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선집 48권 4편
제물의 완성 (훈독본) 9840
1971.09.05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말 씀
역사과정에 있어서 참을 대해 가지고 수고한 사람 가운데 제일 고생을 많이 하면서 참의 가치를 추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이 참을 이어받을 수 있는 주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생활 환경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사건건에 있어서도 보다 희생하는 사람, 보다 뜻을 대하여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주인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틀림없는 사랑의 주인이요, 사랑의 주체입니다. 이 세상을 지금까지 사랑해 나온 틀림없는 영원한 주인이시라면 누구보다도 수고를 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비참한 자리에서 나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인이 못 될 것이 아니냐?
자식을 가진 부모는 자식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 자식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자기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그 자식을 위할 수있는, 즉 자식보다 먼저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 절대적인 부모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너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인간보다 더 비참한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
아담 해와가 타락의 경각에 이르는 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누구보다도 애달프고, 아담 해와보다 더 고통을 느끼신 분이 있다면 그분이 바로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노아는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참기 어려운 길을 생애를 바쳐서 가야 하는 것이 노아의 노정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수난길보다 평탄한 내용을 가지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노아에게 120년 동안 수난의 길을 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120년간 방주를 짓게 한 뜻
노아에게는 아내도, 아들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정을 등지고 120년 동안, 일생을 토막 자르듯이 몽땅 잘라 가지고 미치광이 놀음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을 준 것은 노아의 가정을 지지리 못살게 하고, 지지리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훌륭하게, 무엇보다도 좋을 수 있는 입장에 세워 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를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셨겠는가도 생각해야
우리는 노아를 존경하고, 찬양하고, 찬사하는 말도 필요하지만 그 노아를 바라보며 나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고독하셨고, 얼마나 억울하셨겠느냐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은 그냥 굴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데 있어서는 수천, 수만의 길을 가려 가지고 다시 찾아와 수습하지 않고는 복을 줄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주인이 우리 인류와 더불어 누구보다도 고통을 당해 나왔습니다. 세계적인 대참사가 있고, 혹은 대전쟁으로 인해 비참하게 피 흘리는 자리가 있으면 누구보다 가슴을 조이고, 누구보다 눈물을 흘리며, 누구보다 안타까와하는 분,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혼란의 시대, 혹은 그러한 시대를 결정짓는 결전장을 맞이해 가지고 세상의 어느 군왕보다도 신음과 고통을 느끼는 분, 이렇게 책임을 지고 몸부림치는 분이 절대자 하나님이십니다.
인류역사는 제물의 과정을 엮어 온 역사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물의 완성'이라는 말로 돌아가 봅시다.
제물이 왜 필요하냐? 종교에서는 수난의 길을 가라, 희생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그런 명령을 했겠느냐? 좋아서 그렇게 가르쳤겠느냐? 응당 인간이 수난길을 가야 하고 희생해야 하지만, 수난길을 감에 따라 하나님은 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희생하라는 말, 봉사하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고, 인간들의 수난의 대가로 말미암아 찾아진 가치를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모르지만, 그 명령이 하나님과 직결돼 있는 문제라 생각하게 될 때, 그 수난길을 가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비참한 자리에서 얼마나 비장한 각오를 해 가지고 한 사람을 내세울 것이냐? 민족을 내세우고 가정을 내세울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세요. 자기들이 어려우면 어렵다고 번번이 한탄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을 했을 때, 그 원망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못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뼛골을 다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비참한 자리에서 전진하는 하나님의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싫은 것은 원하지 않고 좋은 것만을 원합니다. 나는 비참한 것은 원하지 않고 행복한 것만을 원합니다. 어려운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십시오' 하는 불효막심한 녀석들이 있을 수 있어요?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그렇게 믿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복귀역사의 철칙
오늘날 우리 인류역사는 비참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있으면 너도 참석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입장에서 강력히 권고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누구보다 고생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누구보다 제물적인 자리에서, 제물 이상의 고충을 느끼면서 악의 세계의 판도를 방지하기 위해 수난길을 책임지고 나오신 분이 아니고서는 우리에게 또다시 명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계를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 욕심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럴 수 있는 어느 한때도 갖지 못하고, 소원을 한번도 이루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게 만든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이예요?
그러면 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세계를 만드신 그분의 아들딸이 되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면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므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겁니다.
제물은 소유를 결정하기 위한 조건물
제물의 완성이라고 했는데 제물은 어떤 때에 이루어지느냐? 제물이라는 것은 내가 슬플 수 있는 장면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될 수 있습니다. 대신 잡아간다는 말 있지요? 대신 잡아간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내가 죽을 판국에 놓였을 때 제물을 자기 대신으로, 죽은 것으로 인정해 주고, 자기를 거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길을 세워 달라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물은 대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원리로 말하면 소유물을 결정하기 위한 조건물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빠져 있는 인간이 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의 시대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중심삼고 볼 때, 제물은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싫어하시지만 할 수 없어, 안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제물로 말미암아 자식이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잘 바쳐지는 날에는 소망의 뜻이 이루어져서 기쁠 수 있는 제물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탄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를 보세요. 언제나 제물을 놓고 싸움을 해 가지고 하나님이 실패했습니다. 그러기에 제물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무섭지만 하나님에게도 무서운 것이요, 사탄에 게도 무서운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생사의 결정이 경각에서 좌우되는 판가리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의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입니다.
제물은 자기 대신
제물이라는 것은 자기 대신입니다. 나 자체는, 마음은 하나님의 일선이요. 몸은 사탄의 일선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일선이요, 몸은 사탄의 일선이기에 몸과 마음은 매일 싸웁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내 몸뚱이를 대신한 것입니다.
제물은 제사장이 갈라서 드려야
그러면 제물을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물을 쪼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을 누가 잡느냐? 제사장이 잡는 것입니다. 제물을 나눌 때, 제물이 희생될 때 나도 희생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제물이 나 대신 희생하니 나는 제물에 대해서 머리를 숙이고 감사해야 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데 있어서는 춘하추동 바쳐야 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데 있어서 원래는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 시대에 다 바쳐야 됩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제물을 바치고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늘편과 사탄편을 갈라야 됩니다, 그렇게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정성껏 제물을 드렸다, 하나님 뜻 앞에 있어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이 굴복해 가지고 제물을 드렸다 할 때에는, 몸 자체에 속하였던 사탄이 분립됩니다. 제물로 말미암아 쪼개져 나가는 것입니다. 제단에 몫을 같이 놓았지만 제물을 하나님이 받았다 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 제물이 삼위일체가 되는 거예요. 창조법도가 하나님, 사람, 만물이라는 것입니다.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것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쪼개 하나님 몫과 사탄 몫을 같이 놓았지만, 제물을 바쳐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일체가 되게 되면 제물은 하나님에게로 넘어가는 것이요. 만약 제물을 잘못 바치게 되면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칠 때에는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시간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일생 동안에 제물적인 기도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은혜가 내리는 때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보면 알게 됩니다.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되면 대번에 안다는 겁니다. 그 방향도 동서남북,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침, 점심, 저녁, 혹은 춘하추동의 절기와 같이 태어난 소질에 따라서 기도하는 정성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시간도 달라집니다. 아침에 기도를 해야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점심 때, 어떤 사람은 오후에, 어떤 사람은 새벽에 기도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소질에 따라 다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물을 중심삼아 가지고 분립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단 합하게 되면 몽땅 하나님이 차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차지하시게 되면, 비로소 제물도 나도 하늘편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역사를 지금까지 해 나오신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만물을 제물로 드린 시대
구약시대는 물질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신약 시대의 제물은 뭐냐? 아들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성약시대의 제물은 뭐냐? 부모가 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재창조 역사를 하는 데 있어서 참된 만물,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참된 만물이 없어 가지고는 사람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피를 흘리게 하여 갈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이 일치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연의 인간을 중심삼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칙을 따라 받은 제물을 중심 삼아 가지고, 사람을 다시 찾았다는 조건을 세워 가지고 분립권을 만들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란 무엇이냐? 제사장들이 관리하는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교회를 대제사장 되시는 메시아 예수가 올 때에 그 앞에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물을 바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래의 메시아를 중심삼고, 미래의 소망을 중심삼고 제물을 바쳐서 판도를 넓혀 가지고, 내적인 유대교와 외적인 이스라엘 나라를 안팎으로 한꺼번에 묶어 가지고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제물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예수
그때 교회와 나라가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시에 하나님 앞에 바쳐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로마에서 갈라져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라내 가지고 제물을 바치는 자리에까지 나가야 했는데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그때 예수님이 제물을 바쳤다면 일시에 제물의 목적이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그 이후 제물은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물의 열매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교회와 나라를 연결시켜 가지고 한꺼번에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나라의 주권이 하늘 나라의 주권으로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칠래야 바칠 수 없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은 잃어버린 교회와 잃어버린 나라보다 가치 있는 것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지 못한 아들의 사랑을 받아야 할 재림주
천국에는 혼자서는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본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살다가 죽어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못 들어갑니다. 여러분도 혼자서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도 혼자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재현해 가지고 신랑의 입장에서 신부를 찾아 상대를 결정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받기는 받았지만 완성적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탕감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와 가지고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완성적인 사랑을 받은 아들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시 와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아들은 뭐냐? 아담의 자리를 복귀한 것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해와가 지어졌기 때문에, 여기서 상대를 찾아 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천도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부모의 기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부모가 나오기 전에 참자녀가 나와야 됩니다. 참자녀가 참부부를 이뤄 사위기대의 목적을 달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을 했습니다. (판서하심)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완성급까지 가야 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7년이라는 기간입니다. 이상상대는 어디서 생기느냐? 장성기 완성급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축복해 주는 자리가 장성기 완성급입니다. 축복을 받아 가지고 완성적인 7년노정이 통일교회에는 있는 거예요. 그것이 1차 7년노정, 2차 7년노정, 3차 7년노정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세계적인 노정을 거치는 운명길을 가고 있습니다. 금년이 2차 7년노정에 있어서 4년째를 맞이한 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의 정세는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급변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느냐
통일교회 교인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느냐?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을 하늘 앞에 세우자,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하늘 앞에 세우자,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하늘 앞에 세우자, 민족이 희생 되더라도 나라를 세우자. 나라를 희생시키더라도 세계를 구하자 하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제물은 억지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바쳐야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복귀섭리의 길에 있어서 그 골수사상은 무엇이냐? 제물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제물은 어떤 것이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것은 무엇이냐?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생명을 내놓는 데는 싫어하며 억지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미친듯이 좋아하면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통일사상은 하나님의 제물사상에서 이어받은 것
세상에 가정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여편네 때문에, 자식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그걸 누가 책임지겠어요? 하나님이 책임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그 인간 책임을 누구에게 지우겠느냐? 세계의 어떤 가정에도, 다른 사람에게 이 책임을 지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지워 주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장이며, 통일교회 문선생의 사상입니다.
누구에게 맞게 되면 세계를 대신해서 맞고, 눈물이 엇갈리는 비참함이 있거든 비참하라는 겁니다. 어미가 자식을 찾아 천리길을 와서 좋은 얼굴을 봤으면 했는데, 그 자식이 병석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으면 그 어미는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 어미는 무슨 말을 할 것이냐? 하늘 가는 길이 어이 이리 비참한고…. 내 자식이야 천만 번 죽더라도 아버지의 입장은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자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 비참하실 것이냐 하는 마음을 갖고, 자식을 붙안고 하나님을 위로하는 눈물을 흘리자는 것이 통일교회 스승의 사상입니다.
우리 일족이 망해서 나라를 살릴 수 있다면, 일족이 칼을 입에 물고 피를 토하며 한 구덩이에서 죽어 썩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정의를 위해서, 천도를 밝히기 위해서 갔노라 할 것입니다. 역사에 반드시 남아질 것이어늘, 그때에 이 길은 천하에 빛날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 사상의 주류입니다.
이 사상은 어디서부터 이어 내려 왔느냐? 하나님의 제물적인 사상으로부터 이어받아 내려왔습니다.
제물은 존재의식이나 소유관념이 없어야
제물의 자리라는 것은 존재의식을 갖지 않는 자리입니다. 또한 소유관념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소유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제물의 노정은 하늘나라가 복귀되어야 끝나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제물의 노정을 거쳐왔습니다. '나 하나 희생해 가지고 온 백성이 살 수 있으면 어서 희생해야지. 통일교회가 망해서 이 나라가 살 수 있으면 통일교회가 희생해야지' 이러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원이, 그런 제물적인 노정이 언제 끝나느냐?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가 제물을 드리게 될 때, 만물과 만백성과 주권이 화합해 가지고 보조를 맞추어야 끝나는 것입니다.
제물이 되어서 따로따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총탕감 해야 됩니다. 나는 참부모를 대신하고, 여러분의 아들딸은 참아들딸을 대신하고, 여러분은 만민을 대신하여 탕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치고, 참부모의 이름을 거쳐 가지고 다시 부모 될 수 있는 세계가 되지 않으면 제물의 완성이라는 것은 이 지상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걸 못 하게 될 때에는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자신들도 망하는 것입니다. 비참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위해서 단결하고, 이 목적을 위해서 전진해야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제물은 죽더라도 자기를 공인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제물은 죽더라도 자기를 공인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죽고 나서도 머리를 숙이고, 다 지나고 나서도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자기 물건이 아버지의 것이요, 자기의 아들이 아버지의 아들이요, 자기의 몸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내 몸은 아버지의 지체요, 내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요, 내가 가진 물건은 아버지의 것이라고, 아버지 앞에 돌려도 아버지 것이요. 나한테 와도 아버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 봤어요? 거기서부터 천국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내 물건은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며, 내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며, 내 남편, 내 아내가 내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람이라고 해야 됩니다. 자기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아들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물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잊고 공적인 입장에서 희생하라
우리는 개인을 위해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탕감노정에 있어서 가정적인 충신이 되어 종족의 전통을 세우고, 민족의 전통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가정 부인들을 동원하여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가정적 제물시대인 동시에 종족적인 제물의 시대요, 민족을 위한 교회적 제물시대의 사명 앞에 있어서 여러분 개인을 망각하고 전체가 공적인 입장에서 투쟁하고, 싸우고, 희생하기를 바라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 도
말씀선집 48권 4편, 원문
제물의 완성
1971.09.05 (일),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이달 들어 처음 맞이하는 안식일 아침이옵니다. 지나가는 모든 날들이 당신과 더불어 인연이 맺어지고 당신이 허락하신 뜻 가운데 기쁨이 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지만, 악한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당신 앞에 염려와 슬픔을 남기고, 또 그렇게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적마다, 당신 앞에 바쳐지는 이 안식일만이라도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소원이 되고, 자랑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만복을 허락하시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 거룩한 이와 같은 날들을 통하여 개개인의 심령동산에 심어지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부족한 저희의 마음을 사로잡으시사 저희들도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닮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은은한 가운데 생명의 빛과 생명의 힘을 부족한 저희 자체들에게 연결하시사, 당신이 소원하시는 뜻 앞에 있어서 필요한 당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게끔, 아버지께서 채찍질을 해서라도 세워 주시옵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여기에 모인 저희 각자는 당신이 허락하신 은사를 따라 모였사옵고, 당신 앞에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아침에 부복했사옵니다. 당신이 능력의 아버지이신 것을 믿고,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이심을 알고, 사랑의 주인공 되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저희들이 느껴야 되겠사옵니다.
완전 완성을 표준하여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자가 있으면 언제나 대하지 않음이 없으신 아버지시여, 그러한 사람이 여기에 있게 될 때에는 거룩하신 은사를 가해 주실 것을 믿사옵고, 또 그런 소망을 가지고 당신께서 찾아주실 것을 바라고 모인 이 자리이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만복을 저희 개개인의 심령 위에 개개인의 소성에 따라 채워 주시옵기를 바라는 이 아침이옵니다. 만민이 당신 앞에 부복하여 영광의 한때를 고대하는 간절한 마음을 묶어 바치는 이 아침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은 목격하고 있습니다. 과연 아버지가 이 세계 인류 가운데서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표준형으로 뽑아 내세울 수 있는 사람, 당신 마음에, 혹은 당신 사정에, 혹은 당신의 소원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자녀가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할 때,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적은 것을 느끼게 되옵니다. 당신이 요구하시는 그 요구와 더불어 심정의 인연을 맺어 나가며 자기 스스로를 세워 맹세 하는 아들이 누구며 딸이 누구냐고 묻게 될 때에, 여기에 부복한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 '나'라고 대답하며 나설 수 있는 아들들이 몇 명이라도 있기를 바라고 있나이다.
늘 보잘것없는 연약한 이 무리들과 더불어 수고하시는 아버지, 외로운 자리에서도 항상 참으시면서 저희들을 권고하시는 아버지, 슬픔의 환경을 홀로 책임지시고 저희들의 안위의 한날을 개척하기 위하여 선두에 서서 나오신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이신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를 심정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한 불효막심한 저희들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무한히 무한히 영원한 생명으로 저희 자체를 부활시키어 오늘도 창조역사를 계속하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미처 몰랐던 부족한 저희들을, 아버지,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옷깃을 여미고 당신의 거룩하신 성상을 바라보면서 흠모와 사모의 심정에 사무칠 수 있는 한 시간을 고대하고 있사오니, 분부하시고 싶은 것이 있으시거든 찾아오시어서 저희 몸 마음에 사무칠 수 있게끔 분부하여 주시옵고 새로운 명령의 인연을 통하여 당신이 원하시는 곳을 향하여 가지 못하거든 그곳을 향해 가라고, 아버지, 채찍을 들어 쳐서라도 그 자리에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9월을 맞이하였습니다. 저희들이 한 많은 1971년도를 맞이하여 어려운 고빗길을 거쳐왔습니다. 많은 행사도 치렀습니다. 이제 저희들 앞에 중차대한 책임과 사명이 있다면, 이 민족과 세계 앞에 당신이 가려야할 최후의 심판대를 맡을 수 있는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옵니다. 이러한 책임이 저희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할 줄 아는 무리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나라의 현 정세를 슬퍼 보시고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금후의 대한민국의 운명을, 아버지, 책임져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 누구도 이 나라를 이끌지 못하고, 그 누구도 이 나라를 책임질 수 없으며, 당신만이 이 나라를 천운의 방향에 일치시킬 수 있사오니, 은은한 가운데서 저희 각자의 마음과 이 민족의 심정을 묶으시어서 당신이 원하시는 뜻 앞에 일치되도록 이 민족이 그 방향을 갖출 수 있게끔, 아버지, 역사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천운을 막을 자가 없는 것이요, 천운의 법도를 따라 그 궤도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희들이 생각할 적마다, 이 나라를 지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당신의 마음이 어리시어서 최후의 결정적인 이 정세 앞에, 당신의 섭리의 뜻 앞에 필시 귀결되어야 할 일점을 아버지께서 제시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는 온 세계가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하고, 하늘땅이 원하는 그 한날의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허덕이며 싸워 나온 것을 당신은 잘 알고 계시옵니다. 오늘의 슬픔이 있더라도 저희들은 현시점의 자기 개인적인 사정을 위해서 슬픈 자리에 서기를 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일의 희망을 위하여 나라와 세계의 운명과 더불어 슬픔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통일사상을 가진 자녀들의 긍지인 것을 느끼게 될 때, 저희 자신들이 아버지 앞에 부복한 이 자리가 하늘의 승리가 국가를 넘어 세계와 천주적인 인연을 거칠 수 있는 그곳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부복한 이 자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옳지 못한 각자의 사심을 제거시키어 참다운 하늘의 마음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이 분부하시는 승리의 한날을 다짐할 수 있는 승리의 실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앞에 제물로 바쳐져야 할 저희 자신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오니, 아버지께서 몰아서라도, 끌어서라도 제물의 제단까지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철모르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하여 가는 아브라함에게 그 자식인 이삭이 제물로 쓰일 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게 될 때에, '그것은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살필 적마다, 그 부모의 마음을 살필 적마다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에 그 얼마나 슬픔이 앞설 것인가를 느끼게 되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염려하기 전에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의 사실들을 염려할 때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이제 저희들은 자신을 넘어서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염려하고 아버지의 주류를 지킬 수 있는, 진정한 효 중의 효를 다하고 충에 충을 다하는, 아버지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아들딸이 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각뿐만이 아니라 신념과 더불어 맹세하는 이 시간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악한 세계에서 태어난 불쌍한 자신을 탄식하면서, 소망의 천국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 마음을 다짐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 승리의 한 결정점을 언제 가름하느냐 하는 문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각자인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좌로 가느냐, 우로 가느냐 하는 두 갈래의 길 가운데서 우를 결정해야 할 운명길을 스스로 가리지 못하는 불쌍한 무리이기에, 여기에 당신이 또 가려 줘야 할 책임이 남아지는 것을 생각하옵니다. 수고의 역로를 거쳐오신 아버지께서는 늘 최후의 도상에서 저희들로 하여금 이런 결정적인 책임을 다짐하게 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면목없고 부족한 저희 자신들인 것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은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요,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서도 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죽더라도 그곳을 향하여 돌진하고, 그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소원의 일념만은 틀림없이 갖고 있사오니, 이 무리들을 거느리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세계의 도상에 세우시기에 부족함이 없게끔 연단시키시옵고,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아침에 전국에 널려서 부족하나마 이곳을 바라보면서 정성을 들이는 자녀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사오니, 그곳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고, 시대적인 사명과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나가 있는 어린 딸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눈물어린 사정과 딱한 사정에 놓여서 하늘을 부여안고 호소할 적마다 당신이 친히 현현하시옵고, 부디 모른다 하는 자리에 서지 마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그들이 그런 자리에 선 것은 당신의 뜻 때문이요, 당신이 이 민족을 찾아오시고,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자 하는 그 소망을 풀어 드리기 위한 것이옵니다. 하오니 부디 승리의 일로를 개방하시어 내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오늘은 부족하지만 당신의 신임받는 딸들이 되고, 그 환경에 처해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제 부족한 마음 몸을 아버지 앞에 바치오니 분부하시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당신의 자녀를 통하여 분부하여 주시옵소서. 선과 악을 분별시키기 위한 당신의 소원의 뜻을 저희 자체로부터 이 환경 전체에 적용하시옵고, 민족과 세계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을 귀히 여기고, 당신을 찬양하는 모든 무리들 위에 친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종교인들과 소망의 마음을 품고 세계에 널려 있는 선한 사람들 위에 생명의 가름길을 어서 속히 허락하시어 내일의 형제로 묶으시어서 당신의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만만세의 은총과 사랑을 여기 모인 자녀들 위에 내려 주시옵고, 수많은 무리들 위에 내려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면서, 이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선한 자아를 추구하는 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개인이 그러한 입장에 있고, 사회가, 나라가, 세계가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며 자기 자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통일교회의 무리들은 전체 분야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더욱더 그런 마음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타락한 인간은 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선을 추구하고 그 길을 따라간다고 해서 누구나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는 안 되어있는 것입니다. 선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상반된 악의 주체인 사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탄 둘 사이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인정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전진적인 선의 자리를 찾아 나갈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섭리상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입장에서 보다 나은 선의 자리에 나가기 위해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보다 나은 선의 자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내용의 탕감조건을 하나님이 제시하든가 인간이 제시하든가 해야 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나은 선의 자리로 나가려면 대가를 치러야
오늘에 있어서 소망을 갖고 내일을 다짐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그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소망 앞에 가까와지기 위하여 전진하는 자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서 노력을 하든가 희생을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환경이나 역사를 막론하고 반드시 거기에 대비될 수 있는, 혹은 비례될 수 있는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실정이었으며, 현실에서 우리가 보다 나은 길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 서도 필연적인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자신이 추구하시는 길에 있어서, 보다 나은 어떤 목적을 찾아 나가는 길 앞에 있어서 역시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악한 타락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 즉 인간세계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이런 공식적인 법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할 때, 선을 추구하는 길에 있어서 선을 대하고 선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진 입장에 섰다고 해서 자기가 바라보는 선의 기준에 해당하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면 그냥 그대로는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면 클수록 자기 자신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결과에 도달한다면 거기에 해당하는 기쁨을 차지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거기에 해당하는 기쁨을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복귀섭리 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치가 성립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다 나을 수 있는 길들을 통하여 보다 나은 개인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시대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보다 나은 사람을 추구하여 나오신 것입니다. 보다 나은 사람을 세워 가지고 보다 큰 가치의 선의 세계를 찾아 나오면서 그 세계를 다짐해 나온 것이 역사가 추구해나온 길이요, 역사가 발전하는 목적이 되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 발전의 법칙
이렇게 보게 된다면, 복귀섭리 도상, 즉 역사시대에 나타났던 수많은 선지선열들 중에서 어떤 시대의 사람이 보다 나은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아담 시대로부터, 아벨을 거쳐 노아 시대, 아브라함 시대, 모세 시대. 세례 요한의 시대를 거쳐 예수님의 시대까지, 또 예수님의 사도들이 기독교의 역사를 엮어 나온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향진적이고 발전적인 역사의 행로만을 거쳐왔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시대에는 높은 자리를 차지했었는가 하면, 어떤 시대에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또 어떤 시대에는 바른 길로 갔는가 하면 어떤 시대에는 엇갈린 길에 처하여 방향을 잃어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은 어제보다도 오늘이 나아야 되고, 오늘보다도 내일이 나아야 됩니다. 금년보다는 내년이 낫고, 내년보다는 그 다음 해가 낫고, 지금 시대보다는 후시대가 낫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 그때에 나타난 책임자들 중 그 시대에 있어서 선의 세계적인 방향을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바통을 이어받은 그 사람이 그 전의 사람보다 반드시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성인의 도리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선한 사람의 도리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선하고, 누가 보다 가치적이냐 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누가 성인이며, 누가 보다 선하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거기에서 책임을 추궁하고, 그것을 가리려고 노력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기 사상에 맞고, 자기가 가는 방향과 맞으면 그 사람을 세계적인 대표로서 추구하고, 일생을 그 대표의 기준과 더불어 결속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있지만, 자기가 대하는 사람이 역사시대에 혹은 참을 추구하는 이 도상에 있어서 얼마만한 가치의 입장에 있고, 또 그 입장이 어느 정도의 입장이냐 하는 것을 분별짓고 전후좌우를 가리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이런 기준에 서 있고 어떤 사람은 보다 낫고, 어떤 사람은 보다 못하다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가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식구면 식구 혹은 종이면 종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면 그 가운데서도 보다 나은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또 보다 나은 사람보다도 한걸음 더 앞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어떻게 이어져 왔느냐 하면 보다 못한 사람, 보다 덜한 사람을 통해 가지고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사람을 통해서 이어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그렇게 이어받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복귀섭리의 발전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는 사람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벨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아벨의 뜻을 이어받는 사람은 아벨보다 못한 사람이겠느냐, 나은 사람이겠느냐 할 때, 두말할 것도 없이 아벨보다는 나은 사람이어야 됩니다. 나은 데 있어서는 일부분만 나아야 되느냐? 아닙니다. 전체적인 분야에서 나아야 되는 것입니다. 평면적인 기준을 넘어서 입체적인 기준, 즉 전체적인 분야에서 낫기를 인간은 물론이고 보다 높으신 하나님은 더욱더 원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 아벨을 능가해야 합니다. 또 봉사적인 면에 있어서도 능가해야 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아벨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당연한 일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노아를 중심삼고 뜻이 완결되지 못했고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찾고자 한 선의 목적, 선의 기준을 찾지 못했다 할진대는 다음 사람이 그 뜻을 이어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계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노아보다 못해 가지고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였다면, 아브라함은 노아보다 나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노아보다 낫다는 내용을 제시할 수 있는 요건은 무엇이냐 할 때, 노아보다 편안한 자리가 될 것이냐, 노아보다 험난한 자리가 될 것이냐? 노아보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노아보다 나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보다 모든 여건이 어려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극복하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입장에 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아브라함이 그랬느냐? 아브라함이 노아보다 더 어려운 자리에서 수고했느냐? 그랬다면 어떤 환경에서 노아보다 나았느냐?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로서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생활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어려운 일은 정든 부모, 혹은 고향이라든가 정서적인 면에서 안식의 터전이 될수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는 생활권을 격파하고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를 하나님께서 요구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즉 자기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불시의 명령을 받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즉시 길을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소망을 두고 내일의 희망을 두고 기다릴 수 있는 자리를 향해서라면 모르지만 그저 당장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정든 고향산천과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떠나는 것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 '너는 떠나면 이렇게 되고 이런 결과가 된다'고 확실히 가르쳐 주고 떠나라고 했으면 모르지만, 혹은 '네가 떠나면 현재보다 낫다'는 귀결점을 명시해주고 떠나라고 했으면 모르지만, 그런 내용도 없이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라고 하는 명령에 그냥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또, 그렇게 떠나는 것을 부모들이 반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필시 아브라함은 부모 몰래 떠났을 것입니다. 형제 몰래 떠났을 것입니다. 친척들 몰래 떠났을 것입니다. 몰래 떠나는데 대낮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을 때에 떠났겠습니까? 틀림없이 밤중이나 새벽에 길을 찾아 떠났을 것입니다. 이렇게 목적도 제시되어 있지 않고, 환경의 내용도 분별되지 못한 자리에서 하늘의 명령만 받고 떠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노아는 그래도 120년이라는 한계선을 그어 놓고 명령을 받은 입장에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그러한 내용이라든가 혹은 환경적 여건도 제시받지 못한 자리에서 자신의 일체를 부정하고 떠난다는 것은 어느누구보다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심정적인 분야, 정서적인 분야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어려운 자리를 극복한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게 되면, 그는 영광 중의 영광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미래에 애급의 주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왕자로서 소망이 있다면 어느누구보다도 큰 소망을 가질 수 있고 희망과 야욕이 있다면 어느누구보다 큰 야욕과 큰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행복하다면 어느누구보다 행복한 자리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을 도맡아 가지고 자기 주위의 모든 환경을 부정하고, 자기의 생사 문제까지 넘어서야 하는 그런 자리에 들어간 것입니다. 모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일신의 영광, 갖추어진 환경의 모든 영광이 문제가 아니요, 자기 생명이 안일한 자리에 있는 것을 자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을 자기 어려움 이상의 어려운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장래에 민족과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보다 영광의 자리에 놓고 싶었던 것이 모세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영광을 생각지 않고 고난과 수난의 역로를 다짐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선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하의 자리로 뛰어내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 자신이 앞날에 어떻게 된다는 하나님의 보장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닙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가지고, 격분하여 행동을 하고 나니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이 거부당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부딪쳤는데도 이스라엘 민족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내심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며, 도리어 원수의 대상으로 나타났던 애급 민족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수난이 있으면 그 수난을 고이 감당하고, 그 수난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미디안 광야에서 갖고, 하나님 앞에 깊이 사례하는 심정의 생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수도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런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명령을 받고 그런 자리에 선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보다 나을 수 있는 가치의 내용을 다짐하는 자리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평상시에 느끼는 그런 입장에서는 전진적인 환경을 맞는다고 해도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최고의 효자, 충신, 애국자, 성인이겠는가
효자가 있다면, 효자 중의 진짜 효자는 어떤 사람이냐? 부모를 위해 일생 전부를 희생하고 7,80세 고령이 되도록 효성을 다한 사람과, 젊은 청춘으로서 부모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효자가 있다고 할 때, 누가 더 효자라고 할 수 있느냐? 아무리 7,80이 되도록 효자의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청춘 시대에 부모를 위해 생명을 바친 효자에게는 못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충신은 죽은 후에, 생명을 바친 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효자도 생명이 엇바뀌는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시대에서 많이 보아 알고 있습니다.
참을 찾는 데 있어서도 남과 같이 좋은 환경에서, 다 갖추어진 자리에서 찾는 사람하고, 갖추어지지 못한 자리에서 생명을 회생해 가면서 찾는 사람하고 어떤 사람이 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건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환경이 전부 다 갖추어진 터전 위에서 수고도 않고 찾을 수 있는 참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귀하겠느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경계해야 할 사람입니다. 참은 평탄한 환경에서 엮어져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탄한 환경에서 엮어져 가지고 남아지는 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이 참으로서 전승되어 가지고 역사과정을 거쳐 현재의 입장에 남아지기 위해서는 모진 투쟁 행각의 노정을 거쳤을 것이 비운의 역경을 극복해 나왔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참은 그런 자리에서 찾아진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 참을 상속받고, 그런 참을 사수하기 위하여 자유스럽고, 소망스러울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서 참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 사람이 참을 대할 수 있는 진짜 자격자이냐 하면,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참이 엮어 나온 역사적 슬픔보다도 더 처참하였고, 더 수난길을 극복하였고, 더 어려움에 부딪쳤고, 혹은 딱한 사정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참을 찾기에 많은 애를 썼고, 뿐만 아니라 최후에는 자기의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그런 자리에서도 참을 찾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을 대할 수 있는 진짜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에 있어서 참을 대해 가지고 수고한 사람 가운데 제일 고생을 많이 하면서 참의 가치를 추구한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 사람이 참을 이어받을 수 있는 주인이 될 것입니다. 참을 위해서 수고하고, 참을 위해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참을 위해서 피를 흘릴 수 있는 자리에 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관리를 받고, 그 사람의 소유가 되고 싶은 것이 참으로서의 바람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애국자가 많다 하더라도 그 애국자 가운데 누가 제일 가는 애국자냐 하면 국가가 일시에 난시에 처했을 때 그 난시를 모면하기 위해서, 그 환경을 염려하면서 충성하는 것보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중심삼아 가지고 폭넓은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수난의 길을 가고, 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 길을 열어 놓겠다고 하며 희생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 그렇게 희생한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이 같은 마음을 먹고 같은 경력을 가졌으나, 두 사람은 쉽게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원수들에게 붙들려 가지고 손이 찢기고 눈이 빠지고, 귀가 잘리고 코가 잘리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하나하나가 잘려서 비참하게 죽어갔다면, 그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제일의 애국자 반열에 동참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제일 비참하게 희생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한 국가에서 그렇다면 세계의 성인 가운데서는 어떠한 성인이 최고의 반열을 차지할 것이냐? 마찬가지로 희생하되 제일 비참하게 죽은 사람입니다. 그 외에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실정이라든가 생활 환경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사건건에 있어서도 보다 희생하는 사람, 보다 뜻을 대하여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어떠할 것이냐? 우리 인간지사(人間之事)가 그러하고, 역사적인 사정이 그러하다 해도 하나님은 다를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불쌍한 사람이 누구냐? 비참한 자리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비참하게 살다가 생명을 잃은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때, 이 세계의 참된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남의 눈치나 살살 보고, 때에 따라 자기에게 이익될 것이 있으면 살짝 옆으로 빠져 가지고 그것만 바라고 행동하는 사람, 자기에게 이익이 크면 큰 만큼 비례적으로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주인은 될는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주인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진정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느냐, 사랑하시는 주인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은 틀림없는 사랑의 주인이요, 사랑의 주체입니다. 이 세상을 지금까지 사랑해 나온 틀림없는 영원한 주인이시라면 누구보다도 수고를 해야 하고, 누구보다도 비참한 자리에서 나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인이 못 될 것이 아니냐?
자수성가한 사람은 자기 뜰 아래에 떨어져 있는 걸레 짜박지도 주워서 살펴보며 '이거 더 쓸 수 있지 않느냐? 합니다. 자기에 속한 일체의 모든 물건들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는 자기의 과거에 있어서 한 가지 물건이라도 귀중하게 여기던, 어떤 물건이고 귀중하게 여기던 습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버리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다시 감정해 보는것입니다. 이걸 볼 때, 안 된 것 같지만 물건 자체가 볼 때에는 자기를 아껴 주는 분이 이분이라는 결정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주의 중심이 되고, 인류역사의 중심이 되며, 인간 앞에 있어서 사랑의 주인공 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어야 되겠느냐? 편한 자리, 영광의 보좌에 앉아 가지고 '여봐라?' 할 때 '예 예' 하게 하는 분이라야 되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는 자식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 자식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자기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그 자식을 위할 수있는, 즉 자식보다 먼저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 절대적인 부모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너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자인 하나님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는 입장을 언제나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는 언제나 주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인간보다 더 비참한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인간세계가 망하고, 흥하고, 죽고, 못 사는 것을 보시며 '깨깨 그래도 싸다. 너희들은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피해 가야 되겠다. 세상은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런 분이라면 그분은 주인이 될 수 없는 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보다 더 비참한 자리를 자진해서 찾아오시는 분이 있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우리 인간 앞에 고마운 분입니다. 그런 분이 틀림없이 우리 개인에게 있다면 개인개인 앞에 그는 누구보다도 고마운 분입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내가 명령받을 일이 있으면 그분에게 명령받고 싶고, 내가 살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분과 더불어 살고 싶고,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면 그분과 더불어 하고 싶고, 혹은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절대적으로 그분과 더불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수긍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복귀섭리의 행각의 노정을 더듬어 보게 될 때, 아담 가정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아담 해와만이 그 자리, 아담 해와만이 타락의 자리에 나갔고 하나님은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면서 책망하며 당장에 벌을 주겠다고 저주의 채찍을 들고 바라보는 자리에 있었겠어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의 경각에 이르는 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누구보다도 애달프고, 누구보다 고통을 느끼신 분이 있다면, 아담 해와보다 더 고통을 느끼신 분이 있다면 그분이 바로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120년 동안 수고의 노정을 거쳐 나온 노아에게 뜻을 성사하기 위해서 바라셨던 소원이 일시에 엇갈림길로 틀어지게 될 때, 하나님이 슬퍼하는 노아를 바라보시고 '너는 내가 명령을 했으니 그 슬픔을 참고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노아가 슬픔의 눈물을 지으니 그에게 명령하신 주인도 눈물 흘리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노아는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평지면 몰라도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선, 상식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도가 넘어도 형편없이 넘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게 될 때, 정상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노아는 미친 사람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에 지어야지. 산에서 배를 지었으니 그것은 상식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것을 명령한 하나님은 농담으로 했겠느냐? 아닙니다. 참기 어려운 길을 생애를 바쳐서 가야 하는 것이 노아의 노정인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수난길보다 평탄한 내용을 가지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노아에게 120년 동안 수난의 길을 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하였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아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긴장된 순간에 있어서 노아가 순응하는 입장을 취할 때, 노아보다 더 기뻐하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노아보다 더 슬퍼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렇듯 기쁨과 슬픔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주인의 자리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자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120년간 방주를 짓게 한 뜻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노아에게는 아내도, 아들딸들도 있었습니다. 가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정을 등지고 120년 동안, 일생을 토막 자르듯이 몽땅 잘라 가지고 미치광이 놀음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부인들, 자기 주인 양반이 그런 일을 한다고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세요. 또 젊은 청년들, 혹은 장년들, 자기가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남편을, 그런 아버지를 믿을 수 있겠어요? 미친 아버지가 아니라 미친 애비다 할 거예요. 어떻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산에 올라가 배를 만들 때에 그의 아내가 점심때가 되었다고 '우리 영감한테 점심 갖다 줘야지, 우리 영감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 될 것인데…' 그렇게 생각했겠어요? 아들들이 그렇게 생각했겠어요? 어림도 없었을 거예요. 바가지 긁기가 일쑤였을 것입니다. 120년 동안 바가지를 긁었을 거예요. 1년 정도 가다가 사이가 틀어졌으면 120년 동안 바가지를 긁었지 별 수 있어요? 한 50년쯤 가다가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다면 70년은 바가지를 긁었을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남편이 무슨 허깨비 같은 소리를 공중으로부터 듣고, 혹은 비몽사몽간에 듣고서 '나는 생명을 걸고 이 일을 해야 되겠소' 할 때에, 그 아내가 '아, 그래요. 나도 그걸 원했는데 당신이 먼저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겠소' 그럴 수 있는 아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 부인들,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럴 수 있다 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 하나 물어 볼께요. 만나는 시간, 말하는 그때부터 둘의 의견이 상충되었으면 120년 동안 노아의 아내는 세상에 없는 비운의 대상이 아니었겠느냐. 또, 아들딸이 있었으면 그 아들딸은 아버지에 대하여 미친 아버지라고 하며, '세상에 120년 동안…. 뭐 물로 심판해? 배를 만들려면 강가에 만들어야지 산 꼭대기에다가 만들어?'라고 비방했을 것입니다.
재목을 누가 해다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혼자 마련해 가지고 산 꼭대기까지 지고 올라가서 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미치광이 중에서도 상미치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환영했겠어요? 우리 통일교회 잘 믿는다는 젊은 양반들, 그대들이 그런 입장에 서게 된다면 '끝까지 가셔야지요' 했겠어요?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왜 그랬을 것이냐? 아내 중의 아내를 찾기 위한 것이요, 가정 중의 가정을 찾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남성과 수많은 가정이 있지만 하나님이 몽땅 사랑할 수 있는 가정을 찾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몽땅 사랑할 수 있는 가정은 몽땅 사랑받기에 알맞을 수 있는 인연이 있어야 되고, 전통이 설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만약에 노아가 늦잠을 잘 때에 그 부인이 '벌써 아침 여섯시가 되었소. 당신 오늘 왜 이리 늦소'라고 했다면, 그 부인은 노아가 쓰고 있는 금관이 있다면 거기에 박힌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또, 아들이 그랬다면, 인류역사에서 가정을 대표해서 만족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들딸이라는 문제를 들고 나오게 될 때에 노아의 아들을 빼놓고는 칭찬할 수 있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러한 사명을 준 것은 노아의 가정을 지지리 못살게 하고, 지지리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훌륭하게, 무엇보다도 좋을 수 있는 입장에 세워 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수 사탄이 있어도 못 따라가고, 사탄세계의 그 누구도 어림도 없는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 단 한 분인 절대자의 소신이 아니었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노아에게 내린 120년이라는 기간은 그 기간에 방주를 짓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노아가 착실하게 하늘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가정의 기반을 이루기를 그 배후에서 고대 했을 것이 아니겠느냐?
노아를 바라보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셨겠는가도 생각해야
이런 등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런 환경을 바랐는데 그것이 노아의 아내로부터 깨져 나갈 때 어떠했겠어요? 다음에는 자식으로부터 깨져 나갈 때 어떠했겠어요? 아내가 노아에게 바가지를 긁었겠어요. 안 긁었겠어요? 아들딸이 효도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효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 하나 물어 보게. 노아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녁에 집에 돌아와 가지고 밥을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밥 먹는 시간에 천대받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바가지를 긁었다면 그 시간에 긁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무슨 밥을 먹고 다녔겠어요? 밥을 해주었다면 보리밥을 해뒀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먼저 해 먹고…. 그래도 고집은 있어서 아낙네가 바가지를 긁을 때 가만히 있었겠어요? '이거 왜 이래…' 이러며 실쭉거리고…. 곧은 성격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 옷이나 잘 해 입혔을 것 같아요? 그 동네에서 누더기와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노아의 신세를 여러분이 연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걸 바라보는 아내는 노아에게 '저놈의 영감 그래도 싸지'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노아의 아들은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 없었겠지만, 노아의 형이 있었다면 노아의 목덜미를 잡고 '야 이놈아' 하고 있는 말 없는 말을 하면서, 별의별 행동을 다 하면서 막으려 했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있었다면 매일같이 길에 지켜 서서 그런 야단을 벌였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랬겠나. 안 그랬겠나?
그런 사연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분의 생활 주변을 두고 보면 이해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그렇게 시킨 하나님의 마음은 편안했겠느냐? 아닙니다. 그런 문제를 당할적마다 소원하던 아내의 기대가 깨져 나가고, 자식의 기대가 깨져 나가고, 가정의 기대가 깨져 나갔습니다. 여기에 끌려갈 수 밖에 없고, 제재 받을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선 노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천리(天理)를 두고 약속했던 엄청난 규약이 깨지느냐, 안 깨지느냐 하는 아슬아슬한 입장에서 노아만이라도 이것을 끌고 가서 맞춰 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겠어요? '내가 왜 이걸 했을까' 그랬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때마다 '노아야, 노아야, 그래서는 안 된다. 몇 년 지나 왔으니 몇 년 남았다' 하면서 계산해 가지고 '50년이 지나갔으니 이제 70년이 남지 않았느냐? 그걸 못 참아? 그랬겠어요? 그렇게 위로해 가면서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나님이 못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남자들도 소위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하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약속을 했으므로 '노아야, 나는 천지의 대주재되는 하나님인데 120년 후에는 틀림없이 이러이러한 일을 할 것이니 너는 배를 준비해라. 120년간 어떤 수난의 길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가지고 배를 지어라' 할때 '예' 하고 약속하고 나서 그런 환경에서 머리 속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를 생각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그런 생각을 안 했다면 그거 거짓말입니다.
노아가 일하러 나가는 시간이 평상시에 일곱시라면 그 시간에 나가야할 노아가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여덟시를 지나 아홉시를 지나고 열시를 지나고 열 한시를 지나 마침내 하루를 빠졌다고 합시다. 빠진 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만약에 하루를 빼먹는 날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하나님이 '야, 너 참 잘했다. 응당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는구나. 잘한다. 조금 더 생각을 그렇게 하지' 그랬겠어요? 노아가 빼먹는 하루가 하나님에게는 천년 만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럴 거 아니예요? 그 하루 때문에 억천만세의 성사(聖事)가 중단될 수도 있는 억울한 하루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하루의 억울함이 하늘땅의 억울함으로 남아질 수 있는 입장인데 하나님이 기쁘셨겠어요? 어떠했을 것 같아요? 기가 막힌 사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노아를 존경하고, 찬양하고, 찬사하는 말도 필요하지만 그 노아를 바라보며 나오신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고독하셨고, 얼마나 억울하셨겠느냐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것을 생각하는 무리가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벌도 줄 수 있고 복도 줄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고서 어떻게 노아에게 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벌을 줄 수도 있고, 생사화복을 주관할 수도 있는 그런 주체적인 절대권을 가진 분이기에 인간 세상의 비참한 고빗길을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인간을 그 고통의 자리에서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선두에 서서 고통을 받고 화도 받는 것이지, 옆에서 구경하는 분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저 복을 주는 것이냐? 천만에요. 복은 그냥 굴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데 있어서는 수천, 수만의 길을 가려 가지고 다시 찾아와 수습하지 않고는 복을 줄 수 없는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연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이런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기에 이러한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이 우리 인류와 더불어 누구보다도 고통을 당해 나왔습니다. 세계적인 대참사가 있고, 혹은 대전쟁으로 인해 비참하게 피 흘리는 자리가 있으면 누구보다 가슴을 조이고, 누구보다 눈물을 흘리며, 누구보다 안타까와하는 분,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혼란의 시대, 혹은 그러한 시대를 결정짓는 결전장을 맞이해 가지고 신음하는 세상의 어느 군왕보다도, 또 고난의 자리에선 어느 군왕보다도 신음과 고통을 느끼는 분, 이렇게 책임을 지고 몸부림치는 분이 절대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인류역사는 제물의 과정을 엮어 온 역사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물의 완성'이라는 말로 돌아가 봅시다.
제물이 왜 필요하냐? 고생한 어버이를 모실 수 있는 효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버이가 고생하며 걸어온 길을 더듬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고 난 후에야 비로소 효도의 방향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아버지를 알지도 못하고서 무턱대고 효도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과거에 이런 고생을 하셨다. 나를 키우시고, 나를 교육 하시기 위해서 이런 수난의 길을 걸어오셨다' 이렇게 아버지의 배후를 들추게 될 때, 비참하고 어려운 사연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효성의 길로 방향을 돌이킬 수 있는 키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눈물이 끊이지 않는 부모의 배후를 아는 자식은 부모 앞에 불효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은, 또는 종교에서는 수난의 길을 가라, 희생의 길을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그런 명령을 했겠느냐? 좋아서 그렇게 가르쳤겠느냐? 응당 인간이 수난길을 가야 하고 희생해야 하지만, 수난길을 감에 따라 하나님은 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희생하라는 말, 봉사하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 여러분, 이 말이 좋은 말이예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고, 인간들의 수난의 대가로 말미암아 찾아진 가치를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모르지만, 그 명령이 하나님과 직결돼 있는 문제라 생각하게 될 때, 그 수난길을 가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비참한 자리에서 얼마나 비장한 각오를 해 가지고 한 사람을 내세울 것이냐? 민족을 내세우고 가정을 내세울 것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세요. 자기들이 어려우면 어렵다고 번번이 한탄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을 했을 때, 그 원망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못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어 가지고 배급을 줄 수 있는데도 쌓아 놓고 안 주는 그런 하나님이겠어요? 자기의 뼛골을 다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비참한 자리에서 전진하는 하나님의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싫은 것은 원하지 않고 좋은 것만을 원합니다. 나는 비참한 것은 원하지 않고 행복한 것만을 원합니다. 어려운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십시오' 하는 불효막심한 녀석들이 있을 수 있어요? 지금까지 종교인들이 그렇게 믿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나온 종교인들의 그 역사가 길면 길수록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슬픔의 대상이 되어 한으로 남게 되고, 한탄의 대상이 되어 산맥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산이 아니라 산맥이 되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나 자체가 복받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놀음입니다. 이런 것을 깨닫고, 즉 하나님은 과연 슬픈 분이 틀림없으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대표적으로 세계를 위해서 나설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 길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나님 앞에 호소한 사람이 있었느냐? 이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천년 만년 서린 한을 다 풀어 놓고, 천년 만년 통곡할 수 있는 심정을 퍼부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어느누구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벌어지는 날에는 세계에 없는 새로운 진리의 길이 정해질 수 있는 가망이 있다는 것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역사과정은 제물의 과정을 엮어 온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역사의 철칙
'오늘날 우리 인류역사는 비참한 역사다. 인간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인간은 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인간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서 이렇게 만든 존재가 있다면 그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안 그래요?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우리의 원수라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면 그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과거가 그랬기 때문에 현재도 그런 것인데, 미래에 무슨 천국이 뭐구 뭐구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있으면 너도 참석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입장에서 강력히 권고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누구보다 고생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누구보다 제물적인 자리에서, 제물 이상의 고충을 느끼면서 악의 세계의 판도를 방지하기 위해 수난길을 책임지고 나오신 분이 아니고서는 우리에게 또다시 명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귀노정에는 개인적으로 희생하는 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희생해 가지고 가정을 찾아야 됩니다. 가정을 찾음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느냐? 가정을 찾았으면 그 가정의 판도를 넓혀서 악한 세계에 있는 종족을 찾기 위해 그 가정은 희생해야 됩니다. 이것이 복귀역사의 철칙입니다. 가정을 제물적으로 회생시켜 가지고 안팎이 일치된 자리에 서야 종족이면 종족, 씨족이면 씨족, 친척이면 친척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척이면 친척을 찾아 가지고 고이 살라고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본래 인간의 욕심이 그렇지요? 인간은 세계를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어린아이도 전부 다 그렇습니다. 우리 아가씨들도 다 그럴 것입니다. 너희들도 그렇지? 얌전하고, 얼굴도 조그마하고, 마음도 조그마하고, 걸음걸이도 전부 다 짤막짤막한 그런 여자에게도 자기가 세계에서 제일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를 다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욕심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소원하고, 죽을 때까지 그러길 바라는데, 한번도 이루어 주지 않고 다 죽여 버리고, 단념하게 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얼마나 악한 하나님이예요? 자식이 떡을 하나 사 달라고 할 때 그것을 사 주지 못하는 부모의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다 세계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세계는 내 것이다'라고 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 싶은 마음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럴 수 있는 어느 한때도 갖지 못하고, 소원을 한번도 이루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게 만든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이예요? 악한 부모도 그만큼 참았으면 한번은 소원을 이루어 줄 텐데…. 안 그래요?
그러면 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간단합니다. 세계를 만드신 그분의 아들딸이 되면 됩니다. 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지하려고 세계를 붙잡고 싸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면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므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겁니다. 여기 학생들, 아버지 집이 자기 집이지? 아버지 집이 자기 집이고, '이 집은 우리 집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의 집이야' 그러는 아들딸이 있어요? 코가 찌그러지고, 다리는 절룩절룩거리고 배밀이 하는 병신 사촌 같은 녀석이라고 해서 이게 누구의 집이냐고 묻게 되면 우리 아버지 집이라고 그래요? 형편없는 아들이라 해도 누구의 집이냐 물으면 우리 집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걸 볼 때 세계에서 제일 되는 길이 있기는 있습니다. 다들 욕심을 채우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 보라구요. 얼마나 자랑하겠어요? 일하고 싶겠어요? 여러분, 일하고 싶겠어요? 취미로는 일을 할는지 모르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밥 때문에 일하고 싶다고는 않을 것입니다. 취미적으로 일은 할는지 모르지만, 먹기 위해서 일한다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그런 소망이 타당하지 않게 되면 그것은 원수입니다. 인간이 이땅에서 천년 만년 사는 것도 아니기에 한번은 소망을 이루어서 세계에서 제일이 되어 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할 말이 많으나 하지 않고 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을 두고 봐도…. 여러분이 통일교회가 좋아서 왔어요? 까놓고 얘기합시다. 통일교회 문선생 편이 되고자 왔어요? 어림도 없는 거예요. 갈고리를 가지고 찍고, 쪼으고, 자르고, 비판하고, 비교하는 별의별 흉측하고 망측한 꼴을 다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처음에 여기에 올 때, 궁둥이는 문턱 너머에 놓고, 다리는 안쪽에 들여놓고, 별꼴을 다 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을 순하게 생겼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봤다면 계산 착오입니다. 나는 옳지 못한 것을 보게 되면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못난이 모양 꾹꾹 참고, 별의별 말을 다 들어도 못 들은 체하고 다 흘려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체격이 이만해 가지고 누가 한대 때리면 나는 두대 때릴 수 있는 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비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두 사람 다룰 줄도 알고, 운동도 못 하는 운동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다 하는 사람입니다.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성격이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서 있는 선생의 성격은 지극히 강하다면 강한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한번 한다 하게 되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리고 내가 직접 하지 데데하게 누구의 신세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절대 신세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모르면 몰랐지 물어 보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모르는 문제를 풀기 위해 혼자 최대한 연구하고 최대한 노력했는데도 안 되게 될 때에는 물을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입니다. 못난이 중의 제일 못난이라구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청파동에 박혀 있는 이 사람이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입니다. 세상 목사들 중에는 나를 본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면 볼 수 있습니다. 뭐, '교수들 공청회도 하는데,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은 왜 나와서 인사도 안 하느냐? 내가 그런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인사를 하려면 소개를 해야지, 소개를 하려면 경력을 밝혀야지, 경력을 밝히면 옳고 그름을 따져서 당신이 옳으냐 내가 옳으냐 하는 판결을 지어야 된다 이겁니다. 덮어놓고 좋다거나 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인사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말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의 얼굴을 척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압니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사람 다루는 전문가라구요.
그러면, 왜 그런 자리에 나타나지 않느냐? '출세를 하려면 선전을 해야지' 하는 사람도 있지만 선전이 문제가 아닙니다. 선전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타나 가지고 하고픈 말을 다 하고 나면 닻줄이 늘어지더라는 것입니다. 태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닻을 새것으로 단단히 죄어 가지고 사방에 고정시켜 놓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흐느적흐느적하고 어영부영 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내 갈 길이 바쁘다는 겁니다. 내 갈 길이 바쁘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야 나를 만나고 싶으면 통일교회로 오면 되는 것이고, 이 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길도 있는 것입니다.
또,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그들을 칭찬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만나게 되면 그들을 들이 깔 것입니다. 목사들에게 할 말이 한없이 많습니다. 대학가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할 말이 많습니다. 이 나라 주권자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옳고 그른 것, 전후가 거꾸로 되어 있으니 바로잡아서 사연을 가려야 되는데 그런 말을 하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으므로 차라리 안 나타나는 것이 그들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파동 골짜기에서 허리 부러진 호랑이처럼 이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 일이 되어 가는 내용을 모른다
하나님이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훌륭합니다. 또 세례 요한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기독교인들은 믿고 야단 하고 있지만, 흉보기에 딱 알맞은 사람입니다. 남들은 옷을 입고 살았는데 그 사람은 뭘 입고 살았어요? 약대 털옷. 거 좋지, 약대 털옷이 얼마나 훌륭해요?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입을 옷이 있는데, 약대 털옷을 입었을 것 같아요? 형편이 무인지경이었다는 거예요. 다음에, 먹는 것은 뭐예요? 메뚜기와 석청. 아이구, 신선 같구만….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메뚜기가 매일 아침 날아와요? 또 석청이 바위돌 밑에 고드름처럼 달려 있어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나라를 가 보세요. 반 사막지대입니다. 기가 막힌 곳입니다. 그걸 볼 때 '아이구, 성경 우습구만' 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20리 안팎의 이야기들입니다. 이 골짝 저 골짝, 앞집 뒷집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렇게 크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세계의 문화권을 조성했습니다. 이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수께끼 같은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이 석청을 먹고 지냈다는데, 그 석청의 덩어리가 커요? 생각해 보세요. 석청이 돌 틈바구니에 있다면 그 틈바구니의 크기만큼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무 구멍에 있다면 그 구멍의 크기만큼밖에 없는 것입니다. 배가 큰 사람은 일주일도 못 먹을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세례 요한이 먹기 위해서 얼마나 고달팠겠나 생각해 보세요. 메뚜기가 그에게 나를 잡아먹으라고 날아올 것 같아요? 생각하면 편하고 좋아 보이지만, 까놓고 이야기하면 기가 막히는 얘기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 누구냐? 세례 요한입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며, 약대 털옷을 입고 다니는 세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났을 때 구경꾼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어른들도 따라다니며 구경할 터인데, 아이들은 하루 종일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웃음) 생각해 보라구요. 세례 요한만 보면 저거 저거 미치고 돈 녀석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다니고, 동네 개도 짖으면서 따라다니기가 일쑤였을 것입니다. 그가 무얼해 가지고, 그 사회에, 그 환경에 이익 될 수 있는 일을 했겠어요? 그럴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오해할는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서 얘기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님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주제가 어떻고 어떻고 하는 얘기하네' 할는지 모르지만 전후를 가려서 얘기하는 것이니 올바로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주제에 하는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하니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했지만 천국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는지 아직 멀었는지 보여요? 따지고 보면 미친 녀석이라는 것입니다. 미친놀음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걸 보면 한국 백성보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수한 백성입니다. 세례를 준다고 하니까 그래도 살겠다고 전부 다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러다가 예수님이 나오니 예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례를 주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에게 머물렀더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했습니다. 그 말이 될 말이예요? 그 말을 누가 입증해요? 누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보증설 사람이 누구예요? 임자들이 될 것 같아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일은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라구요. 그는 떠꺼머리 총각이었어요.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라 하지만 그때도 예수님이라 했겠어요? 친구들이 '예수님' 그랬겠어요, 동생이 '예수님' 그랬겠어요? 오히려 비웃었을 것입니다. 친구들도 '야 야, 예수야' 그랬을 것입니다. 동네에서 주먹받이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안방에 사는 어떤 남자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떠꺼머리 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서른 살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가고, 목수 조수나 하면서 쭉 박혀 있다가 3년 공생애노정인지 뭣인지 한다고 집을 나갔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스스로 집을 나간 줄 알아요? 사실은 쫓겨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이 다음에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기로 하겠습니다. 잘 믿는 기독교 목사들 오게 되면 내가 샅샅이 얘기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렇게 자랐고, 요렇게 요렇게 했다고…. 그런 걸 알면 눈알이 튕겨져 나오도록 통곡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믿으면 천국에 가요?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시험장에 들어가면 백점을 맞을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어요? '믿고 가기만 하면 백점 맞지' 그렇게 천년을 가 보세요, 백점 맞나? 그렇게 엉터리들입니다. 형편없는 주제들입니다. 그런 패들이 통일교회에 대해서 가짜고 어떻고, 전통이 어떻고…. 실력으로 대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최후에는 실력이 판가름해 줄 것입니다.
이렇게 버티고 나오다 보니 통일교회도 많이 소문났습니다. 이제는 우리 통일교회는 어떤 주권자도 뽑아 버리지 못할 만큼 세계적 기반을 닦았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통일교회는 발전합니다. 나는 예수와 같은 비운의 사나이가 아닙니다. 다시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뜻은 이루어집니다,
제물은 소유를 결정하기 위한 조건물
성인도 그렇습니다. 위인은 각 나라마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인은 국경을 못 넘습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세계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성인이 뭐냐? 그 시대에 희생의 길을 갔더라도 세계를 위해 산 역사적인 전통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통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싸우지 않고도 전승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 중의 성인은 누구냐? 성인은 누가 세우느냐? 하나님이 세웁니다. 그런 성인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죽어야 됩니다. 성인들 가운데서도 생명을 바친 성인이 더 훌륭합니다.
복을 받을 때에 불평하지 않고, 복 받은 것에 대하여 응당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동네면 동네에서 정정이나 부리고 살랑살랑 남의 눈치나 보면서 편한 일을 하려고 하고, 남의 잔치 집에나 다니면서 피리나 불어 주는 그런 패들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그 부락을 위해서 봄이 다가오면 봄 준비에 바쁘고, 여름이 다가오면 여름 준비에, 가을이 다가오면 가을 준비에, 겨울이 다가오면 겨울 준비에 바쁜 걸음을 걷는 사람이 그 부락에서는 복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받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물의 완성이라고 했는데 제물은 어떤 때에 이루어지느냐? 제물이라는 것은 내가 슬플 수 있는 장면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될 수 있습니다. 대신 잡아간다는 말 있지요? 대신 잡아간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내가 죽을 판국에 놓였을 때 제물을 자기 대신으로, 죽은 것으로 인정해 주고, 자기를 거기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길을 세워 달라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물은 대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원리로 말하면 소유물을 결정하기 위한 조건물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소유물? 악한 내가 되느냐, 선한 내가 되느냐? 이것은 반드시 판가리지어야 됩니다. 즉, 선과 악을 판가리지어야 됩니다. 선과 악이 엇갈려야 합니다. 엇갈리는 데는 부정이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복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이 첫번에 말씀한 것이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 전부 다 역설적인 논법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느냐? 제물의 과정을 거쳐야 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빠져 있는 인간이 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의 시대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복귀섭리를 중심삼고 볼 때, 제물은 누구에게 바치느냐?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제물을 좋아하시는 분이냐, 나빠하시는 분이냐? 제물을 좋아하시는 분이예요, 나빠하시는 분이예요? 대답해 보세요. 어디 남자분들, 여자분들. 똑똑히 대답해 보세요. 하나님이 제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나빠한다고 생각해요?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싫어하십니다. 제물을 싫어하시지만 할 수 없어, 안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제물을 잘못 바치는 날에는 아무리 잘 믿던 사람이라도 원수에게 목매여 끌려가게 됩니다. 제물로 말미암아 자식이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잘 바쳐지는 날에는 소망의 뜻이 이루어져서 기쁠 수 있는 제물이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탄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를 보세요. 언제나 제물을 놓고 싸움을 해 가지고 하나님이 승리했어요, 실패했어요? 승리했어요, 실패했어요?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실패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예요? 아닙니다. 그러기에 제물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무섭지만 하나님에게도 무서운 것이요, 사탄에 게도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사탄편 사람이 몽땅 제물로 바쳐지는 날에는 하나님 앞에 넘겨줘야 되고, 몽땅 바쳐지지 못하는 날에는 사탄에게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왔다갔다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경각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생사의 결정이 경각에서 좌우되는 판가리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물의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사탄은 자기의 소유물을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은 되찾으려고 하는 소유권, 소유물을 결정하는 심각한 자리입니다.
제물은 정성들인 숫것이어야
투전판이라든가 도박장에 가서 체험해 본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여기에 선 이 사람은 그런 것도 알아야 되겠기 때문에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도박의 심리와 복귀섭리의 심정이 똑같습니다. 몽땅 털어 넣고 지더라도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투전판에 다니는 녀석들은 있던 것을 다 털어 넣고, 나중에는 저고리까지 벗어 걸고 하는 것입니다. 저고리 뿐만이 아니라 조끼까지 벗어 걸고 마지막에는 팬티만 입고도 그 놀음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알몸뚱이가 되어 가지고도 걸고 늘어질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걸고 늘어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도박하는 사람의 심리입니다.
이걸 보게 되면 복귀섭리와 똑같습니다. 사탄도 그렇고, 하나님도 그렇 다는 것입니다. 걸고 늘어질 것만 있으면 걸고 늘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변호사가 그렇잖아요? 변호사가 공판정에 서서 유리한 변호 조건만 있으면, 시시콜콜하더라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늘어놓는 것입니다. 또, 검사도 역시 걸고 늘어질 것이 있으면 그것이 시시콜콜한 것이라도 다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판정에서는 검사도 잘못하면 '그놈의 검사'라는 딱지가 붙는 것입니다. 판사도 잘못하게 되면 딱지가 붙고 변호 사도 잘못하면 딱지가 붙습니다. 그러니 심각한 자리입니다.
제물을 드릴 때는 숫것을 드려요. 쓰다 남은 것을 드려요? 「숫것이요」 왜 그래야 돼요? 한국에서도 그렇잖아요. 성황당 같은 데서 제사를 드릴때 소를 잡으면 암소를 잡아서 드려요. 황소를 잡아서 드려요? 「…」 이런 것을 다 모르는구만. 고대 희랍이나 시리아 같은 데의 역사를 보면, 제사를 드릴 때에는 동물을 잡아서 드렸지만 나중에는 사람도 잡아서 바쳤습니다. 우리나라 심청전에도 나오지요? 사람을 제사 드릴 때에 여자를 드렸어요, 남자를 드렸어요? 「여자요」 그거 왜? 이걸 보면 통일교회 타락론과 똑같습니다. 왜 젊은 숫것을 드리느냐? 숫것을 드려야 됩니다. 사탄세계의 숫것을 잡아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세계의 숫것을 누가 빼앗아 갔어요? 사탄이 빼앗아 갔지요? 그렇지요? 「예」 그러니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더라도 숫것을 놓고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쓰다 남은 것 가지고 정성 들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라는 것은 제일 정성을 들인 숫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물입니다. 이런 얘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하여튼 제물을 드리는 데는 숫것을 드려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들을 제물로 드린다면 어떤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 되겠어요? 미운 아들? 소망이 없는 아들? 그런 아들은 제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아들이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제물은 '나' 대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시받는 것이 좋아요?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아주 겸손한 사람 같지만 그축에서 빼놓게 되면 눈이 뒤집어진다고요.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말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접해 주면 기분 나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것이 뭐냐? 자기는 할 수 없어서 그렇지, 자기를 끝까지 높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높이고 싶은 자기를 대신해 제물로 드리는 것은 자기가 세계 제일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자기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자기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자기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천국이 있더라도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제일 귀하고, 내가 제일 값지다고 생각할 때, 나를 대신한 물건은 보다 가치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물은 정성을 들인 물건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여러분이 교회에 헌금할 때, 어디에서 막걸리를 사 먹다 남은 돈을 헌금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돈은 더러움을 탄 것입니다. 또 시장에 가서 뭘 사다가 남은 돈으로 헌금을 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거기에 같이하시지 않습니다.
제물은 자기 대신
제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자기 대신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서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복귀섭리 역사를 하시는 데 있어서는 주먹구구식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복귀섭리는 재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다시 찾는 역사이기 때문에 원칙을 따라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원칙을 따라 재창조의 역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 놓았지만 지어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사람이 서 있기 때문에 다시 지어졌다는 조건적인 입장에 갖다 맞춰야 됩니다. 사람은 만물로 말미암아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몸뚱이는 만물과 통합니다. 만물에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되지요? 그렇지요? 몸은 만물의 집결체입니다. 이 몸뚱이는 이 땅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나 자체는, 마음은 하나님의 일선이요. 몸은 사탄의 일선입니다. 이렇게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갈라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망해요, 사탄이 망해요? 둘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둘 다 망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사탄과 의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전부 다 자세히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도 망하는 것이요, 사탄도 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다 그만이라구요. 사람 때문에 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니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일선이요, 몸은 사탄의 일선이기에 몸과 마음은 매일 싸웁니다. 삼팔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삼팔 선으로 갈라져 가지고 하나님의 유심사관을 중심한 민주주의와, 사탄의 유물사관을 중심한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심어졌으니 이것이 세계적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시대는 가을절기의 문명시대입니다. 가을절기의 문명시대라구요. 지금 문명권은 온대권에 서 있는데, 봄절기가 아니라 가을절기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영국이나 미국이나 지금 세계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들은 모두 온대권내에 있는 국가들입니다. 그런데 그 문명권은 가을절기의 문명권이기에 내려가는 운세권입니다. 가을이 가까와오니 북풍한설의 소비에트 문명, 한대권 문명이 세계를 풍미하는 때라는 거예요. 이때가 40년의 역사를 거쳐 나가는 때인데 이미 지나갔어요. 그 시대는 망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새로운 봄절기의 문명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통일교회의 원리적인 술어로 말하면 중화문명(中和文明)시대, 혹은 원화문명(圓和文明)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제물이라는 것은 뭐냐? 내 몸뚱이를 대신한 것입니다. 몸뚱이는 사탄의 일선이요, 마음은 하나님의 일선입니다.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에서 평화의 기수를 발견하지 않고는 세계의 평화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는 무엇을 지도해 나오느냐? 마음을 살리고 몸뚱이를 점령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희생봉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뚱이를 때려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이지 말고 금식을 시키며 고통을 주라는 것입니다. 고행길을 가게 하고, 희생 봉사를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제물을 바칠 때는 자기가 맛있는 것을 먹었으면, 제물에게 통고해야 됩니다. '나 오늘 잘 먹었는데, 아이고 너하고 같이 먹을걸. 너는 못 먹었지만 오늘 내가 좋으니 너도 좋아해 다오' 이렇게 통고를 해야 됩니다. 제물은 자기 몸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제사장이 갈라서 드려야
자기 대신 제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을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갈라야 됩니다. 나누어야 됩니다. 제물을 쪼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을 누가 잡느냐? 제사장이 잡는 것입니다. 아무나 잡는 것이 아니예요. 잡아 가지고 나누어야 합니다. 제물을 나눌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물이 희생될 때 나도 희생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제물이 나 대신 희생하니 나는 제물에 대해서 머리를 숙이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제물과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제물을 가르면 한편은 하늘편이고 한편은 사탄편입니다. 그래서 가르는 놀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데 있어서는 춘하추동 바쳐야 됩니다. 제물을 바치는 데 있어서 원래는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 시대에 다 바쳐야 됩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제물을 바치고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물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늘편과 사탄편을 갈라야 됩니다, 그렇게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가지고 정성껏 제물을 드렸다, 하나님 뜻 앞에 있어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이 굴복해 가지고 제물을 드렸다 할 때에는, 몸 자체에 속하였던 사탄이 분립됩니다. 제물로 말미암아 쪼개져 나가는 것입니다. 제단에 몫을 같이 놓았지만 제물을 하나님이 받았다 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 제물이 삼위일체가 되는 거예요. 창조법도가 하나님, 사람, 만물이라는 것입니다.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것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쪼개 하나님 몫과 사탄 몫을 같이 놓았지만, 제물을 바쳐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일체가 되게 되면 제물은 하나님에게로 넘어가는 것이요. 만약 제물을 잘못 바치게 되면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칠 때에는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시간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일생 동안에 제물적인 기도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은혜가 내리는 때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해보면 알게 됩니다.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되면 대번에 안다는 겁니다. 그 방향도 동서남북,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동서남북과 같은 방향이 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혹은 춘하추동의 절기와 같이 태어난 소질에 따라서 기도하는 정성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시간도 달라집니다. 아침에 기도를 해야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점심 때, 어떤 사람은 오후에, 어떤 사람은 새벽에 기도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소질에 따라 다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제물을 중심삼아 가지고 분립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단 합하게 되면 몽땅 하나님이 차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차지하시게 되면, 비로소 제물도 나도 하늘편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역사를 지금까지 해 나오신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만물을 제물로 드린 시대
구약시대는 무엇을 제물로 드렸느냐? 물질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신약 시대의 제물은 뭐냐? 아들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성약시대의 제물은 뭐냐? 부모가 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재창조 역사를 하는 데 있어서 참된 만물,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참된 만물이 없어 가지고는 사람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이 세상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사탄의 주관권내에 들어간 만물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피를 흘리게 하여 갈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이 일치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연의 인간을 중심삼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칙을 따라 받은 제물을 중심 삼아 가지고, 사람을 다시 찾았다는 조건을 세워 가지고 분립권을 만들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자기 몸뚱이 대신 제물을 바쳤습니다.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양을 잡아 제사드리고, 더 나아가서는 무슨 보물을 바쳐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해 왔습니다. 만물을 짓고 사람을 지었기 때문에,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제물을 통해서 찾아 나오던 한계점이 어디냐? 개인이 아니예요. 가정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단입니다. (판서하심 ) 내적인 한계점은 유대교단이요, 외적인 한계점은 나라인 것입니다. 나라가 세워져 가지고 그 나라와 교회가 합해지면 주인이 와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 나라를 봉헌할 수 있을 때까지 제물의 역사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구약의 역사란 무엇이냐? 제사장들이 관리하는 이스라엘 나라와 이스라엘 교회를 대제사장 되시는 메시아 예수가 올 때에 그 앞에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흠 없이 잘 길러진 목자들과 마찬가지이고, 양을 치는 주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들은 제물을 바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래의 메시아를 중심삼고, 미래의 소망을 중심삼고 제물을 바쳐서 판도를 넓혀 가지고, 내적인 유대교와 외적인 이스라엘 나라를 안팎으로 한꺼번에 묶어 가지고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제물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예수
이런 입장에서 제물을 바쳤더라면 어떻게 되었느냐? 그때 교회와 나라가 갈라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시에 하나님 앞에 바쳐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반드시 로마에서 갈라져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거기서 갈라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갈라내 가지고 제물을 바치는 자리에까지 나가야 했는데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그때 예수님이 제물을 바쳤다면 일시에 제물의 목적이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그 이후 제물은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물의 열매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교회와 나라를 연결시켜 가지고 한꺼번에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나라의 주권이 하늘 나라의 주권으로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의 판도를 보게 되면, 중동지역을 중심삼은 로마의 말단 행정력이 약화된 때였습니다. 빌라도와 같은 사람이 민란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했던 것을 두고 보면 행정력이 약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심이 소란해져 큰 문제가 벌어질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자리를 잡아 기수가 되어 가지고 혁명의 봉화를 들고 일어났더라면, 아랍권-이방인이라고 싸워 나왔지만 전부 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후손들이므로-을 일시에 규합해 가지고 로마 제국과 대결해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봉화를 들고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꺼번에 교회와 나라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이 대제사장 메시아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제물을 못 바쳤기 때문에 제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제물을 드리려고 주인이 왔는데, 주인을 무시해 가지고 쫓아 버렸습니다. 제물을 바쳐야 할 책임자가 제물을 바칠 제단을 잃어버리고, 성전을 잃어버린 입장에 섰으니 다시 성전을 지어야 되고, 다시 제물을 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칠래야 바칠 수 없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은 잃어버린 교회와 잃어버린 나라보다 가치 있는 것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유대교의 열매였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 대신 제물되는 희생의 자리에 나가고, 세 제자가 자진해서 제물되는 희생의 자리에 나가고, 열두 제자가 합하여 이스라엘 족장을 대표해 가지고 제물되는 희생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교회를 잃어버리고, 나라를 잃어버리고, 120문도, 70문도, 열두 제자, 나중에는 세 제자까지 다 잃어버린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워 놓은 구약시대의 제물의 터전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쳐야 할 제물의 기대를 잃어버렸고, 제물을 잃어버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책임지고 완결지어야 했기에 자기 일신을 이스라엘 나라와 교회를 대신하여, 몸뚱이는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고 마음은 유대교를 대신한 실체로서 제물을 드리게 된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노정입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양자의 입장에서 제물되신 예수
만물 제물시대를 거치고 난 다음에는 실체 제물시대입니다. 아들이 제물입니다. 그런데 아들로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원리 원칙을 두고 볼때,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그러한 천리의 법도, 천리의 법칙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제물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더라도 언제나 제물되는 운명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느냐? 아들의 자리에서 한 급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들의 자리에서 세례 요한과 구약시대의 제사장을 대표한 자리에 떨어져 죽어갔습니다.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양자의 자리입니다. 알겠어요? 양자의 자리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양자의 자리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양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예」 양자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세례 요한을 중심삼아 가지고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하나되었더라면, 거기서부터 예수님은 대번에 아들의 권위를 거치고 가정을 거쳐 가지고 부모의 자리까지, 인류의 참다운 조상의 자리, 즉 아담 해와를 중심삼은 거짓 부모의 기원을 복귀한 선의 부모의 기반을 닦아놓았을 것입니다. 일시에 이루어졌을 거예요. 또 그렇게 되면 종족적인 승리도 일시에, 민족적인 승리도 일시에, 국가적인 승리도 일시에 이루어 가지고 나라의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라고 했지만, 말로만 만왕의 왕이지 만왕의 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개인복귀를 해서 가정복귀를 하려면 반드시 제물을 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탕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야곱 시대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쫓김을 받았고, 얼마나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 나왔습니까? 이렇게 4천년 동안 근근이 쌓아온 공적이, 그 역사적인 터전이 일시에 왕창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결지어야 할 나라가 깨졌고, 교회의 목적도 깨졌고, 종족의 목적, 가정의 목적, 개인의 목적도 왕창 깨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들의 권위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자리는 아들은 아들인데 양자, 양자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는 것은 뭐냐? 양자의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것입니다. 양자는 뭐냐? 아버지와 핏줄이 다릅니다. 혈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천사장권에 있어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 앞에 복귀된 천사장의 입장에서 종의 주인이 되어야 할 세례 요한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홀로 와서 어떤 자리를 택했느냐? 구약의 마지막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출발은 어떻게 되느냐? 양자라는 것은 혈통이 다른 거예요. (판서하심) 원래 양자로 세워진 것이 누구냐 하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천사장 대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 앞에서 반대한 천사장이 아니라 아담을 끝까지 위할 수 있는 천사장편 땅 위의 대표자로서 세운 것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받들지 못하고,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비운의 역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책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4천년 역사를 파탄시켜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그 역사를 남겨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남기는 데는 영적 세계와 실체세계로 갈라 가지고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자세계와 실체세계를 남기고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다가 가실 때는 구약의 완성인 동시에 신약의 출발이 이뤄져야 하는데, 완전한 출발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천사장의 책임을 해 온 종교
그러면 예수님은 돌아가신 뒤에 지금까지 뭘했느냐? 예수님은 낙원에 갔습니다. 천국에 못 갔습니다. 이걸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책임을 했느냐? 이 땅 위에서 만민을 대하여 메시아의 책임을 했으되 그것은 양자적인 책임을 한 것입니다. 저나라에 가서는 뭘 하느냐? 천사장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천사장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는 천사장의 대역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생명을 바쳐 충성할 수 있는 대역자를 길러 낼 때까지 그 대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영적인 구원을 중심삼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가 있었지만 기독교인은 나라가 없는 민족입니다. 천사장이 나라가 있어요?
지금까지 종교는 뭘 했느냐 하면 천사장권을 만들기 위해 나왔습니다. 세계적 대표자의 천사장권을 만들어 오시는 아들 앞에 절대 복종할 수 있도록 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계급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은 상대가 되는 이성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독신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천사장권 복귀역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걸 잘 모를 것입니다. 종교에서 왜 독신생활을 하느냐? 종교에서는 왜 결혼생활을 허락할 수 없었느냐? 천사세계가 타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세계를 복귀한 형을 완결지어야 아담의 세계가 나옵니다. 땅 위에서 그것을 결정지어야만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예수님의 몸뚱이는 누가 가져 갔느냐? 사탄이 가져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상 이스라엘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권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문명권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나라가 이 땅 위에 없습니다. 기독교 문명을 가진 국가가 많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국가는 아닙니다. 언제나 옮겨질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이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지 못한 아들의 사랑을 받아야 할 재림주
만물에서부터 양자적 승리권을 거쳐 가지고 아들의 승리권을 거쳐 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해 올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아무리 잘 믿어도 하나님의 아들은 절대 못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 아버지가 계신 곳에 가지 왜 낙원에 갔겠습니까? 낙원은 뭐냐? 천국 들어가는 대합실입니다. 천국에는 혼자서는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본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살다가 죽어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못 들어갑니다. 여러분도 혼자서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도 혼자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재현해 가지고 신랑의 입장에서 신부를 찾아 상대를 결정해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받기는 받았지만 완성적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탕감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와 가지고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완성적인 사랑을 받은 아들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시 와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아들은 뭐냐? 아담의 자리를 복귀한 것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해와가 지어졌기 때문에, 여기서 상대를 찾아 한 가정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천도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부모의 기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통일교회 술어로 말하면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부모가 나오기 전에 참자녀가 나와야 됩니다. 참자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걸 여러분이 몰라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자녀의 수속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통일교회 원리를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심정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리고 참자녀가 참부부를 이뤄 사위기대의 목적을 달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제물을 바쳐 왔기 때문에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금까지 피를 흘려 나온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출발 당시에는 피를 흘리지 않으면 교회가 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만 봐도 그랬습니다. 대원군 시대에 그랬잖아요?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최후에는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재림주님이 이 땅에 와 가지고 아들로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다 받아야 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을 했습니다. (판서하심)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완성급까지 가야 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7년이라는 기간입니다. 이상상대는 어디서 생기느냐? 장성기 완성급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축복해 주는 자리가 장성기 완성급입니다. 축복을 받아 가지고 완성적인 7년노정이 통일교회에는 있는 거예요. 그것이 1차 7년노정, 2차 7년노정, 3차 7년노정입니다. 통일교회는 이런 세계적인 노정을 거치는 운명길을 가고 있습니다. 금년이 2차 7년노정에 있어서 4년째를 맞이한 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의 정세는 통일교회가 가는 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급변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원리의 방향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만 얘기합시다. 복귀역사는 잃어버린 역사를 그 모양 그대로 이루는 것입니다. 2차대전 직후에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부흥의 판도가, 부흥의 분위기가 벌어졌습니다. 신령한 집단들은 주님이 오신다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산에서, 혹은 굴에서 그날을 준비했던 무리 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다 가 버렸습니다. 맨 처음에는 이성봉 목사, 박재봉 목사, 무슨 목사, 무슨 목사 목사들이 야단을 하더니 다음에는 장로들로 떨어져요. 무슨 장로, 무슨 장로, 다음에는 권사, 집사 들로 떨어져요. 그러더니 다 지나갔습니다. 역사의 보조를 맞추면서 목사가 지나가고, 장로가 지나가고, 권사, 집사가 지나가고, 이제는 교인의 시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앞으로 살려면 교회에만 나가서는 안 됩니다. 산으로 들로, 세례 요한이 갔던 길을 다시 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굶고도 살 수 있다고 각오한 사람이라야 앞으로 갈 길을 만날 수 있는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왜? 교회가 책임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이 나라와 기독교가 통일교회를 받아들였더라면
해방 직후에 이 나라가 통일교회를 맞이했더라면 공산당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통일교회는 승공연합을 중심삼고 한국에서 명실공히 승공활동에 있어서는 첨단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반공연맹이 있지만 실력기준에 있어서는 누구도 승공연합을 부정할 수 없는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직후에 기성교회가 통일교회 문선생과 손을 잡았더라면 이 세상은 뜻대로 다 되었을 것입니다. 공산당은 벌써 내 손에 나가떨어졌을 것입니다.
해방 직후는 군정시대였습니다. 주권이 세워지려면 3년 기간이 있어야 했습니다. 정부 수립이 1948년이었으니까, 해방 직후부터 3년간 완충기간이 있는 거예요. 이 기간에 기독교와 통일교회가 연합해 가지고 부흥을 해야 했습니다. 일본의 신사참배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계 공산당과 사탄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운명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서로 싸웠던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그 싸움하는 가운데 끼어 가지고 반대를 받게 되니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내가 이북에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 길과 같이, 반드시 원수세계에 가서 빼앗아 와야 됩니다. 찾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음을 해 가지고 갈라졌던 나라, 나라가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던 데에서 재봉춘한 것입니다. 의붓자식과 같이 몰리고 쫓겨나 가지고 제일 원수의 세계에 들어가 기반을 닦아서 남한 땅에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별의별 소문을 남기면서 21년노정을 걸어온 거예요. 이제는 기성교회를 대해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일교회가 실력에 있어서 '너희들에게 지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기성교회와 보따리를 바꾸어 쥐는 거예요.
앞으로 대한민국은 통일사상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안보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를 원수로, 통일교회를 하나의 종파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이 그렇게 못 하면 일본 사람들을 무장시켜 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에 일본 사람들 몇백 명을 데려다 계속적으로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만 지나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왜, 일본 사람들만 부르시고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안 부르십니까?' 할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통일교회 문 아무개라는 사람은 이름은 없지만 아시아가 가는 방향에 있어서 그 누구도 모르는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몰라요.
한국과 일본과 중국은 하나되어야
오늘날 구보끼가 일본에서 유명한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40대 젊은 사람으로서 일본 조야의 거두들이 일본을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로 생각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것이 누구에 의해서 되었느냐? 여기 청파동에서부터 그렇게 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일본이 어떻게 나가야 되느냐? 지금까지 내가 말한 대로 그렇게 다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승공연합의 닻은 어디에 내려야 하느냐 하면, 인도에 꽂혀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중국은 남진정책을 할 것입니다. 소련은 북방에서의 국경분쟁이 문제입니다. 소련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원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때에 사상전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사탄세계가 한번 갈라졌다가 화합할 것입니다. 갈라졌다가 화합하려면 하나가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중공은 앞으로 국경분쟁보다는 남진정책을 세워서 경제기반을 조성하려고 할 것입니다. 남진정책을 세워 가지고 무진장한 남방의 자원을 발굴하여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준을 갖게 되면 중공이 소련과 백년전쟁을 한다고 해도 소련이 못 당할 것입니다. 소련이 그걸 알기 때문에 중공의 남진정책을 방지하기 위해서 함대를 인도양에 배치하고, 인도지나를 중심삼고 아시아의 안보문제까지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소련이 인도와 불가침조약을 맺었습니다. 일본도 거기에 제까닥 걸려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그건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일본이 가야 할 방향 문제라든가 이런 등등의 전반적인 문제를 제시해 가지고, 최고로 여기에 알맞은 사람들한테 줄을 달아서 지금 모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정부를 대해서는 내가 만나지 않습니다. 우리 기반 닦기에 더 바쁩니다. 여러분이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한국과 일본과 중국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일본, 중국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이냐? 경제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력 가지고도 안 됩니다. 사상적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통일사상을 내세워야 합니다. 중국의 장개석도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문제를 국가가 모르는 가운데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본에 선교사를 보낼 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밀선을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때는 이화여대 사건으로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나온 때였습니다. '이 나라의 금후의 갈 길은 일본을 품지 않으면 안된다. 천운이 그 길을 걸어오기 때문에 일본을 품어야 된다'고 하면서 보냈습니다. 일본을 품는 데는, 아는 사람이 그 깃발을 꽂아야 되겠기 때문에 내가 법치국가의 한 국민으로서 위법인 줄 알면서도 보낸 것입니다. 현재는 이것이 법에 위배될지 모르지만, 금후에 한국이 가야 할 길이 그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연코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 내가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이 교회를 2백만 원을 빚을 내 가지고 사서 젊은 사람들을 보내 대청소를 하여 사흘만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1958년 8월에 최봉춘이를 충청남도 갑사 뒷산으로 불러 가지고 일본 선교의 특명을 내렸습니다. '너는 현해탄을 건너야 된다.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준엄한 것이다' 이렇게 다짐시켜 가지고 밀선을 태워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1차에서 걸리고, 2차에서도 걸리고, 3차만에 간 것입니다. 3차에 갔어도 오오무라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더라도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꾀병을 부린 것입니다. 사흘 동안 소금을 먹어 몸에서 열이 나니까,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휴식시간에 탈출을 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해 가지고 길을 닦아 놓은 것이 현재의 일본 통일교회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앞으로 전세계의 통일교회 교인들과 대한민국의 대사관이 딱 하나된다면, 그 나라의 백성을 중심삼고 미국 백성보다 강력한 신임을 받는 백성권을 만들 수 있는 터전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은 모르고 있습니다.
보다 제물되는 자리에 같이하시는 하나님
언젠가 한미문화재단을 만들려고 할 때 별의별 수욕을 다 받았어요. 보좌관으로 가 있던 사람을 시켜 가지고 별 수단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모르리만큼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미국의 상원의원 중 50명에 가까운 무리가, 하원의원 중 120명에 가까운 무리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판국에 있어서, 현재 미군 철군문제를 놓고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을 중심삼아 가지고 닉슨 대통령에게 새로운 방안을 구상하게 하고, 모색하게 하는 모든 배후의 공작을 누가 했느냐? 이런 것은 현 정부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린이 무용단 때문에 얼마나 시끄러웠어요? 또 승공연합 때문에 얼마나…. 통일교회 문선생은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예요.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니 여러분도 좋다고 따르지 마세요. 내가 가는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나는 칼을 품고 가는 사람 이상입니다. 남한테 맞아 죽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몰리는 자리에서도 통일교회 젊은이들을 규합해 가지고 이렇게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품고 나오는 복귀섭리 앞에 있어서 기쁨을 맞겠다는 사고방식은 떼어 버리자 하는 것이 우리의 통일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보다 제물되는 자리에 같이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문선생을 알게 된다면, 문선생의 말씀을 듣고 알게 된다면 그 누구도 머리를 못 들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수다한 역사적 배경의 미지의 사실을 알아 가지고 나가는 길에 그 누구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통일교회 간부들이 있지만 선생님이 가는 길에 절대 협조할 수 없습니다. 협조할 수가 없는 거라구.
통일교회 식구들은 선생님에 대하여 아버님이라고 하지만 부모의 가는 길을 자녀들이 개척할 수 없습니다. 왜? 자식이 있기 전에 부모가 타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안 그래요? 자식이 있기 전에 타락한 거예요. 그러므로 복귀의 길은 자식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고독단신입니다. 지금도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역사는 반드시 탕감을 통해서, 제물을 통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느냐
그러면, 통일교회 교인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느냐? 개인을 희생시켜서 가정을 하늘 앞에 세우자, 가정을 희생시켜서 종족을 하늘 앞에 세우자, 종족을 희생시켜서 민족을 하늘 앞에 세우자, 민족이 희생 되더라도 나라를 세우자. 나라를 희생시키더라도 세계를 구하자 하는 사고방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자기 나라가 망한다고 해서 세계를 집어 던지고 자기 나라만 살겠다고 하게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금후에 여러분은 역사적 방향을 어떻게 모색할 것이냐? 이걸 여러분은 모릅니다. 금후 대한민국은 어떻게 갈 것이냐, 일본은 어떻게 갈 것이냐? 이걸 모른다는 거예요.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돼요. 지금까지의 역사적 방향이라는 것은 어떻게 나왔느냐? 인간 개개인이 출세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타락이 어떻게 해서 벌어졌습니까? 자기를 자각한 데서부터 벌어졌습니다. 자기의 명예를 자각한 데서부터, 혹은 자기를 내세우는 데서부터입니다. 천사장도 거기서부터, 해와도 거기서부터 타락이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의 방향은 자기가 출세하기 위해서 제삼자를 희생시키는 놀음을 해 나왔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결과입니다. 그렇지요? 천사장은 해와를, 해와는 아담을, 전부 다 자기가 남기 위해서 제삼자를 희생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풀이되어 세계적으로 전개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숱한 전쟁의 역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주세계니, 공산세계니 해 가지고 대결하다가 끝에 가서는 자기들 스스로 전부 다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공산세계가 갈 수 있는 길,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중심한 경제이념으로 세계 제패의 꿈이 망상의 논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오토메이션 시대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세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이냐? 이제는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더 이상 못 가는 거예요. 미국 국민에게는 현재 퇴폐적인 사상이 깃들어 있습니다. 미국이 그러한 젊은층을 지도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느냐? 다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주하고 제삼자를 희생시켜서 자기 출세를 위주해 나오는 것은 악입니다. 그러므로 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망하지 않을래야 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돌보지 않는 나라는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찾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대한민국만을 찾으시려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대한민국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를 찾으면 희생된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왕에 희생할 바에야 세계를 위해서 희생한 입장에 서게 되면 대한민국은 주도적인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건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의 방향을 변경시켜야 됩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역사의 방향을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제삼자를 이용하고 밟고 올라서려는 주의는 끝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주의는 이미 그 결과에 봉착해 가지고 이 혼란한 세계정세를 속수무책으로 관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 비참상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예요. 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방안이 있다면 단 한 가지, 돌아서서 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사상이 뭐냐? 남을 희생시켜서 자기가 출세하자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희생시켜서 남을 출세시키자는 것입니다. 거기에 흥미 있는 나라가 생겨날 것입니다. 흥미 있는 인생관, 흥미 있는 국가관, 흥미 있는 세계관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러한 관을 중심삼고 나온 것이 통일사관입니다. 알겠어요? 「예」 개인이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정당한 법입니다. 그러기에 부모 앞에 희생할 수 있는 도리를 찾고, 아내 앞에 희생할 수 있는 도리를 찾고, 자녀 앞에 희생할 수 있는 도리를 찾아야 아들의 사명을 하고, 어버이의 사명을 하고, 남편의 사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이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희생을 다 하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부모도 그 자식을 중심으로 세우려고 할 것이요, 아내도 그 남편을 영원한 중심으로 세우려고 할 것이요. 자식도 '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세계에서 제일이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중심이 되는 거예요.
열 사람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희생하게 되면 그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서 못난 사람 같지만, 가면 갈수록 그는 열 사람의 중심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자기 출세를 위해서 열 사람의 친구를 이용하다가는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떨어져 나가니, 없어지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친구를 위해서 희생하고,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각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열 친구들은 모두 그에게 달라붙을 것입니다. 그가 죽을 일이 있으면 서로 대신 죽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친구들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동원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엉키는 것이기 때문에 망하지 않고 흥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망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영원히 흥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취해 나오실 길이기 때문에, 역사 도상에서 보수전을 하고 있습니다. 공격전이 아니예요. 보수전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먼저 맞고 먼저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되어 가지고 몇십 배의 희생의 대가를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제물이 희생되면 제물을 희생시키게 한 무리는 제물 앞에 굴복하게 되며. 굴복한 전체는 몽땅 찾아지는 것입니다. 전부 그런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이 이런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고,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종족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민족은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국가는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탄의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나라의 이념, 하늘나라의 이념을 바라면서 희생하게 되면 악은 굴복하기 마련입니다. 악은 왜 굴복하느냐? 악은 끝에 가면 선 앞에 굴복하기 마련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이기 때문에 끝에 가면 망하게 됩니다.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유엔 총회에서 구두짝을 벗어 들고 책상을 두들 기고…. 그 말을 듣고 우리 식구들 중심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놈의 자식, 너는 이제 내려가야 돼, 목이 잘려서 내려가야 돼. 너는 최후의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상에서 물러가야 돼' 그랬습니다. 이제 악은 최고의 절정에 달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못 올라갑니다. 하늘이 치는 거라구요. 그러니 공산당은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희생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도하는 민족이 된다
끝날이 되면 세계에서 높다 하는 녀석들은 전부 다 모가지가 잘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높다 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계를 위한 목적을 망각하게 되면 목이 잘리는 것입니다, 일개 민족을 위주한 사상기준을 영구화시키려는 사상은 목이 잘리는 것입니다. 공산당도 그래요. 슬라브 민족을 중심한 공산권이 세계를 제패하려는 꿈을 꾸고 있는데,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특정한 민족을 위하는 사상이 아니라 어떤 민족이든지 충성을 더하고, 희생을 더하고, 초민족적인 감정을 가지고 숭배할 수 있는 사상적 터전을 갖지 않고는 세계를 제패할 수 없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그렇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 갈 길이 바쁩니다. 영광은 나중이예요.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영광은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주인은 민족을 초월해 가지고 세계를 자기 민족보다 더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기준을 망각하는 일이 있더라도 세계의 기준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희생의 길을 자처해 나가는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에게 나라가 없고 주권이 없더라도 후세에, 21세기, 혹은 30세기, 혹은 몇천만 세기에는 그 민족의 사상이 아니면 세계가 살 수 없다고 그 민족을 받들 수 있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 한 개인은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개인으로 그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민족은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민족이 되지 말라고 해도,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민족이 되지 말라고 해도, 세계를 이루지 말라고 해도 형성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망할 수 있는 입장에서 주권을 잡아 가지고 안 망하겠다고 몸부림치는 것보다도 천륜에 순응하고, 박자를 맞추어 가지고 자기의 공적의 터전이 후대에 있어서 세계적인 결실이 되기를 바라며 엄숙히 자기의 생애를 바쳐 나가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가 성인의 반열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시대에 있어서 민족한테 동정을 못 받고, 주권자들한테 동정을 못 받았습니다.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은 간신으로 몰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서 통곡한 사람이라도 있었다구요. 역사는 이렇게 엇갈리는 거예요.
통일사상은 어떤 사상이냐
통일사상은 어떤 사상이냐? 대한민국을 사랑한다 할 때, 사랑하는 데는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대한민국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사랑한다 할 때-종협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통일교회의 공적이 많습니다- 종교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통일교회 안에 있는 귀한 종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는 종교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사상이 없고, 주류적인 사상이 없기 때문에 주류적인 사상을 남기기 위해서 통일교회는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투입하고,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투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면 기독교의 목사 같은 양반들, 내가 지금 공산당식으로 작전을 하면 다 말아먹을 수 있습니다. 암만 뭐라 해도 그들의 머리에 내가 지지 않습니다. 사탄도 녹여 놓은 사나이예요. 하나님을 반하게 만든 사나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 머리가 있다면 있는 사람입니다. 1차 작전, 2차 작전, 3차 작전으로 다 테스트해 보았습니다. 그 누구 누구의 속을 여기에 앉아 가지고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느냐?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는 통일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구요. 통일교회를 희생하여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하늘의 뜻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공헌하고, 세계의 만민을 소생시켜 가지고 하나의 세계로 몽땅 가게 하는, 하나님의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정 부패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악당의 무리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중요한 행정요원들의 실정을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 누구는 뭘 해먹고…. 어느 한때가 되면 이것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김총리가 그런 부정문제에 대하여 언급을 했지만…. 그러므로 올바른 국가관, 올바른 세계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 중에 달러 보따리를 싸 가지고 도망가려고 하는 녀석이 있다면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신문사도 하고 있지만, 신문사 편집부장 혹은 기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돈 받고 하는 녀석들은 전부 다 모가지를 자를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런 소문이 들려오거든…. 우리는 정당한 신자입니다. 우리는 의사가 되어 가지고 병폐가 있거든 무자비하게 수술하고, 말없이 끝에서부터, 발톱에서부터 하나하나 손을 대 나가자는 것이 통일교회 주의입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피 흘리는 사람을 구하려면 자기도 피를 묻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는 통일교회를 제물삼자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수님 앞에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제물삼고자 하는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제물되겠다는 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고독한 죽음의 길로 몰아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역사를 바라보게 될 때, 숭고한 기독정신이 배양될 수 있는 터전이라는 것은 죽음이 엇갈리는 자리에서 서로서로가 죽음을 앞 놓아가며 싸우는 자리였습니다. 죽음을 놓고 싸우는 자리에서 발전의 봉화는 세계의 도처에서 빛을 발했지만, 자기 자체를 내세우고 환경을 자르는 거기에는 망운이 깃들었습니다. 망한 것입니다.
제물을 참되게 바치면 망하는 법이 없어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이 제물의 완성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3시대를 거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최후에 오시는 주님은 인류의 조상으로 오십니다. 인류의 조상으로 오시는 그분을 만약에 기독교가 받들지 못하면…. 거 받들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줄 알고 있는데, 통일교회에서는 육신을 쓰고 오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교인들을 정신 나갔다고 합니다. '구름 타고 오면 어떡할 테야, 어떡할 테야? 하면서 천년왕국이 어떻고 어떻고…. 그렇게는 나도 다 믿어 봤습니다. 그런 신앙은 다 해봤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뒷골목까지 다 파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배후가 어떻다는 것도 다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예요. '기독교 통일해 보겠소? 하는데 문만 열어 보라요, 6개월이면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문만 열게 되면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도 성경이면 성경대로 해석하고, 이론이면 이론대로 설명해 가지고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문만 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목사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의 갈 길을 막았다가는 저나라에 가서 강도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내가 지금도 공청회를 하면서 상감마마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보지도 못한 음식을 해 어서 먹어라 하며…. 그저 게걸이 들어 가지고 먹는 것을 보고 내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야곱과 같고, 열 한 형제 앞의 요셉과 같은 기분이 났습니다. 어쩌면 그러냐? 저렇게까지 불쌍하게 되었느냐?
닭다리를 훔쳐 가지고 먹겠다는 놀음이 식당에서 벌어지더라는 겁니다. 기가 막히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분량을 먹었으면 됐지, 그것을 넘어 또 갈비짝을 숨겨 가지고 다니는 무리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볼때 칼로 자를 것이냐, 눈물을 머금고 참을 것이냐? 그래도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한 터전이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잘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형의 입장에서 먼저 하나님을 모시고 나왔던 게 아니냐? 나는 그 후에 나와서 하나님을 모셨지만, 그 전에 외로운 하나님을 모시고 나온 그들이 아니냐? 이런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동생의 입장에서 한이 맺혔습니다. 여러분 지금 그래요. 기독교가 지은 죄가 많다는 거예요.
내가 1967년에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조야가 전부 통일교회 문선생 왔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내가 동경에 도착하게 되면 신문기자들이 비행장에서부터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대판(大阪)에서 내렸습니다. '이놈의 자식들, 내가 너희들 작전에 말려들지 않는다' 대판에서 내려 다시 동경으로 갔습니다. 후에 그들이 알아보니까 오긴 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분 나빴다 이거예요. 자기들 계획대로 안 되었거든요. 이번에 오게 되면 통일교회 문선생을 한번 파헤쳐 가지고…. 아주 흥미진진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놈의 자식들, 내가 너희들 작전에 말려들지 않는다 이거야. 결국에는 꽝 했어요.
이래 가지고 어떤 기자 녀석이 왔었는데 문전에서 쫓아 버렸습니다. '내가 일본에 와 가지고 너희들이 계획하는 작전에 움직일 수 없다' 해가지고 쫓아 버렸습니다. 한국에서도 정식으로 통일교회 문선생과 회견한 기자가 없습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기자회견 안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할 짓을 다 했으니까, 그들이 필요할 때 내가 만나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그들을 만나지….
그러다 보니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두 달동안에 일본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제 통일교회 문선생 하면 아주 악당의 괴수로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문선명' 하게 되면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까지도 이름을 들어 가지고, 일본 앞에 제일 악한 사람의 상징으로 그릴 수 있을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기가 막히다면 기가 막히고, 통쾌하다면 통쾌한 일입니다. 소문 내는 데는 좋은 일 가지고는 빨리 못 내거든. 그렇지요? (웃음)
전차 안이고, 기차 안이고…. 전지역에 매일 이만한 내 사진을 내 가지고, 두 달 동안 선전한 거예요. 장사거리가 되거든, 잘 팔리니까. 이래 가지고 두 달 동안에 취재된 기사는 일본의 매스컴 역사상 톱을 기록했습니다. 그런 난장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괴수로 소문이 나니까 일본 구보끼 협회장은 이런 일을 처음 당하다 보니 큰일났거든. 앞이 캄캄해.
어쩔 줄 몰라 가지고 앉아서 뭉개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때는 경험자가 필요합니다, 내가 순회를 하고 있는데 동경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척 벌써 예감으로 안 것입니다. 전화 소리만 들어도 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압니다. 전화를 받을 때 '구보끼, 정신차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큰일났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큰일은 무슨 큰일이야? 이래 가지고 동경에 올라오자마자 전국에 '최고 동원이다' 하고 명령한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욕을 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전체를 동원한 거예요. 각지방의 처녀들까지 총동원한 것입니다. 신문쟁이들은 앉아서 신문으로 선전을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나가서 지서장, 지서주임, 군수, 면장 등자기 고향의 행정 요원들을 전부 소집해서 '신문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교육한 것입니다. 우리 말을 들으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전부 다. 일본에서 통일교회의 앞길을 막는 제일 문제되는 사람들이 경찰입니다. 그들은 권력기관이기 때문에 '그들을 교육해라' 그 놀음을 한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떠들지만 경찰에서는 동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자기들의 비밀-위에서 이렇게 이렇게 조사하라는 것까지-을 다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못 하는 일이 뭐야? 꽃파는 일을 해 가지고 돈을 벌면 그것을 우리를 위해 쓰나, 나라를 위해서 쓰지. 그러니 조사하라는 거예요. 조사해 봐야 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한참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것이 중공 일변도입니다. 경제인, 정치인 전부 다 중공과 손을 잡으려고 야단이라는 거예요. 그런 판국에 우리 통일교회 패들은 가두에서 일주일 동안 단식 투쟁을 하면서 중공과의 친교를 반대하는 데모를 했습니다. '중국의 장개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이런 놀음을 하니까 일본 매스컴에서는 '저런 미친 놈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저게 무슨 꼴이야.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머리 없는 통일교회, 머리 없는 승공연합'이라고 했습니다. 이놈의 자식들, 통일교회의 문선생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 일을 누가 시켰는 데, 구보끼가 시킨 건가? 내가 시킨 건데…. 나는 손해나는 일은 안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서는 반대를 받았지만 중국(대만)의 장개석을 잡은 것입니다. 장개석은 몽땅 우리에게 업힌 거예요.
그래서 내가 구보끼를 장개석에게 보낼 때, 이러 이러한 이야기를 해서 보냈습니다. '제1은 뭐, 제2는 뭐, 제3은 뭐 하게 되면 40분 이내에 장개석이 손안에 들어온다' 이렇게 해 가지고 보냈더니 가서 그대로 이야기를 하니 아니나 다를까, 들이 맞게 되니 한 시간 반이나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는 사진까지 찍은 것입니다.
그런 일을 통해 가지고, 이번에 세계를 순회하는 데 있어서, 중국 대사관을 통해서 특사 이름으로 어느 나라든지 가서 그 나라의 수뇌들을 만나고, 로마 교황까지 만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손해날 게 뭐가 있어요? 이래 가지고 구보끼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단식 투쟁한 사건으로부터 전부 영화로 찍어서 각 나라에 갈 때마다, 혹은 훌륭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공대회를 했습니다. 또 돌아와 가지고는 와클(WACL )대회에서도 보고를 했습니다. 앞으로 와클대회의 지도자는 젊은층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너희들 지금까지 뭘했느냐? 들이 비판하는 것입니다. 각 나라의 수뇌들이 지난번 마닐라 와클대회를 촬영한 40분 짜리 영화를 보자 다 놀래는 것입니다. 구보끼는 일시에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계획대로 딱 들어맞습니다. 침을 흘리고, 머리를 숙이고 전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인도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모가지를 매는 것입니다. 이걸 일본의 최고 간부들도 다 아는 것입니다. 사또 수상까지 우리가 교육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일본사상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걸다 알고 있습니다. 기시(岸) 같은 양반들은 국수주의 사상이 골수에 배어 있는 걸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세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문화의 세계가 된다고 교육을 해 나왔기 때문에 국수주의 사상에서 자꾸 돌아가는 거예요. 사사까와(笹川) 영감도 아주 철저한 국수주의자였습니다. 천황 외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에 가서도 하늘을 지붕 삼고, 뭐 어떻고 하는 세계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전반적인 사상의 흐름은 그런 국수주의이기 때문에 중공이 미워하는 거예요. 그리고 미국도 일본을 대해 '이놈 자식들' 하며 안보문제라든가 석유문제를 이용해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이번의 엔화 절상문제도 그런 의미에서 복수전이라구요. 그러다 보니 이것 큰일 났거든요. 중공보다 미국이 더 저렇게 되었으니 말이예요. 그래서 할 수 없으니까 우리 구보끼를 불러 가지고 속닥속닥해서 무엇이든 해줄 테니까 미국에 한번 갔다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곧 구보끼가 미국으로 떠나게 될 거예요.
우리 통일교회가 지금 이런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잘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예요? 자, 우리 통일교회 패들 기분 좋아요, 나빠요?「좋습니다」얼마나 좋아요? 누구 때문에 기분 좋아요? 선생님 때문에 좋아요, 누구 때문에 좋아요? 대한민국, 이 나라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대한민국에서 없어지면 적적할 것입니다. 요전에는 교수공청회니 뭐니 해 가지고…. 또 1군 장병들을 교육한 것이 큰 문제가 되었어요. 우리가 가서 부딪치는 것마다 문제입니다. 매스컴들이 중공만 쓰더니 요즘에 와서는 통일교회에 대해 신경 안 쓸 수 없게 되었어요.
통일교회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더니, 그 녀석들 뭔가 있다고 자기들끼리 쑥덕공론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했다고 해서 우리 통일교회나 승공연합이 손해본 것 없습니다. 일본에서 반공사상을 가졌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발붙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희생하게 되면 절대 손해나는 법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그건 왜? 제물을 참되게 바치게 되면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밟히면서도 세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밟은 사람이 망했지 밟힌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제물은 억지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바쳐야
나는 고생을 참 많이 한 사람입니다. 얼굴을 보면 고생한 사람 같아요? 지금도 젊은 사람에게 지지 않는다구요. 힘으로도 안 집니다. 한 가지 조금 다른 것이 뭐냐? 옛날과 다른 것이 뭐냐? 옛날에는 한 이백 계단을 단숨에 올라가는 데도 내가 일등을 안 하면 안 됩니다. (웃음) 그런 성격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반 세기가 넘게 되니까, 기력이 조금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문제없습니다. 선생님이 나이 먹었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부러운 게 없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는 몇 사람에게 편지만 하면 쓸 돈은 당장에 날아옵니다. 또, 독일 사람들에게도 전보만 하면 당장에 날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 20명 혹은 50명쯤 외국으로 보내야겠다고 구라파 통일교회에 전보만 띄우게 되면 비행기표가 금방 날아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편리하지요? 얼마나 편리해요.
일본의 전 지역에 3시간 이내에 연락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회사에 무슨 기계가 있는데 그 비밀을 알아봐라 하면, 일주일 이내에 다 알아낼 수 있습니다. 남들은 몇년 걸려야 할 것을 우리는 일주일 이내에 다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돈을 벌려면 못 벌겠어 요? 통일교회가 돈을 벌려고 하면 이병철씨가 문제가 아닙니다. 조중훈씨가 문제가 아닙니다. 조중훈씨의 길도 내가 막으려면 막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조중훈씨 사돈 있거든 미리 가서 경고하라구요. 통일교회 문서방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웃음)
여의도에 우리 땅을 살 때도, 6억 가까운 돈을 주고 시청 땅보다 더 큰 땅을 샀습니다. 돈은 없지만 돈이 있습니다. (웃음) 수속이 안 끝나서 그렇지. 근근이 계약금만 마련하게 되면 다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50일 동안에 몇천만 원이 아니예요. 1억 9천만원을 마련해야 된다는 겁니다. 돈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그만큼 컸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중에 '야, 통일교회 본부가 이게 뭐야' 할지 모르지만 이 건물은 영원히 없애지 않으려고 합니다. 통일교회 본부 사람은 좋은 교회에서 예배보기는 틀렸습니다. 그거 바라는 사람은 영락교회로 가요, 영락 교회. (웃음) 앞으로 이 집에서는 1억달러를 주고도 하룻밤을 못 잡니다. 1억달러를 주고도 못 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안재웁니다. (웃음)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에는 역사가 통곡할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볼 때 그저 '아이구, 기둥 저 기둥. 저게 무슨 통일교회 본부야' 하겠지만 이곳은 훌륭한 곳입니다.
내가 예루살렘 박물관에 갔을 때, 박물관에 대해서 물어 봤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쓰던 물건이 있느냐고 했더니, 그 대답하는 사람의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쓰던 젓가락 끄트머리 한 조각만 있어도 미국을 주어도 안 바꾼다는 것입니다. 야! 거, 그때 한 사람이 그것을 하나만 싸 가지고 하나님 모시듯 모셨으면 미국보다 더 좋았을 텐데…. (웃음)
그런 생각을 할 때, 통일교회는 어떨까? '통일교회 문선생이 예전에 쓰던 물건이 예수가 쓰던 물건보다 못하면, 내가 지면 기분 나쁜데…'이런 생각을 한다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웃음)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그 쓸데 없는 생각 가지고 예수가 나와 씨름을 해서 졌으니 그것은 진 거라구요. 내 물음에 대답 못 한 것을 내가 말해 주면 지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을 못 했는데 내가 했다면 그가 진 것입니다. 기독교도 예수님보다 못하면 망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통일교회 문선생보다 더 훌륭해야 됩니다. 나는 시기 안 합니다. 내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물론 누구든 내가 더 훌륭해진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결론입니다. 어때요? 이게 이단자예요?
대학 교수가 제자들에게 '나 이상의 지식을 가지면 안 되지' 이렇게 못을 박는 교수가 있다면 그 교수는 앉아서 죽어야 됩니다. '전통적인 사상을 존중하라' 하는데, 전통은 과정에는 필요하지만 목적을 성사하는 데는 안 됩니다. 뿌리 가지고 열매가 돼요? 뿌리와 열매는 다릅니다. 뿌리와 가지는 다릅니다. 잎하고도 다르다는 거예요. 기독교가 그 모양 그 꼴로 있으면 세계가 그 품에 들어올 것 같아요? 어림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여담 같지만 얘기하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 선전 좀 해야지. 안 그래요?
우리 통일교회가 가는 복귀섭리의 길에 있어서 그 골수사상은 무엇이냐? 제물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걸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물은 어떤 것이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것은 무엇이냐? 모가지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모가지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생명을 내놓는 데는 싫어하며 억지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미친듯이 좋아하면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을 바에는 울면서, 내놓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어요, 아니면 정신없이 좋아서 미칠 것 같고 죽을지 살지 모르고, 죽어도 좋다고 그저 춤을 추면서 내놓는 것을 좋아하시겠어요? 어떤 사람이예요?
통일교회 사람들은 남들보다 하나 더 해야
나는 이북에 들어갔을 때, 공산당 감옥을 찾아들어간 사람이예요. 이북에 전도하려고 간 것이 아니라 이북의 감옥을 찾아들어간 것입니다. 왜? 이남 땅에서 왜 거기를 찾아들어갔느냐? 복귀의 길을 가려면 그 길을 갔다 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옥살이 중에서도 최고의 옥살이를 해야 되겠기 때문에 그래서 공산당한테 갖은 수욕을 다 당하면서도 그런 일을 한것입니다. 거기에서 일하는 데 있어서도 모범 노동자였습니다. 나를 빼놓고는 모범 노동자 표창을 못 했습니다. 어디 가든지 사탄들한테 져서는안 되는 거예요. 통일교회 영신들, 통일교회패들은 언제든지 사탄들한테 져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안 질 자신 있어요? 「예」
통일교회 사람들은 남들보다 하나 더 해야 됩니다. 산봉우리를 올라가는 데도 올라가다가 그냥 쉬는 게 아니예요. 통일교회 교인들은 남들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걷고 나서 쉬어야 합니다. 이게 통일사상입니다. 공부를 하더라도 남들보다 1분이라도 더 하라는 것입니다. 남이 열 장의 책을 읽고 자면 열 한 장을 읽고 자라는 거예요. 한 장이라도 더 보라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데도 남보다 더 하라는 것입니다. 출근을 하는 데도, 출근 시간이 여덟시이면 여덟시 이전에 출근할 수 있어야 됩니다. 퇴근할 때도 남보다 10분이라도 더 늦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 더하라는 것입니다. 작업장이나, 혹은 무슨 일이든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시작은 남보다 빨리 하고 끝맺음은 남보다 나중에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먹는 것은? 일을 남보다 하나 더 하니까 먹는 것도 하나 더 먹어야 되겠구만? (웃음) 남은 열 숟가락 먹으면 나는 열 한 숟가락 먹어야 지요? 그런 걸 오해해서 한 숟가락 더 먹겠다고 눈을 밝히면 안 됩니다. (웃음)
내가 우스운 얘기 하나 하지요. 내가 피난 나올 때 세 동무가 있었습니다. 지금 저기 떡 앉아 있구만. 다리가 부러진 녀석을 자전거에 태워 가지고 천리길을 끌고 나온 것입니다. 내려오는데 국도는 전부 다 후퇴하는 군인들로 꽉 차 있어서 산등성이, 산비탈로 왔습니다. 그때의 일화가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나오다 보니 제일 문제가 뭐냐 하면 밥해 먹는 것입니다, 밥. 짐을 지고 쌀까지 지고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때는 도둑질을 하는 거예요. (웃음)
'아이구 통일교회 문선생이 도둑질을 해? 할지 모르지만,(웃음) 도둑 질을 내가 시켰습니다. 다 피난 간 집들을 뒤지는 거예요. 그때는 도둑질을 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뒤지지 않아도 중공군이 와서 뒤져 갈 테니까. 피난 갈 때는 간편히 가야 됩니다. 내가 죽으면 큰일나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 죽는 것은 괜찮지만 하늘땅이 서러워할 것을 생각하게 되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 죽고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침에 밥을 해 먹으려니 무슨 쌀 가진 것이 있어요? 그래 저녁 일찍 근처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일 아침 밥을 하려고 가서 쌀을 구하는데 집집마다 쌀이 있습니다. 내가 쌀을 가져올 때에는 처음 보이는 쌀을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쌀을 고르고 다니다가는 진짜 도둑놈이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그렇게 해야 도둑놈의 누명을 피할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늘땅이 볼 때, '야, 이 녀석들은 남의 쌀을 갖다 먹어도 뭣이 있는 녀석들이다' 하여 동정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쌀독을 열어서 거기에 좁쌀이든 강냉이든 처음 본 것을 가져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걸 내놓고 다른 것을 가져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첫번 본 것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집을 딱 들어가면 쌀 독, 쌀 독, 쌀 독 하면서 찾고 다닌다구. (웃음) 이렇게 해서 좁쌀이 있으면 좁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같은 것만 가져오면 기합을 받으니 다음부터는 신중하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밥을 하는데 가만히 냄새를 맡아 보니 공동묘지에서 널을 주어다가 밥을 하는 거예요. 그런 걸 척 보면 알아요. 그래서 내가 '무얼 가지고 밥을 해 이 녀석들아' 했습니다. 방안에서 그런 것을 알고 말도 할 줄 안다고. 그런 뭐가 있기 때문에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버터 남아진 것이예요. 여러분과 같이 깜깜천지면 벌써 망했다는 것입니다. (웃음)
밥을 하게 되면 언제나 듬뿍 하지만, 양재기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쪼그만 양재기 하나에다가 하는 것입니다. 피난살이 하는데 살림하는 것처럼 덜거덩덜거덩 하게 돼 있겠어요? 간단한 양재기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젖가락은 어디를 가든지 나무를 꺾어서 하면 되기 때문에 양재기 하나만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밥을 해 놓고 언제든지 셋이 둘러 앉으면 사실, 궁상이 상팔자라는 거예요. (웃음) 그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게 상팔자입니다. 그리워할 줄 아는 그 팔자. 예수님이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배에서 꼬르륵 하니, 그 궁상에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는 거예요. 먹는 것이 뭐 보리개떡이란도 상감마마의 진수성찬보다 더 그리운 것입니다. 맛없는 것이 없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 장정 세 녀석이 앉아 가지고 양재기 하나 놓고 먹기 시작하면, 이건 혼자 먹어도 양이 차지 않을 텐데 같이 앉았으니 어떻겠어요? 통일교회 문선생은 지금까지의 생활철학이 나중에 먹기 시작하고 먼저 숟가락을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숟갈을 먼저들 수 있어요? 숟갈을 들 때는 나중에 들고, 놓을 때는 제일 먼저 놓아야 된다는 거예요. 요전에 어떤 사람이 간증을 하는데, 언제나 선생님이 숟가락을 먼저 놓고 자기는 숟가락을 잡고 자기 배와 싸웠다는 것입니다. (웃음) 그러다 보니 밥 먹는 판국에서 그 사람들은 제자가 되고 나는 스승의 자리에 올라가는 거예요. 밥을 먹을 적마다 머리를 숙이는 거예요. 거 그럴 수 있겠어요? 이해가 안 돼요? 그럴 수 있겠지요? 「예」 그게 통일사상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옆으로 빠지려고 했지 먼저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통일교회 젊은이들을 보게 되면 '아이고, 내가 이만큼 믿었는데 나를 몰라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선생님하고 인연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그런 사람으로 알지 말라고요. 그런 사람으로 알았다가는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같이하시지 않으십니다. 내가 지금까지 모시고 나오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위해 통일교회를 믿지 말라
여러분은 통일교회를 믿되 통일교회를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예요. 일을 하더라도 통일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어요? 「예」 자기를 위해서 일하고, 자기가 가서 살아야 할 나라를 찾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선생을 대해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와주지 않는다고….
제물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삼천만 민중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도 좋다고 하면서 자기가 살던 문화주택을 팔아서 돈을 몽땅 갖다 아프리카오지에 큰 집을 지어서 그 사람들에게 살라고 할 때, '너희들은 이런 데서 살아 보지 못하면 한이 될 것이 아니냐' 하는 이런 운동을 세계적으로 전개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천국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의 전통이니 뭐니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역사가 있다면 그런 역사가 있는 거예요.
지금 한국 통일교인들이 보리밥을 먹으면 미국 통일교회 사람들도 보리밥을 먹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자는 데도 침대가 뭐예요? 한국사람들이 마루바닥에서 잔다 하게 되면 침대를 버리고 시멘트 바닥 위에서 쿨쿨 잔다는 것입니다. 재미있었던 것이 미국의 49개 주를 내가 다 돌아보 았지만, 미국에 있는 젊은 놈들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캘리포니아 대학원을 나온 녀석이 있는데, 11개국의 말을 아주 잘하는 녀석입니다. 내가 그 녀석에게 '운전을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교회의 중진들에게도 '운전을 해라' 하면서 심부름을 시키고 죽도록 고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내 숙소는 1등 호텔을 얻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좋은 호텔을 얻어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 미국에 왔으니까 너희들은 그렇게 해라'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1등 호텔을 얻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마루바닥에서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며칠이나 가나 보자 해 가지고…. 이렇게 선생님도 짓궂은 일을 곧잘 합니다. 어디 가든지 그렇게 꼭 시켜 봅니다. 그래 놓고 마지막쯤 가서 될 수 있으면 '너희들도 좋은 호텔을 같이 얻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같이 얻으라고 해도 안 얻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옛날에는 자고 눈을 퍼뜩 뜨면 선생님이 올려다 보였는데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내려다 보인다는 거예요. 자기들이 키가 크거든. (웃음) 내려다보이니 안 되겠다는 거예요. '야, 이녀석들, 이제 됐구나…' (웃음)
이걸 볼 때, '야, 사상이 이렇게 무서운 거로구나. 내가 돈이 없다고 한하지 말자. 세상이 어렵다고 한하지 말자' 이국 땅에서 나를 보지 않고도 이런 무리가 생겨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를 하셨겠느냐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대학원생들이 캘리포니아 대학 캠퍼스에서 맨발로 뛰면서 장사를 안 하면 잠을 못 자겠다고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지금 그런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거 왜 그래요? 우리가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그랬다면, 자기를 위해서 피땀 흘리고 죽음길에 섰다면 누가 거들떠나 보겠어요? 세계의 관심을 일으킬 수 있고, 하나님의 관심을 일으킬 수 있고, 역사시대에 길이길이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자리는 비참한 자리더라 이거야. 오늘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비참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축복받은 가정들을 내모는 겁니다. 언제는 잘살라고, 이상상대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주 멋졌지요. 그 내용을 들어 보면 아주 마음이 시원하고 누구나 고개를 끄떡끄떡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합동결혼식을 해주고, 1970년도 12월부터 '가정주부들 전체 동원이다' 해서 동원을 했습니다. 내가 6개월 전부터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부장들은 '뭐 선생님 말이 그렇지 정말로 그렇게 하겠나? 말이 그렇지' (웃음) 이렇게 미리 얘기를 떡 했는데, 가정주부들 동원한다 할때, 꼴좋게 별의별 소리를…. 절대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하고들 있었는데 안 되기는 왜 안 돼요. 선생님은 한 것입니다.
어려운 살림살이 가운데 종지 짜박지, 그릇 짜박지, 숟갈 짜박지, 상짜박지, 단스 짜박지 이런 것을 챙기는 것을 볼 때, 기분 나빴습니다. 트렁크 하나가 내게 격에 맞다는 것입니다. 지금 피난살이인데…. 지금 피난살이 아니야? 광야시대를 거쳐가는 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시 대와 마찬가지로 통일교회는 지금 개척시대에 있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할 때 한번 왕창 뒤집어 박는 거예요. 그래서 '다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일선 출동! 하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어디 안 가나 보자. 협회장 여편네부터 나서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지, 안 나서면 벼락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지. 다들 나갔더구만. (웃음)
총각도 아닌 신랑 녀석들이 눈을 꺼벅꺼벅하고 지금까지 자기 여편네만 부려 먹었거든. 그러다 보니 여편네 고마운 줄을 모른다구. 그러니 사내 녀석들에게 교육도 해야 되겠고, 뜻도 세우고, 나라에 새로운 전통도 세워야 되겠기에 축복가정 부인들을 동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자들은 체면을 차렸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남자 체면에 어떻게 맨발로 나가서 물을 떠 먹나, 여보게! 물 좀 주소. 그래야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체면이 어디 있어요? 다 깨뜨려 버려야 됩니다. 체면 때문에 물을 못 떠 먹으면 물을 먹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별 수 있어요? 별 수 없으니 손수 물을 떠 먹고, 밥을 해 먹는 녀석, 혹은 애기를 업고 다니는 녀석도 있습니다. (웃음) 어떤 녀석들은 공장에 가는데 애기를 업고 갑니다. 그래도 내가 욕을 못하겠더구만. 내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옛날 같으면 용서할 수 없는 거라구요. 공장에 가 보면 이 구석 저 구석에 애기들이 참 많아요. 이게 뭐예요. 내 생리에 맞지 않아요. 그렇지만 내가 시켰으니까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니 통일교회 777가정의 잔치는 세계적으로 훌륭하던데, 문선생은 무슨 원수가 져서 결혼식만 살짝 해서 냄새만 풍기고 여자들을 빼다 어디에다 감추었소'(웃음) 하는 등 별의별 소리를 내가 다 듣고 있습니다. 내 귀가 넓습니다. 그런 것은 잘 들립니다. 잘 듣지만 그런 말 듣다가 일이 돼요? 안 되는 거라구요.
통일사상은 하나님의 제물사상에서 이어받은 것
이제는 민족적인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의 역사 가운데 그것이 비참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느냐? 자식을 품고 암죽을 먹이던 어머니가 배가 고파서 자식 줄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입에 퍼넣을 때까지, 그런 자리까지 갈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이렇게 고생을 하거든, 통일교회를 고생시키는 목사 들은 그 이상의 자리에 갈 것입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 삼천리 반도를 편답하는 입장에 설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그대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넘어 올라가게 되면 발전합니다. 천지이치는 그런 거예요.
이런 놀음을 왜 시키느냐? 그들에게 내가 무슨 원수예요? 세상에 가정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그걸 알아요? 여편네 때문에, 자식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그걸 누가 책임지겠어요? 하나님이 책임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책임져야 할문제입니다.
그 인간 책임을 누구에게 지우겠느냐? 세계의 어떤 가정에도, 다른 사람에게 이 책임을 지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지워 주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장이며, 통일교회 문선생의 사상입니다.
누구에게 맞게 되면 세계를 대신해서 맞고, 눈물이 엇갈리는 비참함이 있거든 비참하라는 겁니다. 어미가 자식을 찾아 천리길을 와서 좋은 얼굴을 봤으면 했는데, 그 자식이 병석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으면 그 어미는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할 것이냐? 그 어미는 무슨 말을 할 것이냐? 하늘 가는 길이 어이 이리 비참한고…. 내 자식이야 천만 번 죽더라도 아버지의 입장은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자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 비참하실 것이냐 하는 마음을 갖고, 자식을 붙안고 하나님을 위로하는 눈물을 흘리자는 것이 통일교회 스승의 사상입니다. 그러니 이런 비참한 명령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책임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떠하냐? 나도 그런 사람입니다. '나도 지금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현재도 가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갈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우리 일족이 망해서 나라를 살릴 수 있다면, 일족이 칼을 입에 물고 피를 토하며 한 구덩이에서 죽어 썩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정의를 위해서, 천도를 밝히기 위해서 갔노라 할 것입니다. 역사에 반드시 남아질 것이어늘, 그때에 이 길은 천하에 빛날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 사상의 주류입니다. 이 사상은 어디서부터 이어 내려 왔느냐? 하나님의 제물적인 사상으로부터 이어받아 내려왔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됩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라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잘 알아요. 그러나 내가 생애를 바쳐서 믿어 왔지만, 어떤 때에는 칼이 있다면 그 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항의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지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너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모른다고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느냐는 것입니다.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손발을 가만히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서 천번 만번 도와주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통일교회 문이라는 사람이 갈 수 있는 운명적인 길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제삼자의 입장에 서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그 자리가 나에게 있어서 도리어 힘의 자리요,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자극적인 자리인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망하지 않고 남아진 것입니다. 감옥의 비참한 자리에서 신음할 때도, 최후의 결전의 고비에서 뒤넘이칠 때도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시면서 '너는 그런 길을 가고 있지만 네가 가지 않는 나의 십자가의 길은 이러이러하다'는 사실을 통고하시는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그러한 순간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남아진 거예요.
공적인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
여러분들은 복받고 사는 현재 그 자리를 행복한 자리로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그것을 풀어 가지고 만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터전으로서 투입하게 하시고 싶은 마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나도 돈이 있다면 있는 사람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돈을 관리하기에 급급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 돈은 누가 관리를 하든 절대로 먹지 못합니다. 먹었다가는 그 종족이 망합니다. 망해 가지고 망한 그 종족의 재산까지 플러스가 되어서 통일교회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내가 알면서도 많이 속아 주는 거예요. '끝이 얼마나 가나 보자' 해 가지고 보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누구도 통일교회를 먹지 못합니다. 통일교회의 재산은 누구도 농락하지 못합니다. 왜? 그 재산은 내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긁어모은 것이 아니라, 천륜을 따라서 세계를 위하여 눈물과 피와 땀을 고임돌로 삼아 가지고 모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피눈물이 엮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로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물건입니다. 제물로 내세우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물건입니다. 그런 물건에 손을 댔다가는 벌을 받는 거라구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통일교회 문선생을 무슨 영광의 자리에 앉아 있는 고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정 피곤하면 차에서 잡니다. 그래서 차 타고 다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무리를 합니다. 지금도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안 자려고 신경 썼지만 지금은 차 타는 시간이 휴식시간입니다.
만일에 차 안에서 자지 않고 다른 데서 낮잠을 자게 되면 일어나서 회개를 하는 사람입니다. 낮잠을 자고 나면 회개하는 사람이예요. 지금도 공장에 가면 어린 소년 소녀들이 일하고 있는데 내가 고달프다고 해서 낮잠을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잠이 오면 앉아 가지고 졸지…. 누가 본다고 그러는 것이 아니예요.
왜 그러느냐? 하나님은 24시간 쉬지 않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6천년 동안 어느 한 시간이라도 쉰다고 정해 놓고 쉬는 시간이 있었느냐? 없었 다면, '아버지여 한 시간만이라도 쉬십시오'라고 권한 아들딸이 있었느냐? 없었다는 것입니다.
죽음길을 가고 있는 인생길에서 사랑의 마음을 중심삼고 자식의 인연을 찾아 나서는 그 어버이는 잠을 자겠다고, 쉬겠다고 하는 어버이가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나는 24시간 피곤하면 잠을 잘 수 있고, 밤이 되면 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고 나를 위해서, 혹은 통일교회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에게 빛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생각할 때, 잠을 자고 일어나면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행로를 거쳐서 통일교회는 나온 것입니다.
이제 9월을 맞이했습니다. 초하룻날에 결실의 계절에 대해서 말했지만, 9월만은 모든 정성을 들이고 피땀을 흘려 가지고 지은 농작물을 거두어서, 나라면 나라에 자랑하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하나님 앞에 한번 바쳤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직까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가 되지 못한 것을 볼 때,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어느 한때에 정성을 들여 가지고 논을 만들고 밭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한 날을 마련하겠다고, 그러기 위해 정성을 다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사상이 목표로 하는 것
금년 1971년은 앞에서 역사적인 탕감노정의 빚을 갚는 해라고 말씀드린 것같이, 지극히 중요한 해입니다. 1972년까지는 이 나라의 운명이 가름될 것이고, 아시아와 세계의 운명이 가름될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통일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떠한 민족도, 어떠한 종단도 못 한 이 제물적인 책임을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하는 데 있어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와 성약시대를 중심삼고 나왔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되고, 성약시대는 신약시대를 횡적으로 탕감해야됩니다.
그러면 제물이 완성되는 때는 언제냐?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됩니다. 제물이 언제 완성을 보느냐? 제물이 완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제물을 따로따로 갈라서 드렸지요?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부모와 자식은 만물과 더불어 한꺼번에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타락하지 않은 이 부모를 중심삼고, 거기에서 태어난 자식과 거기에 있는 모든 만물이 그냥 그대로 몽땅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제물이니 탕감조건이니 하는 이런 시시한 놀음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류에게는 갈라 가지고 나오는 제물시대가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신약시대를 거쳐왔는데 그러한 시대는 1년이 아니라 몇천년입니다. 대개 2천년이라는 기간을 중심삼고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갈라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는 바람에 세계는 악당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한때를 맞이해 가지고 특정한 나라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 많은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 사탄이 사랑하고 자랑할 수 있는 나라는 열 나라가 아니라 한 나라입니다. 그렇지요? 지금 사탄이 세계에서 제일 사랑하는 곳이 어디냐?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공산권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최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있고, 사탄세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자랑할 수있는 한 나라, 그런 국민성을 가진 나라를 하나님이 지도하고, 가꾸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입니다. 사탄보다 무능한 하나님이라는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사상이 바라고 나가는 길은 그것을 표준해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공산당에 대비해서 그들을 이겨야 됩니다. 그래서 승공이념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또한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도 최고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뒷받침이 강력해야 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주권자의 권력을 가지고, 세계적인 권한을 가지고도 밀어낼 수 없다는 강력한 이념의 뒷받침이 있어야 됩니다.
제물은 정성의 표시체
옛날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그 민족은 자기들을 위주한 이스라엘 나라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의 서러움을 벗겨 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인류의 서러움을 벗겨 주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싫다 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상충을 일으켜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데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교단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기성교회가 썩었고, 일반 종교가 썩었으니 이 종교들을 중심삼고는 한국을 제3이스라엘권으로 세우지 않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가 교회를 대표해 가지고 정성들이는데 있어서 한국내 종교를 대표하고, 세계의 종교를 대표하여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 정성은 무엇으로 표시하느냐? 제물입니다. 제물의 과정을 거치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제물, 가정적인 제물, 교단적인 제물을 통해서 민족적인 제물과 국가적인 제물의 과정을 거쳐 세계 앞에 등장하는 날에는, 사탄 국가가 아무리 자랑하려고 해도 내적인 면이나 외적인 면에서 하늘의 세계보다 못 할 때에는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나라보다 못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삼팔선 이북을 넘나들어야 됩니다. 오늘날 간첩들이 활동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과 공포와 공갈 협박에 못 이겨 그런 활동을 하지만, 우리는 자진해서 생명을 바치는 자리에서 활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협이 아닙니다. 자동적인 것으로 원리의 길이요, 천륜의 도리입니다. 횡적인 입장에서 누구의 간섭을 받는 것도 아니요, 위에서 명령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물은 존재의식이나 소유관념이 없어야
제물의 자리라는 것은 존재의식을 갖지 않는 자리입니다. 제물은 존재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소유관념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제물은 그래요. 제물이 되려면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누구, 즉 통일교회 문선생이면 문선생이다'라고 하는 존재의식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소유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소유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뜻을 위해서는 존재의식이 없어야 됩니다. 소유관념, 자기에 대한 애착이 없어야 합니다. 소유관념에 있어서는 나라를 위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관념이 자기를 위한 소유관념보다 강해야 됩니다. 존재의식에 있어서도 나라에 대한 존재의식이 자기 존재의식보다 강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무서운 게 그거예요.
여편네들을 동원했는데 간부 중에서 누가 앓는다는 것을 소리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죽음이 엇갈리는 경계선에 들어가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되느냐? 저 협회장 부인 사길자 아주머니, 세상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면 눈이 뒤집히고 다리가 후들후들할 거야. 그러나 남편을 누구 때문에 얻었느냐? 누구 때문에 얻었어? 나라 때문에 얻은 거라구. 그런데 남편이 나라를 찾지 못하고 갔으니 아내는 두 배의 일을 해야 되는 것이라구. 다르다는 거야. 그렇지, 길자!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다고 붙들고 울기 전에. 내 나라가 망했을 때 그보다 천배 만배 울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생각해 보고 있으면 울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죽었다 하더라도 자식이 죽었다고 통곡하기 전에 나라가 망했을 때, 그 몇십배 울 수 있는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해도 눈물을 못 흘렸어요. '내가 통일교회 책임자로서 나라의 서러움과 나라의 비운을 바라볼 때, 십배 이상 백배 이상 눈물지을 수 있는 자리에서 통곡을 하지 못하고는 자식을 잃었다고 붙들고 울 수 있겠어? 이놈의 자식아'라고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 세계의 어떤 민족 앞에 서더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지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린 것으로 하더라도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위해 많이 흘렸습니다. 오늘날 기성교계면 기성교계, 혹은 수많은 종단을 중심삼고 볼 때, 내가 뼈대 있는 사람 중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통일교회는 누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마음을 중심삼고 세계의 종단을 대표한 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제물 중의 제물이 되자는 것입니다. 외적인 실권에 있어서는 공산권을 타파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실권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면 죽어서라도 그런 전통적인 사상을 남기고 가겠다고 해야 하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의 주류사상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그러기에 예수님 말씀의 결론이 이거예요. 죽고자 하는 자는 뭐라구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뭐라구요? 「죽는다」 처음 된 자는?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는? 「먼저 된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그걸 압니다. 앞으로 목사들이 눈물 흘릴 일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 기성교회 믿던 사람들, 기성교회하고 통일교회하고는 천리 만리 차이가 납니다. 기성교회는 유치원도 못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거만하다고, 교만하다고 하겠지만 통일교회는 이미 그러한 레테르가 붙었습니다. 가짜가 아닙니다. 죽어 보라는 거예요, 내가 거짓말 했나.
예수 믿고 복받겠다는 녀석들은 미친 녀석들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고 예수님도 하늘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있는데 복받겠다구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오죽했으면 죽을 때 '아버지시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겠습니까? 아직도 소원성취를 못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다시 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지 못해서 오지도 못하는 이 판국을 알진대, 예수 믿고 복을 받겠어요? 도리어 예수 믿고 죽겠다고 해야 됩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복을 받는 거예요. 복받겠다고 하는 자는? 「죽습니다」 통일교회 믿어 복받겠다는 사람은 오지 말라구. 통일교회를 믿으면 복받는 것이 아니예요. 통일교회 믿으면 망하는 거예요. 통일교회를 믿으려면 자식을 잡아 제사 드리겠다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 서는 여편네와 자식을 한꺼번에…. 아브라함은 자식을 잡아 제사를 드렸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아내까지 잡아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머니 아버지까지 여기에 달려들어 가지고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된다면 어머니 아버지까지, 아니 일족이 망하더라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각오를 가진 사나이입니다. 이러한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 통일교회 사람들입니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더러운 골목을 봐도 '오늘은 내가 그냥 가지만 다음에 올 때에는 깨끗이 청소할 것이다. 기다려라'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제물된 자리입니다. 제물된 자리.
제물의 완성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제물의 완성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고, 그의 아들딸도 완성되고, 만물도 완성되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터전은 나라의 터전이요. 세계가 한꺼번에 갖추어진 자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복귀섭리 도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제물 기준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이스라엘 나라를 찾아 나오신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못 찾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 나라를 중심삼고, 사탄에게 잃어버린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가 되는 하나의 기준, 하늘나라의 전통과 사상을 이어받아 누구보다도 자신 만만하게,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스림을 받고, 거느림을 받을 수 있는 국민이 되는 자리입니다.
하나의 단체뿐만이 아니라 삼천만 민족이면 민족 전체가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으면 모두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제물을 바칠 수 있고, 혹은 그러한 교단이 있으면 그 교단이 정성어린 제사장의 책임을 지고 흰옷을 입고 민족과 더불어 쌍수를 합장해 가지고 안팎을 갖추어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국가적 형태를 갖춘 날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있었느냐 하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약시대의 제물은 부모 곧 자기
그러면, 나라를 중심삼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도 다 부모지요? 복귀역사는 부모와 자녀와 만물이 사위기대를 이루게 하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만물이지요? 요것이 사탄의 침범을 받았기 때문에, 침범받은 것을 제거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봉헌해야 됩니다. 바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예」그러므로 우리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가정들이 부모의 자리에 섰거들랑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되고, 자기의 물질을 제물로 바쳐야 됩니다.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탕감해야 되는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물은 물질이요, 신약시대의 제물은 자녀요, 성약시대의 제물은 부모, 즉 자기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것들을 전부 한꺼번에 제물로 바쳐야 됩니다. 내가 부모의 자리에 있으면 자식이 있고, 자기 소유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소유물을 하나님 앞에 바쳐 봤어요? '저것은 아무개의 것이다, 이것은 아무개의 것이다' 하는 물건이 있을 때, 그것을 대해 '야. 네가 타락권내에서 탄식하는 물건인데, 너는 사탄세계의 김씨면 김씨의 소유가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보면 어림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 물건이 가라사대 '나의 갈 길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선한 부모의 소유로 돌아가는 것이다' 할 것입니다. 본래 부모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부모의 것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당의 물건이 되어서, 이렇게 뒤집혀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만물까지도 탄식을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성경 로마서 8장에 기록되어 있잖아요. 또 아들도 '아무개의 아들이 되기 전에 참부로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무개의 남편, 아무개의 여편네가 되기 전에 참부모의 아들, 참부모의 며느리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라고 한 거예요. 여기에 있는 것을 저리로 옮겨야 될 때, 아내가 먼저 옮기겠다고 하면 남편이 반대를 하는 것이요, 남편이 먼저 옮기겠다고 하면 아내가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옮겨 가는 데 있어서는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딱 갈라 놓고 가는 것입니다. 옮겨 가려면 오누이의 자리에서 옮겨져야 합니다. 부처끼리 오누이가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복귀의 역사는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물의 노정은 하늘나라가 복귀되어야 끝나
통일교회의 소원은 무엇이냐?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제물의 노정을 거쳐왔습니다. '나 하나 희생해 가지고 온 백성이 살 수 있으면 어서 희생해야지. 통일교회가 망해서 이 나라가 살 수 있으면 통일교회가 희생해야지' 이러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소원이, 그런 제물적인 노정이 언제 끝나느냐?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 나라가 제물을 드리게 될 때, 만물과 만백성과 주권이 화합해 가지고 보조를 맞추어야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알겠어요?
제사장과 이스라엘 민족이 전부 다 그것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해야 돼요? 제물이 되어서 따로따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총탕감 해야 됩니다. 나는 참부모를 대신하고, 여러분의 아들딸은 참아들딸을 대신하고, 여러분은 만민을 대신하여 탕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치고, 참부모의 이름을 거쳐 가지고 다시 부모 될 수 있는 세계가 되지 않으면 제물의 완성이라는 것은 이 지상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걸 못 하게 될 때에는 통일교회의 축복받은 자신들도 망하는 것입니다. 비참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위해서 단결하고, 이 목적을 위해서 전진해야 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가 피눈물의 역사로 이어져 나온 것이요. 예수님 자신의 정체를 수습하지 못한 비운의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 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것을 가로막아 가지고 수습하여 새로운 천지를 향하여 재출발을 다짐해야 할 때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자는 것이 통일교회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독교가 하지 못한 것을 죄다 탕감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직접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제물적인 입장에서 이러한 것을 탕감하자는 것입니다.
제물은 죽더라도 자기를 공인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제물은 죽더라도 자기를 공인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죽고 나서도 머리를 숙이고, 다 지나고 나서도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의 기원이 되기 때문에 제물의 완성권이 나타날 때까지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우리 통일교인은 엄숙히, 밤이나 낮이나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자기 물건이 아버지의 것이요, 자기의 아들이 아버지의 아들이요, 자기의 몸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내 몸은 아버지의 지체요, 내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요, 내가 가진 물건은 아버지의 것이라고, 아버지 앞에 돌려도 아버지 것이요. 나한테 와도 아버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 봤어요? 거기서부터 천국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면 세계 만민은 그 원칙을 따라 가지고 자기의 물건, 자기의 자식, 자기 전체를 입적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여자가 시집가게 되면 신랑 집에 입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책임자가 나라를 대표해 가지고 입적을 하게 되면 그 나라 전부가 입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국가가 일시에 구원받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자랑하는 이상의 하늘의 주권국가. 사탄이 부러워할 수 있는 하늘의 주권국가를 중심삼고 전체를 대신하여 일시에 하나님 앞에 총탕감하지 않고는 여러분의 가정, 혹은 환경이 깨끗한 자리가 못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몽땅 바칠 수 있는 자리를 우리는 죽기 전에, 신명(身命)을 다하여 일시에 제물의 완성을 이루어서 구약시대, 신약시대, 성약 시대의 일체를 청산해야 됩니다. 종적인 역사를 횡적으로 총탕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내 물건은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며, 내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며, 내 남편, 내 아내가 내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람이라고 해야 됩니다. 천국가는 것은 간단합니다. 자기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아들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물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 가지,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돈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녀석들, 자기 자식만 끼고 다니는 녀석들, 자기 아내나 남편끼리만 좋아하겠다는 녀석들은 전부 다 하늘과는 상관이 없는 패들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하는 논리에 의하면, 자기 집을 버리는 사람은 더 좋은 집을 얻는 것이요. 자기의 나라를 버리는 사람은 더 좋은 나라를 얻는 것이요, 자기의 세계를 버리면 더 좋은 세계를 얻는 것입니다. 그거라구요. 그러기에 찾고자 하는 자는 잃어야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잊고 공적인 입장에서 희생하라
우리는 개인을 위해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탕감노정에 있어서 가정적인 충신이 되어 종족의 전통을 세우고, 민족의 전통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에는 통일종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낙네들이 나가 가지고 이 나라를 새로운 사상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아들딸들을 올바로 교육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도둑놈이라 할지라도 그 아들딸에게는 교육을 올바로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가정 부인들을 동원하여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가정적 제물시대인 동시에 종족적인 제물의 시대요, 민족을 위한 교회적 제물시대의 사명 앞에 있어서 여러분 개인을 망각하고 전체가 공적인 입장에서 투쟁하고, 싸우고, 희생하기를 바라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 도
아버님, 흘러가는 역사노정에는 인연도 많았고 사정도 많았지만, 저희들은 그 가운데 당신을 빼놓은 인연과 사정은 저희의 원수인 것을 미처 몰랐던 무리들이옵니다. 제물의 완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나왔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이 시간 저희들은 잘 알았습니다. 대한민국을 잃어버린 서러움을 품은 그때의 애국자들의 사정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은 그 자리에 서지 않고는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 모인 당신의 자녀들은 누구도 모를 서러움을 품은 나라 없는 불쌍한 무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민족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한 불쌍한 무리들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과 나라가 하지 못하는 제물의 과정을 당신 앞에 더 다짐해 가지고 책임질 수 있고. 당신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이 나라, 이 백성을 붙안고 모든 수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의 어려움을 대신 짊어지겠다고 몸부림칠 수 있는 무리가 통일제단에 속한 각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오랜 역사노정을 찾아오신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외롭고 비참하셨던가를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냐 할 때, 이 나라에 호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피눈물을 흘리고, 장래의 이상적인 나라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없이 희생의 길, 제물의 길을 이어 나온 무리가 아니고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세계의 주인이 누가 되겠사옵니까? 누구보다 수고의 자리를 거쳐 극복해 나오시는 당신 앞에서 세계를 부여안고, 누구보다 수난길을 감수해 나가면서 제물의 길을 찾아 나가는 무리가 있다면, 그 무리를 통하여 이 세계는 수습된다는 이런 원리 원칙을 저희들이 확실히 알았사오니, 이제 저희들은 당신께서 저희들을 그 환경에 세우고자 하는 데 있어서 저희 자체의 부족한 과거를 규탄해야 되겠고, 현실에서 자아의 길을 고수하기에 비겁한 자신들을 타파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리하여 저희 자체의 몸과 마음을 고이 아버지 앞에 바쳐 제물의 실체가 되게 하시옵소서. 그 제물의 실체는 사탄의 조건으로 남을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제물, 승리의 부활체로서 아버지 앞에 몽땅 바쳐져야 되겠사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저희가 기뻐할 수 있는 그날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오늘 통일교회 무리들이 가야 할 운명길인 것을 확실히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지금까지 참고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왔습니다. 그런 저희들 앞에 배가된 수난의 노정이 놓인다 하더라도 저희 들은 또다시 정성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맹세하고 가야 할 몸들입니다. 저희가 이 길을 책임지지 않으면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앞놓아가는 시련의 무대를 향하기 위해 망각된 저희 자신을 다시 한 번 수습할 줄 알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결의된 실체로 다시 한번 나타내어 당신이 보게 될 때에, 장담코 자랑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수난의 역사노정에서 비참한 역사를 남겨 온 이 나라, 이 민족을 긍휼히 보아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붙안고. 당신을 위하여 염려하며 애국애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 운세권에 처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고맙게 생각하옵니다.
아버지의 심정적 내면에 일치된 효자 효녀를 찾아 나오는 도상에 있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 되겠사옵고, 이제는 아버지의 수고의 길을 인계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수난의 길을 상속받을 수 있는 통일교단의 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더 고생하지 못한 것이 슬픔이요, 더 수난의 길에 서지 못한 것이 걱정인 것을 느껴야 할 무리인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들은 불쌍한 무리이옵니다. 이 무리는 고독한 무리요, 외로운 무리이옵니다.
외로운 하늘의 길을 사수하고 하늘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 수 없는 공동적인 운명을 가졌기 때문에 당신이 기필코 이들과 같이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업고 쓰러지고, 당신을 모시고 자빠져야 되는 것이 저희들의 생활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승리의 한날을 바라보고 만천추의 영광을 당신을 대신하여 저희가 힘껏, 마음껏, 목이 터지도록 찬양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날을 위하여, 그 한 시간을 위하여 천년 세월을 투입하고, 일생을 투입할 줄 아는 거룩한 당신의 아들딸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 드리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날 이 아침, 전국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 혹은 이 청파동을 바라보면서 스승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눈물짓고 있는 무리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외로운 길에서 당신을 그리워하며 내일의 패자가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오늘도 극한 시련 고비에서 극복의 일로를 다짐 하는 무리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자리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같이해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서도 기필코 떠나지 않고 지켜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는 자리인 줄 알았지만, 그 자리가 죽는 자리가 아니라 영광의 자리로 돌변한 역사는 얼마든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간 길에는 비참이 아니요, 처량이 아니요, 낙망이 아니라 소망이 깃들어 있고, 승리의 전통적 인연이 스며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고이 옷깃을 여미고 아버지와 더불어 그 길을 넘을 수 있는 무리가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통일의 무리들, 만날 날을 고대하며 수고하고 있다는, 그 전해 오는 소식을 대할 적마다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습니다. 엇갈리는 딱한 사정과 원수들이 막는 장벽을 헤쳐 버리기 위하여 묶어진 통일의 무리들의 결속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역사적인 기원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고, 모든 사상과, 혹은 민족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당신의 심정의 용맹을 지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막혀진 담을 헐고 최후의 당신의 조국 강토를 이루어 당신 앞에 바쳐 드리고, 승리의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는 무리들이 될 때까지 싸워 남아지는 무리들이 되게끔, 아버지, 주도하고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오늘도 성심을 다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찬양하는 곳곳마다 당신이 같이하시옵고, 수많은 종교계에 당신의 사랑의 인연을 가진 수많은 자녀들을 한 나라의 백성으로 결속시킬 수 있는 인연을 세워, 당신의 한을 해원성사하는 데 있어 협조하는 자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달을 아버지 앞에 맡기오니, 빛나는 달이 되고. 일생에 남는 달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재삼 부탁드릴 때에, 모든 말씀 참부모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