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선집 59권 3편
인연의 행로 (훈독본) 8360
1972.07.16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말 씀
인간의 운명은 상하 전후 좌우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한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전후좌우의 사방이 있어야 되고 상호관계가 연결되는 자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또, 그 결정된 위치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방향을 갖추게 될 때,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반드시 어떠한 가정적인 운명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행복은 인연에 따라 설정된다
어느누구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고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행복은 계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절절히 바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행이 닥쳐오는 것은 어떤 원인 때문이냐? 현실적인 무대가 어떤 인연의 박자에 맞추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운명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인연에 따라 가지고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역사시대의 어떠한 인연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선대(先代)로부터 조상들이 쌓아 나온 공적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좌우됩니다.
선은 전체의 것
그렇다면 선은 어떤 것이냐? 선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데에서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천지만물을 지어 놓고, '보기에 좋은지라, 선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선의 출발이 상대적인 피조물을 만들어 놓고, 그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는 그 마음의 자세,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자리에서 선하다는 역사적 전통이 세워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볼 때 선의 기원은 상대를 위하는 데서 설정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조와 인연 된 나
혼자 태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부모가 사랑을 통해서 하나되는 혈연적인 터전을 통해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보다 높은 터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현재의 나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연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천 수만의 선조를 거쳐 가지고 내가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조상들의 종합된 하나의 실체
그런데, 선조들이 이만큼 끌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일대에 와서 그것을 후퇴시켰다 할 때는 역사적인 탕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운의 인연을 거쳐 나오는 역사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의 생애노정이라는 것은 천태만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선대로부터 연결된, 모든 조상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하나의 종합된 실체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선조들의 만물상을 대표한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나타나 있는 나의 모습은 선조로부터 인연된 그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 일대에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아부정을 자각하고 남을 위해 살라
완전한 종교는 자아부정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그 다음에는 타아 즉 남을 위해서 살라 그겁니다. 자아완성은 자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아를 통해서, 다른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타락은 자아자각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타아자각을 어떻게 하느냐. 그 범위를 자기와 같은 일체적인 감정으로 어떻게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세계적인 인물의 등급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큰 환경을 자기와 같이 사랑해 가지고 그 사랑한 것이 돌아오게 될 때는, 지금 사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전체를 포괄한, 전체가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의 주체격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보다 높은 환경을 향해서 출발할 수 있는 제2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기대는 제 3 기대, 제 4 기대로서 차원을 높여 가지고 하나님에게까지 그것이 상승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고차적인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사랑을 가지고 오는 목적
타락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이 아들딸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을 사랑하지 못하였으니, 이 운동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시아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아들로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 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기 위한 운동을 연결시키는 분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타락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메시아가 남자로 오면 남자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그 메시아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메시아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딸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신부입니다. '끝날에는 신랑신부가 온다!' 이것은 결국 사랑을 사랑답게 갖지 못했던 인간에게 사랑다운 사랑을 찾아가자고 하는 말입니다. 불륜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별되었던 것이, 본연의 이상적인 사랑이 섬으로 말미암아 원칙적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이상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보면 지상천국이요 천상천국이 아니겠느냐? 그건 당연한 말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려면 복귀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한 복음이다 이겁니다. 미완성이요, 절망권내의 역사적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두고 볼 때, 그런 인간 앞에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이것은 우주적인 혁명입니다. 우주적인 혁명인 동시에 우리 인간 앞에 지극히 복된 복음입니다.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될 것이냐? 수가 난다는 것입니다, 수가. 인간세계에서 상상하지 못할 고차적인 사랑의 세계가 비로소 문을 여는 것이 아니냐? 사랑의 세계가 현현되는 것이 아니냐? 새로운 천지에서 활기를 펴고, 환희와 기쁨에 충만한 모습으로 천지를 자기 것과 같이 사랑하기 위하여 제일보를 나서는 행복된 그 자아가 얼마나 멋지겠느냐?
그것을 볼 때 하나님도 '히야-' 하고 침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아이구 좋구나, 야, 야 너만 가지 말고 나도 데려가 다오!' 하나님도 그걸 보고 위신상 가겠다고 나설 수 없어도 마음으로는 고대하고 있을 때 '하나님 가십시다' 그래야지 고대하지도 않는데 '가십시다!' 이런다고 나설 것 같아요? 마찬가지예요. 사람과 마찬가지라구요.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양반은 이 땅에 와 가지고 누구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파탄시키고 파괴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건설과 희망의 교차로가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그렇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이겁니다.
혁명하는 단 하나의 길
혁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혁명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나니, 이것이 뭐냐? 전부 부정하고 박차 버려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인정하지 말고 전분 다 옥살박살 부정해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부정해 가지고 부정을 한 그 이상의 자리로 점핑해 가지고 그 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앙은 운명길을 혁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믿어라! 절대적으로 믿으면 일시에 돌파구가 생겨가지고 초월할 수 있는 길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신앙은 운명길을 혁신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한 인연도 바로 잡을 수 있고, 관계도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연의 장난은 여러분의 운명 앞에 갖은 슬픔과 비극을 전개시켜 나오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길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믿고 넘어가야 된다 이겁니다.
절대적인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험을 촉구해 나가는 개척자의 행각의 노정에서는 불가피적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니, 이 권위가 이거 참 얼마나 멋져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도하기 위한 최고의 표어가 아니냐? 안 그래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운명은 여기에서 엇갈리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먼저 나 자신을 정비해야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통일사상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사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념은 뭐냐, 생각입니다. 생각하는 상응사상입니다. 사상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념은 체계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으로 전진적인 체계화 놀음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상은 이념을 전개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이념은 비로소 생활법도가 되어 실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것이 새로운 문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실천장에 있어서는 이념이 고차적이니만큼 행동도 고차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야 할 목적관에 대한 강력한 생각이 앞서야 됩니다. 구상하는 생각, 그것이 앞서지 않고는 안됩니다. 자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입장에서 3대 눈물을 흘려라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아이들 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엄마를 못살게 하고도 말이예요.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불구하고, 그 아들은 어머니 앞에서 잉잉 운다구요. 잉잉 우는데 '야 이놈의 자식아! 내 팔 봐라 내 팔, 이놈의 자식아 이걸 보고 어떻게 울어!' 어머니가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딸 때문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철모르는 아이가 울게 되면 그 부러진 병신 팔을 가지고도 또 그 아이를 위해 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어린애와 같이 철모르고 순진해야 되지만, 부모의 마음이 언제나 어린애에게 떠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과 동정의 마음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만 천국에 간다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철모르는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제일 좋아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든간에 하나님만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난 몰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어머니 외에 다른 사람을 알아요? 젖통도 크고 어머니보다 더 잘생긴 미인이 와서, 이렇게 암만 내밀고 아이에게 먹으라고 해도 싫다고 하는 거라구요. 안 그래요? 그저 못생겼더라도 어머니를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어머니밖에 모른다구요. 어머니밖에 몰라요. 하나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어린애와 같아야 된다는 이 비유의 말이 타당한 말이라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해 가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 길, 오직 어머니밖에 모르는…. 사랑의 길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런 순결한 사랑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옆을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골수 사상은 이런 인연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 사상은 천주주의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사상은 천주주의(天宙主義)입니다. 천주주의는 하나님의 집주의입니다.
위대한 혁명가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자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제 천주주의를 그려 나가야 되겠습니다. 천주주의는 집 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집 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집 주의니 그 집살림살이는 하나님주의 살림살이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왕이요, 세계를 위한 살림살이를 주도해 나가는 주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살림살이를 해야 됩니다.
타락은 가정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모셔드리지 못했으니, 가정에서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귀입니다.
오늘날 타락의 비운권내에 살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떠한 원인을 따라 빚어진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개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산 기준에 따라 선의 실적기반이 닦아지면 그 선은 자기의 것이 아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 가정의 사랑이라는 것은 남자의 것도 아니요 여자의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가정의 본래의 사랑이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할 수 있는 창조이상적 그 사랑으로 모든 천지 인간의 가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기원을 중심삼고 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자만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 길을 거쳐가지 않고는 인연과 인정의 길을, 인연과 관계되어 있는 지금까지 자기의 과거사를 청산지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위대한 혁명가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일대에 있어서 세계사적인 혁명을 제시해야 할 위대한 혁명가요, 세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위대한 선봉자들인 것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신념이 앞서야 됩니다. 그 신념을 위해서 기거동작하고, 그 신념을 통해서 일방통행하게 될 때는 그것은 반드시 끝이나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사위기대를 만들어라
종과 아들과 딸, 이 세 사람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에덴 동산에서 세 사람을 중심삼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네 식구가 새로운 하늘의 가정이 되어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면 한 사람만 없어도 그 세 식구는 밥을 먹지 못하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네 식구가 하나가 되어 잘 때도 같이 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할 터이니 형님 누님, 혹은 아버지는 주무십시오' 할 수 있는 그런 기운이 그 가정에서 싹터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남북통일의 기수가 되어야
이제야말로 그 땅에 서서 '하늘이여, 이제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이 이 나라를 사랑했거들랑 나를 봐서 살려주시옵소서!' 이렇게 나라 사랑하는 심정으로 하나돼 가지고 남북을 깔고 올라서야 됩니다. 북한의 김일성 도당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가지고 남한을 자기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그 사상을 능가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통일적인 심정의 기반을 닦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잘못하여 가졌던 비운의 역사를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선생님을 믿고 선생님은 여러분을 믿고 셋이 절대적인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삼팔선을 넘나들며 어느누구보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봉화의 횃불을 들고 나설 때, 그 움직임이 거국적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공산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새로운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야 돼요.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노력하여 실적을 가지고 부딪쳐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남한 땅의 원수가 문제가 아니라 북한 땅의 원수들이….
이것을 어떻게 대비해 나갈 것이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하나되어 가지고 교파면 교파를 초월해야 됩니다. 그러나 앞으로에 있어서 비운의 역사가 이 나라를 휩쓸 때가 오기 때문에, 그 때를 대비해서 전교파를 규합해 가지고 하나의 장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걸 미리 알고 반공전선의 노선을 공고화시켜야 한다는 문제를 중심삼고 종교협의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삼천만 민중이, 아내와 남편이 남북으로 갈라져 이 나라의 평화의 기수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나간다면 해방의 종소리와 더불어 삼팔선 경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 붙안고 눈물의 상봉을 하고, 그 삼팔선이 하늘 앞에 감사의 선이 되는 한 이 한국은 평화통일이 될 것이고, 하늘의 왕국으로 설정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서로 반목질시하는 비운의 심정을 품은 개개인이 되게 될때는 망합니다.
거국적으로 다시 출동하라
타락의 비운의 행로를 걷어차고 복귀의 승리의 인연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만을 위주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종족을 거느리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백성을 품고 지도하기에 미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고, 하늘나라의 가정의 식구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것이 틀림없는 것을 알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거국적으로 다시 출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 도
말씀선집 59권 3편, 원문
인연의 행로
1972.07.16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7월도 벌써 절반을 보내고, 남은 절반을 새로이 맞는 세번째 안식일이옵니다. 이 아침에 당신이 사랑과 자비로 같이하시옵고, 당신이 안위와 권위와 은사로 같이하시옵소서.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로 책정하시사 당신의 승리의 나라를 건국하시고, 당신의 영원한 승리의 권한을 세우시어 온 천지를 통치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버님, 이 아침에도 어린 자녀들이 당신의 무릎 앞에 또다시 모였사옵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의 모든 환경을 살피고, 당신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뿐이옵니다. 저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 받은 것이요,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역시 당신의 것을 이어받은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저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요, 당신이 목적하는 것을 따라 감으로 말미암아 저희의 가치적 내용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저희는 대상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당신이 머물 수 있는 안식의 곳을 향하여 가야 되는데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몸들이기에 투쟁하고 또 투쟁하기를 바라는 저희들이오니, 아버지여, 인도하시옵소서. 저희 앞에 인도자가 없게 될 때에는, 사망의 세계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사망의 귀결점에 봉착하는 것이 자연적 이치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이여, 저희는 악에서 출발한 입장이기 때문에 당신의 지도와 당신의 보호와 당신의 직접적인 가호가 없어 가지고는 악의 환경을 밟고 넘어설 수 없고, 이 길을 타개하여 승리의 자리까지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추구하오니, 당신이 현현하시어 저희가 갈길을 지시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당신 앞에 하나로 묶어 바치는 이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전국에 널려 있는 통일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이 시대적인 특별한 사명을 절감하면서 기도하는 이 기간, 아버지, 외면하지 마시옵소서. 당신의 은사와 더불어 자고 깨며, 당신의 보호 아래서 저희 자신을 봉헌해 드릴수 있는, 당신의 소원 앞에 제물의 실체로 나타날 수 있는 어린 모습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하늘을 부여안고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기보다도 나라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부여 안고 불철주야 호소하는 정성된 무리가 있거들랑, 아버님이여,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들이 산야의 어떠한 곳에 있을지라도 당신이 찾아가시어서, 그들을 보호하고 권고하시고, 새시대의 사명을 절감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하시어 하늘나라를 건국하는 데 필요한 당신의 자녀들로 삼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는 이 세계 앞에 새로운 선포를 하고 나선 무리들이옵니다. 이들은 비록 수는 적다 하나 당신의 내정적 심정을 대신하여 땅 위에 현현한 행렬이기에, 당신이 밤이나 낮이나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면 뜻의 방향이 빗나가 그날을 맞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들이 가는 길을 아버지께서 소망을 갖고 바라보시는 반면, 이들이 가는 노정에 아버지의 사랑과 권위를 나타내시어 시대적인 사명을 절감하는 당신의 자녀들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걸음을 걸을 수 있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오직 하늘만을 받들고, 오직 하늘이 남기신 뜻만을 사랑하면서 1972년 후반기 6개월을 힘차게 달림으로써 살아 계신 아버지가 현현하고, 현재를 운행하시는 아버지의 행차가 만민 앞에 현현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국경를 넘고 민족의 감정을 넘어, 문화와 전통 혹은 세속적인 배경을 초월하여 새로운 문화 창건을 위한 기수로서 이미 행군을 시작하였사옵니다.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종착점이 어디냐고 묻게 될 때 세계를 구하는 것이요, 세계를 구함과 동시에 당신과 상봉하는 것이요, 당신을 만남과 동시에 당신의 안위의 한날을 맞아 효의 도리, 충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이들이 가는 종차점이요, 목적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충효의 도리라는 것은 자기를 찾고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존귀한 부모 앞에, 하늘 앞에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옵니다. 자기의 생활 감정은 자기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리의 대열에 참석한 터전이 자기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니라 위로 말미암아 되어졌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동대원들에게 아버지께서 명령하셨사오니, 하늘의 권위로 그들의 갈 길을 살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당신께서 세우셨사오니 당신께서 지도하시고 키우시어서 당신의 나라에서 덕망지자(德望之者)로서의 사명을 할 수 있게끔, 완전하고도 늠름하게 자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날이 감에 따라 가지가 뻗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날이 만국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인연을 펴시옵기를 재삼 바라옵니다. 그들이 마음을 모아 하늘을 그리워하고, 아시아의 일각에 있는 한국 땅, 서울, 이 본부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짓고, 혹은 거리에서 애절한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속죄의 길을 다짐하면서, 아버지, 호소하고 절규하는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뭇사람 앞에서 비난의 대상, 혹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의 뜻이 크기에, 당신께서 하셔야 할 의무와 사명이 남아 있기에, 그 뜻과 사명에 동참해야 할 아들딸로서 태어났기에, 그 일을 감당하는 길 위에 있사오니 부디 당신이 버리지 마지옵소서, 제가 그러했을 때에 당신이 지켜 주시던 것을 생각하면서, 이들도 그러한 자리에 세운 것은, 아버지, 하늘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하늘에 의해 시작하였거든 결과도 하늘에 의해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을 중심삼고 살수 없는 것이요, 하늘을 믿고 승리의 생활을 거쳐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옵니다.
아버지여,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고 지나가는 날들 가운데 아버지의 깊은 심정의 인연을 묶으시어서 당신이 소망하는 영광의 때를 단장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한국의 동산을 당신께서 맡으시옵소서. 사람의 힘으로써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전능의 아버지요,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아버지요, 생사의 기연을 주관하시는 아버지요, 운명을 결정지으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 앞에 맡기고 아버지의 소원 앞에 일치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 민족이 금후에 가야 할 길을 가려 주시옵소서.
남북으로 분단시켜 놓고 있는 원한의 삼팔선을 헤쳐 버리고, 생명의 인연을 따라, 사랑의 인연을 따라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하늘이 남기신 길을 거두어 드릴 수 있는 민족적인 사명이 남북한의 이 동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당신의 뜻 앞에 일치되지 못하는 무리들이 있으면, 그들을 제거하시고 막으시옵소서. 원하시는 뜻 앞에 원치 않는 무리, 굴복시켜야 할 가인의 무리가 있는 것을 아옵니다. 이들을 굴복시키는 데는 하늘이 직접 채찍을 들어 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난 후에, 그들이 그 정성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때에야 심판해 나온 역사적인 분별노정을 아는 저희들이옵니다. 엄숙한 제물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고 전국에 있는 통일교회 무리 앞에 통고하고 있사오니, 아버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심정을 안고 밤을 지새워 흐느끼며 옷자락을 적시는 무리가 있으면, 아버지, 같이해 주시옵소서.
망하지 않는 하늘을 믿고 하늘을 위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망할 수 없는 모습이요, 이러한 모습을 영원히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당신의 은사밖에 없다는 것을 아오니, 당신이 품에 품으시어 보호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지키시어 기쁘게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이 아침에 소수의 무리가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들이 무심코 나온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명심하여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복귀의 한스러운 길에 서 있는 것을, 저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의 심정과 당신의 생활과 당신의 이념과 일치되어, 싸움노정에서 지쳐서는 안 될 것을 잘 아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니 당신의 이름 아래 모이는 남한 각지의 무리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무리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만민들 위에 당신의 지극한 사랑과 은사의 손길이 떠나지 마시옵길 재삼 부탁드립니다. 남은 시간들도 기쁨으로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성호 받들어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는 자기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자신을 볼 때, 자기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상하 전후 좌우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한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전후좌우의 사방이 있어야 되고 상호관계가 연결되는 자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또, 그 결정된 위치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방향을 갖추게 될 때,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하는 것이 무엇에서 결정되느냐 하면,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방향을 가려 나가는 데서, 다시 말해 직장이라든가 혹은 사회의 어떠한 부류에 속하여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개인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히 그렇게 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가정적인 운명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상하관계를 두고 보면, 부모가 있고 앞으로는 후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다음에 미래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를 중심삼고 보게 되면 좌우와 통하고, 전후와 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개인은 상하 전후 좌우의 관계에 의해 존속하고, 위치를 결정해 가지고 방향을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관계라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계가 맺어지기 전에 반드시 인연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한 사람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인연에 따라 일생에 없어서는 안 될, 승패를 결할 수 있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혹은 볼 수 있습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이겁니다. 우연 같지만 역사시대를 거쳐온 인생일진대, 그 인생의 배후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인연이 엮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 만난 당사자들은 한 시대권내에 있지만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의 배후라는 것은 역사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과정에는 개인이 동참할 수 있는 것이요, 혹은 가정, 종족, 민족, 국가,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전체가 가담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한 나라를 지나 이방, 더 나아가 전세계가 그 권내에 가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삼아 가지고 빚어진 이 세계뿐만이 아니라 하늘이 있다면 하늘까지도 그 배후에는 반드시 인연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난 것이 순간적인, 일시적인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부부를 이루게 된다고 할 때, 그 부부를 이루게된 것이 20대면 20대, 30대면 30대의 평면적인 생을 지닌 사람들로서 만나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횡, 혹은 전후 좌우를 중심삼은 방대한 인연의 운명길이 연결되어 가지고 어느 한 시점에서 상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 결혼이라는 문제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두 사람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삶을 대신해 가지고 살아 간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어 가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인연이 가담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역사적인 부부일 뿐만 아니라 천륜을 대변할 수 있는 부부로서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평면적으로 보면 개인과 가정과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인연이 연결돼 있고, 종적인 면으로 보게 된다면 천륜이 가담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인연에 따라 설정된다
사람들이 인생 행로를 거쳐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생활감정이나 그 모든 것이 그 사람들만의 생활로서 종결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원인을 통해서 인연된 것으로, 그 귀결점을 바라고 그들을 끌고 나가기 때문에 미쳐지는 결과라는 것은 그 개인들로서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내용이 내포된 생활을 해 나간다고 우리는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하나 잘돼 가지고는 좋아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남자면 남자 한 사람만 기뻐 가지고 가정이 평화로울 수 없고, 여자면 여자 한 사람만 기뻐 가지고 가정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행복하다고 해서 그 가정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이 시점이라는 것은 인연을 통한 관계에 의해서 되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보다 가치적인 인연을 추구하기 위해 있는 것이요, 그 결과를 통하여 보다 가치적인 관계를 입체적인 면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복은 그들만을 위한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행복은 과거의 불행을 채우기 위한 행복도 될 수 있는 것이요, 과거에 행복한 때가 있었다면 그 기준을 넘어 보다 더 나을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 있는 행복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행복하였던 것은 인연을 통하여 높고 낮은 길을 거쳐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형태는 직선이 없습니다. 이것은 상하고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발전해 나가기 때문에 높았던 것은 낮아지는 것이요, 낮았던 것은 높아지는 것입니다.
운명길이 이와 같이 엇갈리고 교차되면서 발전해 나가는 역사인 것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여러분의 생활이라는 것은 매일 매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분도 아침 저녁으로 달라집니다.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저녁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혹은, 봄절기에는 운이 좋았지만, 여름절기엔 운이 나쁘다! 혹은, 작년에는 운이 좋았지만 금년에는 운이 나쁘다! 혹은, 청년시대에는 운이 좋았지만 노년시대에는 운이 나쁘다! 이렇게 엇갈리는 모든 것이 우리들이 원해서 그런 결과가 되어졌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고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행복은 계속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절절히 바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행이 닥쳐오는 것은 어떤 원인 때문이냐? 현실적인 무대가 어떤 인연의 박자에 맞추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운명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인연에 따라 가지고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반드시 나빠지느냐, 아니면 좋아지느냐 하는 결론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을 수 있는 관계가 되느냐, 내가 슬플 수 있는 관계가 되느냐?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느냐, 나에게 부끄러운 관계가 되느냐? 관계를 통하여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 관계라는 것이 자기가 주동이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자기만의 주동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역사시대의 어떠한 인연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작하는 데 주동적 인연이 있었으면 과정에도 주동적 인연이 연결되어 그것이 어느때에 가서는 주동적 결과로 인연맺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느냐, 나쁜 것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자기 일대(-代)로 말미암아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로부터 조상들이 쌓아 나온 공적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만약 선한 터전을 세웠다면….
선은 전체의 것
그렇다면 선은 어떤 것이냐? 선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데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 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데에서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루하루 천지만물을 지어 놓고, 그 만물을 대해 '보기에 좋은지라, 선한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기에 선한 지라' 한 그 선의 출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내가 혼자 있으니 선하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피조물을 만들어 놓고, 그 피조물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는 그 마음의 자세,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자리에서 선하다는 역사적 전통이 세워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볼 때 선의 기원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데서 설정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할 때, 그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위해 가지고 환경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움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소화되어 가지고 환경을 움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선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은 적선을 많이 말하고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선을 쌓으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남을 위해서 공을 세우는 데서 선이 쌓아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이 쌓여져 완전히 다 이루어지게 될 때 그 선은 상대의 것도 아니요, 주체의 것도 아닌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부부일심을 이루게 되면 그 부부는 남편만을 위한 것도 아니요, 아내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부부일심이 이루어지게 될 때 그것은 누구의 것이냐? 그 부부의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동시에 그 부부는 누구의 것이냐? 그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벌써 부부가 하나됐다고 하게 될 때는 남편의 것도 아니요, 아내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공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어떠한 환경이 주체자와 중심적인 내용을 결합시켜 가지고 그 중심이 움직이는 데에 완전히 보조를 맞추게 될때, 일치를 이루게 될 때에 거기에 선한 토대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갑과 을, 둘이 하나될 때 갑이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혹은 을이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하나가 됐지만 그것은 갑의 것만도 아나요, 을의 것만도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둘의 것입니다. 이 둘의 것인 그선도 둘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체를 대표한, 전체의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설정되느냐? 나 혼자만 행복해 가지고 행복이 설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다 행복하게 될 때 행복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둘 다 행복한 것은 어떤 것이냐? 보다 차원 높은 인연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갑은 동쪽에서 왔고 을은 서쪽에서 왔으면 동서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행복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완전한 선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한 선이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인연을 따라오는 과정에 있어서 관계를 맺어 온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비로소 꽃을 피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연을 통하여 보게 될 때 그것은 인연의 부활이요, 관계를 통하여 보게 될 때에, 하나의 결실로서 등장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가 행복한 자리요, 선한 자리라고 우리는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가 상대에게 주는 데에서 자비와 사랑의 터전이 설정된다
그러면 자비라는 것은 무엇이냐? 완전한 선이 성립되어 가지고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위해 줄 수 있고, 보다 큰 것을 위해 상대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자비의 마음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체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게 될 때는 보다 높은 차원의 경지가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비로소 자비스러운 주체라고 말할 수 있고, 자비스러운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횡적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아! 자비스러운 주체, 자비스러운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 못된 그 환경을 초월한 자리에서 중심이 되고, 하나가 되지 못한 데에 본이 되는 공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주체가 되어 보다 공적인 기준을 따라오는 그들을 위하여 사랑의 마음이 흘러 내리게 될 때에, 자비의 마음이 설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도 여기에서 벌어 지는 것이요, 보다 차원 높은 행복의 요인도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은 두말할 것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보다 큰 것을 중심삼고 하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보다 큰 것을 중심삼고 하나되려고 하느냐?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자기를 초월한 자리에서, 보다 자비스러운 사랑의 주체, 보다 자비스러운 선한 주체, 보다 자비스러운 사랑의 중심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중심이 커 감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절대적인 자비의 주인이요, 사랑의 주체요, 선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접근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큰 것과 하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다 잘난 사람, 보다 유명한 사람, 보다 훌륭한 사람과 하나되려는 것은 그와 내가 하나되게 되면 그의 것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요, 하나의 공적인 것으로 남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공적인 것을 주체가 상대에게 다시 주는 경지에서 자비와 사랑의 터전이 설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이땅에 와서 하려고 한 것이 무엇이냐? 밥을 그리워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자기의 생활무대를 그리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뭐냐? 예수님은 이땅에 주체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삼고 나라면 나라, 세계면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일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된 것은 예수님의 것도 아니요, 세계의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된 것이 하나님 것으로서, 보다 차원 높은 중심적인 존재로서 차원이 낮은 사람들을 대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 여기에 자비의 천국이 형성되고 새로운 선과 사랑의 세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는 일구월심 생애를 통해 싸움의 행로를 개척해 나갔다는 사실을, 그 개척와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때는 생명까지 바치는 데에 순응해 가지고 죽음길도 기쁨으로 맞이해 나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는 사람과는 하나 못 됐지만, 사람과 하나돼 가지고 인간 세상에 새로운 주체로 서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을 대해 가지고 주체로 서지 못했지만 영적으로나마 하나님과 하나 된 자리에 섰기 때문에, 그 마음과 하늘이 하나되었기 때문에 그 하나된 기준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시대의 중심적인 생명이 인연되어 새로운 생명의 부활권, 하나님의 은사권과 자비권, 사랑의 세계, 선한 역사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 혼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혼자 태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반드시 두 존재가 하나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나'라는 사랑받을 수 있는 실체가 나온 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가 사랑을 통해서 하나되는 혈연적인 터전을 통해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보다 높은 터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부모는 나를 사랑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 사랑하지 않더라도, 싸움을 하더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나된 기준 위에서 보다 차원 높은 대상의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필연적인 소망의 기준으로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요, 인간 본연의 행로인 것입니다. 그 행로를 따라가야 할 인생에 있어서 아무리 자기들 부처끼리는 싸우더라도 자식을 대해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선이라는 것은 혼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협동해야 됩니다. 보다 새로운 혁명을 제시하는 역사적인 운동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사상이 있어 가지고 그 사상을 중심삼고 주체자와 대상이 서로 하나되었다면, 그 사상은 주체자에게 속한 주창자의 사상이냐? 아니면 따라오는 사람들의 사상이냐? 그것은 따라오는 사람들의 사상인 동시에 제창한 사람, 즉 지도하는 사람의 사상인 것입니다.
그 사상을 중심삼고 하나가 되게 될 때는 그 하나된 사상은 제창한 사람의 것만도 아니요, 따라오는 사람의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의 인연을 가지고 역사시대에 새로운 운동을 제시할 수 있는 선의 모체가 되고, 사랑의 모체가 되고, 생명의 기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시대를 통해서, 우리의 생활환경을 통해서 매일같이 당하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 자신들도 그러한 운명길을 가려 나가야 합니다. 개인이 그러하기 때문에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도 한 나라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 주체적인 자리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세계는 그 국가의 이념과 정책과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된 그 세계는 대한민국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공적인, 차원 높은 새로운 것으로 등장해 가지고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나'라는 것은 현재의 나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연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인연 길이라는 것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향이면 남향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수만의 선조를 거쳐 가지고 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 선조들 가운데에는 남향을 향해서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북향, 동향, 서향, 혹은 아래 위로 가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천태만상의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내 한 생명체를 빚어 내기 위해서 역사적인 공을 남기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 조상도 있었을 것이고, 혹은 앞으로 나가는 조상이 있는 반면 뒤로 후퇴한 조상도 있었을 것이고, 후퇴하다 말고 떡 하니….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을 것 아니냐?
그러한 인연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어떤 한 출발 기점에서 전진을 해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될 때는, 기준에서 후퇴한 그 거리만큼 탕감을 하지 않고는 못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의 한계점에 서야 할 인간이 그만큼 후퇴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후퇴된 거리에 해당하는 탕감이 설정돼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조가 선한 기준까지 끌고 나왔을 때, 그것을 넘어 선한 기준에 올라가게 되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높고 낮음이 벌어지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
그러한 자리에서는 정상적인 발전이 벌어지고 그 과정을 통하여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이만큼 끌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일대에 와서 그것을 후퇴시켰다 할 때는 역사적인 탕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운의 인연을 거쳐 나오는 역사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의 생애노정이라는 것은 천태만상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저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겁니다. 혹은, 청춘시대에는 이러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안 된다구요.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욕망은 언제나 지금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지금보다 낫기를 바라고 전진하기를 바라지, 후퇴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볼 때는 전진하려고 하는데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될 놀음이 벌어진다구요. 이렇게 나가서는 안 되고, 반대의 그 인연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길로 가야 하는데 인간의 욕망은 앞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반대로 돌아서 가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가려고 하다가는 반드시 들이맞는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고, 혹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하는 것은 그런 때를 통하여 급격히 변하는 방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탕감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이면 개인이 탕감을 하는 것이요, 가정이면 가정이 탕감을 하는 것이며, 국가면 국가가 탕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골상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손금이나 관상을 보고 뭐가 어떻다고 얘기를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귀 하나만 보더라도 그 귀가 자기 어머니의 귀만 닮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의 나는 선대로부터 연결된, 모든 조상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하나의 종합된 실체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선조들의 만물상을 대표한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나타나 있는 나의 모습은 선조로부터 인연된 그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 일대에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쁜 선조, 선한 선조가 내 일생에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그 반영의 결과로서의 생활을, 생애를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높고 낮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이치인 것입니다.
불행의 환경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방안
이러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인간들이 이것을 어떻게 모면하느냐,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 방안이 없겠느냐? 이게 문제라구요. 불행한 사람은 그 불행의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방안이 없겠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방안은 무엇이냐? '선조를 이겨라! 선조들이 가진 목적 이상의 목적을 가져라!' 문제는 그겁니다. 그럴게 아니예요? 이만큼 떨어져 내려 왔으면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그 떨어져 내려온 것을 원상복귀하려면 반대로 그 이상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선조들이 갖고 나온 모든 생활방법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결론입니다.
선조들이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됐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반대의 행로를 주장하는 운동이 없어 가지고는 그릇된 인생 행로를 바로잡을 길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은 수천만대의 선조들을 가졌습니다. 선조 가운데 선한 선조가 많았느냐, 악한 선조가 많았느냐 그것을 종합해 볼 때 선한 선조가 많았다는 사람은 비례적으로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 일생을 살고 나서 임종하는 순간에 가 가지고, '내가 일생 동안 선한 일을 많이 하였느냐, 악한 일을 많이 하였느냐? 하고 회고해 볼 때, 선한 일보다도 악한 일을 많이 했다는 결론을 어느누구나 내린다는 것을 볼 때, 우리 선조들 전체가 선한 사람이 못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례적으로 악한 선조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나는 선할수 있는 새로운, 혁신적인 운동을 제시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연의 혁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인연의 결과물로 태어난 존재로서 그 운명을, 그 환경을 그냥 그대로 따라가 가지고는 비참한 자리에서 파탄되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혁명해야 됩니다. 반대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그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고 '야야, 거기에서 네가 좋아하는 대로 살아라!' 해 가지고 인간을 구할 수 있겠느냐? 절대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면 반대의 행로를 제시해야 됩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악한 선조들이 많았기 때문에 너는 선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선조들은 어떻게 살아왔느냐? 선조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자기 부인, 자기 남편, 자기 아들딸,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자아완성, 자아 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기 족속, 자기 가정을 위주해 산 것이 아니냐? 그것은 틀림없다 이겁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할머니 할아버지 고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총괄적인 결론을 내리면 그들은 자기 아들딸, 자기 가정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그런 류의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 자기 가정을 위해 살아 가지고는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반대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살지 말라! 자기를 중심삼고 살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 운동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역사 가운데, 선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산 사람 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데 어떤 것을 위해 산 사람이냐? 같은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동네를 위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위하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면을 위하는 사람은 그 부락을 위하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군을 위하는 사람은 면을 위하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거라구요.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가정이 존경하는 사람보다 그 마을이 신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구요. 마을뿐만이 아니라 면에서, 면뿐만이 아니라 군에서, 군뿐만이 아니라 도에서, 도뿐만이 아니라 나라에서, 나라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이렇게 돼야 합니다. 욕망이 가는 길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악의 결과로 빚어진, 그 인연의 불순분자로 태어난 나 자신임을 발견했다 할진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어떤 작전을 하실 것이냐? 이것을 유지시키는 작전이 아니라 파탄시키는 작전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길로, 반대되는 극의 방향을 거쳐 가지고 살리는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이 나오는 거예요.
자아부정을 자각하고 남을 위해 살라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반대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사람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과 사람은 주체와 대상 관계로서 하나는 남극이요 하나는 북극과 마찬가지입니다. 남극에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남극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북극을 위해 살아라! 북극을 바라보고 살아라' 하는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 죽고자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북극을 위해 죽어라!' 이와 같은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종교가 사실 그렇게 됐다면 역사적인 섭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극과 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인적인 존재고 인간은 결과적인 존재니까 원인적인 존재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무 목적도 없이 죽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 이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는데 그냥 맹목적으로 죽어요?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 다는 말입니다. 반대적이다 이겁니다.
반대적 교훈이 있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완전한 종교사상입니다. 완전한 종교 완전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신은 죄악된 인연권내에 고착돼 있는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일시에 혁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저분한 것들을 한꺼번에 깨뜨려 버려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지 말고, 사람의 사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사상을 믿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최대의 비법이 아니겠느냐?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라구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종교는 어떤 것이냐? 자아부정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자아부정을 자각함과 동시에, 그 다음에는 무엇이냐? 타아(他我)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타아 즉 남을 위해서 살라 그겁니다. 그 남은 남이 아닙니다. 하나되는 목적을 중심삼은 남이라구요. 상대적인 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상대적인 입장에 될 때, 그 천지만물은 지어진 물건으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의 소성을 발전시킨 또 다른 나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나를 통해서 형성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냥 완성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완성은 자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아를 통해서, 다른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타락은 무엇이냐? 타아자각을 한 것이 아니라 자아자각을 한 것입니다.
자아자각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타아자각을 어떻게 하느냐. 그 범위를 자기와 같은 일체적인 감정으로 어떻게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세계적인 인물의 등급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지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큰 환경을 자기와 같이 사랑해 가지고 그 사랑한 것이 돌아오게 될 때는, 지금 사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전체를 포괄한, 전체가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의 주체격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보다 높은 환경을 향해서 출발할 수 있는 제2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기대는 제 3 기대, 제 4 기대로서 차원을 높여 가지고 하나님에게까지 그것이 상승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고차적인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사랑을 가지고 오는 목적
여러분이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 쉬워요? 쉽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이만큼 사랑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할지 모르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더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환경을 토대로 제 2 의 출발을 또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범위를 넓혀 면을 통해서, 군을 통해서, 도를 통해서, 나라를 통해서, 세계를 통해서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도약이 벌어지는 거예요. 달나라 가는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지구성이 하나의 유도탄 기지와 같이 되어 가지고, 인공위성의 기지와 마찬가지로 되어 가지고 밀고 나가야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인공위성을 만들어 왔다 하더라도 밀어 주는 추진력이 없게 되면, 그런 터전이 없게 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날리려고 해도 날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단단한 터전이 되어 가지고 어떠한 힘으로서 밀더라도 그것을 반대로 밀어제낄 수 있는 기대가 있어야만 인공위성을 날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우주적인 도약을 바라서 하나님에게로 직행할 수 있는 심정적 유도탄을 발사하게 될 때, 그것이 가서 맞는 날에는 천지는 그 사랑 앞에 폭파될 것입니다. 폭파가 되면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던 것이 통일이 벌어질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을 통한 죄악된 결과의 자리에 선 우리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 '반대의 길을 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느냐? 본래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기원으로 해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인간 본래의 이상적인 사랑은 출발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인연인데도 불구하고 그 인연을 무시하고 포기해 버리고 출발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 포기된 자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포기 하지 않았던 자리 이상의 자리를 사랑할 수 있는 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타락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이 아들딸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을 사랑하지 못하였으니, 이 운동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시아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아들로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사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랑 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기 위한 운동을 연결시키는 분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간단하지 않은 거라구요.
동기가 되어 가지고 인연의 결과를 가져왔으면, 그 이상적인 자아는 이상적인 사랑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돼 가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열매는 본질적인, 원인적인 존재와 일치될 수 있는 열매가 되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열매로서의 인연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이게 타락된 것입니다. 본래 인연된 열매의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딸로부터 연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랑의 인연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랑의 인연을 가져야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주체에게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메시아가 사랑을 가지고 오는 목적이요, 그가 해야 할 책임입니다.
메시아가 남자로 오면 남자만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그 메시아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메시아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딸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신부입니다. '끝날에는 신랑신부가 온다!' 이것은 결국 사랑을 사랑답게 갖지 못했던 인간에게 사랑다운 사랑을 찾아가자고 하는 말입니다. 불륜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별되었던 것이, 본연의 이상적인 사랑이 섬으로 말미암아 원칙적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이상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적으로 보면 지상천국이요 천상천국이 아니겠느냐? 그건 당연한 말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려면 복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처녀 총각들이 맨 처음에는 서로 죽자살자 좋아서 결혼했지만, 지난날을 가만히 보니까 사랑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흔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뻐할 상대가 있어요? 손들어 봐요. 있어요, 없어요? 자, 우리 여자들 있어요? 우리 할머니들, 옛날 할머니들은 남편에게 절대 순종하는 법에 매여 살았지요? 그런데 남편을 가만히 보니까 외도를 한다고 할 때,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또, 그런 정력을 가졌다고 할 때 좋아할 사람 있어요? 지금까지 좋던 것이 뒤집어지는 거라구요. 왱가당 댕가당. 전부 다 위가 아래되고 아래가 위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마찬가지라구요. 타락한 인간도 그렇거든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들로 맞으려고 할 때, 원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지고 원수의 사랑을 받으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아이고 좋아, 아이고 좋아' 하면서 살아온 그런 꼬락서니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이 그러한 작자를 사랑하고 싶겠어요? 여러분 대답해 봐요. 사랑하고 싶겠어요, 사랑하고 싶지 않겠어요? 「사랑하고 싶지 않겠습니다」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그런 패들은 절대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보기만 해도 그저 메스껍고, 보기만 해도 그저 밉고 보기만 해도 물어뜯고 싶고, 보기만 해도….그럴 수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볼 때 '야, 고거 고거…'그럴 것 아녜요?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말예요.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한 복음이다 이겁니다. 미완성이요, 절망권내의 역사적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두고 볼 때, 그런 인간 앞에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이것은 우주적인 혁명입니다. 우주적인 혁명인 동시에 우리 인간 앞에 지극히 복된 복음입니다.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될 것이냐? 사랑을 못해서 그렇지 더 사랑하면 어떻게 될 것이냐? 수가 난다는 것입니다, 수가. 인간세계에서 상상하지 못할 고차적인 사랑의 세계가 비로소 문을 여는 것이 아니냐? 사랑의 세계가 현현되는 것이 아니냐? 새로운 천지에서 활기를 펴고, 환희와 기쁨에 충만한 모습으로 천지를 자기 것과 같이 사랑하기 위하여 제일보를 나서는 행복된 그 자아가 얼마나 멋지겠느냐?
그것을 볼 때 하나님도 '히야-' 하고 침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아이구 좋구나, 야, 야 너만 가지 말고 나도 데려가 다오!' 하나님도 그걸 보고 위신상 가겠다고 나설 수 없어도 마음으로는 고대하고 있을 때 '하나님 가십시다' 그래야지 고대하지도 않는데 '가십시다!' 이런다고 나설 것 같아요? 마찬가지예요. 사람과 마찬가지라구요.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양반은 이 땅에 와 가지고 누구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를 더 사랑해도 안 되는 것이요, 부모를 더 사랑해도 안 되는 것이요, 아들딸을 더 사랑해도 안 되는 것이요,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파탄시키고 파괴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건설과 희망의 교차로가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그렇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이겁니다.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여러분을 보면, 뜻을 위해서 간다고 해 가지고 지금까지 왔지만 먹다 남은 찌꺼기, 먹다 남은 쓴 오이꼭지처럼…. 여러분 자체가 뜻을 위해 산다는 사람들의 새빨간 가슴을 해부해 놓고 한번 자기를 비판해 보십시오! 내가 천국에 가겠는지 못 가겠는지, 하늘나라의 백성인지 아닌지, 하늘나라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혈족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해부해 보자구요. 좋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내 거! 나쁜 것은 네 거! 그래 가지고는 완성의 세계, 이상의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 예수는 자기 인생은 '이렇게 가야 된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다는 겁니다. 반대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해야 되기 때문에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문화의 기원이 벌어지고, 새로운 개인의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우주관이 벌어진 것은 두말할 것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솔직하게 얘기해 봅시다. 숫총각이 있다고 한다면 자기 친구와 얘기를 할 때 '야, 이 녀석아! 너는 숫총각인데, 이 다음에 어떤 색시를 만날 거야! 여자학교 졸업한 아가씨를 만날 거야? 남녀공학한 학교를 다닌 아가씨를 만날 거야?' 하고 묻는다면 지금 사회제도가 그러니 그렇지, 그 남자는 '야, 야 나는 남녀공학을 졸업한 아가씨는 원치 않아'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건 보수적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보수적이라서 그렇게 말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보수적이 아니라 진취적이라는 거예요. 공식이 딱 그렇게 돼 있습니다.
혹은 남녀공학인 학교를 졸업한 여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이면 대학생 처녀를 아내로 맞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진짜 사랑하려면 누구 한 사람도 곁눈으로 바라보고 딴 생각하지 않은 그런 여자를 상대로 원한다는 거예요. 선생님 말이 틀렸어요? 남자들 그런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어디 한번 대답해 봐요. 있어요, 없어요? 남녀공학한 대학을 나온 여자들은 다른 데에 능란해 가지고 살림살이하기가 좀 힘들다구요. 자기의 남편을 대하게 되면 벌써 자기가 대학 다닐 때의 학급 남학생들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공부 잘하던 아무개는 얼굴이 이렇게 생겼고 어떻고, 나도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프로포즈했던 제 1 호, 제 2 호, 제 3 호… 제 10호 이렇게 딱 그 상판대기를 언제든지 비교하고 분석한다는 거예요. 그런 학생을 내가 보이코트했는데 이런 졸장부를 만났구만….
이렇게 볼 때 남자라면 숫처녀를 원하고, 여자라면 숫총각을 원한다는 거예요. 처녀 총각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뭘 그래? (웃음) 정말 그래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시기 질투가 많은지 알아요? 하나님은 시기하는 데도 천하의 대왕이요, 질투하는 데도 천하의 대왕입니다. '나만 사랑하라!' 그 대신 나도 너하고 죽자살자 사랑하겠다는 거라구요. 그러면 됐지, 그렇지 않아요? 그게 나쁘냐 이겁니다. 시기도 좋다, 질투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시기가 나빠요? 질투가 나빠요? 사랑하게 마련인 자리에서 자기만 사랑하겠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나빠요? 그것은 방어적 울타리라구요, 방어적 울타리. 누가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방어적 울타리라구요. 그런 것을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들 지금 하나님의 아들딸 되겠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누더기 보따리도…. 어린애가 똥 싸서 뭉개 놓은 것은 그래도 초밤중이예요. 이것은 뭐, 몇십년 전 할아버지 똥, 처녀 때 똥, 총각때 똥 해 가지고 똥주식회사 같은 것을 싸 가지고 다닌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 가지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겠다고 입이 벌려져요, 입이? 얼굴을 들고 이렇게 해 가지고 입이 벌려지느냐 이거예요. 이 땅에서 족보에도 자기 자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할 텐데, 뻔뻔스럽고 대담하다는 거예요. 그 비린내 나는 것을 대해 가지고 지금까지 복귀섭리,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느냐 이거예요. 생각해 보라구요.
시집 온 색시가 조금만 뭐하면 보따리 싸들고, '나 안 살아' 하면서 한번 나갔다 들어오고, 두 번 나갔다 들어오고, 세 번 나갔다가 들어오고…. 그걸 또 따라가면서 사랑하겠다고 하는 사내가 있으면 그런 사내는 때려 죽여야 돼요. 미친 녀석이라구요. 그렇게 말하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하나님이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면 얼마나…. 하나님이 뭐야, 하나님이 뭐냐구. 나중에야 하나님이 있지…. 임자네들 하는 놀음을 보라구요. 그거 메스껍겠어요. 안 메스껍겠어요? 구역질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구역질이 나게 돼 있어요, 안 나게 돼 있어요?
우리 아줌마들, 뭐 얼굴에 분 바르고 잘 꾸미고 온 아줌마들, 마음 심통, 그 마음의 역사를 가만히 뒤적뒤적 전시해 놓고 척 바라보게 될 때, 얼굴에 분 바르고 나타날 수 있는 자신이 있어요? 그거 생각해 볼 문제라구요.
그래 가지고도 뻔뻔스럽게시리 '나를 왜 몰라줘! 누구는 어떻고 나는 어떻고…' 그렇게 말하게 안 돼 있다구요. 인연의 판정의 도수가 달라요. 공판정이라고 전부 다 같은 형, 1년 6개월짜리만 공판하는 게 아닙니다. 공판정은 사형에서부터 몇십년, 몇백년 천태만상으로 벌어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다 같기를 바랍니다. 안 된다구요. 그러니 누구에게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평하려면 자기 조상에게 불평하라 이거예요. 불평하려면 나에게 불평하라 이거예요. 이 불평을 벗어나는 길은 인연의 길을 혁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혁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혁명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나니, 이것이 뭐냐? 전부 부정하고 박차 버려라!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인정하지 말고 전분 다 옥살박살 부정해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부정해 가지고 부정을 한 그 이상의 자리로 점핑해 가지고 그 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앙은 운명길을 혁신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가 고마운 것은 하나님을 절대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혁명의 본위입니다. 알겠어요? 절대 믿어라? 네 자체를 타령하지 마라! 타령해 봐야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알겠어요? 인간들끼리 무슨 죄가 많고 어떻고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평면적으로 보게 되면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잘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못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믿어라! 절대적으로 믿으면 일시에 돌파구가 생겨가지고 초월할 수 있는 길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신앙은 운명길을 혁신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알겠어요? 또한 인연도 바로 잡을 수 있고, 관계도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고착된 그 관계를 개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선하려면 새로운 신앙에서부터, 신앙은 새로운 이념에서부터, 새로운 이념은 새로운 사상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이념과 사상을 제창한 인물이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세계적인 성현들이 아니냐 이겁니다.
그 성현들이 추구하던 것은 무엇이냐? 그 골자사상은 자기를 위주로한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세계로 보면 그들은 약자였습니다. 자기 주장은 없고 오로지 하늘, 하늘, 하늘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양반도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지요? 세상적으로 보면 그게 얼마나 비굴한 사나이 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요?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도,'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무슨 사내가 그렇게 생겨 먹었어요? 세상적으로 보면 그건 인중지말(人中止末)입니다. 누가 그의 말을 믿겠어요? 졸장부같이…. 사내답게 혁명을 못 일으키고…. 모든 것을 혼자서, 장엄한 자세로 칼을 빼어 들고 원수들이 목을 뚝뚝 잘라 버리는 것이 시원하고 남자답지. 아이쿠, 궁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건 인간적으로 보면 인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는 예외의 인물이었더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외의 길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연의 장난은 여러분의 운명 앞에 갖은 슬픔과 비극을 전개시켜 나오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대의 길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믿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믿고 넘어가야 된다 이겁니다.
어떤 강을 건너뛰게 될 때, 넓이뛰기에 있어서 자기의 기록이 있다구요. 자기의 기록이 4미터 내지 5미터쯤 된다면, 4미터쯤의 거리는 쉽게 건너뛸 수 있지만 5미터라는 한계선을 건너뛰려면 비장한 각오, 지금까지 없었던 비장한 각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넘어야 합니다. 해봐야 죽든지 살든지 둘 중의 하나가 결정됩니다. 알겠어요? 그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건너뛰어야 되는데 '아이구, 건너뛸까 말까! 난 자신이 없는데, 다리가 건너뛰겠지' 그렇게 생각해요? '난 자신 없지만 다리가 건너뛸 것이다' 그러면서 뛰는 녀석이 있어요? 그건 미친녀석입니다. 먼저 마음이 문제입니다. '좋은 고비다. 이건 문제가 아니다' 하며 심각한 마음으로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을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해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넘을까, 될까 말까 이래 가지고 되는 수가 있어요? 이것은 틀림없이 가다가 쿵하고 떨어지는 거라구요.
절대적인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험을 촉구해 나가는 개척자의 행각의 노정에서는 불가피적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니, 이 권위가 이거 참 얼마나 멋져요? 하나님이 인간을 구도하기 위한 최고의 표어가 아니냐? 안 그래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운명은 여기에서 엇갈리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먼저 나 자신을 정비해야
격동하는 세계사적일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에, 현실의 어떠한 주의나 사상도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신앙관과 생활이념을 갖고 나서게 될 때는, 그 신앙관과 생활이념을 통해서 개혁이 벌어지고 새로운 세계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통일사상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사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념은 뭐냐, 생각입니다. 생각하는 상응사상입니다. 사상이 이념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념은 체계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으로 전진적인 체계화 놀음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상은 이념을 전개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이념은 비로소 생활법도가 되어 실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것이 새로운 문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실천장에 있어서는 이념이 고차적이니만큼 행동도 고차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야 할 목적관에 대한 강력한 생각이 앞서야 됩니다. 구상하는 생각, 그것이 앞서지 않고는 안됩니다. 자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게 될 때, 자신이 있느냐고 물어 보지요? 조금만 다른 새로운 것을 하더라도 '너, 자신 있나?' 이렇게 묻지요? 일을 해보기 전에는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텐데,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네 마음이 결정돼 가지고 그 이상 넘어설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말은 뭐냐 하면, 신앙적으로 볼 때에 현재에 당면한 문제를 극복할 수있는 마음의 방향이 갖춰져 있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갖춰져 있으면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가기 때문에 변치 않고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기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그래요. 삼신(三神)이 동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동해야 되고, 내 마음이 동해야 되고, 물심이 동해야 됩니다. 병난 사람을 보면, 그 몸뚱이가 수척한 것을 보고 자기가 아픔을 느끼면서 이 병자를 하나님이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이냐? 이래 가지고 부모의 심정으로 측은하게 보면서 병자라는 생각이 없이 그를 붙들면 대번에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를 병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잃어버린 아들딸, 십년 혹은 천년 동안 찾던 아들딸을 만난 것 같은 사랑의 마음이 여기에 덮어져 그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이 벌어지면 대번에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적이 뭐 다른 게 아닙니다. 그것을 동화시킬 수 있는 자리, '그는 나요 나는 그다' 하는 자리, 창조원리대로 둘이 하나되는 데는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면 재창조의 운동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소원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재창조의 능력이 가해져야 새로운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어떤 문제를 중심삼고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이루어질지 말지…. 그게 아니라구요. 여러분은 이러한 비운의 운명을 불신하고 나섰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되는 것이 뭐냐? 여러분 자체를 정비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나 자신이 되었느냐? 내가 누구를 더 사랑했느냐 이겁니다. 먼저 나 자신을 정비해야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잖아요?
여러분을 보면 여러분도 그렇다구요. 자기의 남편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남편이다 이거예요. 그 사람이 총각으로서 자기와 결혼했고 일생 동안 자기만을 위하고 말이예요. 남성으로서 세계에 둘도 없는, 참 존경할 만한 남성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과거에 실수가 있었다고 하면 이는 언제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지 않고 숨기고 산다고 하더라도 일생 동안 죄책감을 받는 거라구요. 남편이 잘 해주면 잘 해줄수록 죄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다는 거예요. 마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그분 앞에는 순수한 여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냐 이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순수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순수하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차원 높은 자리에서 새로운 심지(心地), 마음의 밭을 어떻게 개발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인데, 우리는 타락의 후손입니다. 이것은 배반이예요. 여러분의 조상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배반했겠습니까? 배반자의 후손들…. 이게 또 둥글다면 모르겠습니다. 얼럭꿍 덜럭꿍 제멋 대로, 될 대로 돼 버린 것이, 나는 이래뵈도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구….
어린아이 같은 입장에서 3대 눈물을 흘려라
그러한 자기를 발견할 때에는 눈물로 회개해야 됩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전통적인 신앙길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린다면 얼마나 흘려야 되느냐? 자기의 과거를 생각할 때, 수치스런 자기를 회상할 때는 부끄러워서 회개의 눈물을, 그렇던 자기가 이런 은사의 자리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황공해서 감사의 눈물을, 내 생활 가운데 자랑할 것이 있으면 부끄러움과 황공한 눈물을, 이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까지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눈물은 그분 앞에 무엇을 해드리고 그분이 좋아하게 될 때, '야! 오늘은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너도 좋다!' 하며 그가 손을 들고 춤을 추면서 나에게 춤을 추자고 끌어낼 때, 그때에야 비로소 기쁨의 모양 이라도 갖출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냐?
3대 눈물을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맨 처음에는 무슨 눈물? 슬픈 눈물, 그 다음에는? 황공한 눈물,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게 될 때, 용서받을 수 없는 나 자신이 하늘 앞에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용서받은 자리에 있는, 이와 같은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대할 때는 황공하다는 거예요. '어쩌면 당신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느냐!' 황공한 눈물을 흘려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하나님이 중심이 돼 가지고 나를 위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
내가 기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대신 갚아줘 가지고 그가 기뻐하는 자리에 서서, 그 다음에 그가 나를 리드해서 세워 가지고 기뻐하는 그 자리에서 기뻐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날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대한 심정의 길을 개발하는 정상적인 노정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거라구요.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은 참 뻔뻔스러워요. 참 배포들이 크다구요. 원리가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배포들이 큽니다. 배포 큰 거, 좋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도 배포가 커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아이들 보면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엄마를 못살게 하고도 말이예요.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불구하고, 그 아들은 어머니 앞에서 잉잉 운다구요. 잉잉 우는데 '야 이놈의 자식아! 내 팔 봐라 내 팔, 이놈의 자식아 이걸 보고 어떻게 울어!' 어머니가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딸 때문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철모르는 아이가 울게 되면 그 부러진 병신 팔을 가지고도 또 그 아이를 위해 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어린애와 같이 철모르고 순진해야 되지만, 부모의 마음이 언제나 어린애에게 떠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과 동정의 마음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만 천국에 간다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철모르는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제일 좋아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든간에 하나님만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난 몰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어머니 외에 다른 사람을 알아요? 젖통도 크고 어머니보다 더 잘생긴 미인이 와서, 이렇게 암만 내밀고 아이에게 먹으라고 해도 싫다고 하는 거라구요. 안 그래요? 그저 못생겼더라도 어머니를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어머니밖에 모른다구요. 어머니밖에 몰라요. 하나밖에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어린애와 같아야 된다는 이 비유의 말이 타당한 말이라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해 가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 길, 오직 어머니밖에 모르는…. 사랑의 길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런 순결한 사랑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옆을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골수 사상은 이런 인연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조들의 운명길을 초월하고 역사적인 인연을 탕감해야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의 얼굴이 아무리 못났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구요. 되어진 그 얼굴로 몇십 배 더 강력한 정성을 들이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게 되면 그 사람의 길이 바뀌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나오던 것이 꺾여진다 이겁니다. 알겠어요? 새로이 믿음으로써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선조들 이상이 돼 가지고 수평선에서 떨어져 내려온 것을 딛고 올라가야 합니다. 이때까지는 사탄들이 반대하는 거예요. 그 길을 거쳐 나가게 될 때는 악한 사탄들이 모질게 들이치는 것입니다. 신앙을 꺾어 버리기 위해서….
악의 주체 되는 사탄은 역사상의 모든 선조들을 악한 길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아무런 공로도 없이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탄이 역사적인 선조들을 때려잡던 방법으로 땅땅 내리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조들이 사탄 앞에 꺾여 나가던 그런 신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고차적인 신념을 가지고 어느 과정을 거치고 나면 올라서게 된다는 거예요. 올라서 가지고 딱 넘어서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통일교인을 보면 그런 무엇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 나가게 되면, 이건 나가자마자 아무것도 없지만 사람들이 그저 밥 싸 가지고 따라 다닌다는 거예요. 사람이 줄줄 붙어 다녀요. 그 사람을 보면 국민학교밖에 안 나오고, 인품을 봐도 몇푼짜리밖에 안 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그 동네가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람이 새벽같이 일어나면 전체가 새벽같이 일어나고 말이예요. 그런다구요. 그것은 세상에서 기를 못 펴고 희생한 많은 선조들이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따라서 그 시점에 태어나 가지고 그 선을 넘을 수 있는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운세, 하늘의 낮의 운세를 맞을 수 있는 자리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피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도 잘생겼고, 그렇지만 어느 곳에 배치를 해도 지지리 고생합니다. 그것은 옛날에 선조들이 잘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탕감길에 들어서서는 거꾸로 서야 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서 올라가는 데는 시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반드시 사(邪)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보따리 싸 들고 가는 사람은 그 이상 절대 못 올라갑니다. 통일교인 중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통일교회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운명의 인연을 초월해 가지고 승리의 자리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도 공평하고 인류의 운명길도 공평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이예요. 자기 일대(一代)에서 '아이쿠 좋아라, 아이쿠 좋아라!'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작다구요. 이게 크다구. (그림을 그리시면서 말씀하심) 이렇게 보게 되면 '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각도로 보면 요거, 요거, 요렇게 돼 있어요. 이거 지나게 되면 이만큼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반대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행복은 아이쿠…' 나중이 더 높다는 겁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인연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와 같은 싸인 커브(sine curve)라는 것은 한 개인이 그렇고 한 가정이 그렇습니다. 또한 한 씨족이 그렇고 한 민족도 그렇습니다. 이 커브가 클 뿐이지 민족도 그렇다는 거예요. 세계를 보면 세계도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는 내려가는 운세라면 하나는 올라가는 운세라는 겁니다. 싸인 커브, 이것이 심판대입니다. 타락되었기 때문에 인류는 타락세계에서 육천년간 기반을 닦아 가지고 비로소 천국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정과 천정이 결합할 수 있는 통일적 사상의 도래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아무리 어떠하더라도 박자를 맞추는 사람입니다. 종교가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수천년의 운을 맞자! 수천년 고생해 왔지만 한때에 찾아오는 수천년의 운을 맞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여 이 기간에 천년 운세를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생활을 혁명하고, 가정생활을 혁명하고, 친척이나 종족생활을 혁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으로, 민족으로 태어나 군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왕으로 보내져 가지고 배반자의 길을 가고 산중 수도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는 낙오자와 같은 입장에 섰지만, 그것은 무엇이냐? 한 나라의 국운을 겨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운수에 도수를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무리들이 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끝날까지 참고견디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끝날이 언제냐? 내리막길을 가는 비운의 역사가, 이렇게 골짜기의 비참한 운세가 새로운 해방권의 역사로 벌어져 상승할 수 있는, 안팎이 교차되는 순간이 역사시대에 벌어질 것을 종교에서는 말해 왔습니다. 그때가 끝날입니다. 그러한 시대에서 새로운 운세를 타고 천년왕국을, 지상 천국을 향하여 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승리의 날을 맞게 될 때 거기에서는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무리 행복했댔자 거기에 도달할수 없습니다. 여기는 전부 다 지옥입니다. 지옥이라구요.
그러면 여러분은 개인의 운명을 존중할래요? 개인의 운명을 타개하기 위해서 살지 말고 국가의 운명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는 세계적인 사상의 시대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세계주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종착점을 향해서 가는데, 그 가는 데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 주고 갑니다. 세계적인 종말, 세계적인 사상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 사상시대에는 무엇으로 연결시켜야 하느냐? 인정(人情)이 아니라 천정(天情)을 결합할 수 있는 사상이어야 합니다. 그 사상 가운데 천정을 결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정을 통할 수 있는 사상도 있겠지만, 천정을 통할 수 있는 사상, 인정과 천정을 결합할 수 있는 통일적인 사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온다면 천정을 갖고 내려오고 인간이 올라간다면 인정을 가지고 올라가기 때문에, 인정과 천정이 한 점에 합해질 수 있는 합일점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바라는 최대의 희망의 자리, 상봉의 자리가 아니겠어요?
사람으로 말하면 참다운 남자가 참다운 여자를 만나는 자리요. 참다운 땅이 참다운 하늘을 만나는 자리요, 참다운 인정이 참다운 천정과 결합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겠느냐? 인정이자 천정이요 천정이자 인정, 인정과 천정이 합해 가지고 인정도 아니요 천정도 아닌 것이 되어 새로운 행복과 이상적인 모든 것이 화해지고 그러한 행복의 출발이 이 땅에 벌어지면 그것이 지상천국이요, 세계 만민이 희망하는 자유세계, 자유동산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천년을 그려 살고 만년을 그려 사는 사람입니다. 만년을 맞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노력해 가지고 하루 성공하기를 바랄래요? 하루 노력해 가지고 그것을 홀딱홀딱 다 까먹고, 또 하루 노력해 가지고 홀딱 다 까먹고 이런 사람 될래요? 하루 고생하고, 이틀 고생하고, 사흘 고생하고, 10년 고생하지만 그 이상되는 20년 행복이 있으면 어떻게 할래요? 그러면 '야, 20년 행복을 위해서 10년 고생을 해야지!' 한다는 거예요. 보라구요. 우리가 일생 동안 고생하면 영생토록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보장해 줍니다. 그러니 여러분 개인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통일교회 사상은 천주주의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사상은 천주주의(天宙主義)입니다. 천주주의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천주가 뭐냐? 집이예요, 집. 천주주의는 하나님의 집주의입니다. 집이 왜 좋으냐? 집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집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집은 내가 태어난 곳이요, 내가 자란 곳이요, 내가 사는 곳이요, 내가 죽는 곳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돼 있다구요.
인생의 시작에서부터 잘살든 못살든 모든 인연을 여기에서 다 풀고 다 전시를 했다가 나중에는 보따리 싸 가지고 그 집에 가는 것입니다. 날때에도 그 집에서 울며 났고, 갈 때에도 울고 가든가 웃고 가든가 그 집에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시작과 끝을 최총적으로 종결지을 수 있는 곳이 집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집이 좋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집이 어떻게 돼 있느냐? 하나님을 빼놓은 집이 됐습니다. 주인을 빼놓은 집이 됐습니다. 그러니 타락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주로 한 집이 아니라 개인을 위주한 집이 됐습니다. 김 아무개란 간판이 붙은 집이 됐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앞으로 문패를 말이예요. 다른 표식을 해야 됩니다. 성을 뭐라고 갈면 좋겠어요? 여러분 성을 갈면 좋겠어요, 안 갈면 좋겠어요? 어디 대답해 보세요. 타락한 조상으로부터 태어나 누더기 보따리를 이고 다니는게 좋아요. 집어치우는게 좋아요? 「집어치우는게 좋아요」 그리고 아무개 김씨의 딸로 태어난 게 좋아요, 나빠요? 「나쁩니다」 그럼 나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 성을 간다는 말이 있지요? 성을 갈게 되면 종자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성을 갈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무슨 성을 만들 것이냐, 그거 생각해 봤어요? 세상에 제일 좋은 글자가 무슨 자냐, 생각해 봤어요? 제일 좋은 글자가 하늘 천(天) 자라구요. 그 다음에 제일 좋은 글자가 뭐냐? 아버지 부(父) 자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좋은 글자가 무슨 자냐? 지아비 부(夫)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게 되면 재미있습니다.
제일 좋은 글자는 하늘 천(天) 자라구요. 그것이 제일 좋은 글자지요? 하늘 천(天) 자를 보면 이 글자는 두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부(父)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부(父) 자는 뭐냐 하면 여덟 명이 연결되어 있어요. 여덟 사람씩 둘이 합한 거라구요. 그렇지 않아요? 이게 사람 인(人) 자라구요. 이것은 두 사람 표시라구요. 그렇지요? 따로따로 나누면 두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지아비 부(夫) 자는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이 부(夫)자는 하늘을 뚫고 올라갔습니다. 이게 두 사람이긴 두 사람인데, 부(夫) 자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한문을 지은 사람들은 천리를 통해 다 계시받고 지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문선생이 설명을 그렇게 해서 그게 근사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구요. (웃음) 이 부(夫) 자, 이놈은 하늘보다 높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외톨이로는 있을 수 없다는 그 말입니다. 지아비를 가져야 된다 이겁니다, 그것은 뭐냐? 부부가 돼야 된다 이거예요. 부부가 될 땐 그것이 이렇게 부(夫)가 된다구요. 그래서 제일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늘은 높고 땅은 제일 넓은데, 그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지요? 아버지 부(父)자도 이것을 (八) 없애 버리면 십자(十字)가 됩니다. 십자 아니예요? 이 두 아버지는 복귀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웃음) 이것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어질 인(仁) 이니 무엇이니, 이것도 전부 두 사람을 말하지 않아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좋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외톨이가 좋아요? 눈이 여기에 딱 하나만 있으면 좋겠어요? 귀가 여기에 나 있어서 이만큼 끄트머리가 나오니까 보기에도 좋은 거예요. 눈이 움푹 들어가 둘이 까박까박하고 말이예요. 전부 다 둘이 아닙니까? 입술도 둘이고 전부 둘로 돼 있습니다. 둘이 합해야 좋다! 이렇게 돼 있다구요. 내 눈 하나 병신 돼도 좋소! 그런 사람 돼 보라구, 좋은가. 좋은 것은 혼자 좋은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별수없습니다. 하나님 혼자 '하하하' 웃는다면 그놈의 하나님 미쳤지 하더라도 별수 있어요? 그러니 사람을 안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천주주의(天宙主義)입니다. 이제 보라구요. 집 주(宙)지요? 그렇지 않아요? 이 집 주(宙) 자는 밭 전(田), 밭 전(田)자보다 높지요? 요 위에 갓머리를 덮어씌운 것을 말합니다. 평안할 안(安) 자 하게 되면 갓머리를 씌워 놓은 그 안에서 여자가 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여자는 행복하려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 말이예요.
자유(自由)라 하면 말이예요. (판서하심) 여기를 보면 이것은 우주를 말합니다. 이건(自의 目) 뭐냐? 소생, 장성, 완성. 이것은(目의 )의 뭐냐? 하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은 자유입니다. 자유는 자주적인 입장을 말합니다. 쉴 식(息) 자를 봐도 재미있다구요. 이것을 갖다 놓고 하나돼야 쉬는 것입니다. 이것(自)은 천지를 말하는 거라구요. 천지와 마음이 하나돼야 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한문이 참 재미있는 글자입니다. 무슨 영어의 알파벳보다 재미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사상은 계시적 사상입니다. 이런 건 뭐 비사로 듣고….
위대한 혁명가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자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제 천주주의를 그려 나가야 되겠습니다. 천주주의는 집 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집 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집 주의니 그 집살림살이는 하나님주의 살림살이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왕이요, 세계를 위한 살림살이를 주도해 나가는 주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살림살이를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주의 사상권내에 있는 통일교회 축복가정들은 자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남편이나 자기의 아내만을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다. 옛날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을 위주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되 혼자서는 구원 못 받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 가는 겁니다. 절대 혼자 못 갑니다. 혼자는 천국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한 이념의 터전을 이 지상에서 새로이 출발시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는 앞으로 무엇이 주인이냐? 가정입니다. 전통적 가정입니다.
타락은 가정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모셔드리지 못했으니, 가정에서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귀입니다. 비운의 역사를 거쳐 떨어져 내려왔으니 올라가야 되는데 세상과 짝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만 생각하지 않고는 올라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의 비운권내에 살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떠한 원인을 따라 빚어진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이 개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산 기준에 따라 선의 실적기반이 닦아지면 그 선은 자기의 것이 아닌 전체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 가정의 사랑이라는 것은 남자의 것도 아니요 여자의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가정의 본래의 사랑이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할 수 있는 창조이상적 그 사랑으로 모든 천지 인간의 가치를 심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기원을 중심삼고 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자기만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만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절대적인 신앙과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자만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 길을 거쳐가지 않고는 인연과 인정의 길을, 인연과 관계되어 있는 지금까지 자기의 과거사를 청산지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위대한 혁명가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일대에 있어서 세계사적인 혁명을 제시해야 할 위대한 혁명가요, 세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위대한 선봉자들인 것을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신념이 앞서야 됩니다. 그 신념을 위해서 기거동작하고, 그 신념을 통해서 일방통행하게 될 때는 그것은 반드시 끝이나는 것입니다. 그 끝에는 대해(大海)가 있는 것입니다. 지류로서, 남이 보기에는 북으로 흘러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의 구비를 돌아 흘러가게 될 때에는 남으로 흘러간 것보다 앞설 수 있는 길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그렇지요? 돌고 도는 길이요 반복되는 것 같은 길을 종교인들이 걸어왔지만, 최후에 대해를 향해서 하나의 문호를 개방하여 해방의 기수가 될 수 있는 역사적인 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길로 내몬다는 것을 알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인들이 가는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남북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될 때까지는 나그네 신세
이제 1972년도도 중반을 넘어섰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1965년도에 제 1 차 세계노정을 나서면서 여러분에게 우리의 노래로 부르라고 해 가지고 그때부터 부르기 시작했지요? 지금까지 7년 됐습니다. 1972년도를 들어서면서 남북이 현재 정치적인 협상을 하지만, 통일의 기운을 바라보며 나가는 이것은 천지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임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망하느냐 흥하느냐,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 탕감이라는 것은 저 동쪽 끝이나 서쪽 끝에 가서 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서로 씨름을 해 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땅 앞에서 공판을 해야 됩니다. 누가 참이냐 하는 것을 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참이 참으로 결정되기 위해서는 일대 씨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네가 이기느냐 내가 이기느냐 씨름을 해야 할 민족적 운명이 지금 남북으로 갈라진 한국의 운명이 아니예요?
서로 싸우게 되면 남한이 이기겠느냐. 북한이 이기겠느냐? 그것은 누구도 자신 못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가려 줄 것이냐? 북한은 북한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하고 남한은 남한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서로 엇갈린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그 소원을 이루어 줄 자는 누구냐? 문제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북한만 사랑하거나 남한만 사랑하는 사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남북한을 넘어서 북한 땅의 백성을 남한땅 백성 이상으로 사랑하고 남한 땅 백성을 북한 땅 백성 이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그러한 거국적인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칠 수 있는 활동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 활동체제가 벌어지게 될 때는 그 운동을 통해서 북한도 흡수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요, 남한도 흡수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비운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개문되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커다란 기대를 가진 어떤 개인이나 어떠한 단체나 어떠한 무리가 나타나서 그러한 국민운동을 주도해 주기를 바라실 것이 아니냐?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삼천리 반도를 중심삼고 그러한 일을 할 성싶은 단체가 없지 않느냐? 기성교회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나장로나 박장로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자기 교단의 이익을 무시하면서 국가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을 가려 나가자고 몸부림치고 그것을 지향하며 지금까지 물고 나온 것은 통일교회밖에 없지 않느냐? 여러분 그것을 알아요? 그거 아느냐 말이예요.
이제야말로 남한 땅을 전부 샅샅이 뒤지고 북한 땅으로 들어가 가지고 방방곡곡에 하늘의 깃발을 꽂기 위해 재무장해야 할 때가 아니냐?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한 땅에 나가서 전도하기가 싫어요? 이제야말로 남편이 남한 땅을 지키면 그 아내는 북한 땅에 가서 북한을 구해야 할 것이고, 아내가 남한 땅을 지키면 그 남편은 북한 땅에 가서 북한에 살고 있는 동포를 구해야 될 것이 아니예요?
남북이 엇갈려 파탄되었던 한 가정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우리 통일교인이 남북으로 갈라져 가지고 심정적 인연을 중심삼고 손에 손을 잡고 공산권과 자유세계로 분단된 이 난관을 넘어 가지고 통일의 기원을 열매 맺을 수 있는 가정적 인연의 승리적 터전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민족 해방을 바란다는 것은 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언제나 보따리를 싸 놓고 살아야 됩니다. 남북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될때까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그 터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피난 보따리를 싸 놓고 나그네 신세의 놀음을 해야 될 것입니다.
실적으로 국가나 세계가 공인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야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을 빨리 성사시킬 수 있는 길이 있게 되면 홍해로 가라 할 때 가야 됩니다. 그런 시급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인연의 운명길을 통해서 이것을 연결시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제야말로 우리가 승리할 때가 왔습니다. 알겠어요? 이제야말로 승리할 때가 왔다구요.
옛날에는 벽돌담 너머에다 전부 다 가두어 놓고 일했지만, 이제는 벽돌담을 헐고 문을 열어 놓고 이마를 맞대고 일할 때가 왔습니다. 누가 더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실력과 실적을 가지고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적 앞에는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철두철미한 사상과 구상이 있으면 그 구상은 반드시 실천해야 됩니다. 실천이 구상보다 나을 때에는 그 이념은 급진적으로 세계를 통일시킬 것입니다. 이상은 좋은데 실천에 있어서 미급한 분야가 과정에 남아서 역사시대를 거쳐 나가는 한 통일세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도하는 지도자는 강력히 내몰아서 현실 생활에 있어서 보다 이상적인 구조의 실적의 가치를 드높여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모르지만, 통일교회의 실적을 보아 가지고 국가나 혹은 세계가 공인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만들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이고 무엇이고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을 찾아오는 인연과 국운, 모든 것을 대해 여기에서 우리가 국가를 구하겠다는 새로운 신념과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세계를 구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신념의 결합운동이 통일교회를 중심삼은 주체사상이 되어, 남한 땅을 움직이고 북한 땅을 움직인다면, 나라는 망하더라도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길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다 쓰러지더라도 한 권의 책에 이렇게 싸웠다는 역사의 한 페이지만 남아 있으면, 그 한 권의 책에 남아진 역사로 인해 세계를 다시 점령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다년간 주장해 온 것은, 공산당들이 나라를 위해 애국애족하는 사상을 갖고 나온 통일교회를 보고 자기들보다 낫다고 증거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북한 땅에 들어가서 누가 더 나라를 사랑했느냐 묻게 되었을 때,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옳소! 통일교회가 그렇소' 할 수 있는 재료를 수습 할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렇지요? 피어린 역사의 길, 엇갈린 역사적인 길을 개척해 나온 그 생활이 슬펐다면 슬프고 비참하였다면 비참하였지만, 그것이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해방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하늘의 사자로서 그런 일을 했다면 이는 길이길이 역사에 남아질 것이 아니겠느냐? 그 실적이 드높이 빛나게 될 때에 이 터전을 통하여 남북한의 해방은 물론이요, 아시아의 새로운 해방의 종소리는 울려 퍼질 것이고, 세계의 해방의 기운은 여기서부터 솟구쳐 오를 것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바라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게 되면 말이예요. 여기에 있는 아줌마들, 옛날에는 뭐 본부에 드나들고 할 때는 눈물을 흘리고 야단하더니 다 어디로 갔어요? 여러분 이제는 허리띠 졸라매고 또다시 보따리 쌀 준비를 하라 구요. 우리 통일교회가 또 가정을 버리고 전도 나가게 되면, 그렇게 했다고 그 남편이 통일교회에 와서 땡깡을 부리더라도, 그런 꼴을 또 보더라도, 이제는 북한을 위해서 배치해야 할 때가 왔다 이겁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남한 땅에 배치되는 줄만 알았지요?
남북으로 엇갈린 이 땅을 다시 찾아 세우려면 동원해야
자, 여러분 그냥 그대로 있으면 좋겠어요? 흥해야 되겠어요, 망해야 되겠어요? 그냥 그대로 있는 게 좋아요? 좋지 않으면 얼마만큼 좋지 않아요? 기분 나쁠 만큼 좋지 않아요? 문제라구요. 그저 그렇소, 그래요? 기분 나쁠 만큼 좋지 않아야 됩니다. '이놈의 집이 그냥 그대로 있다니 기분 나쁘다구' 이래야 돼요.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기분 나빠야 된다구요. 지금 이래 가지고는 안 된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 그냥 있다가는 망하는 거라구요. 그래요, 안 그래요? 망하는 거예요. 아무리 큰소리쳐도 망한다구요. 안 되거든 혁명을 해야 됩니다. 안 하겠다면 들이패서라도 끌고 가야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자체내에서 정비해야 된다는 공동적인 규약을 세워 가지고 코를 꿰어서라도 끌고가야 됩니다. 그래야 되겠어요, 안 그래야 되겠어요?
이것을 보라구요. 이스라엘 민족이 내일이면 애급을 떠나야 할 텐데 자기 사촌, 삼촌, 친척들 중에 '야, 야,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 거야. 야이 녀석아, 난 애급을 위해서 사는 놈이야. 난 애급 사람 되겠다구. 언제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언제 나라를 이루고 어떻게 살아!'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예요. 일본에 살고 있는 교포들이 일본 사람으로 귀화하는 운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요즈음에 들어와서 7천 명 이상이 귀화했다는 보고를 듣고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내버려 두면 전부 망하는 거라구요. 애급 사람들의 장자를 때려죽일 때, 애급에 이스라엘 민족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이 장자뿐만 아니라 차자까지도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아요? 하나님은 애급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장자뿐만이 아니라 차자까지도 친다는 약조를 세우고서야 장자를 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는 날에는 큰 것 작은 것 할것없이 모가지다 이거예요.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버지 갑시다' 할 때, 안 가겠다고 하면 '이놈의 영감…' 하고 모가지를 끌고서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웃음) 그게 효자예요, 불효자예요? 대답해 봐요. 「효자입니다」 아버지 모가지를 끄는데 효자예요! (웃음) 그럴 때가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호랑이같이 무서운 남편이라도 죽게 될 때는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겁니다. 강아지 사타구니에 들어가 엎드려 있어야 살 수 있다면 강아지 사타구니에 들어가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살 수 있으려면 그래야 된다구요.
끝날에는 아내가 남편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되고, 남편은 아내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늙은 영감 할아버지는 손자의 말을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가 80이 넘도록 쓴맛 단맛 뭐 짓궂은 것 다 알고 있는데' 하면서, 여섯살짜리 손자 녀석이 와서 '할아버지 불났어요!' 하는데도 '이 녀석아. 내 코가 메지 않았어, 연기 냄새가 나지 않는데 무슨 말이야!' 했을 때, 만약 그 할아버지가 감기가 걸려 가지고 코가 멨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웃음)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데 가만히 앉아 가지고 그러면 되겠어요? 벌써 보고 듣고 행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허, 난 보지 않고 냄새만 맡아 가지고도 안다!' 하겠어요? 그런 수작들 그만두라는 거예요.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동원되고 늙은이들은 잠만 자고 있으면 되겠어요?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전부 나가 가지고 전체적인 훈련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가다가 쉬면 안 됩니다. 딴 패가 나와요. 여기 남한 땅에서 사랑한 무리가 북한 땅에 가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니 여러분이 북한 땅을 맡아야지요. 남한을 사랑했다고 한다면, 아벨 나라만 사랑하면 돼요? 가인 나라도 사랑해야지요. 가인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면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원리의 가르침이 아니예요? 준비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남북으로 엇갈린 이 땅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언제든지 치어 죽습니다. 이것을 밟고 올라서야 되는 거예요.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이 서로 밀어 줘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 여러분 동원하면 좋겠어요, 안 하면 좋겠어요? 「해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너만 하면 좋겠지? 다 해야 되겠어요, 몇몇 특수부대만 해야 되겠어요? 다 해야 되겠지요? 「예」 그러면 아주머니들은?
보세요, 집은 늙은 사람들이 지킵니다. 늙은 사람들이 집을 지키는 데는 왕입니다. (웃음) 도적놈이 오는 데는 누가 지키느냐? 늙은 고양이가 쥐 잘 잡고, 늙은 개가 집 잘 본다구요. 사람이 집을 지키는 데도 늙은 사람이 잘 지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예언자들은 전부 늙은이들이 었습니다.
요즈음은 때가 달라졌기 때문에 늙은이 시대는 지나가고 젊은이 시대, 산시대로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이 시대로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 시대는 늙은이들의 꽁무니를 붙들고 빙글빙글 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지극히 젊지만 할머니 궁둥이를 붙들고 따라다녀야 됩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늙기는 늙었지만 젊은이들의 궁둥이를 붙들고 따라다녀야 됩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젊은이가 가는 곳에 늙은이가 못 가고, 늙은이가 가는 곳에 젊은이가 못 간다는 말이예요? 「아닙니다」 그러면 뭐예요? 같이 가면 됩니다. 그렇지요? 같이 가면 왜 안 된다는 거예요?
할머니가 가는 데에 젊은이도 가라!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지방에 나가서 개척을 하게 될 때 젊은이들만 찾아다녀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집을 지키는 할머니들도 찾아가라는 거예요. 할머니들은 집을 지키기 때문에 사연을 잘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아, 너 왔니! 내 말좀들어 봐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아무 날은 이렇고 아무 달은 이랬다! 그랬다 이랬다'고 얘기해 주는 겁니다. 이렇게 사연을 잘 아는 사람은 그 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요? 「예」 그렇기 때문에 지방에 가서 일하고 돌아오면 그 할머니한테 가서 보고하는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이 젊은 녀석들은 '아이고 보고하려면 젊은 사람 찾아가야지, 할머니가 뭐야? 그래서는 안 됩니다. 돌아가야 된다구요. 나이 많은 할머니는 나이 많은 할머니만 만나면 되겠어요? 나이 많은 할머니는 전부 다 젊은 사람 밀어주고, 또 젊은 사람은 할머니를 밀어 주고, 이렇게 자꾸자꾸 밀어 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밀어 주면 망해요, 굴러가요? 빨리 굴러갑니까. 천천히 굴러갑니까? 빨리 굴러갑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엎드려서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웃음) 그 반대로 따라가 보라는 거예요. 따라가 보고 '아이쿠. 우리 손자와 같은 젊은이들 수고가 많은데' 하며 누룽지도 좋다는 거예요. 누룽지 알지요. 누룽지, 새까만 누룽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눈물 콧물, 때나 코딱지, 혹은 다른 것이 묻어 있어도 좋다는 거예요. 누룽지 보따리 하나 들고 땀을 흘리며 천리길을 가는 사람은 복 받기 마련입니다. 알겠어요. 할머니들?
때를 놓치지 말고 사위기대를 만들어라
이제는 기도만 하는 건 필요 없어요. 내가 기도만 하라고 그랬어요? 지금까지는 기도하고 정성을 들여 준비하는 때였어요. 준비했으니까 이제는 실천할 때라구요. 기도하는 할머니도 한 달에 세번씩은 저 먼데 다녀오라 이거예요, 먼데…. 할머니가 손자들을 사랑해 줘야 그 집안이 잘될 게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여기에 온 할머니들, 열심히 기도는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 갖다 주기 위해서 금식한 일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다구요.
그래서 이번에 선생님이 책임자들에게 지시한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산하단체의 모든 장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에 다녀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가 왔다 이겁니다. 자기 혼자만 잘살려고 할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알겠어요? 살림살이하는 아줌마들! 선생님도 옷이 구겨졌지만. 이거 왜 그래요. 선생님이 아침에 기도하느라고 옷이 구겨졌으면 양심에 가책을 안 받지만 도적질을 갔다가 그랬다 할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거예요. (웃음)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이번에 가정을 동원한 것은 3년 전부터 예고했던 것입니다. 가정 주부 들을 동원한다고 했더니 '설마 축복해 준 선생님이 원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겠나! 잘살라고 했는데 뭐 또 갈라 놔! 그럴 리가 없어!' 하겠지만, 없긴 왜 없어요? 통일교회 교인들도 그렇거늘, 기성교회 교인들도 동원 한다면 통일교회 교인들을 그냥 놔 두지 않을 것입니다. 길을 잘못 들면 망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요? 약을 잘못 먹으면 죽게 마련입니다. 독약을 먹고 죽게 되어 있는데도 안 죽어요? 여기 보라구. 내가 뭐 임자네들보다 못해서 이 놀음 하는 줄 알아요? (잠시 녹음이 되어 있지 않음)
하나는 종이요, 하나는 아들이요, 하나는 무엇이냐? 여자입니다. 종과 아들과 딸, 이 세 사람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에덴 동산에서 세 사람을 중심삼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제도 내가 수련소에서 그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반드시 근본적으로 우리의 체제를 정비해야 되겠다. 사위기대복귀니만큼 이제 지방에 돌아가면 한 교회 책임자가 사위기대를 만들어야 된다. 네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네 식구가 새로운 하늘의 가정이 되어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면 한 사람만 없어도 그 세 식구는 밥을 먹지 못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한 식구의 심정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네 식구가 하나가 되어 잘 때도 같이 자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할 터이니 형님 누님, 혹은 아버지는 주무십시오' 할 수 있는 그런 기운이 그 가정에서 싹터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행차하더라도 그런 가정에 찾아와서 쉬려고 할 것입니다. 싸우는 가정에 가서 쉬려고 하겠어요?
하나님은 웃고 노래하는 집을 찾아가고 싶은 것이다
내가 요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 기분 나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기념으로 파인애플을 몇 개 사옵니다. 조금 싸게 파인애플을 파는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약 8키로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갔더군요. 그집을 찾아갔었어요. 그 주인 아주머니는 뚱뚱하면서도 얼굴이 구수구수 하게 생겼습니다. 흰 찰떡에 시꺼먼 팥고물을 묻힌 것이, 보기에는 그렇지만 맛은 근사하고 감칠맛이 더 있듯이…. 그런 아주머니였습니다. 얼굴이 구수구수하게 생긴 것이 그저 돈냥이나 붙어 있겠다 생각해 가지고 다음에 올 때는 틀림없이 돈 좀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요.
제주도에 온 김에 기념품으로 파인애플을 사 가지고 가자고 생각하여 그 집을 찾아갔는데, 보니까 큰 밭에 파인애플 농장을 만들어 놓고 양옥집을 척 지어 놓았더군요. 판국을 보니까 아주 격식을 잘 갖춰 놓은 집이더군요. 이거 옛날에 왔던 집하고는 다른데 하고 떡 들어가 가지고 주인을 만나 파인애플을 사는 도중인데, 아, 안방에서 왱가당 댕가당, '야, 이놈의 자식아! 너 그럴 줄 몰랐다!' 하고 나팔 소리가 들려 오는데 근사하더구만. 아주 뭐 평안도 사투리가 절반은 섞인 목소리로, '이놈의 백정 간나 놈의 새끼 말이야!'(웃음) 그러면서 '너 그럴 줄 몰랐다. 네가 이런 집에 사는 것이 네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아! 나를 몰라보면 안 돼! 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구!' 아, 이렇게 그 여자가 엮어대는데 야, 그거 근사하더군요.
이 여자 틀림없이 배가 뚱뚱하고 여기가 이렇게 나왔지, 눈이 이렇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오는 것을 보니까 옛날 그 아주머니예요. 그때 나를 척 보더니 날 봤던 기억이 있으니까 '아, 옛날에 왔던 분이 아니요', '그래요? 난 모르겠는데요? 그랬어요. 안다고 하면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웃음) 배짱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 언제 한번 내가 파인애플 사러 온 적이 있었지요.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당신을 잘 알아요' 그랬어요. 내가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다구요. (웃음) 그냥 그대로 파인애플을 사려고 했으면 기분 좋았겠어요, 나빴겠어요? 기분이 이상한 것입니다.
'저, 주인 양반! 아, 어디 갔소, 오늘은 봄날이라 날도 좋은데, 양지바른 곳에 가서 콧노래 부르며 춤이나 추고 놉시다! 아무개 아버지 있소, 없소!' 해 가지고 숨막히는 노래가락으로 꾀꼬리같이 노래 한 번 불러 주면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 아주 뭐 기분파라구요. 그래서 춤이나 덩실덩실 추면 얼마나 좋겠느냐 말이예요.
싸움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어요, 노래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어요? 어느 집이예요, 싸움하는 집에? 「아닙니다」 여러분 통일교회에 와서 칭찬 받는 게 좋아요, 욕먹는 게 좋아요? 어떤 게 좋아요? 「칭찬받는 게 좋습니다」 칭찬받는 게 좋지요. 그렇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이 번번이 욕을 하면 호락호락 그 욕을 잘 먹어. 여러분은 욕먹는 게 기분 나쁘지요? 그러나 욕먹고 더 좋은 일이 생기면 욕먹는 것도 좋다는 것입니다. (웃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 하나님도 싸움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겠어요, 웃고 노래하는 집에 찾아가고 싶겠어요? 여러분 대답해 봐요. 어떤 집을 찾아가겠어요? 웃고 노래하는 집을 찾아갑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어디를 지나가게 될 때,'아이고 배고파, 배. 선생님 아이구 나 배고픈데 쌀 한 말만 주소!' 그렇게 기도하는 그 집을 찾아가겠어요? 배고프더라도 선생님이 오게 되면 밀가루 부침개라도 만들어 가지고 물 한 그릇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그 집을 찾아가겠어요? 어느 집을 찾아가겠어요? 만일 내가 하나님이라면, 혹은 여러분이 선생님이라면 어떤 집을 찾아가 겠어요? '아이고, 배 고픈데 쌀 한 말 사다 줘요!' 하는 집을 찾아가겠어요?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덜 먹고 정성들이며 기다리는 그 집을 찾아간다구요. 마찬가지라구요.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
'오늘 교회에 가게 되면 7,4 남북공동 성명도 있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오늘 아침에 선생님께서 무슨 새로운 말씀을 하실 것이다. 뭐, 이제 복닥불나게 때려몰지 모르지'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내가 점친 것이 맞았으니 기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자기와 관계가 없게 될때는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된다구요. 점을 쳐서 맞추지 못했더라도 점을 쳐서 맞춘 가치 이상의 자리를 찾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 전도 나가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어요? '아이쿠, 우리 남편 때문에 못 나가겠소, 우리 아들딸 때문에 못 나가겠소!' 그럴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죽을 때에 자기 아들딸이나 남편 때문에 안 죽을 수 있어요? 죽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아들딸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말이예요. 신앙인으로서 죽고 사는 데는 마음대로 살아야 되겠어요? 왜 나는 못 살아요?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통일교회 선생님이 무슨 여러분들 종이예요?
선생님이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 우두커니 서 가지고 '이 사람, 너 어디로 가니?' 내가 나에게 물어 보는 거예요. '어디로 가긴 어디로 가우! 어디 어디 뭐 하러 가우', '거긴 뭐 하러 가! 그래 남달리 왜 미쳐 가지고 날뛰는 거예요? 좀 편안히 쉴 일이지…' 한다는 거예요.
어제도 한 곳에 다녀왔더니 밤 한 시가 넘었더군요. 오늘도 다섯 시인줄 알고 일어났더니 새벽 세시였습니다. 어디를 가게 되면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기도를 해야 되거든요. 일어나서 보니까 한 시간을 착각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복닥불이 난 거예요. 시계가 야광시계인데 보길 잘못 본 것입니다. 틀림없이 시간이 다 됐구나 하고 벌떡 일어나서 '엄마, 시간이 다 됐는데 왜 안 일어나요?' 했더니, '지금 뭐 네 시도 안 됐는데 왜 그래요?' 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일찍 일어났다고 또 잘 수 있어요? 그래서 몇 시간 안 잤어요. 여기서 이야기를 마치면 열두 시경에 수택리에 가서 일본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되고 그리고 또, 종로교회에 가야 됩니다. 나는 종로교회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종로교회 아는 사람 있어요? 아는 사람은 대답해 봐요. 동하가 아는지 모르겠구먼.
선생님은 새벽부터 일어나 가지고 이 놀음 하고, 또 낮에는 어디에 가야 되고, 저녁에는 어디로 가야 되고, 이거 뭐 인생이 눈코 뜰 새가 없다구요. 피곤하다구요. 선생님은 지금 이러고 있는데 여기 본부에 있는 녀석들은 꿈속이라구. 그런 사람들은 다 선생님과 인연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절대 안 데리고 갑니다. 앞으로. 따라오라는데 못 따라올 때에는…. 미국도 영국도 같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 다니는 거예요, 따라와라 이겁니다. 그들이 환영할 수 있게끔 노력해 가지고 미국에서 '아, 한국에 있는 누구를 모시러 가겠습니다!' 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 이거예요. 영계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돼라 이거예요. 그래 가지고 세계 한 12개 국쯤 돌아다니면서 살고 말이예요. 그렇게 따라 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그 나라가 모두 환영하면서 '그대들은…' 그럴 수 있는 역사적인 전통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내가 지원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그 역사적인 전통을 알아 가지고 그들이 환영식을 해줄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 있어요? 어림도 없다는 거라구요.
여기를 보면, 외국 식구들이 뭐하러 여기에 와서 앉아 있겠어요? 말을 할 줄 알아요, 들을 줄을 알아요? 그런데도 여러분보다 먼저 와서 앉아 있는데, 이거 본국에 살고 있는 괘씸한 날나리꾼들은 뒷전에 다 들어왔지요. 나중에 들어와 앉아 가지고…. 내가 창피하다구요. 외국 식구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기를 잘했지, 이걸 통역을 하더라도 이 말은 빼놓고 통역해야 된다구. (웃음)
기분 나쁘지만 할 수 없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돼지 새끼도 눈에 뭐가 묻으면 어미가 핥아준다구. 이것들을 어떻게 하든지 입장을 세워주고, 어떻게든 뭐 해주고, 용서를 해주고 하면 지지리….
남북통일의 기수가 되어야
눈을 보니까 심상치 않구만. 이거 뭐 놀 때는 잘 놀았지만 망하는 거라구요. 이번에 안 나간 사람들은…. 협회장, 나갔나? 「예」 어디로?
전부 다 결의합시다. 60년도에 처음으로 개척했던 곳, 1차 2차 3차로 나가서 개척한 곳으로…. 그곳에 교회가 없거든 다시 나가서 개척해라 이거야! 이것은 천명(天命)입니다. 전체가 나서야 됩니다.
이제야말로 그 땅에 서서 '하늘이여, 이제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이 이 나라를 사랑했거들랑 나를 봐서 살려주시옵소서!' 이렇게 나라 사랑하는 심정으로 하나돼 가지고 남북을 깔고 올라서야 됩니다. 북한의 김일성 도당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가지고 남한을 자기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그 사상을 능가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통일적인 심정의 기반을 닦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잘못하여 가졌던 비운의 역사를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선생님을 믿고 선생님은 여러분을 믿고 셋이 절대적인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 삼팔선을 넘나들며 어느누구보다 이 민족을 사랑하는 봉화의 횃불을 들고 나설 때, 그 움직임이 거국적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공산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새로운 신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야 돼요.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노력하여 실적을 가지고 부딪쳐야 합니다.
지금까지 현정부가 우리를 얼마나 핍박했습니까? 정부면 정부가 우리가 고와서 지금까지 협조했습니까? 자기들이 갖지 못한 실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실적이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미래의 역사에 남아질 수 있는 실적이 되게 될 때는, 사람은 공의의 법도를 존중시하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 양심을 따라 순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누구 앞에 변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때에 들어와서는 말이예요. 북한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들, 혹은 반대한 사람들을 모두 용서해 주라고 금년부터 선생님이 말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남한 땅의 원수가 문제가 아니라 북한 땅의 원수들이….
이것을 어떻게 대비해 나갈 것이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하나되어 가지고 교파면 교파를 초월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초교파운동을 해 나왔는데 통일교회에 조금이라도 이익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에 있어서 비운의 역사가 이 나라를 휩쓸 때가 오기 때문에, 그 때를 대비해서 전교파를 규합해 가지고 하나의 장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때를 알고, 선도적인 입장에서 사명감을 느껴 가지고,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런 단체를 만들어 가지고 그에 대비하겠느냐? 선생님은 그런 걸 미리 알고 반공전선의 노선을 공고화시켜야 한다는 문제를 중심삼고 종교협의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종교협의회 형성이 다른 누구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 통일교회 문선생을 통해 가지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금후에 사라질 사나이와 같이 아무 이름도 없이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통일교회의 모 부처를 중심삼고 '누구는 이런데 난 왜…' 이놈의 자식! 권력을 잡기 위해서 여기에 들어왔나? 이놈의 자식들! 나는 그런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구요. 기관장들 가운데 앞으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의 원수야!
이제야말로 삼천만 민중이, 아내와 남편이 남북으로 갈라져 이 나라의 평화의 기수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나간다면 해방의 종소리와 더불어 삼팔선 경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 붙안고 눈물의 상봉을 하고, 그 삼팔선이 하늘 앞에 감사의 선이 되는 한 이 한국은 평화통일이 될 것이고, 하늘의 왕국으로 설정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서로 반목질시하는 비운의 심정을 품은 개개인이 되게 될때는 망합니다. 망한다구요. 망합니다. 그것을 누가 할 것이냐? 통일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8월까지의 기도 기간은 심각한 기간 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최후의 장벽을 격파하라
이제부터 재차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너는 정말 나라를 사랑했느냐! 교회를 사랑했느냐!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스승을 사랑했느냐! 하나님의 가정을 사랑했느냐!' 하는 것을 재차 우리는 비판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인연지어 준 그인연을, 이 땅위에 선 자기 가정의 인연을 통하여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거쳐 영원한 복지 천국의 터전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서 고이 맺어 준 그 인연을 산산조각으로 깨지게끔 하고, 자기 멋대로 갈래갈래 갈라진 그런 인연을 품고 오늘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은 망하는 것입니다. 망하는 거예요. 이런 비장한 때가 왔습니다.
타락의 비운의 행로를 걷어차고 복귀의 승리의 인연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만을 위주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종족을 거느리기에 미치고, 하나님의 백성을 품고 지도하기에 미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고, 하늘나라의 가정의 식구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것이 틀림없는 것을 알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거국적으로 다시 출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시겠어요? 「예」
자, 그러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최후의 장벽을 맞이한 이때에 있어서 이것을 격파하기 위해서 선두든 어떠한 일선이든 개의치 않고 나는 돌진하겠다고 결심한 사람 손들어 봐요. 내려요.
기 도
아버지! 통일교회 문 아무개라는 사람이 이 자리에 남아져 있는 것은 저에게 어떠한 계획과 어떠한 머리가 있어서 남아졌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싶은 것이 어린 자식의 마음인 것을 아버지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소원하시던 당신의 나라가 얼마나 그리웠습니까? 그렇게 그리워하시던 당신의 백성을 보기에 얼마나 시선이 둔하여졌습니까? 자녀들을 품고 그렇게 살아왔던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상처를 받았습니까?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를 제가 알았고, 저희의 본향땅이 어떻다는 것을 제가 알았기 때문에, 저희의 고국과 조국의 창건이 이래야 된다는 것을 알고 난 그날부터, 저 자신의 수난길을 생각지 않기를 각오한 그날부터 제 생애에 슬픔의 길이 엇갈리고 비운의 운명이 감돈다 하더라도 하늘을 위로하겠다는 일편의 심정을 붙안고 몸부림쳐 나오던 과거지사가 어젯날같이 생생하기만 합니다. 그날들이 하루와 같이 지난 것 같은데, 벌써 10년, 20년, 30년, 40년, 50여년의 생애로 반세기의 생애를 넘어섰습니다. 인생 행로가 오르막길이 아니라 내리막길을 가야 할 길임을 알았을 때는, 아버지여! 왠지 모르게 가중된 당신의 슬픔을 더더욱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스며드는 것을 금할 길 없사옵니다.
아버지!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대상들이 많아야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커져 나가는 통일교회의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에 그것을 책임지겠다고 신념에 불타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옵니까? 당신은 언제나 히말라야 산맥의 제일 높은 최고봉을 찾아오시는데도 불구하고 그 산맥에 연결될 수 있는, 그 하나의 영산 줄기에 잇닿은 조그마한 산 언덕도 되지 못한 저희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 하늘은 언제나 불쌍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선 아버지는 더더욱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통일교회는 무엇이 많고 뭐가 어떻다고 하는 말을 들을 적마다, 그것은 당신의 눈물의 결정이요 피의 댓가로 말미암아 보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치리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역사가 망하고 후손이 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서운 자리가 이 자리인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 앞에 나설 적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말 가운데에는 당신의 천년 한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마음에 사무쳐 있는 아무도 모르는 그 사정을 저는 알았기 때문에, 당신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의 골짜기를 헤매이던 그러한 생애의 모든 날들에 있어서 당신이 어떻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준 것도 당신의 은덕인 것을 저희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과거를 생각하게 될때는 타락의 선조를 가진 슬픈 후예가 된 것을 저희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에, 부름받은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당신을 모르는 민족이 많고,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당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참한 무리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민족, 갈라져 있는 민족, 자주성이 강하여 통합할 줄 모르는 이 민족을 보게 되옵니다. 당신의 어떠한 인연도 찾을 수 없는 이 민족, 한 피를 받고 태어난 이 민족과 이 땅을 아버지께서는 기억하시옵소서.
이 민족 가운데서 오늘날 이와 같은 무리를 새로운 기수로 세워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게 한 것도 당신의 은사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황공한 눈물을 금할 길 없는 생애의 길을 남기고 있는 것이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문 아무개의 노정인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생애에 제 눈에서 기쁨의 눈물과 더불어 당신 앞에 충의 도리를 다하고 효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자신을 가질 수 있는 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당신이 그리워하던 완전한 그 승리의 표적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스러운 복귀의 길 가운데서 그 놀음을 거쳐 개척자의 행각의 노정이 오늘날까지 계속해야 된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아버지 앞에 나타나기에 부끄러운 것을 느낄 때가 많은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입이 있어도 입을 열 수 없고, 마음 다하고 싶어도 당신 앞에 부끄러움을 자처하면서 주저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당신을 위하는 길인 것을 아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의 친구가 되고, 당신은 그런 자의 지도자가 되고, 당신은 그런 자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찾아온다는 그 사실이 더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황공한 일인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지! 통일의 무리들이 본연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아들은 그 아버지의 모양을 닮아야 되겠고, 아버지의 가정에서 자란 아들딸은 그 아버지의 교육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가정을 통일가가 理루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정과 그런 자식 들의 인연을 상속받고 남을 수 있는, 권위 있는 아들딸들을 아버지께서 지극히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지금까지 통일교회는 숱한 고역의 노정을 거쳐왔고, 슬픈 투쟁의 역로에서 시달려 왔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은 알면 알수록 피곤해도 피곤타 할 수 없고 지쳐도 쓰러질 수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피곤한 심신을 무시하면서, 적진을 향하여 가일보 전진하고, 가일보 준비하고, 가일보 투쟁해서 실적을 남기기 위해 다짐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통일의 무리의 운명길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아버지! 금후의 한국을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3차노정과 더불어 세계의 정세는 이렇게 급변될 것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당신은 배후에서 염려에 염려를 가하시사 저희들의 갈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저희들은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맡기고 어려운 것을 스스로 자기의 생애의 직업과 같이, 자기 부모의 일과 같이 느끼면서 탕감복귀의 행각을 순조롭게 다 짊어지고 달려갈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참석하였던 아들딸들, 이제 당신 앞에 손을 들어 맹세 하였사옵니다. 아버지여 ! 저희들이 당신의 나라를 언제 사랑해 봤습니까? 통일된 삼천리 반도를 언제 사랑해 보았습니까? 아버지, 저는 이북 땅에서 눈물지을 때도 있었고 남한 땅에서 눈물지을 때도 있었지만, 이북 땅에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고 당신의 심정을 가다듬고 호소해 보지 못한 남한 땅에 살고 있는 우리 통일교회 무리들에게는 북한 땅을 중심삼고 슬펐던 역사를 해원성사하고 탕감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망각 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보고 싶고 그렇게 그리던 함흥 땅이 어떠하며, 그렇게 생각하던 정주 땅이 어떻더냐?'고 하루바삐 달려가서 승리의 깃발을 꽂고,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당신 앞에 이곳이 거룩하다 할 수 있는, 해방의 은사를 감사할 수 있는 무리들로서 나타나겠다고 생애를 걸고 밤을 지새워 수난길을 극복하면서 승리를 다짐할 수 있는 영광된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7월, 8월, 9월, 이 3개월을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옵고, 금년을 지켜 주시옵소서. 1974년까지 제 2 차 7년노정이 끝나는 이 3년노정에 있어서 이제 통일교회가 민족을 대해서 사명해야 할 중차대한 시점으로 접어든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자기를 믿고 아버지를 믿고 스스로 담판지어 나갈 줄 아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길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남아진 그날들과 오늘 저희들의 모든 생활을 당신 앞에 맡기고 기여하오니, 그 마음이 일편단심 그날과 더불어 전진하게 허락하여 주옵길 부탁하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