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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집 40-200권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53권 2편)

작성자훈독왕|작성시간24.03.27|조회수7 목록 댓글 0

말씀선집 53권 2편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1972.02.08 (화), 미국 필라델피아 쉐라톤호텔

<52권 18, 53권 3, 6, 9, 12, 15, 54권 1편도 같은 제목의 말씀임>

 

오늘 저녁에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해 보겠습니다.

존재와 작용의 요건

이 세계는 크게는 태양계가 존재하는가 하면 작게는 원자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니다. 그런데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힘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힘이 있기 위해서는 작용을 해야 됩니다.

 

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 혼자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다고 합시다. 그 하나님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혼자 있어 가지고는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절대적인 그분이 혼자 좋아하고 웃는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도 정상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그 하나님이 요만한 상대에 대하여 '야!' 하며 감탄을 하고 춤을 추며 좋다고 하게 될 때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미친 것이 됩니다.

 

그러니 대상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 대상 없이는 작용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전부 다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없을 때 작용하는 것은 헛작용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주체자가 계시고 그 주체자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용하는 데는 손해나는 작용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 주체의 목적과 대상의 목적이 엇갈려 가지고는 작용을 안 하는 것입니다. 작용하는 데는, 주체에게도 플러스되고 대상에게도 플러스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그때에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큰 우주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작용을 하면서 더 플러스될 수 있는 목적의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작아지는데도 행동을 한다면 이 우주는 언제인가는 없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작용하는 데에는 주체와 대상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상대자는 인간

하나님도 혼자 있어서는 안 되겠으니 상대를 취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우주에서 무엇을 상대로 취하겠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식물? 동물? 절대적이요, 최고이신 하나님이 이 만물지중에서 상대를 무엇으로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묻게 된다면, 이건 유치원 아이들이라도 우리 인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은 이 우주의 피조 만물 가운데에서 걸작품입니다. 얼마나 걸작품이냐 하면 여러분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도 멋진 걸작품입니다.

 

여기에 온 청중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면 그 하나님을 내 것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남자나 여자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병신이나, 누구나를 막론하고 최고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소원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서 그런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목적 달성의 가능성이 없는데 작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과 인간이 바라는 목적이 엇갈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에 귀결될 수 있는 귀결점을 세워 놓아야만 하나님이 '아! 뜻을 이루었다. 아! 걸작품이다' 할 수 있는 것이요, 비로소 그것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양심작용이 있는 것을 보아 신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라고, 인간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올라가야 됩니다. 우리 인간이 없어 가지고는 당연코 안 되겠기 때문에 이런 방향성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며, 이것이 양심작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하나님도 사람을 만나 가지고 손해나는 것이 아니요,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 가지고 손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서로가 좋겠기 때문에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양심작용은 자고로 인류가 생겨난 이후 그 누구를 막론하고 세계를 지배하고 싶어하고 최고의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작용의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작용하는 데는 상대가 있어야 되고 상대가 없는 작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 작용을 하려면 그 양심의 주체적인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심 자체가 손해나는 작용을 안 한다는 거예요. 주체가 없는 작용, 상대가 없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로 계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구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여러분들 가운데 영적인 체험을 한 분이 계시겠지만, 영계에 가도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힘과 같은 분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을 갖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에 형상적인 대상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를 중심삼고 영원히 우리 인간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갖기 위해서 인간과 같은 이 체(體), 형상을 갖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실체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완전한 대상자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체를 하나님 자신은 쓸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과 하나되어 가지고 쓸 수 있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체를 입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대상의 자리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망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크냐 하면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만나 점령했더라도,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만났더라도 만난 것 가지고는 만족을 못 하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으로 만들기 전에는 기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서적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 유일의 사랑'이라 하면서 최고의 형용사를 갖다 붙여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났더라도 하나님 속에 있는, 인격적인 신 속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점령하는 것 외의 딴 것은 뭐 다 필요 없다구요. 그것만 점령하면 그분 것은 자동적으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인간의 욕망을 볼 때, 이 우주지간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랑을 받고 싶겠느냐 하는 것을 추구해 보면, 그 최후의 자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막연한 입장에서의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다. 진실되고 사실적인 입장에서, 사랑을 중심삼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류의 소망이요, 우리 인간 욕망의 종착점이 아닐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치는 이러한 자리까지 크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보면 아버지는 위에 있고 아들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은 그 아버지 자리까지도 내가 가졌으면 하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이 '야, 이놈!' 하시겠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은 자리까지도 허락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밖이라면 하나님은 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중심삼고 보게 된다면 사람이 몸뚱이라면 하나님은 마음의 입장에 서서 인간과 동등한 자리에서 계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머니 아버지에게 좋은 게 있으면 그것을 갖고 싶지요? 그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높은 곳, 하나님과 같은 자리를 인간에게 허락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똑같이 됐는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다 이거예요. 우주를 창조한 창조의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인간은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내가 한번 가졌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을 만들어 왔다구요. 그러니 우리 인간도 '내가 그런 것을 한번 만들어 보았으면, 내가 동기가 되어 가지고 가져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주체 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대상의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아들딸을 낳게 하는 것은 재창조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닳았기 때문에 그렇다구요.

 

아담 해와 두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결과의 존재입니다. 대상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생겨난 것은, 동기의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콩 같은 걸 보라구요. 콩은 결과예요, 씨예요? 원인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 하나의 전체적인 생명체로 결합된 것이 씨인 것입니다. 하나의 콩은 두 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으로 보면 남자 여자와 마찬가지예요. 또 우리 마음과 몸과 같은 것이요, 상대적인 입장에 선 남자 여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즉 원인적이요 주체적인 하나님과 대상관계가 됐기 때문에 이 두 성(性)이 합해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딸을 낳게 되는 거예요.

 

자, 이렇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 속에 있는 사랑을 전부 다 갖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사랑의 종류를 보게 된다면 자녀의 사랑, 상대적 사랑인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 이 세 가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이 사랑을 우리 인간은 전부 다 갖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간으로 하나님이 지었다는 거예요. 이 세 사랑을 완전히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어야만 완전한 사람이요, 완숙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 없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결혼은 했지만 아들딸은 필요 없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습니다. 이것은 숙명적으로 다 원하는 일이예요. 이것이 위대한 인간 본연의 가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종교는 고장난 인간을 고쳐 주기 위한 수리공장

그럴 수 있는 가정에서, 그런 사랑권내에서 아들딸을 낳는 가정이 벌어졌다면 그 가정에 구주가 필요합니까? 그분이 가진 권한과 그분이 가진 소유와 그분이 가진 모든 사랑은 우리 것입니다. 이것이 본연의 기준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제일 높아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욕망인 것입니다. 세계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살펴봅시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하나의 생각,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인간을 지었을 터인데, 우리 인간을 두고 보게 되면 마음과 몸이 상반되는 방향의 목적을 따라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이리 가자 할 때에 몸뚱이는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은 몸과 마음은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내적인 플러스라면 이것은 외적인 플러스 요인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주체가 되겠다는 거라구요. 언제나 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목적을 가진 하나님은 이것을 그냥 놔 둘 수 없기 때문에 이 반대 것을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앞에서 말한 본연의 이상 인간은 절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작전을 투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요, 구원섭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재까지 사람은 마음과 몸이 싸우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장났다는 것입니다. 고장났기 때문에 수리 공장에 집어 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장난 물건으로서 수리 공장에 가기 싫다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거예요. 수리를 하지 못하고 갖다 놓는 곳이 지옥이라는 거예요, 지옥!

 

그러니 지옥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타락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기도고 종교고 이거 다 필요가 없는 거라구요. 여기에 기도 생활을 하고 싶고, 종교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보라구요. 너도 나도 원치 않는다구요.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기 때문에 이 타락권내를 벗어나려니 구주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는데, 병나지 않았는데 의사가 필요해요? 병이 났기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은 병이 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병났으니 구주가 필요하다구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역사를 통해 수리공장 제작운동을 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운동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이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화의 배경이 다르니만큼, 국가와 민족이 다르니만큼, 환경이 다르니만큼 이렇게 수습하면서 하나하나씩 종교를 규합해 가지고 지금까지 4대 종교 문화권을 만들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 중심종교

 

그럼, 4대 성현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성인은 하나님을 위주로 해 가지고 세계를 구하자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또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세계적으로 인류를 포섭해 가지고 발전해 나올 수 있게끔 보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개 국가의 문화라든가, 교육이라든가, 이런 모든 것의 지침이 되는 것은 전부 다 성인의 도리를 본받은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4대 종교 가운데 최고의 중심 종교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된, 하나님에게 맞는 종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맞는 종교가 되려면 하나님에게 맞는 것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되어 가지고 아들딸을 낳아서 하나님의 전체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심 종교를 가려내는 기준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볼 때 불교면 불교, 유교면 유교, 회회교면 회회교, 기독교면 기독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거기에 맞는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가르쳐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유교를 보면 신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합니다. 불교를 보면 법적인 세계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또 회회교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기도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서 최고의 바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를 설파했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예수님만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맨 처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과 인류가 지향하고 소망하는 목적이 서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요한복음 14장에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을 대해서 '나도 네 안에 있고, 너도 내 안에 있으니까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동등한 자리를 말했습니다. 안팎을 말했어요. 그것을 표준했던 것이 예수님의 사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의 남자가 완성하여 가지고 하나의 상대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과 인간이 바라는 목적의 최고의 귀착점을 완결지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고 나왔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한계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하나밖에 없는 죄 없는 남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남자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여자를 만나야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가정을 가졌으면 이스라엘 나라의 제사장이 되었을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게 될 때, 예수님이 왕이 되었더라도 혼자 있는 왕을 바라겠어요?  반드시 거기에는 황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랬으면 예수님에게 아들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예수님도 '아버지',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거라구요. 여기에서의 할아버지는 죄 없는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중심삼고 기독교가 출발했으면 오늘날 기독교는 이렇게 안 됩니다. 뭐, 구교니, 신교니, 네 교파니, 내 교파니, 이렇게 싸우는 기독교는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또, 예수님의 후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주권국가를, 세계적인 판도를 이루면 공산당이니 무엇이니 하는 이런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거라구요.

 

타락은 땅에서 한 것입니다. 땅에서 잃어버렸으니 땅에서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땅에서 하나님의 한 아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땅에서 찾아진 것이 예수님입니다. 한번밖에 올 수 없는 아들이 악한 세상에 와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4천년 동안 이스라엘 선민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으면 안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찾다가 못 찾고 십자가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다' 하면서 다시 찾아와야 할 가정의 이상을 남겨 놓고 십자가에 돌아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다시 회생할 재림의 날을 찾아 나온 것이 2천년 기독교의 수난길임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세계종교의 기원

예수님은 와서 예비된 신부를 찾아야 된다구요. 그래야 가정을 중심삼고 이루려는 세 가지의 사랑 목적을 결론지을 수 있는 자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찾아 나온 것이 요한 계시록에 예언된 어린양잔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인간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참부모가 안 나타났어요.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에 첫번에 구상했던 것을 끝에, 창세기에서 실패한 것을 요한 계시록에서 갖다 맞추려는 것입니다. 6천년 전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성혼식을 이루어야 할 것을, 참부모를 세워야 할 것을 못 했기 때문에 이것을 이뤄서 맞추자는 것이 기독교의 골수적인 가르침이요, 예수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를 중심삼은 신부와 예수를 중심삼은 새로운 부모와 하나님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종교가 필요 없고, 구세주가 필요 없고, 원죄가 없는 입장에서 가정 전체가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우리 인류가 바라는 소원의 곳이요, 우리 인류가 믿고 나오던 종교의 목적지요,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시는 최종적인 목적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종주 한 분만을 모셔 왔으니 앞으로는 부모를 모셔야 됩니다. 부모를 중심삼은 가정의 전통을 받아 가지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씨족적인 문제, 민족적인 문제, 흑백의 인종문제 등 세계 인류의 모든 문제를 초월해서 하나의 하나님을 중심삼은 가정의 식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전세계가 그 모든 문제를 넘어 가지고 새로이 하나되어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우리 인류가 바라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세계적 종교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의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세계종교가 출발하는 것이요. 그 세계종교를 중심삼고 지상에 새로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천국을 중심삼고 살던 사람이 그냥 그대로, 가정 전체가, 종족 전체가, 민족 전체가, 국가 전체가 그냥 그대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가 세계적인 종교 시대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목적을 중심삼고 나가야 할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써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란 제목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선집 53권 2편, 원문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2

1972.02.08 (화), 미국 필라델피아 쉐라톤호텔 

오늘 저녁에, 이와 같이 신사 숙녀 여러분들이 참석해 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곳 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기념할 수 있는 곳이며, 역사과정에 있어서 자랑할 수 있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여러분과 같이 회합을 갖는 데 대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보다시피 동양 사람입니다. '한국'하면 여러분은 한국 동란의 인상을 잊지 못하리라 봅니다. 그 한국에서 미국까지 와 가지고 여러분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인은 한 20년 동안, 다년간 여러분을 이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 만나기를 바라왔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데 대하여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면서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 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현재의 세계정세를 보게 될 때에 이 세계를 누가 책임져 주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이 세계를 올바로 지도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지도해 주어야만 되겠다는 것이 절박한 우리들의 욕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그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안다면 그분을 따라가지 말라고 해도 개인은 물론이요, 수많은 국가, 세계 전체가 그분이 가시는 곳과 그분이 목적하시는 곳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있어야만 그분의 뜻을 바라보고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방향을 따라가는 종교도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세계 종교니 무엇이니 하는 말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갑시다.

존재와 작용의 요건

이 세계는 존재하고 있는 세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크게는 태양계가 존재하는가 하면 작게는 원자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는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힘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힘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힘이 있기 위해서는 작용을 해야 됩니다. 작용을 하지 않고는 계속하여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려면 작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작용하지 않는 데는 힘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용을 하는 데 있어서 혼자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통령이 혼자 말을 하면서, 혹은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기뻐한다면 누구나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그만 시계라든가 그 어떤 것을 보면서 웃을 때는, 그분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다고 합시다. 그 하나님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혼자 있어 가지고는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절대적인 그분이 혼자 좋아하고 웃는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도 정상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그 하나님이 요만한 상대에 대하여 '야!' 하며 감탄을 하고 춤을 추며 좋다고 하게 될 때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미쳤다고 하는 사람이 미친 것이 됩니다.

그러니 대상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 대상 없이는 작용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이 전부 다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없을 때 작용하는 것은 헛작용입니다. 좋아하고 하는 것도 다 헛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주체자가 계시고 그 주체자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작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용하는 데는 손해나는 작용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 주체의 목적과 대상의 목적이 엇갈려 가지고는 작용을 안 하는 것입니다. 작용하는 데는, 주체에게도 플러스되고 대상에게도 플러스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그때에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필라델피아의 번화가의 이름이 무엇인지 난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마켓 스트리트가 있다면 그 마켓 스트리트에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마켓 스트리트에 나가게 될 때 '지금 내가 마켓 스트리트에 나가는데, 일전이라도 손해보기 위해서 나간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가게 될 때에는 반드시 내게 플러스가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고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손해나는 행동이라면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안 하려고 하며 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큰 우주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작용을 하면서 더 플러스될 수 있는 목적의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작아지는데도 행동을 한다면 이 우주는 언제인가는 없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다 하는 관념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작용하는 데에는 주체와 대상이 필연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상대자는 인간

자,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서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도 혼자 있어서는 안 되겠으니 상대를 취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우주에서 무엇을 상대로 취하겠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식물? 동물? 동물이 식물보다 조금 낫다구요. 그러니 절대적이요, 최고이신 하나님이 이 만물지중에서 상대를 무엇으로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묻게 된다면, 이건 유치원 아이들이라도 우리 인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은 이 우주의 피조 만물 가운데에서 걸작품입니다. 얼마나 걸작품이냐 하면 여러분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도 멋진 걸작품입니다. 그러면 그 주체자, 즉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셔 가지고 사람을 만들었다면 하나님 자신이 말한 것, 보는 것, 느낀 것을 사람이 모르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작가로 비유해 봅시다. 작가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머리로 구상하여 최고의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려고 구상을 해 가지고 만든 작품이 그야말로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 되게 될 때는 무한히 기쁜 것입니다. 만일 그 작품이 자기 생각보다도 더 멋지게 되었다 할 때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됐기에 깨뜨려 버린다. 이놈!' 하며 깨뜨려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 될 때는 자기 일생의 보물로 여기고, 가나 오나 놓아 두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작가의 마음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절대적인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면….그런 인간인데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의 내성적인 마음을 느끼지 못해요? 우리 인간이 그 이상의 것을 바라면 하나님도 그 이상의 것을 바라실 텐데, 그렇게 인간을 지었다면 얼마나 멋지게 지었겠어요. 여기에서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온 청중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면 그 하나님을 내 것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남자나 여자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병신이나, 누구나를 막론하고 최고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소원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서 그런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목적 달성의 가능성이 없는데 작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과 인간이 바라는 목적이 엇갈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에 귀결될 수 있는 귀결점을 세워 놓아야만 하나님이 '아! 뜻을 이루었다. 아! 걸작품이다' 할 수 있는 것이요, 비로소 그것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양심작용이 있는 것을 보아 신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라고, 인간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올라가야 됩니다. 우리 인간이 없어 가지고는 당연코 안 되겠기 때문에 이런 방향성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며, 이것이 양심작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하나님도 사람을 만나 가지고 손해나는 것이 아니요,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 가지고 손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서로가 좋겠기 때문에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양심작용은 자고로 인류가 생겨난 이후 그 누구를 막론하고 세계를 지배하고 싶어하고 최고의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작용의 방향성이 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작용하는 데는 상대가 있어야 되고 상대가 없는 작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 작용을 하려면 그 양심의 주체적인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심 자체가 손해나는 작용을 안 한다는 거예요. 주체가 없는 작용, 상대가 없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로 계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구요.

여기의 청중 가운데 '그래도 하나님이 있는지 나 잘 모르겠다'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이제 실감나게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해 봅시다.

인체의 신비를 통해서 본 신의 실존성

우리 인체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머리입니다. 여러분, 머리 중에서도 눈을 가만히 보라구요. 얼마나 재미있게 되어 있는지. 자, 이거 눈이 왜 이렇게 생겼을까요? 그것이 생겨난 것은 우리 아버지가 있었고, 우리 할머니가 있었고,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 해 가지고 맨 위의 우리 인류시조가 이런 눈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시조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태어날 때, 눈이 지구가 있는지 천체가 있는지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이 눈은 땅 위에 태어나면서 땅뿐만이 아니라 태양계가 있는 것까지 알고 벌써 거기에 준비를 했다는 거예요. 그럼 이 눈 스스로 지구를 알고 태양을 알았을까요?

또 보라구요. 눈을 보면 깜박깜박합니다. 이 땅은 태양이 비추게 되면 복사열이 생기기 때문에 수분이 증발합니다. 여러분의 눈에 있는 수분이 이 열에 의해 증발해 버리면 큰일난다는 거라구요. 증발하면 안 돼요. 그렇게 되면 큰일나기 때문에 증발하는 것을 막고 축여 주기 위해서 눈까풀이 깜박깜박하는 것입니다. 눈이 그걸 스스로 알았어요? 또 눈썹을 보라구요. 눈썹은 땅에 나오기 전에 먼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구요. 먼지가 들어가기 때문에 눈썹을 만들어 놓았다구요. 이게 어떻게 알았어요? '먼지가 있기 때문에 나는 요렇게 나겠다'고 하며 나왔어요? 눈썹은 벌써 사람이 서서 다닐 것을 알았다구요. 땀이 날 것을 알았다구요. 눈이 움푹 들어갔으니까 땀이 나면 하수구처럼 물이 들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가게 방어선을 쳐 놓은 거라구요. 이것을 눈썹이 스스로 알았어요? 또 이 코를 보라구요. 이 코가 꺼꾸로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웃음) 꺼꾸로 붙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붙은 거라구요. 이 코도 공기 가운데 먼지가 있는 것을 알았다구요.

여러분, 이건 왜 이렇게 해 놓았어요? 여러분, 이거 생각해 봤어요? 사람마다 금이 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입에 무엇이 들어가면 안 되겠기 때문에 금을 떡 갈라놓은 거라구요. 눈도 싹 드러나게 해 놓고 입도 싹 드러나게 해 놓았다구요. 또 귀를 보라구요. 귀는 상대방으로부터 소리를 전부 다 들어야 할 것을 알고 이렇게 되어 있다구요. 듣는 데는 그냥 들으면 큰일나겠으니 큰 산맥 작은 산맥을 거쳐 다 조정해서 듣게 되어 있다구요. 이렇게 다 알고 나왔다구요.

여기에 대학교수든가 혹은 유명한 학박사가 왔더라도 그들 가운데 '그거 다 모르고 나왔소. 그렇게 되고파서 나왔소'라고 말할 사람 있어요? 나기 전에 완전히 알고 나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뱃속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알았어요? 사람이 이렇게 알고 나왔어요? 이 몸뚱이는 수백 개, 수만 개의 의학박사 주식회사라구요. 무엇이든지 다 알아요. 박물학적, 천문학적 내용에 박자를 맞추게끔 다 알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온 그 자체는 모르지만, 그건 누가 알았느냐? 아는 그분의 이름을 붙인다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자, 그래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겠어요? 자, 어때요. '하- 그거 있을 것 같다' 그래요. 나님은 있다는 결론을 완전히 내리고 넘어갑시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는 데는 서로서로의 목적이 있어야 된다고 했으니, 하나님도 목적없이 작용할 수 없고, 인간도 목적없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목적의 귀일점이 하나님이냐, 어떠한 개인으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알아보고 넘어갑시다.

여러분들 가운데 영적인 체험을 한 분이 계시겠지만, 영계에 가도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힘과 같은 분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을 갖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에 형상적인 대상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를 중심삼고 영원히 우리 인간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갖기 위해서 인간과 같은 이 체(體), 형상을 갖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자신이 실체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완전한 대상자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체를 하나님 자신은 쓸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과 하나되어 가지고 쓸 수 있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체를 입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대상의 자리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망

하나님의 상대로 지은 인간을 두고 볼 때,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게 어떤 가치를 요구할 것이냐? 또,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를 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크냐 하면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만나 점령했더라도,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만났더라도 만난 것 가지고는 만족을 못 하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으로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으로 만들기 전에는 기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서적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 유일의 사랑'이라 하면서 최고의 형용사를 갖다 붙여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났더라도 하나님 속에 있는, 인격적인 신 속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점령하는 것 외의 딴 것은 뭐 다 필요 없다구요. 그것만 점령하면 그분 것은 자동적으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인간의 욕망을 볼 때, 이 우주지간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랑을 받고 싶겠느냐 하는 것을 추구해 보면, 그 최후의 자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막연한 입장에서의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다. 진실되고 사실적인 입장에서, 사랑을 중심삼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입장에 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류의 소망이요, 우리 인간 욕망의 종착점이 아닐 수 없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치는 이러한 자리까지 크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보면 아버지는 위에 있고 아들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은 그 아버지 자리까지도 내가 가졌으면 하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이 '야, 이놈!' 하시겠어요? 그럴 수 없는 거라구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은 자리까지도 허락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밖이라면 하나님은 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중심삼고 보게 된다면 사람이 몸뚱이라면 하나님은 마음의 입장에 서서 인간과 동등한 자리에서 계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머니 아버지에게 좋은 게 있으면 그것을 갖고 싶지요? 그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높은 곳, 하나님과 같은 자리를 인간에게 허락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똑같이 됐는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다 이거예요. 우주를 창조한 창조의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인간은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내가 한번 가졌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을 만들어 왔다구요. 그러니 우리 인간도 '내가 그런 것을 한번 만들어 보았으면, 내가 동기가 되어 가지고 가져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주체 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대상의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아들딸을 낳게 하는 것은 재창조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닳았기 때문에 그렇다구요.

아담 해와 두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결과의 존재입니다. 대상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생겨난 것은, 동기의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콩 같은 걸 보라구요. 콩은 결과예요, 씨예요? 원인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 하나의 전체적인 생명체로 결합된 것이 씨인 것입니다. 하나의 콩은 두 쪽으로 되어 있습니다. 둘로 갈라져 있다구요. 그것을 사람으로 보면 남자 여자와 마찬가지예요. 또 우리 마음과 몸과 같은 것이요, 상대적인 입장에 선 남자 여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즉 원인적이요 주체적인 하나님과 대상관계가 됐기 때문에 이 두 성(性)이 합해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딸을 낳게 되는 거예요. 시간이 많이 갔기 때문에 세부적인 이야기를 짧게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 속에 있는 사랑을 전부 다 갖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사랑의 종류를 보게 된다면 자녀의 사랑, 상대적 사랑인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 이 세 가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이 사랑을 우리 인간은 전부 다 갖고 싶어한다는 거예요. 가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간으로 하나님이 지었다는 거예요. 이 세 사랑을 완전히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어야만 완전한 사람이요, 완숙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 없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결혼은 했지만 아들딸은 필요 없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습니다. 이것은 숙명적으로 다 원하는 일이예요. 이것이 위대한 인간 본연의 가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종교는 고장난 인간을 고쳐 주기 위한 수리공장

그럴 수 있는 가정에서, 그런 사랑권내에서 아들딸을 낳는 가정이 벌어졌다면 그 가정에 구주가 필요합니까?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진 권한과 그분이 가진 소유와 그분이 가진 모든 사랑은 우리 것입니다. 이것이 본연의 기준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권리인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제일 높아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욕망인 것입니다. 세계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살펴봅시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하나의 생각,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인간을 지었을 터인데, 우리 인간을 두고 보게 되면 마음과 몸이 상반되는 방향의 목적을 따라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이리 가자 할 때에 몸뚱이는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은 몸과 마음은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내적인 플러스라면 이것은 외적인 플러스 요인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주체가 되겠다는 거라구요. 언제나 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목적을 가진 하나님은 이것을 그냥 놔 둘 수 없기 때문에 이 반대 것을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 가지고는 앞에서 말한 본연의 이상 인간은 절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작전을 투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요, 구원섭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재까지 사람은 마음과 몸이 싸우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장났다는 것입니다. 고장났기 때문에 수리 공장에 집어 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고장난 물건으로서 수리 공장에 가기 싫다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거예요. 수리를 하지 못하고 갖다 놓는 곳이 지옥이라는 거예요, 지옥!

여러분, 집을 지을 때 쓰레기통을 먼저 만들어 놓고 집을 짓는 사람이 있어요? 집을 지어 놓고 살다보니 쓰레기가 생겨나기 때문에, 그때야 그걸 만드는 거라구요. 그때 쓰는 거라구요. 그러니 지옥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타락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기도고 종교고 이거 다 필요가 없는 거라구요. 여기에 기도 생활을 하고 싶고, 종교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보라구요. 너도 나도 원치 않는다구요. 그건 누구나 원치 않는 것입니다. 본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기 때문에 이 타락권내를 벗어나려니 구주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는데, 병나지 않았는데 의사가 필요해요? 병이 났기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은 병이 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병났으니 구주가 필요하다구요. 틀림없이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역사를 통해 수리공장 제작운동을 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운동입니다. 어떤 놀음을 하느냐 하면 손을 만들고, 발을 만들고, 귀를 만드는 놀음을 하는 거예요. 전세계적으로 이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화의 배경이 다르니만큼, 국가와 민족이 다르니만큼, 환경이 다르니만큼 이렇게 수습하면서 하나하나씩 종교를 규합해 가지고 지금까지 4대 종교 문화권을 만들어 나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 중심종교

그러면 4대 종교 가운데 어떤 종교가 중심이냐? 그냥 그대로, 즉 4대 공장만 가지고 되겠어요? 한데 모아 가지고 재교육할 수 있는 하나의 운동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 가운데 어떤 종교가 끝까지 남느냐 하면, 하나님의 전체 목적에 규합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종교일수록 끝까지 남아지는 것입니다. 큰 종교는 전부 다 '세계 인류를 구하자, 세계를 구하고, 인류를 구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자기 나라부터 찾자는 종교, 나라를 중심삼은 종교는 세계 시대까지 못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국가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주의자. 세계를 구하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럼, 4대 성현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이들은 전부 다 그 나라, 그 국가권내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입니다. 공자도 그랬던 것이요, 예수도 그랬던 것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부정하는 자리에 서서 자기의 궁중을 버리고 수도의 길을 떠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호메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국민 앞에 환영받았던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국민이 반대하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생명을 던져 가지고 그 길을 개척해 왔기 때문에 오늘에 와서 성인의 이름을 남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4대성인을 꼽을 때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꼽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성인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는 철인이예요, 철인. 지식을 가지고는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수 없어요.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하나님뿐이예요. 하나님만이 좌우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4대성인을 두고 보면 전부 다 교주들입니다. 성인은 하나님을 위주로 해 가지고 세계를 구하자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또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세계적으로 인류를 포섭해 가지고 발전해 나올 수 있게끔 보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개 국가의 문화라든가, 교육이라든가, 이런 모든 것의 지침이 되는 것은 전부 다 성인의 도리를 본받은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성인이 하나님을 위주로 살며 하나님을 중심삼고 죽고 살았던 것을 존중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젊은 청년들이 '종교는 필요 없다. 종교는 필요 없다'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4대 종교 가운데 최고의 중심 종교가 무엇이냐? 이걸 알아야 돼요. 중심없이 세계는 잘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중심되는 종교를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가려낼 것이냐?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된 것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맞는 종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맞는 종교가 되려면 하나님에게 맞는 것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되어 가지고 아들딸을 낳아서 하나님의 전체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심 종교를 가려내는 기준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볼 때 불교면 불교, 유교면 유교, 회회교면 회회교, 기독교면 기독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거기에 맞는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가르쳐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유교를 보면 신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합니다. 불교를 보면 법적인 세계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또 회회교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기도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은 어떠했느냐? 문제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서 최고의 바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를 설파했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예수님만이 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맨 처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과 인류가 지향하고 소망하는 목적이 서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요한복음 14장에 '하나님은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을 대해서 '나도 네 안에 있고, 너도 내 안에 있으니까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동등한 자리를 말했습니다. 안팎을 말했어요. 그것을 표준했던 것이 예수님의 사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말했느냐? 하나의 남자가 완성하여 가지고 하나의 상대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과 인간이 바라는 목적의 최고의 귀착점을 완결지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고 나왔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한계

그러면 국가가 보호하고, 교회가 보호하고, 종족이 보호하고, 가정이 보호하고, 전체가 보호하여 사탄권을 막아 줌으로써 예수님이 자유스런 환경에서 신부를 맞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예수님은 남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하나밖에 없는 죄 없는 남자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돌감람나무이지만 예수님만은 참감람나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남자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여자를 만나야 됩니다. 여기 남자들 중에 나 혼자 살다가 죽겠다 하는 사람 있어요? 그건 창조원칙에 위배되는 거라구요. 하나님은 그런 비원칙적인 역사는 안 하시는 거라구요.

만약에 예수님이 가정을 가졌으면 이스라엘 나라의 제사장이 되었을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게 될 때, 예수님이 왕이 되었더라도 혼자 있는 왕을 바라겠어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반드시 거기에는 황후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랬으면 예수님에게 아들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예수님도 '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었다는 거라구요. 여기에서의 할아버지는 죄 있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죄 없는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중심삼고 기독교가 출발했으면 오늘날 기독교는 이렇게 안 됩니다. 이렇게 안 돼요. 뭐, 구교니, 신교니, 네 교파니, 내 교파니, 이렇게 싸우는 기독교는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또, 예수님의 후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주권국가를, 세계적인 판도를 이루면 공산당이니 무엇이니 하는 이런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거라구요.

현재의 기독교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반사회에서는 목사, 혹은 신부 하게 되면 전부 풀이 죽어 있습니다. 또, 뉴욕에서는 '뭐, 하나님? 하나님 없어. 하나님이 죽었다'라고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하나님이라는 맡을 하게 되면 안 된다고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미국 국민은 자각해야 됩니다. 신부가 부패해 가지고 일반인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중심삼은 인간의 도리와 종족을 중심삼고 사회가 갈 길, 나라가 갈 길, 세계를 치리 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구요. 타락은 땅에서 한 것입니다. 땅에서 잃어버렸으니 땅에서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땅에서 하나님의 한 아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땅에서 찾아진 것이 예수님입니다. 한번밖에 올 수 없는 아들이 악한 세상에 와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4천년 동안 이스라엘 선민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으면 그가 죽어요? 안 죽는 것입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찾다가 못 찾고 십자가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다' 하면서 다시 찾아와야 할 가정의 이상을 남겨 놓고 십자가에 돌아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다시 회생할 재림의 날을 찾아 나온 것이 2천년 기독교의 수난길임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세계종교의 기원

예수님은 와서 예비된 신부를 찾아야 된다구요. 그래야 가정을 중심삼고 이루려는 세 가지의 사랑 목적을 결론지을 수 있는 자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찾아 나온 것이 요한 계시록에 예언된 어린양잔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인간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거짓 부모를 모셨습니다. 거짓 조상을 모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참부모가 안 나타났어요.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에 첫번에 구상했던 것을 끝에, 창세기에서 실패한 것을 요한 계시록에서 갖다 맞추려는 것입니다. 6천년 전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성혼식을 이루어야 할 것을, 참부모를 세워야 할 것을 못 했기 때문에 이것을 이뤄서 맞추자는 것이 기독교의 골수적인 가르침이요, 예수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를 중심삼은 신부와 예수를 중심삼은 새로운 부모와 하나님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종교가 필요 없고, 구세주가 필요 없고, 원죄가 없는 입장에서 가정 전체가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우리 인류가 바라는 소원의 곳이요, 우리 인류가 믿고 나오던 종교의 목적지요, 하나님이 섭리해 나오시는 최종적인 목적지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종주 한 분만을 모셔 왔으니 앞으로는 부모를 모셔야 됩니다. 부모를 중심삼은 가정의 전통을 받아 가지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씨족적인 문제, 민족적인 문제, 흑백의 인종문제 등 세계 인류의 모든 문제를 초월해서 하나의 하나님을 중심삼은 가정의 식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전세계가 그 모든 문제를 넘어 가지고 새로이 하나되어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우리 인류가 바라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세계적 종교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의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세계종교가 출발하는 것이요. 그 세계종교를 중심삼고 지상에 새로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천국을 중심삼고 살던 사람이 그냥 그대로, 가정 전체가, 종족 전체가, 민족 전체가, 국가 전체가 그냥 그대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가 세계적인 종교 시대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목적을 중심삼고 나가야 할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써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종교'란 제목의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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