며 종말론적인 희망이 1917과 1918년에 절정에 달했다.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터어키로부터의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경에서 아마겟돈이라 불리는 메기도(이스라엘 북부)에서의 결정적인 영국군의 승리였다. ㉑

 

바티칸 공의회 헌장 (기쁨과 희망)

 

가톨릭 신부들의 설교에 부응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이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1965년 12월 7일 공표되어 성전이란 개념에 다소 긍정적인 의미를 제공했다.

 

교황 헌법은 무장한 전쟁이 다음 조건에서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1) 한 국가가 그 권리가 침해되고 있으며 어떤 임박한 위험에 직

면하고 있음이 도덕적으로 확실할 때

(2) 모든 전쟁의 일부가 되는 전쟁의 원인에서 악의 비중이 클 때

(3) 모든 평화로운 방법이 효과적이지 않을 때

(4) 전쟁으로 인해 인간이 처할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근거 있는

희망이 있을 때.

 

그 문서는 아래와 같이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모든 전쟁이 완전히 국제적인 승인하에 완전히 위법이 되는 때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모든 근육을 격렬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명백한 의무이다. 이런 목표는 모두가 인정하고 모두를 위해서 안전장치 즉 안전, 정의에 대한 고려, 권리에 대한 존중 등을 부여하는 어떤 세계적인 공적인 권위있는 기구를 만들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권위체가 만들어지길 희망하기 전에, 가장 높은 수준의 국제적인 중심기구가 공동의 안전조치를 취득하기 위해서 보다 나은 방법을 추구하기 위해서 활발하게 전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평화는 국가들 사이에서 상호신뢰로 생겨나야 하며, 이용할 수 있는 무기에 관한 공포를 통해 그들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마침내 무기경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방적이 아닌 합의를 통해서 같은 보폭으로 나아감으로써 진실되고 작동 가능한 안전조치를 보장하면서 비무장의 진정한 출발을 시작해야 한다.

 

최근 몇 년에 걸쳐, 가톨릭 기구들이 성전 원칙의 폐기와 평화론의 명백한 주장과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에 대한 거부를 긍정하는 새로운 공식적인 교황 문서의 배포를 주장하는 문서를 발표했다. 바티칸 평화 회의는 다음의 성명을 발표했다.

 

명백하게 신의 말씀인 예수의 증인은 폭력, 불의 혹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신의 백성들은 전쟁, 박해, 억압, 착취 그리고 차별에 참여하면서 여러번 이런 중심적인 복음말씀을 배반하여 왔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신성한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주 빈번하게, ‘신성한 전쟁 이론’이 전쟁을 방지하거나 혹은 제한하기보다는 전쟁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신성한 전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한 전쟁에 대한 비폭력적인 변형을 위한 도구들과 역할들을 개발하기 위한 도덕적인 명령을 약화시킵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복음의 비폭력에 근거한 정당한 전쟁 접근방식으로의 이동을 발전시키고 고려해야한다고 제안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성한 전쟁론’을 더 이상 사용하거나 혹은 가르치지 않을 것을 교회에 촉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톨릭 전통 비난.

 

위원회의 제안에 보조를 맞춰,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9년 2월 5일 정의롭고 신성한 전쟁의 개념에 대해 아래의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 우리는 종교가 결코 전쟁, 증오의 태도, 적대감, 극단주의를 조장해서는 안되며 물론 폭력 혹은 유혈사태를 선동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굳은 결의로 선언합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은 종교적 가르침으로부터의 일탈행위의 결과입니다. 그것들은 종교의 정치적 교묘한 조작과 역사의 한 과정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가슴속에 있는 종교적 정서의 힘을 이용해 왔던 종교단체가 만든 해석에서 생겨난 결과입니다. 이런 결과는 종교인들로 하여금 종교의 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 세속적으로 그리고 근시안적으로 어떤 목적들을 성취하는 방법을 위해 행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가 증오, 폭력, 극단주의 그리고 맹목적인 광신주의를 조장하기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살인, 추방, 테러, 억압의 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할 것을 모든 관련 당사자들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는 서로 죽이고 싸우기 위해 하나님이 남자 여자를 창조하지 않았으며 또한 고문당하고 그들의 인생과 환경에서 굴욕감을 당하게 하지 않았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공통의 믿음에 근거하여 이것을 요청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은 누구로부터 방어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인간에게 폭력을 가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사제단이 선언하여 통과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계명들, 전임 교황들의 조치들과 그들이 신성하고 정당하다고 믿었던 국가 간의 충돌에서 죽은 수백만 명의 병사들의 희생들은 비기독교적이며 절대자의 의지와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신교의 편협한 주장

 

또한 주류 신교 교파도 ‘신성한 전쟁’에 관한 주장을 발표했다. 2015년 제15차 기독교 연합교회(UCC) 총회에서는 전쟁에 대해서 심지어 자체 방어와 정당한 전쟁에 대한 공표 그 자체에 대해서도 분명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교파 지도자들은 “정당한 평화신학을 생각하여 정의의 전쟁을 뛰어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㉖ 그들은 이어서 “비폭력 충돌은 다양성의 건전한 반영이다”라고 계속했다. 전쟁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지도자들은 다음 사항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국제연합(UN)을 강화시키는 지원책을 주장했다.

 

* 국가 간의 이해 충돌에서 보다 많은 권한.

 

* UN이 행동을 하도록 요청받을 때 국경 분쟁을 감시하고 관여할 수 있는 적어도 5,000명의 영구병력을 포함한 평화군

 

* 중재, 분쟁 관여, 분쟁 해결에 훈련된 평화유지 단체

 

* 국제평화 교육기관 지원

 

* 군사정보를 공동단체에 제공하는 세계적인 인공위성 감시체계

 

* 군사시설과 국제적인 무기 거래를 제한하는 국제조약

 

* 대량 살상의 핵과 생화학 무기의 개발, 실험, 사용과 보유에 관한 국제적 금지

 

* 우주 방어 체계, 전략방위구상(SDI: 대기권 밖에서 탄도 미사일을 요격하는 미국의 군사계획) 개발과 우주에서 모든 무기 국제적 금지

 

이 교파 주장은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이 ‘전쟁의 인물’(출애굽 15:3)이었으며, 그가 그의 민족을 전쟁터로 인도하며 그들의 적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다윗의 다짐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나의 반석이신 주를 찬양하라. 주는 전쟁에 대비하여 나의 손을 단련시키며, 전투를 위해 나의 손가락을 단련시킨 분이라! (시편 18장, 다윗의 다짐)”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사울의 군대의 승리에 관한 어떤 시인도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손가락으로 석판에 새겼던 토라와 율법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기독교 연합교회의 주장에는 그들의 모든 지향점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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