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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열지의 BPA, 위험할까?

작성자박정학|작성시간26.06.19|조회수126 목록 댓글 0

 

상점 계산대에서 받는 영수증, 항공 탑승권, 택배 라벨, 대기표 등에 쓰이는 감열지thermal paper는 비스페놀 A(BPA)와 결합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화학물질로 처리되어 있다. '감열'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열이 필요한데, 프린터의 가열소자가 이 열을 만들어낸다. 감열반응이 일어나도, 종이를 만질 때 피부에 묻어날 수 있는 BPA는 항상 남아 있고, 이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할 수 있다.
 
BPA에 대해 처음 우려를 갖게 된 것은 1990년대, 플라스틱 젖병에서 BPA가 미량으로 용출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다. BPA는 100년 전 러시아 화학자 A. 디아닌이  합성했다. 1930년대 중반, 런던대학교의 E.C. 도즈와 W. 로슨이 BPA를 쥐에 주사하면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을 주사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도즈와 로슨은 에스트로겐 결핍으로 인한 부인과질환 치료 약물을 찾고 있었다. BPA가 유망해 보였지만, 도즈가 함께 합성한 디에틸스틸베스트롤(DES)이 에스트로겐 모방 물질로서 훨씬 더 강력했기 때문에 BPA는 약물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BPA는 1950년대에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시 등장했다. 화학자들이 BPA와 포스겐을 결합하면 폴리카보네이트(PC)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PC는 스포츠 헬멧부터 자동차 헤드라이트까지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강력한 플라스틱이다. 에피클로로히드린과 결합하면 BPA는 에폭시 수지를 형성하는데, 캔 내부 코팅재로 사용되어 내용물과 금속이 반응하는 것을 막아준다. BPA가 에스트로겐 유사 성질을 가진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음에도, PC나 에폭시 수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우려가 없었다. 고분자 안에서 BPA가 불용성 고분자의 일부가 되고, 중합 과정 후 남는 '미량'의 유리遊離 BPA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으나, 이 가정이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1997년, 내분비학자들이 임신한 쥐에게 BPA를 먹이니 체중 1kg당 하루 2마이크로그램이라는 극히 낮은 용량에서도 수컷 새끼에게 생식 관련 악영향이 나타난다고 보고했다. 게다가 BPA는 ‘용량이 높을수록 해가 크다’는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 매우 낮은 용량에서 BPA는 세포의 에스트로겐 수용체에 결합해 반응을 일으키지만, 더 높은 용량에서는 수용체의 민감도가 떨어져 오히려 반응이 줄어들었다. 낮은 용량에서 자극된 반응이 생물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특히 태아 발달기에 그러했다.
 
BPA는 태반을 통과해 전립선과 유방 조직 발달에 영향을 주어, 이후 '호르몬 의존성 암'에 더 취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여자아이들이 점점 더 이른 나이에 사춘기에 들어서는 전세계적 추세 역시 BPA 같은 에스트로겐 모방 화학물질 노출과 연관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여성의 경우 이 화학물질이 난자의 질을 떨어뜨리고, 남성의 경우 정자 수를 줄일 수 있다. 혈중에 순환하는 BPA는 인슐린 저항성, 심혈관 질환, 심지어 자폐증과도 연관성이 보고된 바 있다.
 
사람에게 BPA를 먹여 그 영향을 연구하는 것은 당연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므로, 동물실험, 세포배양 연구, 그리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역학 조사에서 발견된 연관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증거가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지만, BPA 같은 내분비 교란 물질에 대한 노출을 줄여야 한다는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 있다. 제조업체들은 캔의 BPA 기반 에폭시 코팅재를 비BPA 에폭시, 아크릴, 폴리에스테르, 폴리에틸렌, 그리고 천연 식물성 수지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 젖병 같은 식품 접촉 소재에 쓰이던 PC는 유리나 다른 플라스틱으로 대체되어 'BPA-Free' 라벨을 달고 있다. 많은 경우 BPA는 비스페놀S(BPS)로 대체되는데, 이 물질도 내분비 교란 성질이 비슷하지만 'BPA-free'라는 표시는 할 수 있게 해준다. '페놀 무첨가'phenol-free'라고 쓰여 있다면 BPA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감열지의 BPA는 폴리카보네이트나 에폭시 수지처럼 고분자의 일부가 아니고, 결합되지 않은 채로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빠져나온 양 중 얼마가 피부를 통과해 혈류로 들어가는가, 그리고 이 양이 위험 용량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인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BPA를 섭취하는 것과 피부로 흡수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섭취하면 소장에서 간으로 직접 이어지는 문맥門脈으로 들어가고, 간에서 대사되어 그 산물이 소변으로 배출된다. 반면 피부로 흡수되면 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혈액 속을 순환하며, 조직 세포의 수용체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체중 70kg 성인이 하루에 감열지 영수증 몇 장을 만질 경우 최대 3.5마이크로그램의 BPA가 혈류로 흡수될 수 있다. 그런데 손에 핸드크림을 발랐었다면 그 양이 100배까지 늘어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용가능한 안전성 자료는 '허용 일일 섭취량’tolerable daily intake뿐인데, 이는 평생 매일 섭취해도 건강에 악영향이 없는 최대 섭취량을 말한다. 동물실험을 바탕으로 미국과 일본은 체중 70kg 성인 기준 3,500, 우리나라는  이보다 2.5배 낮은 1,400마이크로그램이다. 이 1,400마이크로그램 중 실제로 혈중에 순환하게 되는 양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수증에서 흡수되는 3.5마이크로그램보다는 많을 가능성이 높다. 유럽식품안전청EFSA은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데, 동물에서 극미량으로도 면역세포와 생식세포에 변화가 나타난다는 결과를 근거로 한다. EFSA는 모든 노출원을 합한 하루 최대허용량을 0.014마이크로그램으로 산정하는데, 이는 감열지 영수증 두어 장만 만져도 초과할 수 있는 양이며, 하루 종일 감열지를 다루는 계산원이라면 분명히 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 감열지에는 무게 기준 최대 2%에 달하는 BPA가 함유될 수 있어 상당한 흡수로 이어질 수 있다. 제조업체들이 아스코르브산이나 설포닐유레아 같은 대체 발색제로 전환하고는 있지만, 전체 생산량에서는 여전히 작은 비중에 불과하다. 젊은이, 특히 '가임기 여성'은 감열지를 오래 만지는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 '계산원'이라면 라텍스 고무 장갑을 끼는 걸 추천한다. '60~70대 이상 노인'이라면 임신이나 정자 수를 걱정할 나이가 아니니 감열지를 만지더라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 같다. 다만 개인차와 불확실성이 늘 함께 하니 단언하기는 어렵다. '위험 분석'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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