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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증거 (버림받은 하나님 아버지 제2부 법규 6장)

작성자훈독왕|작성시간22.01.29|조회수68 목록 댓글 0

 버림받은 하나님 아버지 

 

 제 2부

 법 규

(The Law) 

 

 6

출애굽 증거

(The Evidence of Exodus)

 

  학문에 관한 근본적인 변화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이 자신의 공부 분야에 점차적으로 다가 가는 것은 보통 관례이며천천히 밝혀지는 미스테리들처럼시간이 지나 그들이 그들의 전공을 전체적으로 보는 때가 되면 그들은 아주 철저하게 전통적인 선입견과 사고방식으로 가득 채워진다그들은 기존 관념의 전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이런 무능력은 특히 과거 역사에 관련된 학문에서 명백하다 

     마틴 버날(Martin Bernal), 『검은 아테나(Black Athena)1987.

 

출애급 시기

 

 적잖은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만일 수십만 명의 히브리인들이 갑자기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이동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애굽 노예생활에 대한 토라 이야기가 역사적인 증거가 거의 없는 실현 불가능한 지어낸 이야기라면, 성경의 전반적인 기반이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십계명을 받은 모세의 이야기 또한 신뢰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그런데도 사람들은 십계명이 하나님의 진실되고 권위있는 지시 사항이라는 것을 왜 믿어야 할까? 성경은 소위 해리포터 소설 같은 더 이상 권위가 없는 하나의 문학 작품이 될 것이다. 마르키온 추종자들은 곧바로 구약의 많은 부분이 전혀 역사적인 기반이 없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약 또한 구약의 여러 사건들을 반복하여 언급하게 되므로, 신약의 신뢰성도 의심받을 여지가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대탈출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출애굽은 기원전 13세기에 군림한 애굽의 가장 위대한 왕인 람세스 2세(Ramses: 기원전 1279-1213) 통치기간 중에 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것은 출애굽 1장 11절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애굽인들이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 왕을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메스를 건축하게 하니라”

 

  일부 고고학자들은 새로운 왕조 때에 람세스 도시에 거주한 셈족에 관한 고고학적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① 그러나 토마스 톰슨(Thomas Thompson)과 데이비드 로흘(David Rohl)을 포함한 많은 고고학자들은 라메스 2세가 통치하기 몇 백 년 전에 ②, ③ 그 지역에 사는 셈족(셈어를 사용하는 아랍인 또한 유대인)의 증거는 히브리민족의 노예생활에 관한 증거를 가리킨다고 믿고 있다. 람세스 남부지역 바로 아래 있는 아바리스 도시의 텔 엘 다바에서, 고고학자들은 가나안에서 온 아시아인들이 거의 대부분 거주했던 훨씬 더 큰 도시를 발견했다. 고대 도시 중에서 가장 큰 것 중의 하나인 그 도시는 12대 왕조시대에 생활을 시작되어, 13대 왕조에는 빠르게 팽창되었다. ④ 자유 지역과 같은 특수한 신분을 누렸던 그 도시는 그곳에 사는 유목민들의 증거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이집트 관습이 아니었다. 16)

 

룩소르 기념비

 (이집트 남부 나일강변의 소도시, 테베 유적이 있음)

 

  람세스 2세 사망 몇년 뒤에 그의 아들 메렌프타프가 룩소르에 만든 ‘메렌프타프 석주’라 불리는 한 기념비의 발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탈출이 람세스의 신왕조 통치기간 중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믿음은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그 기념비는 바로에게 패배한 이스라엘 국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념비에는 “이스라엘은 버려진 쓰레기이며, 그의 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다. ⑤ 만일 람세스 군대가 가나안에 이미 살고있는 이스라엘 군대를 물리쳤다면, 어떻게 람세스가 이스라엘 노예들이 심지어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이집트를 떠나도록 허용하는 바로가 될 수 있었을까?

 

 또 다른 증거는 독일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기원전 1360년 이집트 왕조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베를린 받침대’이다. 이 이집트 문서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속박되어 있는 적에 대한 참고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⑥ 이것은 대탈출을 언급하는 새 왕조의 후반기를 아주 의문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빨강 머리 남자

 

 또한 아바리스에서 람세스 2세 왕조 수세기 중기 왕국기간에 속하는 12대 왕조 말기에 존재했을 것 같은 이집트 풍습이 아닌 시리아족의 집이 발견됐다. 그 집의 맨 위쪽에는 12개의 기둥과 2개의 무덤이 있는 큰 궁궐이 있었다. 하나는 바로의 무덤인데, 그것은 고위층을 위한 높은 명예를 의미했다. 피라미드는 보통 바로만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남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⑦ 피리미드 무덤 안쪽에서 고고학자들은 빨강색의 실물보다 더 큰 남자의 머리와 노란 피부를 가진 동상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 남자가 줄무늬 망토를 가리키는 그림물감 유물과 더불어 셈족(시리아 팔레스타인 계통 아시아인)임을 나타낸다. 그 망토는 아마 족장인 야곱이 그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었던 창세기에서 언급하는 다양한 색깔로 된 외투와 같은 것이다.

 

 그 동상을 발견한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는 비록 그 남자가 이집트 사람이 아닌 아시아 계통 사람이지만, 그는 의외로 권력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언급한다. 이런 사실은 드문 일이였는데 왜냐하면 아시아 사람들을 나타내는 이집트 중기 왕국의 조각상들이 가장 흔하게 이들을 정복당한 적군이라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⑧, ⑨ 이 사람이 창세기에서 묘사한 바로 왕 다음으로 이집트의 가장 높은 고위직에 오른 요셉이었을까? 북서부 성 바울 대학의 이집트 고고학자인 찰스 알링(Charles Aling) 교수와 성경협회 고고학자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는 그런 언급은 성경이 요셉이란 인물을 셈족의 유능한 존재로 가리키는 결과로 간주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⑩

 

바로의 미간주름 17)  ( 두 눈썹 사이에 나는 주름)

 

 그 당시의 바로는 그의 동상이 미간 주름으로 묘사된 아메넴하트 왕이었다. ⑪ 이 묘사는 그의 통치기간 중에 이집트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나타낸다. 이 바로의 통치 말기에는 지역 권력자들의 영향력이 끝나고 왕의 수중에 권력과 부의 중앙 집중현상이 발생했다. ⑫ 그런 권력 중앙 집중현상은 창세기 41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바로 정부가 7년 풍년으로 많은 곡식을 저장하고 그 후 발생한 7년 흉년으로 인해서 촉발되었다.

 

  그 때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은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더라. 일곱 마리 좋은 암소는 일곱 해이며, 일곱 개의 좋은 이삭은 일곱 해이라; 그 꿈은 하나이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는 칠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칠년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고하기를 하나님이 그 하실 일로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는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기근으로 멸망되리니.

  후에 든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를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시고 바로께서는 이같이 행하사 나라에 여러 관리를 두어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 관리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식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에 쌓아두게 하소서.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의 흉년을 예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인하여 멸망치 아니하리이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의 직무를 보러 들어갈 때 나이 삼십이었다. 요셉이 바로 앞을 떠나 애굽 땅 전역을 순찰하였다. 칠년 풍년에는 토지 소출이 아주 많아, 그는 애굽에 풍년이 든 칠년의 모든 곡식을 모아, 각 성에 곡식을 비축하였으며, 각 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성안에 저장하여. 저장한 곡식이 바다의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요셉이 말한대로 애굽 땅에 퍼진 일곱 해의 풍년이 끝나고, 일곱 해의 흉년이 들었더라. 온 땅에 흉년이 들었으나, 애굽 땅은 식량이 있었다. 애굽 온 땅이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이 바로에게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어, 바로는 모든 애굽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요셉에게 가서 그가 말하는 대로 하라”. 온 땅에 기근이 있으니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어 애굽 백성에게 팔쌔,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여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하였더라. (창세기 41:25-57)

 

 외딴 지역의 주민들은 그 극심한 몇 년 동안의 기근으로 인해 중앙 정부의 가게로 가서 목숨을 연명할 곡식을 사기 위해 그들의 소유물종들토지 그리고 심지어 그들 자신을 팔았어야 했을 것이다.

 

피라미드 무덤

 

  신기하게도, 아바리스 지역의 피라미드 무덤은, 도굴꾼조차도 가져가려고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뼈는 있지만, 완전히 텅 비어있다. 고고학자 로흐는 만일 그 유물들이 요셉의 것이라면, 여호수아 24:32(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들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에서 언급되었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수세기 후에 애굽을 떠날 때 ⑬그것들은 무덤에서 옮겨져 가나안에 있는 세겜으로 (현재 서안의 나불루스) 가져갔을 것이다. 또한 출애굽기 1:7(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에서 묘사되었듯이, 아바리스와 다른 지역을 포함한 애굽 삼각주 지역에는 이런 셈족 거주민들의 ‘뛰어나고 대단한 종족 번식’의 증거도 있었다. ⑭

 

이스라엘 민족의 노예생활

 

 영국 브리스톨 트리니티 대학의 구약 교수인 존 빔선(John Bimson)은 아마넴해트 통치기간 중에 지속된 이런 풍년은, 그 이후 흉년으로 이어져 사람들이 30대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⑮ 그는 또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의 살해 증거를 본다. 아바리스 발굴 현장에 의하면 신생아들은 아주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열 살에 이르는 아이들의 50%는 생후 3개월 안에 죽었다고 추정 되나. ⑯그 당시의 매장 형태는 60%의 성인 여성과 40%이 성인 남성들의 유적을 보여준다. ⑰ 이처럼 남자 성인들의 무덤 수가 적은 것은 남성이 성경에서 묘사되었듯이 남자 유아 살해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브루클린 파피루스라 불리는 유명한 문서에는 그 당시 부유한 애굽 가정집에 거주하는 집안 노예들의 목록을 포함하고 있다. 기록된 노예들의 70%는 셈족이다. 그들의 이름은 출애굽기 서두에서 언급되는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는 것을 거부했던 산파들의 이름과 같은 십보라(아름다움이란 뜻으로 모세가 태어날 당시 히브리 산파 중 한사람) 뿐만 아니라 메나헴, 잇사갈과 아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⑱ 그 증거는 수세기 뒤의 새 왕국인 19대 왕조가 아니라 분명히 13대 왕조(중기 왕국)에서 다수의 히브리인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역병의 증거

 

  네덜란드 레이덴 박물관에는 ‘애굽 현자의 경고’로 알려진 이집트 ‘아이푸워’라는 필경사가 쓴 파피루스 문서가 있다. 이 문서는 ‘물에서 피’로 변하는 등의 연속된 재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풍부한 곡식이 떨어졌다. 식량 공급이 줄어들고 있다. 귀족들이 굶주리고 고통받고 있다. 살아있는 자들은 짙은 폭풍우 속에 갇혀 있다. 보아라, 역병이 나라 전체를 휩쓸고 있다. 시체가 줄어들지 않고 피가 도처에 번져 있다. 통곡소리가 비탄과 함께 나라 전체에 들린다.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필요한 것을 묘사하는 것과 갑자기 부유하게 되어 부자들에게서 빼앗은 좋은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된 가난한 사람들을 서로 연관시킬 수 없기 때문에 ‘아이푸워 파피루스 문서’를 무시한다. “노예가 그가 원하는 것을 가져간다. 금, 청금석, 은 그리고 터키석 보석들이 여자 노예의 목에 걸려있다.” ⑳ 그러나 이런 환상적인 이야기가 정확하게 출애굽기 12:35-36의 성경 이야기와 일치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들에게 금은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빼앗었더라

 

 이집트 고고학자인 갤리트 다얀(Galit Dayan)은 나라 전체에 ‘번져갔던 어떤 역병’을 묘사한 다른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피가 도처에 있었고, 강물은 핏빛이었다. 우박이 들판 전체를 내리쳤으며 땅은 빛이 없었으며 나라 전역에는 짙은 어둠이 있었고... 하나님이 애굽 땅의 모든 맏것 즉 왕위를 이어받을 바로의 맏이로부터 감옥에 있는 죄인들의 맏것에 이르기까지 내리쳐서 목숨을 앗아갔다.”㉑

 

              이집트 역사의 3대 주요 왕국

고대왕국
2700-2200 B.C.E
중기왕국
2050-1800 B.C.E
신왕국
1550-1100 B.C.E

 

  아바리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12번째 왕조 후기부터 13번째 왕조 말까지 지속되는 몇 세기 후에, 본래의 완전히 애굽화 된 셈족의 사람들 즉 야곱의 이스라엘 후손들이 아바리스를 버리고 고고학적인 기록에서 애굽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황폐한 모습을 그 도시에 남겼다.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은 아바리스 전역에서 적절한 무덤 안장 물품도 없이 시체를 덮고 있는 땅에서 얕은 구덩이들을 발견했다. ㉒

 희생자들을 급하게 매장할 필요가 생긴 것을 미루어 보면 어떤 치명적인 역병이 그 도시를 덮쳤음에 틀림없다. 데이비드 로흘에 의하면, 이것은 열 번째 재앙 즉 맏이에 대한 죽음에 관한 증거일 것이다. 그때 그 도시의 셈족 구역은 텅 비었고, 사람들은 단순히 그들의 소지품들을 집어들고 떠나갔으며 집들은 무너져 망가지도록 방치됐다. ㉓

 

출애굽의 증거 18)

 

  람세스 혹은 그의 아들의 통치 기간에는 대재앙의 증거가 없는 반면에, 새 왕국이 수립되기 수세기 전에 시체 더미와 더불어 만들어진 아바리스와 카훈 지역에는 많은 구덩이들이 있다. 이런 사실은 비상 매장의 증거이며 그곳에 살고 있었던 셈족 백성들의 갑작스런 사라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물품들은 갑작스런 출발을 암시하듯이 집들이나 도로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3세기 ‘마네토’라는 애굽 성직자는 ‘두디모어’ 왕의 통치기간의 역사를 썼다. 두디모어 왕은, 13번째 중기왕국의 마지막 왕인데, 그의 통치기간에 “하나님은 애굽인을 세게 내리쳤다.”라고 마네로는 기록했다. ㉔ 두디모어의 사망 직후, 애굽은 북쪽에서 온 알려지지 않은 이방 민족에게 침략을 받았는데, 그들은 큰 타격을 주지 않고 그 땅을 정복했다.㉕ 왜? 애굽인은 이미 쇠약해지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힉소스 왕조(기원전 1750-1580)라 불리는, 이 시기에 외국 침략자들은 애굽인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 시기는 고대, 중기 혹은 신왕국 기간 중에서 애굽역사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쇠퇴기였다.㉖

 

가나안의 정복

 

  열왕기상 6:1(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년 십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에 의하면 출애굽은 기원전 1450년에 일어났는데, 이 시기는 솔로몬 왕이 통치 4년째인 기원전 970년에 성전을 세웠던 시기보다 480년 전에 발생했다. 그래서 주류학자들은 애굽의 신왕조에 해당되는 후기 청동기 시대에 여리고 성의 파괴 증거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1550년 경에 그 도시를 파괴했던 거대한 화재로 무너진 성벽의 증거는 있다(중기 왕국).㉗

 

  고고학자들은 또한 모든 집에서 곡식으로 가득찬 항아리를 발견했다. 이것은 포위기간이 아주 짧았음을 암시하며, 그 도시 주변을 7일 동안 행진해가고 이어서 그 성벽이 무너졌다는 이스라엘인의 성경 이야기와 일치한다.㉘ 여호수아(2:1-7)에서는 이스라엘 첩자를 숨겨주고 그들의 탈출을 도왔던 기생 라합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눈(히브리어의 14번째 글자)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담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어떤 자가 여리고 왕에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인 몇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이미 그 두 사람을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로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지만, 급히 따라가라 그러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어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아마) 줄기 속에 숨겼더라. 그 사람들은 요단길로 나루터까지 따라갔고 그 추적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수2:1-7)

 

 도시 성벽 안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 그녀의 집은 공격당할 때 선택된 사람에게 제공된 그녀의 도움 덕분으로 무사했다. 고고학자들은 여호수아 2장에서 묘사된 대로, 성안에 지어진 집들과 함께 성벽의 한 부분이 파괴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㉙ 성경은 또한 하조르(가나안 왕국의 수도였으며, 현재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고대도시)의 왕인 ‘자빈’이라 불린 사람을 죽인 여호수아에 관해 언급한다. 청동기 중기시대 기간에 하조르 지역 왕궁 유적지에서 발굴된 명판들은 이 군주에 대한 참고 자료를 남기고 있다.㉚

 

고고학적 재평가

 

  성경 이야기의 여섯 단계 전체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있다. (1) 이스라엘인의 애굽 도착 (2) 수십만 히브리 민족의 증가 (3) 히브리족의 노예생활 (4) 애굽에 닥친 역병 (5) 출애굽/갑작스런 출발 (6) 가나안 국가 정복. 이런 사건들은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신 왕조가 아닌 중기 왕국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들은 새로운 연구와 인식 체계의 대전환으로 인해서, 다음 사항들이 드러났다. 평범한 관점에서 감춰진 것, 애굽에서 이스라엘인의 존재 현실, 그들의 노예생활, 일련의 대재앙 후의 갑작스런 출발, 여리고 성과 다른 부족 정복, 모세 5경에 나타난 모든 것들.

 

 이런 것들은 고대 애굽,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과는 달리, 히브리인의 신은 신화적인 시간과 장소가 아닌 직선상의 역사에서19) 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유대인의 주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런 계시들 중의 다수는 고고학적인 자료에 뒷받침되어 회의론자, 무신론자, 종교 경멸자 그리고 현대 영지주의자들의 상반된 주장과 계속해서 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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