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선집 42권 6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훈독본) 8370
1971.03.07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말 씀
오늘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래세계를 개척하는 자
소망이 없는 사람은 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강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강하게 하루의 생활을 잘 넘길 수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환난에 부딪힌다든가 고독한 자리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당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사람이 지극히 불쌍한 사람이요 지극히 동정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을 동정하던 사람들과 그를 평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불쌍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자리에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극복한 여력을 갖고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갖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이런 사람은 미래를 계승할 수 있고 앞으로 다가오는 수난의 길을 극복할 수 있으며, 또 그 수난에 대처하여 싸워 전진할 수 있는 동기라도 가질 수 있으되, 비판하고 동정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뭇사람들이 보기에 불쌍한 자리에 있고 삼천만 민족이 모두 동정하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또 수난과 어지러운 환경 가운데 극복할 수 없는 최고의 어려운 자리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그런 무대에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진일보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개척이 되고 새로이 방향을 갖추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렇기 때문에 대개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보다도 미래를 염려하고, 미래보다도 영원을 염려합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본다면 현재의 입장보다도 내일에 올 수 있는 이 나라의 비운을 염려합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금후에 되어질 세계적인 시대를 염려하고, 나아가 하늘땅까지 염려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천주주의면 천주주의의 미래를 염려하고 나아가 하나님까지, 더 멀고 더 크고 더 영원한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염려하는 기준이 영원한 기준이면 영원한 기준일수록 현실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야 하고, 극복한 거기에서 영원한 보장이 결정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환경과 보조를 맞추면서 뭇사람이 따라가고 뭇사람이 좋아하는 데 같이 어울려 살고, 그들의 환경의 인연을 따라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것을 위해서는 현재의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해 나가겠다는 마음을 갖고, 그런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세계의 승리자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왔다 간 성현군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그마치 세계를 위해 현재의 수난길을 극복하려고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에 어려운 환경이 있다 할 때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기준에서 싸우는 인격적인 내용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는 성인 현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 같은 양반을 보게 되면, 그때 이스라엘 국민이 배반하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반대하고, 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그를 반대하는 자리에서도, 그런 시련과 환난 앞에서도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대결한 것이 아니라 웃음과 소망으로 대하고, 오히려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세계가 그를 알아주었느냐? 전혀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또, 그와 더불어 관계도 맺지 않았습니다. 현실적 환경에서는 누구도 그와 관계를 맺지 않은 지극히 고독한 자리요, 지극히 외로운 자리요, 지극히 한스럽고 원망스러운 자리에 있었지만, 미래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면 그 나라의 한이 될까봐, 그가 슬픔을 품고 가면 후대에 한이 될까봐 죽음의 그 자리를 슬픔으로 넘지 않고 기쁨으로 싸워 넘었습니다. 자기가 그 나라에 하나의 희생의 씨로서 뿌려지고 싶은 고귀한 마음을 갖고 죽음길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발전해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나라와 그 세계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고, 고독이 아니라 소망이 뿌려졌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새로운 미래의 희망의 터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예수가 로마제국을 제압하고 이스라엘 교단을 넘어 세계를 제패할 줄이야….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내용을 가지고 하늘의 대신자로 사라져 갔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그의 마음속에 철석같이 굳어 있는 소망의 결합체는 새로운 나라 창건의 동기가 되고 새로운 세계 창건의 동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온 천지의 운세가 공인하지 않을 수 없고,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 있으면 그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철두철미하고 확고부동한 내적인 실체로서 심어졌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인연맺고 찾아오는 천운-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하나님-은 그 터전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로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적인 결실을 통하여 외적인 환경을 소화하고 극복하는 자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에게 시대를 책임지게 하시느냐?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는 사조와 보조를 맞추어 흘러가는 군상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을 가로막고 새로운 세계로 끌고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을 보장할 수 있고 내일보다 후세를 보장할 수 있는, 보다 미래적이요, 보다 가치적이요, 보다 고차적이요, 보다 세계적이요, 보다 천주적인 내용일수록 그것은 현실세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그것을 현실무대의 외적인 환경에 대비하고 내적인 결실을 통하여서 외적인 환경을 소화시키고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미래의 세계는 보장되는 것이요, 미래의 세계의 이념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미루어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미래세계는 현실을 극복하는 자로 말미암아 계승가 되어야
미래는 현실에 도취하는 무리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미래의 소망을 갈구하는 무리들로 말미암아 계승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세파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면 타락한 권내에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임을 자인한다면 그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있어서는 현실을 부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인격을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 됩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는 누구를 좋아할 것이냐? 자기 일신을 위해 수난길을 극복하겠다는 사람보다도 천년 만년 인류가 소망하고 내가 소망했던 것이 내가 죽더라도 남아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수난을 극복해 가겠다는 사람을 절대자는 좋아하십니다. 누구를 제일인자로 선택할 것이냐 하면 영원을 위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고하는 사람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행동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 주는 그 사실은,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원수와 원수 사이의 간막이가 터져 나갔고, 이것은 고립된 역사시대에서 서로 서로 자기를 중심삼고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빈다는 사실을 원수가 알게 될 때는 저절로 원수가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앞으로 먼 길을 가는 도상에 있어서 수많은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응당 원수를 갚아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다 하는 말을 원수가 듣고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아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 같지만, 지극히 지혜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새 출발의 동기를 마련해 놓은 지혜로운 사람
민족 가운데 어느누구 하나 동정하지 않는 외로운 자리에서 자기 생명을 이어간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가 다가온 그 시간은 일생을 결판짓는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이 출발하는 시간이요, 새로운 소망의 씨를 뿌리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소망의 세계의 끝이 아니라 소망의 세계의 출발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은 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산 사람들이 아니고, 그 시대에 쫓기고 비운의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그 시대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 살다 간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역행하는 이치를 따라서 그 시대에 역설적인 법도를 따른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환영을 못 받고 배척을 받아 가면서 비운아로서의 생애를 마치고 갔지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출발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 놓고 간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바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선한 백성이 지지할 수 있는 생애를 위해 죽음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를 창건하고, 그가 남긴 사상과 그가 생활환경에 남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전통은 계승될 것이요, 새로운 세계는 창건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은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오늘을 위하여 사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가는 과정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초민족적인 사상을 실천해야
어려움을 피해 가려 하는 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려움이란 누구의 어려움이냐? 그것이 나 자체의 어려움이라 할 때는 내가 그 어려움으로부터 도망을 간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넘어 국가적인 어려움을 붙안고 나가게 될 때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현재에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있고 수난이 있더라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괴로움을 극복하고 이것을 제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면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미래는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알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 만민이 추구할 수 있는 사상을 우리나라의 사상으로 삼아 가지고 다가올 세계적인 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책임을 세계를 대신해서 지고도 남을 수 있다 할진대는, 앞으로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 주장하기를 '국경을 초월하자. 초민족적인 신념을 오늘날 생활무대에 집중시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피로 맺힌 원수입니다. 그 원한은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원수 관계를 극복하여 사랑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영원한 미래를 보고 사는 사람일수록 지혜로운 사람
현재에 있어서 환영을 못 받는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청산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민주세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고 공산세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고 있습니다. 승공이라는 레테르를 들고 나왔기 때문에 공산당까지도 우리를 원수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외로운 패들이 아닙니다. 외로운 무리가 아니예요. 또한 무용한 패도 아닙니다. 말은 없지만 무엇인가 하고 있는 패입니다. 아직 싹도 나오지는 않았지만 싹을 틔우기 위해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지각을 터뜨리고 나오게 될 때에는 그 원천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내용이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세계적인 것이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뜻이 영원한 미래의 뜻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실권내에서 우리가 촉감을 가지고 그것을 감지할 수 있고, 우리의 시야를 넓혀 응시할 수 있는 시대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의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자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절박한 사명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흔적 자체도 남김없이 망할 수 있는 환경에 발을 디뎌 끌려가는 통일교회 패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환경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의 때가 가까와 오는 것입니다. 들려오는 소문이 점점 절박할수록 우리의 끝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때가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장벽을 헤치고 나가는 날에는 세계는 우리로 말미암아 새로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가까운 미래가 아닙니다.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고, 큰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일수록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사람이면 큰 사람일수록 그의 계획이라든가 그의 소망은 1년, 2년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만년이 지나가더라도 그 계획권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요, 성인입니다.
신념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하라
뜻을 위하여 나왔으면 불평없이 계속 뜻을 위해 나가야 됩니다. 뜻은 영원한 뜻이지 몇십년 나가다가 그만둘 뜻이야!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해 출발을 했으면 그 목적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됩니다. 가다 말고 자빠져 가지고 아이고 힘들다고 해봐야 누구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죽더라도 정의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망하는 데도 정의를 위해 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해도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평을 가지고 죽으면 그 누구도 절대로 동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동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낙엽을 붙들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평이라는 것은 신앙길에 있어서 장애물입니다.
소망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언제나 건설적이요, 언제나 새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시시하게 지나간 날들을 가지고 어떻고 저떻다고 하는 것보다 내일의 소망을 중심삼고 뜻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가야 된다고 해야 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뜻 앞에 플러스가 될 것인지 마이너스가 될 것인지를 생각해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복 현실의 안일을 추구하는 길이 소망의 길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의 후손과 미래의 나라와 미래의 인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의 자기를 중심삼은 가정과 아들딸과 어머니 아버지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전체와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전체를 위로하지 못하고 미래를 부정하고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절대시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현실에서 결판난다
현재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현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에게는 앞으로의 세계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선생님 자신이 생애를 바쳐 가지고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청춘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것은 오늘날 통일교회 여러분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아직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쉬지만 나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지하고 있어도 나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떨어질는지 모르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떨어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려운 때가 오면 올수록 여러분과 선생님과의 거리는 배가될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입하여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다 미래를 위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현실에서 가치와 보람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수 있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강하게 사는 사람이요, 공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자기 일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觀)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의 반열에 참석할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들이 뜻을 품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입장에 서느냐 안 서느냐에 따라, 미래와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가 현실 생활 무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이 현실이야말로 미래의 심판대요 과거의 심판대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주기 바랍니다.
기 도
말씀선집 42권 6편, 원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1971.03.07 (일), 한국 전본부교회 말씀선집 42권 6편
[기 도]
아버님, 오늘은 3월 7일, 이달 들어 처음 맞는 안식일 입니다.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을 오늘 통일교단과 더불어, 이 민족과 더불어 성취하시옵소서. 당신이 바라시는 창조이상을 온 인류가 하나되어 성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역을 맡은 책임자들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고, 맡겨진 책임이 크면 클수록 그 책임을 하여야 할 중심적인 존재들이 거기에 대응하여 극복의 노정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계속되는 수난의 길을 피해 가고자 하는 것이 현재 인간의 본성인 것을 아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타락하지 아니한 본연의 자리,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본연의 자리에서 가져야 할 성품이기에, 오늘날 타락한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부여할 수 없는 아버지의 딱하고 외로운 심정을 더듬어 살필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맡겨지는 사명이 크면 클수륵 현재의 입장에서 공고한 터전을 닦아, 주위에서 어떠한 시련의 노정이 몰려 오더라도 이것을 극복하여 소화시키고 흡수시키고 제거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의 모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아버님,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은 아버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역사과정을 거쳐 나오시면서 저희가 당하고 있는 수난과 환난보다도 더 어려운 수난의 고빗길을 참아 나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으로부터 교훈을 받으면서 당신께서 지시하시는 명령에 따라 당신의 목적을 승리적으로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살아가는 저희들이 환경에 치우칠 적마다, 저희를 주관하시고 관리해 주시는 아버지의 후대하신 사랑을 바라면서 따라 나가고 있사오니, 아버지, 이러한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아침 삼천리 반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외로운 딸들과 아들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한 곳을 향하여 조아리며 아버지 앞에 부복한 그 자리를 거룩히 보시옵소서. 그 누구도 모르는 당신의 내적 심정의 고통을 느끼면서 아버지 앞에 사연을 통고하는 무리들을 거룩한 무리로 간주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소원이 곧 당신의 소원이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뜻 또한 당신의 뜻이기 때문에 당신께서 같이해 주시지 않으면 그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부디 그들이 머무는 곳곳마다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애정이 솟구치는 심정을 가지고 민족을 염려하고 세계를 염려한다는 일은 자신과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나 먼 뜻이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자리에서 진정한 의미의 눈물을 짓고 아버지를 향하여 호소 하는 자녀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 시대와 더불어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요, 이 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를 창건하고, 이 땅에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복의 기원을 남겨 놓고 갈 것임을 아옵니다. 과거, 역사상에 왔다간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한 길을 가고자 하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현재 이와 같이 선두에 서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행로와 일치될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사오니, 이것만이라도 당신이 자비로이 보시어서 이 자리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님, 그와 같은 뜻을 당신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이 오늘날 이만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요, 당신이 임재하셨기 때문에 수많은 시련 가운데에서도 남아져 이만한 터전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 당신이 후대하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며, 금후에 가는 길도 더더욱 같이하시어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다가올 시련무대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커지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저희들이 투입해야 할 힘의 비중도 커져야 할 것임을 아오니, 아버지여, 저희들이 가는 길에 당신의 크고 넓으신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께서 앞놓아 나가시며 긍휼의 마음으로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아버님, 이 자리에 모인 소수의 자녀들, 이들이 진정한 당신의 아들이요 딸들이옵니까. 스스로 반문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자리에 선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싶으냐고 묻게 될 때, 저는 이러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아들 딸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흐르는 물결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흘러가는 물결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그것을 헤치고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반석의 터전이 되어서 모진 흐름 가운데서도 자기의 모습을 완연히 드러낼 수 있고, 정체가 확실한 당신의 자녀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나는 이러한 결과를 맺기 위하여 이렇게 생애를 바쳐 싸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의 승리의 결과를 다짐할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어야되겠습니다.
아버님, 저희 마음 마음에 친히 찾아오시옵소서. 부족한 저희 자신들을 바라볼 때 당신께서는 천번 만번 저희들과 격리되고 싶고 저희들에게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사오나, 이 땅 위에는 저희들만한 무리도 없는 것을 아시는 아버지시여, 부족한 저희들을 격려하시어서 저희들이 안 가려 하거든 채찍질을 해서라도 갈 수 있게 하시고, 행하지 않거든 아버지께서 끌어서라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지 않고는 저희들이 달성해야 할 소기의 목적과 가야 할 길을 다 주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일심단결하여 아버지가 남기신 뜻을 위하여 정도(正道)의 표준을 바라보면서 매일매일 개척자의 사명을 더디 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부복하였사오니 당신이 찾아오시어서 저희 생애에 잊을 수 없는 당신의 간절한 심정이 저희들의 마음에 어리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이 저희들이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어 눈물로 그 간절함을 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잃어버린 선의 자녀를 찾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애절한 마음을 가진 자신들이 될 수 있게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없어서는 안될 것을 확실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번 만번 죽더라도 이것만은 붙들고, 이것만은 갖고, 이것만은 남기고 죽지 않으면 안 될 자신인 것을 확실히 깨달을 줄 아는 저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저 관념적으로 아버지를 생각하고, 관념적으로 아버지를 믿는 모습이 아니라, 실질 생활권내에 있어서 아버지와 더불어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 의논하고 사연을 토로할 수 있는 간곡하고도 간절한 생활의 일면을 갖추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누가 무어라고 하더라도 꾸준히 찾아갈 줄 아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봄이 오면 봄을 맞이하고, 여름이 오면 여름을 맞이하고, 가을이 오면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이 오면 겨울을 맞이하고도 남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재차 새로운 탕감의 노정을 맞을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은 확실히 알고 있사옵니다.
개인 탕감노정이 지나고 나면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적 무대까지 탕감노정을 가야 할 복귀의 운명길에 서 있는 저희들은 슬픈 마음으로 갈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탕감노정을 슬픔으로 갔기에 아버지의 한을 가했던 사실을 알고 있는 저희들은 기쁜 마음으로 가야 되겠사옵니다. 기쁜 마음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리움에 사무쳐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서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사연을 열지 않을 수 없는 스스로의 간곡한 사무침이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대하는 데 있어서 머뭇머뭇하는 마음, 꺼리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자기를 중심삼고 이러한 관념에 처해 있는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에 사무쳐 부족한 자기 일신의 모습을 잊어 버리고 당신께로 달려갈 수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며 주시옵길,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이 자리에 찾아오시어 저희들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당신의 높으신 인연권내에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대적인 사명을 책임진 당신의 딸들을 다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운 그 자리가 감사한 자리이고 복된 자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뜻 가운데 허락하신 자비의 은사를 스스로 찬양하고 맡겨진 한날 한날을 뜻의 길이 되게 하시어서, 복된 날들로 남겨 가지고 아버지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조건과, 칭찬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갖추는 거룩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금후에 다가오는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남아질 수 있는 통일의 교단이 되고, 이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인연을 따라 간절한 심정이 있게 될 때는 그 심정으로 말미암아 악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절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현재 아시아의 정세를 굽어살피시옵소서. 저희 앞에 악의 세력이 준동(蠢動)하며 저희의 갈 길을 막으면 막을수록 저희들의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고, 일심동체가 되어 아버지 앞에 생축의 제물로 묶어 바쳐 지기를 결심하고, 이 시대에 있어서 맡겨진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허락 하여 주시옵길 재삼 부탁드리옵니다. 만만세에 당신의 은사와 당신의 긍휼과 당신의 사랑이 저희 모든 전체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길 바라오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잠깐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행, 불행과 환경
소망이 없는 사람은 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없습니다. 반면 강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강하게 하루의 생활을 잘 넘길 수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람 중에는 평범한 자리에서 소망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운 자리에서 소망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자리에서 갖는 소망과 어려운 자리에서 갖는 소망은 그 차이가 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평범한 자리에서 소망을 갖고 나가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자극과 평범한 결의로서 소망을 향해 나갈 수 있지만, 어려운 자리를 중심삼고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 사람은 그 어려움에 비례되는 극복의 요소를 투입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처하고 있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넘을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만 어려운 그 자리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에 부딪힌다든가 고독한 자리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당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사람이 지극히 불쌍한 사람이요 지극히 동정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을 동정하던 사람들과 그를 평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불쌍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평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현재 동정받아야 할 수난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자리를 바꿔 서게 될 때는 대다수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자리에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극복한 여력을 갖고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갖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이런 사람은 미래를 계승할 수 있고 앞으로 다가오는 수난의 길을 극복할 수 있으며, 또 그 수난에 대처하여 싸워 전진할 수 있는 동기라도 가질 수 있으되, 비판하고 동정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현재 편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요, 현재 어렵고 외로운 자리라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때든지 한 나라에 있어서 충신은 그 나라의 비상시에 나타나고, 한 가정에 있어서 효자는 그 가정이 파탄되려 하는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환경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극한상황에서 참은 증거되고, 참의 모습이 공고한 실체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혹은 우리의 모든 생활 환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충신과 효자의 위상(位相)
한 나라에 비운이 찾아들게 될 때, 그것은 군왕이 당하여야 할 운명이지만, 그것을 군왕이 당하여야 할 운명으로 남기지 않고 자기가 당해야 할 운명으로 알고, 생명을 바쳐 그 국가의 비운을 막기 위하여 죽음길을 자처하고 나서 가지고 국가를 살리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만고의 역사가 찬양할 수 있는 충신의 반열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 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모를 모시고 효도하는 그런 생활 환경에서 부모 앞에 효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뭇사람이 전부 다 부모를 배척하고 자기 스스로 가야 할 길을 피할 때,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할 그런 길에 있어서 부모를 위하려는 입장에 선다면, 그야말로 환경을 초월한 자리에서 효성의 도리를 했기 때문에 효자로 세워 놓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행복이 어디 있으며 불행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아는 것처럼 현재의 입장에서 잘살고 뭇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자리에 선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냐? 아무리 그러한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내일을 계승할 수 있는 소망과 더불어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은 두말할것없이 불행한 날이 찾아올 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뭇사람들이 보기에 불쌍한 자리에 있고 삼천만 민족이 모두 동정하는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또 수난과 어지러운 환경 가운데 극복할 수 없는 최고의 어려운 자리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는 그런 무대에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진일보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는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개척이 되고 새로이 방향을 갖추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에서도 소망을 갖고 진일보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운명은 새로이 개척되고 그 나라의 비참상이 해결되어 새로운 시대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렇기 때문에 대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시대와 더불어 그 환경과 더불어 좋은 면만 짝해 가는 사람 가운데는 지혜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보다도 미래를 염려하고, 미래보다도 영원을 염려합니다.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본다면 현재의 입장보다도 내일에 올 수 있는 이 나라의 비운을 염려합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금후에 되어질 세계적인 시대를 염려하고, 나아가 하늘땅까지 염려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천주주의면 천주주의의 미래를 염려하고 나아가 하나님까지, 더 멀고 더 크고 더 영원한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염려하는 기준이 영원한 기준이면 영원한 기준일수록 현실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야 하고, 극복한 거기에서 영원한 보장이 결정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환경과 보조를 맞추면서 뭇사람이 따라가고 뭇사람이 좋아하는 데 같이 어울려 살고, 그들의 환경의 인연을 따라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것을 위해서는 현재의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해 나가겠다는 마음을 갖고, 그런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개인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맞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종족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민족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국가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하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 어려움이 전세계적인 어려움으로 남을지라도 내가 이끌고 가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 때, 그 사람은 반드시 역사시대의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역사는 반드시 그런 사람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와 더불어 그 어려움을 극복해 가지고 내일의 희망의 동산을 창건하고 말겠다는 결의와 사상을 갖고 싸워 나왔다 할진대는 그는 인류 역사상 만민이 추앙할 수 있는 성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사람 중의 지혜로운 사람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왔다 간 성현군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그마치 세계를 위해 현재의 수난길을 극복하려고 싸우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에 어려운 환경이 있다 할 때 자기의 생명을 투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기준에서 싸우는 인격적인 내용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는 성인 현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예수 같은 양반을 보게 되면, 그때 이스라엘 국민이 배반하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반대하고, 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그를 반대하는 자리에서도, 그런 시련과 환난 앞에서도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대결한 것이 아니라 웃음과 소망으로 대하고, 오히려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리석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목적이 없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요, 머리가 돈 사람밖에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가슴에 창을 들이대고 죽으라고 못을 친 용서할 수 없는 원수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후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복을 빌어 줄 수 있었다는 사신을 두고 볼 때, 그는 무엇을 붙들고 원수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느냐? 망할 수 있는 그 시대를 붙들고 복을 빈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 민족은 거기서 망국의 운세에 접어들어 세계의 유랑민족이 된 것을 우리가 역사적인 실증으로 아는 바이지만, 예수님은 그렇듯 망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니요, 망할 수 있는 로마제국을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니요, 망해 가는 유대교단을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망해서는 안 될 미래의 나라와 미래의 세계를 붙들고 원수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기도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와 그 세계가 그를 알아주었느냐? 전혀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또, 그와 더불어 관계도 맺지 않았습니다. 현실적 환경에서는 누구도 그와 관계를 맺지 않은 지극히 고독한 자리요, 지극히 외로운 자리요, 지극히 한스럽고 원망스러운 자리에 있었지만, 미래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면 그 나라의 한이 될까봐, 그가 슬픔을 품고 가면 후대에 한이 될까봐 죽음의 그 자리를 슬픔으로 넘지 않고 기쁨으로 싸워 넘었습니다. 그 나라와 세계를 생각하는 마음의 터전에서 죽더라도 기쁨으로 그 나라와 가고 싶고, 기쁨으로 그 나라와 인연을 맺어 가지고 자기가 그 나라에 하나의 희생의 씨로서 뿌려지고 싶은 고귀한 마음을 갖고 죽음길을 맞이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발전해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그 시대에 있어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요 지극히 무지하고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고독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 고독한 입장에서 희망의 마음을 가졌고,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생명보다 가치 있는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나라와 그 세계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고, 고독이 아니라 소망이 뿌려졌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새로운 미래의 희망의 터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횡적인 세계의 발전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 시대에 편안함을 누리고 당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 같은 일개인을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취급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예수가 로마제국을 제압하고 이스라엘 교단을 넘어 세계를 제패할 줄이야…. 그건 그 누구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권위를 자랑하고, 그 시대에 생사문제를 좌우할 수 있는 특권계급에 있는 모든 권위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 문화를 창건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물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내용을 가지고 하늘의 대신자로 사라져 갔지만, 그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그의 마음속에 철석같이 굳어 있는 소망의 결합체는 새로운 나라 창건의 동기가 되고 새로운 세계 창건의 동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온 천지의 운세가 공인하지 않을 수 없고,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 있으면 그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철두철미하고 확고부동한 내적인 실체로서 심어졌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인연맺고 찾아오는 천운-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하나님-은 그 터전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로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나타나는 때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에게 시대를 책임지게 하시느냐?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희희낙락하면서 하루의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시대를 맡기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학급을 중심삼고 볼 때, 스승이 그 학급에서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놀기나 좋아하고 환경에 보조를 맞추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는 학생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극복하면서 내일의 목적을 위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노력하는 학생에게 스승은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는 사조와 보조를 맞추어 흘러가는 군상이 아니라, 세계의 흐름을 가로막고 새로운 세계로 끌고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사람은 어느 시기에 나타날 것이냐? 오늘날 현실에는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현실에서 세계를 차지할 수 있으되, 세계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현실의 환경 가운데서 비운만을 맞습니다. 지혜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지혜로운 내용을 갖고 지혜로운 자신을 갖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을 보장할 수 있고 내일보다 후세를 보장할 수 있는, 보다 미래적이요, 보다 가치적이요, 보다 고차적이요, 보다 세계적이요, 보다 천주적인 내용일수록 그것은 현실세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그것을 현실무대의 외적인 환경에 대비하고 내적인 결실을 통하여서 외적인 환경을 소화시키고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미래의 세계는 보장되는 것이요, 미래의 세계의 이념은 남아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미루어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좋은 것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면 현재의 자기 위치에서 좋은 것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희망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상이라든가 이상이 있다면 그러한 것들을 상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 적인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는 어떤 표준을 중심하고 나가느냐? 현실과 더불어 야합하고, 현실과 더불어 타협하고, 현실과 더불어 상응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 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종교는 오늘을 극복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있어서 희생하라고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것은 현실 생활권내에서 그 누구도 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긍정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무시해 버리고 그것을 극복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역리적인 수단과 방법이요, 역리적인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을 왜 따라가야 되느냐? 미래는 현실로 말미암아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하는 터전으로 말미암아 계승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는 현실에 도취하는 무리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미래의 소망을 갈구하는 무리들로 말미암아 계승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현실을 극복하려 하는 자리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비참한 자리입니다. 그런 비참한 자리에서 보다 더 가치적인 내용을 추구하는 인연을 통해서만 미래는 계승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하루의 생활을 위해서 사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오늘 먹고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여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동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로써 만족하고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을 보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 고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 환경의 물결에 휩쓸려 흘러가는 생활을 요구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물줄기의 원천을 찾아 거기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본연의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세파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면 타락한 권내에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임을 자인한다면 그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있어서는 현실을 부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인격을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 됩니다. 여기서 극복한다는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요, 아시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영원을 보장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면서 어려움을 기쁘게 극복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 소원의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는 누구를 좋아할 것이냐? 자기 일신을 위해 수난길을 극복하겠다는 사람보다도 천년 만년 인류가 소망하고 내가 소망했던 것이 내가 죽더라도 남아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수난을 극복해 가겠다는 사람을 절대자는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제일인자로 선택할 것이냐 하면 영원을 위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고하는 사람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절대자는 반드시 그러한 무리들과 더불어 생활하고 그들과 더불어 모든 인연을 맺고자 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종교인들은 영원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요, 오늘날 우리 인간들도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수 있는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의 인연을 오늘날 현실적 생활환경에서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같이 보이고 지극히 허황된 일 같아 보일 것입니다. 만일 신(神)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그것이 허황된 일로 끝날지 모르지만 신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행동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 주는 그 사실은, 지금까지 역사노정에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시대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원수와 원수 사이의 간막이가 터져 나갔고, 이것은 고립된 역사시대에서 서로 서로 자기를 중심삼고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일수록 그가 가는 길이 복잡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한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뜻을 품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는 작은 원수, 큰 원수, 여러 종류의 원수들이 많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방법을 몰라 가지고는 그 크나큰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하는 환경에 있어서는 원수가 많기 때문에 그 모든 원수를 원수로 갚으려는 사상을 가지고는 미래에 찾아올 그 세계 앞에 참된 길을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빈다는 사실을 원수가 알게 될 때는 저절로 원수가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앞으로 먼 길을 가는 도상에 있어서 수많은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응당 원수를 갚아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다 하는 말을 원수가 듣고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아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 같지만, 지극히 지혜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새 출발의 동기를 마련해 놓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의 행복된 여건을 중심삼고 거기에 도취해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역사를 중심삼고 그 역사 가운데 무엇을 남겼다면, 후대 사람들은 무엇을 계승하고 싶어하겠느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그 시대에 도취되어 살다가 간 그 사람의 마음이나 그 업적을 계승하려는 후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의 것을 계승하려고 하느냐 하면, 그 나라와 그 사회에 있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 되는 것과 어려운 것을 중심삼고 자기 일생을 희생해 가면서 미래의 소망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남겨 놓은 업적이 오늘 현실의 입장을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일의 입장까지 보장할 수 있는 것을 계승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크면 클수록 그러한 내용을 가진 사람을 현재의 우리들은 역사적인 인물로 추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역사과정에서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의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발전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 있으면 오늘날 우리들은 그를 추모하는 것입니다. 추모하는 것이 역사과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생활에 밑받침이 되고, 악한 세계에 있어서 중심 적인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 현실적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내일의 바탕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그 큰 내용을 가진 사람들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아니냐.
오늘날 사람들이 성인들의 가르침을 중심삼고 이 시대를 요리하고 이 시대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도 그러한 내용이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넘어서서 내일의 희망을 보장할 수 있는 내용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역사를 넘어 남아져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가운데에 그 시대와 더불어 만족하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도 '반드시 끝날이 온다. 끝날에는 반드시 선과 악을 가르는 대심판이 있다. 그러므로 끝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행복한 것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을 추구해야 된다. 보다 심각한 내용을 중심삼고 시련을 극복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끝날이 온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끝날이 될수록 극복해야 할 어려운 시련이 더 많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 가지고 오늘 현실에서 자아의 신념을 갖고 실행하라고 강조하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을 품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끝날이라는 것은 한스러운 날이 아닙니다. 뜻을 품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끝날이 오면 그야말로 소망하던 관문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소망은 끝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끝날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는 끝날이야말로 최후로 바라는 고비라는 것입니다.
그 고비를 타개하기 위해서 수십년 혹은 일생을 투입하고 자기 일신의 전력을 다해서 그 고비를 밟고 넘어서게 되면, 내가 망하든 흥하든 결정적인 무엇을 남기고 소망의 한 날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끝날을 바라며 나가는 사람들은 오늘날 이 시대, 즉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온 희망을 끝날에 걸고 끝날을 넘어서 벌어질 새로운 그때에 관심을 갖고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을 누가 알아줄 것이냐? 그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는 인간들은 알아주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에서 저렇게 유난스럽게 살게 뭐야' 하는 평을 받게 됩니다. 이렇듯 역사과정의 성인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위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위인들이라든가 그 나라의 애국자들 앞에는 일면 반대하는 무리도 있고 반대하지 않는 무리는 인륜에 의해서 같이 눈물을 흘려 주고 아픔을 같이 느끼면서 동정하는 무리도 있었지만, 성인들이 가는 길 앞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민족 가운데 어느누구 하나 동정하지 않는 외로운 자리에서 자기 생명을 이어간 대표적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가 다가온 그 시간은 일생을 결판짓는 최후의 순간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이 출발하는 시간이요, 새로운 소망의 씨를 뿌리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소망의 세계의 끝이 아니라 소망의 세계의 출발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참되게 심어진 것은 반드시 참되게 싹이 나고 참되게 자라서 참된 열매로서 거두어지는 것이 천지의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람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은 그 시대에 환영을 받고 산 사람들이 아니고, 그 시대에 쫓기고 비운의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역사가 지나 그 인격을 찬양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두고 볼 때,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그 시대와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 살다 간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역행하는 이치를 따라서 그 시대에 역설적인 법도를 따른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 시대에는 환영을 못 받고 배척을 받아 가면서 비운아로서의 생애를 마치고 갔지만,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출발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 놓고 간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바입니다.
지혜로운 교단으로 남아져야 하는 통일교회
이렇게 볼 때, 통일교회는 어리석은 교단이 될 것이냐, 지혜로운 교단이 될 것이냐? 한민족은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이냐, 지혜로운 민족이 될 것이냐? 또 세계는 어리석은 세계가 될 것이냐. 지혜로운 세계가 될 것이냐? 이것은 개인에서부터 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어리석은 교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날 현재의 사조와 보조를 맞추어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교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천년 후, 만년 후의 행복을 위하여 오늘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싸워 나가는 교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교단이 가는 길은 외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외롭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종으로서 종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같은 입장의 종들로부터는 인정을 못 받더라도 주인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다시 말하면 같은 입장에 있는 동역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좋아할 것이냐, 아니면 동역자를 지도하는 지도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좋아할 것이냐 할 때, 자기 동역자들로부터는 공인을 못 받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가 아무리 어리고 병신이라 해도 그에게 공인을 받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많은 민족이 반대하고, 많은 민족 앞에 공인을 받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민족을 지도할 수 있고, 미래의 참된 민족의 지도자로서 설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선한 나라는 아직까지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소망하는 선한 나라와 선한 주권은 지구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한 백성이 지지할 수 있는 생애를 위해 죽음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를 창건하고, 그가 남긴 사상과 그가 생활환경에 남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전통은 계승될 것이요, 새로운 세계는 창건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은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역사시대에 무가치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있어서 무한한 가치의 소유자로 공인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위대하다면 위대한 사람으로, 참된 사람이라면 참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오늘날 보통 어리석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내용으로는 심어지고 거두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외로운 길을 수십년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그런 외로운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주권자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속여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지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태산 같은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극복하겠다고 해야 됩니다. 현재에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몰림을 받더라도 미래의 한국을 위하여,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말없이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무리가 있다면 대한민국과 세계의 운세는 그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세계의 민족 앞에 있어서 불쌍한 민족이지만 이 민족 가운데 인류가 가지 못하는 수난길을 가고, 세계 만민이 바라지 못하는 소망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단체가 있다면 그 단체로 말미암아 이 나라도 살고 이 세계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단체인 동시에 세계를 대표하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러한 개인과 단체를 세워서 역사를 맡기고 역사를 상속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보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친구를 사귈 때 그저 오늘 만나는 그것으로 끝나는 친구는 건성 친구입니다. 그 이상 소망이 없는 친구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길을 가고 수난길을 가더라도 오늘 만날 때보다 다음에 만날 때 그 무엇인지 모르게 자극을 받고, 그 무엇인지 모르게 충격을 받고, 그 무엇인지 모르게 좋은 결심을 하게 하는 내용을 가진 친구가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외로운 자리를 거쳐가더라도 그 친구를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오늘을 위하여 사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역사적인 위인들이나 성인 현철들을 볼 때, 그들은 그 시대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모두 내일을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미래를 위하는 그 한계가 민족적이냐, 국가적이냐, 세계적이냐, 천주적이냐 하는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소원은 멀어지는 것이고, 또 그만큼 막연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막연한 걸음을 수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걸어 나온 것입니다. 이 막연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통일원리와 같은 사상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경우 결과는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식의 논리적인 법칙에 의해서 증명이 가능한 사상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세계의 어떠한 지성인이나, 어떤 훌륭한 뜻을 품은 사람보다도 높은 차원에 입각한 지혜의 터전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는 과정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가고 난 후에는 행복할 수 있지만 가는 과정이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는 과정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초민족적인 사상을 실천해야 할 통일교인들
오늘날 대한민국을 보면 남한과 북한의 극한 대립 상황이 점점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둘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자타가 공인하듯이 대한민국은 위기일발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위기감에 사로잡힌 상태로 끝날 것이냐?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이냐? 현실 사회에 있어서 자기의 행복을 찾고, 안일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내일의 소망을 보장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입장에 선 사람, 그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의 위기는 극복될 것이고 미래는 계승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통일교단에는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냐? 정서적으로 갖추어진 기반이 없이는 행복의 터전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모든 터전까지도 극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971년을 기해 축복가정 부인들을 동원한 것은 크나큰 의의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동원 자체만을 놓고 보면 가정의 파탄이며 현실의 부정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손해입니다. 천만사에 마이너스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이냐? 이것은 과거를 위한 부정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부정입니다. 현실에 남아지는 것은 철두철미한 미래의 내용이 현실에 닻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은 미래의 터전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현실과 더불어 망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미래를 위한 닻을 갖고 있고, 미래의 터전 위에 서 있는 통일교단은 망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피해 가려 하는 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려움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려움이란 누구의 어려움이냐? 그것이 나 자체의 어려움이라 할 때는 내가 그 어려움으로부터 도망을 간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아무리 도망을 가더라도 그 어려움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망을 가서 산중에 숨어 있더라도 자기 어려움은 그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넘어 국가적인 어려움을 붙안고 나가게 될 때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현재에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있고 수난이 있더라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괴로움을 극복하고 이것을 제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면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미래는 새로이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알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앞에 필요한 국가로, 그리고 후대의 세계 만민이 필요로 하는 나라중에 최고의 나라로 등장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분야에서 뒤떨어져 있으니까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세계 만민이 추구할 수 있는 사상을 우리나라의 사상으로 삼아 가지고 다가올 세계적인 수난을 극복할 수 있는 책임을 세계를 대신해서 지고도 남을 수 있다 할진대는, 앞으로 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서 주장하기를 '국경을 초월하자. 초민족적인 신념을 오늘날 생활무대에 집중시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느냐?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사람들은 원수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원수입니다. 피로 맺힌 원수입니다. 그 원한은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원수 관계를 극복하여 사랑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역사적인 배경이 다릅니다. 그리고 주권자도 다르고 국민으로서 의무도 다릅니다. 사회체제에 있어서도 부딪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일본 민족을 중심삼고 생각해 볼 때, 일본 민족 가운데 한국의 전통이나 풍습을 따르는 입장에 선 사람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은 그를 보고 '한국풍이다. 한국패다'라고들 할 것입니다. 그 패들 가운데 '나는 미스터 문이라고 하는 사람을 중심한 그런 사상을 갖고 있는데 그 사상은 이러이러하다' 하는 사람은 단일민족으로 천황을 위주로 한 국수주의 사상을 중심삼는 일본 민족에게는 배치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한편으로는 매국노와 마찬가지로 봅니다. 구보끼 협회장이 그런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점점 커가면 커질수록 반기의 기세는 상대적으로 커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수록 그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내야 할 것이 일본 통일교회 신도들의 사명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통일교회 사상은 극우사상이다' 해 가지고 CIA에서까지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가 많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미래를 보고 사는 사람일수록 지혜로운 사람
현재에 있어서 환영을 못 받는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청산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민주세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고 공산세계에서도 환영을 못 받고 있습니다. 승공이라는 레테르를 들고 나왔기 때문에 공산당까지도 우리를 원수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외로운 패들이 아닙니다. 외로운 무리가 아니예요. 또한 무용한 패도 아닙니다. 말은 없지만 무엇인가 하고 있는 패입니다. 아직 싹도 나오지는 않았지만 싹을 틔우기 위해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지각을 터뜨리고 나오게 될 때에는 그 원천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내용이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세계적인 것이 안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통일교단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가지고 선두에 서서 싸워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원수가 많았습니다. 승공연합만 중심하고 보더라도 반공연맹이 그렇게 못살게 했습니다. 근 2년 동안 있는 힘을 다하여 반대했지만 실력대결에 있어서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뜻이 영원한 미래의 뜻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실권내에서 우리가 촉감을 가지고 그것을 감지할 수 있고, 우리의 시야를 넓혀 응시할 수 있는 시대권내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사실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의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자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절박한 사명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흔적 자체도 남김없이 망할 수 있는 환경에 발을 디뎌 끌려가는 통일교회 패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통일교회패가 못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의 때가 가까와 오는 것입니다. 들려오는 소문이 점점 절박할수록 우리의 끝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때가 가까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장벽을 헤치고 나가는 날에는 세계는 우리로 말미암아 새로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타락한 인간은 소망의 세계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하나의 세계를 추구해 나가면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떻게 될 것이냐? 하나의 세계를 이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의 세계의 이념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 속에서라도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현세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가정과 자기 사회를 중심삼고 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정을 끊고, 그 사회를 끊고 미래를 위하여 살자는 것입니다. 그 미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현재를 부정하는 입장도 무난히 거쳐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를 위해 살면서 미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배가 고프면 싸워서라도 빼앗아 먹는 그런 사람은 동물과 같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가까운 미래가 아닙니다.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고, 큰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일수록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사람이면 큰 사람일수록 그의 계획이라든가 그의 소망은 1년, 2년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만년이 지나가더라도 그 계획권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요, 성인입니다.
신념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하라
미래라 하면 어떤 미래냐? 오늘 좋았으면 내일도 좋아야 되고, 10년까 지도 좋아야 되고, 영원히 좋아야 합니다. 통일교인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내가 10년 동안 이 길을 왔는데 이꼴이 됐어? 라고 합니다. 이건 기가 막혀요. 10년간 왔는데 누구를 위해 왔다는 것입니까? 하늘을 위해서 왔느냐,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왔느냐? 자기를 위해서 왔다는 게 말이 돼요? 10년 동안 뜻을 위해 왔는데, 이제 와서 누구에게 불평을 합니까? 뜻을 중심삼고 불평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지금까지 왔다면 입교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뜻을 위하여 나왔으면 불평없이 계속 뜻을 위해 나가야 됩니다. 뜻은 영원한 뜻이지 몇십년 나가다가 그만둘 뜻이야!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됩니다.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해 출발을 했으면 그 목적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됩니다. 가다 말고 자빠져 가지고 아이고 힘들다고 해봐야 누구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라톤대회 같은 데 나가 달리는 데 있어서도, 코스를 따라 있는 정성을 다하여 선두에서 달리다가 죽으면 그를 동정하지만, 경기규칙을 어기면서 달리다가는 국가를 망신시키고 '그놈의 자식' 하는 욕을 먹게 됩니다. 법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어기면 그 조그마한 것이 그 사람의 형태와 인격 전부를 하늘이냐 땅이냐로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정의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망하는 데도 정의를 위해 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해도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평을 가지고 죽으면 그 누구도 절대로 동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동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낙엽을 붙들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평이라는 것은 신앙길에 있어서 장애물입니다.
소망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언제나 건설적이요, 언제나 새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시시하게 지나간 날들을 가지고 어떻고 저떻다고 하는 것보다 내일의 소망을 중심삼고 뜻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가야 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만나도 맛이 납니다. 보따리 풀어 놓고 나쁜 것은 모두 갖다 쌓아 놓는 사람과는 만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탄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렁뱅이입니다. 거렁뱅이예요. 그러한 사람들은 뜻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를 해도 뜻을 위하고 뜻을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뜻 앞에 플러스가 될 것인지 마이너스가 될 것인지를 생각해 가지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복을 찾는 길이 소망의 길이 아니며, 현실의 안일을 추구하는 길이 소망의 길이 아닙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부흥을 중심삼고 볼 때도, 제1차 5개년 계획, 제2차 5개년 계획, 제3차 5개년 계획 등의 경제계획을 세워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것입니다. 극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극복하면 그 이상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에 서게 되면 자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후손까지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하면 자기만 나쁜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는 더 나쁜 것입니다. 이게 길이 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의 후손과 미래의 나라와 미래의 인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의 자기를 중심삼은 가정과 아들딸과 어머니 아버지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전체와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전체를 위로하지 못하고 미래를 부정하고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절대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자(智者)와 우자(愚者)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중심삼고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는 20년이면 20년 계획을 세워서 '나는 이렇게 나갈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렇게 갈 것이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나가는 데는 이런 저런 일이 부딪칠 것입니다. 나중에는 선생님까지도 박차 버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생명시하고 따라가던 선생님까지 나를 박차 버릴 때가 있을 것인데 그럴 때는 어떻게할 것이냐? '나는 이렇게 간다' 하는 신념을 갖고 나가다가 그런 때가 오거든 때가 왔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만일 그릇된 자리에서 선생님이 여러분을 저버린다면 선생님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버림을 당한 그 사람은 후대의 기수, 후대의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실에서 결판난다
어떤 사람을 보게 되면 축복받기 위해서 뜻길을 간다고 합니다. 축복받기 위해서 뜻길을 간다는 거예요. 축복만 받으면 그게 전부입니까? 축복을 받으면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축복은 종족을 복귀하기 위해 받는 것입니다. 내용이 그렇습니다. 혼자는 종족을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족을 복귀하려면 가정이 필요합니다. 종족을 복귀하는 것은 민족을 복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민족을 복귀하는 것은 주권을 복귀하기 위함이요, 주권을 복귀하는 것은 세계를 복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축복만 받으면 됐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축복가정 전체를 동원했는데, 축복가정 중에 지금까지 동원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라는 것입니다. 말할수 없이 탄식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후손들이 참소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축복을 받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 가정은 가정 중에 지극히 어리석은 가정입니다. 개인 중에도 지극히 어리석은 개인이 있는 것처럼 가정 중에도 지극히 어리석은 가정이 있습니다. 또한 씨족 가운데도 그런 가정을 중심삼은 지극히 어리석은 씨족이 있습니다. 반면에 지극히 지혜로운 씨족도 있습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지극히 지혜로운 민족도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민족이 없으면 세계는 망하는 것입니다. 또, 지극히 어리석은 민족도 있을 것입니다. 그 민족은 이미 망한 것과 같습니다.
세계 가운데에는 지극히 어리석은 나라들은 사라질 것이고 지극히 지혜로운 나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와 짝하여 사는 사람 가운데서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인간은 타락하여 현재를 버리고 미래를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현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에게는 앞으로의 세계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찾아가기 때문에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때가 오면 그 사람이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위치가 이런 입장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입장에서 자기 생애를 넘어 가지고 미래를 찾아갔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 가운데 뜻을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님 자신이 생애를 바쳐 가지고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청춘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싸워 나온 것은 오늘날 통일교회 여러분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아직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쉬지만 나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지하고 있어도 나는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떨어질는지 모르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떨어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든 한 발짝이라도 더 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때가 오면 올수록 여러분과 선생님과의 거리는 배가될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입하여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 핍박이 없다고 해서 선생님이 가는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계속적인 투쟁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핍박이 없는 만큼 선생님이 공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기습작전도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이러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 가서 그 결전장을 맞을 것이냐? 이 결전장을 몰라 가지고 왔다 갔다하는 사람은 통일교회 식구가 될 수 없는 것이요, 영광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지도하는 방향과 코스를 따라 행동하기에 급급해야만 최후의 승리의 한날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이만큼 끌고 올라온 것입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무대에 나의 정성과 힘을 투입시켜 가지고 거기에 뿌리를 내려 오늘의 기반을 닦아 나온 것입니다. 현실을 위해서 싸워 나온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싸워 나온 것입니다.
보다 미래를 위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현실에서 가치와 보람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수 있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강하게 사는 사람이요, 공익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자기 일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觀)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의 반열에 참석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만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들이 뜻을 품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입장에 서느냐 안 서느냐에 따라, 미래와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가 현실 생활 무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이 현실이야말로 미래의 심판대요 과거의 심판대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주기 바랍니다.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아버님께서 지금까지 싸워 나오신 그 싸움의 노정에 있어서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당신은 지나 가는 역사적 환경을 넘어서시기 위해 그 환경에 미련을 두지 않고 싸워 나오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미래의 한날만을 바라보시며 싸워 나오셨다는 것을 아옵니다. 싸우는 모든 동기도 미래 때문이요, 싸우는 과정도 미래 때문이요, 싸우는 목적도 미래 때문이라는 것을 또한 아옵니다. 그러한 자리에 계신 분이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어야 할 저희들도 싸우는 것이 오늘날 현실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싸우고 미래를 위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되겠습니다.
모든 전부는 미래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며, 그 미래는 현실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응될 수 있다는 것을 아옵니다. 당신은 끝날을 위하여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이와 같은 섭리노정에 있어서 역사적인 섭리의 모든 정점이 통일교단 앞에 나타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통일교단이 따라 나온 수난의 길은 그 누구도 찬양하고 그 누구도 기쁨으로 맞을 수 없는 외로운 길, 어려운 길이었으나, 그것으로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미래와 상응할 수 있는 상대적인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옵니다. 이런 역사적인 한때를 맞이한 통일교단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말세와 미래의 출발이 연결될 수 있는 한 시점에서 오늘 세계정세를 바라볼 때, 통일교단이 제시하는 내용과 상응적인 인연을 갖추고 연결되고자 하는 실상을 보고, 오늘 저희들은 각자가 해야 할 책임이 얼마나 지중한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서 저희들은 아버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희들은 현실적인 무대에서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되겠고 천지와 더불어 살아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현실 무대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겠사옵니다. 그래야만 미래의 출발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심판을 받는 데 있어서 영영 사라져 버려야 할 현실적인 모든 것을 저희 앞에서 송두리째 벗겨내고, 미래의 전체적인 내용을 저희의 생활노정과 생애노정에 뚜렷이 나타내어, 세계의 끝날과 더불어 하나될 수 있는 진리를 갖추게 될 때에, 여기서부터 영원한 소망의 나라는 찾아질 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우리의 시야에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때야 말로 우리가 있는 정성을 다해야 할 때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전체 교단이 통합하여 그러한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되겠고, 전체 가정이 보조를 맞추어 그러한 때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시여, 저희 전체의 마음 마음을 수습하시어 최후의 장벽을 밟고 넘어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때에 책임을 못해 가지고 천만세에 한을 남기고 하늘땅 앞에 저주를 받는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사오니, 승리의 한날을 맞이하여 만세에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왕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제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 결심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미래의 한날을 위해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기로 삼았는지, 오늘의 모든 여건이 미래의 승리를 위한 방패의 조건으로 세웠는지, 스스로 반문하고 세우지 않았거든 다시금 다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시련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사정으로 내일을 위할 수 있는 보장자요, 현실을 청산할 수 있는 청산자로 설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진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원하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기에 남한 각지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세계에 널려 있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곳을 흠모하면서 당신을 부르고 있을 줄로 아옵니다. 하오니 그런 곳곳마다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 주시옵고, 내일의 소망의 실체가 될 수 있는 기원이 그들의 생활환경을 이끌어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 있는, 아버지께서 바라보시고 사랑하시고 믿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금후에 가야 할 통일교단이 당신의 운명과 더불어 당신의 노정과 보조를 맞추게끔 채찍질을 해서라도 몰아 주시옵고, 당신과 더불어 일치할 수 있는 행동을 하여 승리의 그날까지 동참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희생의 길을 가더라도 아버지와 더불어 갈 수 있는 있는 기쁨을 스스로 찾아 나갈 줄 아는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의 전체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옵소서. 이달과 이해에 계획하는 모든 것이 당신께서 뜻하신 섭리의 노정과 함께 일취월장하여 당신께서 기뻐할 수 있는 결과로 나타나, 그 기쁨을 아버지 앞에 돌려 드릴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나이다. 모든 전체를 아버지께서 맡아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 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