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JnTm91mWL0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에모토 마사루>에 대한 서평
과학계의 황홀한 사기극
대체의학을 전공한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가 출간됐을 때, 언론은 이 책을 거의 소개하지 않았고 학계의 반응 또한 냉담했다. 그러나 책 속에 실린 물 결정 사진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지금까지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몇 달 전 한 대학신문의 학생기자는 내게 ‘이런 사이비 과학 책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 왜 과학자들은 침묵만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주변의 과학자들에게 물어보니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 걸 보면, 주류 과학계의 침묵은 ‘냉담의 한 표현’인 것 같다.
인터넷서점 독자서평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엉터리 사진들과 논리적 비약으로 가득 찬 과학책’이라는 혹평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에세이’라는 평이다. 이 책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과학책이 아니라 ‘물의 생명력을 깨닫게 해준 사진 에세이’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논리구조를 따져보자면,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우선 책에 등장하는 물 결정 사진들이 믿을 만한 데이터인지 의심스럽다. 저자 에모토는 샬레에 물을 떨어뜨려 영하 20도의 냉장고에 3시간쯤 넣어둔 후 결정 구조를 관찰했다.
그는 클래식음악이나 ‘사랑, 감사’라는 단어를 보여준 물은 결정 구조가 아름답고, ‘망할 놈’이란 단어나 헤비메탈 같은 음악을 들려준 물의 결정은 흉측하더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구조를 변화시킨다’는 주장으로, 무슨 에너지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결정 구조를 바꾼다는 것인지 기존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은 더욱 위험하다. 저자는 물 입자가 사랑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맙습니다’라는 단어는 감사의 주파수를 물에게 보내 아름다운 결정을 만들고, ‘망할 놈’이라는 단어는 비난의 주파수를 내보내 결정 구조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물질마다 고유의 진동 주파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이에 쓴 글씨가 단어의 의미에 따라 서로 다른 주파수를 낸다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낸다. 물이 세계 각국의 언어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의식’이 있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려면 꼼꼼히 그 근거를 대야 할 것이다.
어는 점 이하에서 물 입자들이 조건에 따라 다양한 결정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는 고체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의 오랜 연구 주제였으니 새로울 것도 없다. <네이처>의 물리화학 분야 편집자였던 필립 볼이 쓴 (양문·2003)에는 에모토의 주장을 포함해 물에 관한 온갖 사이비과학들의 허구성이 잘 소개돼 있으니 저자 에모토가 참고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랑과 감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 책의 메시지는 좋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가 조작된 것이고 해석 또한 엉터리라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만약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저자는 각 국의 신과학 지지 모임에만 참석하지 말고 연구 결과를 저명한 과학저널에 제출해 심사 받기를 권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이 책은 근래에 나온 최악의 ‘과학’ 도서가 될 것이다.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정재승
위 정재승 교수 서평에 대한 출판사쪽 반론
'물은‥알고 있다' 반박 과학적 근거 있나?
지난 19일치 ‘정재승의 책으로 만나는 과학’ 난에 실린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서평을 읽고 책을 낸 출판사 쪽에서 반론을 보내왔다. 편집자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재승 교수가 칼럼 전반에서 과학자가 지녀야 할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물 결정 사진들이 믿을 만한 데이터인지 의심스럽다’는 말로 평가를 시작했는데, 과학자로서 아무런 근거자료 없이 그러한 심증을 표현하는 일이 바람직한 태도인지 의문스럽다.
또한 물이 다양한 언어와 음악에 제각기 다른 결정으로 반응했다는 저자의 설명에 정 교수는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구조를 변화시킨다는 주장’이라며 동의할 수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1980년대에 프린스턴대학 특이공학연구소의 두 교수가 8년 연구 끝에 ‘물질계에서 의식의 영향력은 유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을 참조해 주었으면 한다.
이어서 그는 ‘무슨 에너지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결정구조를 바꾼다는 것인지 기존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적고 있는데, 만일 이 말이 ‘기존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허구’라는 의미라면, 이야말로 과학자로서 객관적인 태도를 상실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의 발전사가 끊임없는 발견과 그에 대한 검증의 역사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저자 에모토는 1·2권 어디에서도 ‘물 입자가 사랑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표현을 구사한 적이 없다. 설사 저자가 그렇게 주장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반박을 하려면 정 교수 자신의 표현대로 ‘꼼꼼히 그 근거를 대야’ 할 것 아닌가.
그는 이어 필립 볼의 저서를 언급하면서 에모토의 발견을 ‘사이비 과학’의 범주에 끼워넣고 있는데, 필립 볼의 책에는 에모토의 연구에 대한 언급이 한 군데도 없거니와, 아직 ‘발견’에 지나지 않는 현상을 ‘사이비 과학’으로 규정하고 ‘허구성’ 운운하는 일이 과학자로서 올바른 대응인지 묻고 싶다. 또한 ‘종이에 쓴 글씨가 단어의 의미에 따라 서로 다른 주파수를 낸다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낸다’는 평가는 정 교수 스스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종이에 쓴 글씨는 서로 다른 주파수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뒤에나 할 수 있는 발언이다.
한의학의 경락 이론은 그 메커니즘이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신의학에서 폭넓게 원용되고 있는 프로이트의 이론 역시 엄밀한 ‘과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다만 두 이론은 여러 심신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유효하다는 경험적 진실에 힘입어 임상에서 채용되고 있는 것이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의 내용 역시 하나의 경험적 사실일 뿐, 그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그밖에 저자의 모든 주장은 한 자연인의 ‘믿음’이거니와, 과학자가 나서서 그것이 틀렸다고 단언하거나 경험적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는 것은 지적 월권이라 할 수밖에 없다.
김철호/나무심는사람 주간
위 〈물은 답을 알고 있다〉출판사 반론에 대한 재반론
“아니라는 근거 요구전에 맞다는 증거부터 내놔야”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대한 정재승 교수의 글을 반박하는 출판사쪽의 반론(7월26일치 16면)에 대해 정 교수가 재반론을 보내왔다.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대한 나의 서평에 대해 해당 출판사 김철호 주간께서 반론을 보내주셨다. 김 주간의 반론에는 신과학을 옹호하는 분들의 논리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우리 논쟁이 초자연현상을 둘러싼 논쟁들의 축소판이 될 것 같아 자못 흥미롭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물 결정 사진들이 의심스럽다고 말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두 개의 유리병에 쌀밥을 넣고 한 병에는 ‘고맙습니다’를, 다른 병에는 심한 욕을 하면, 한 달 뒤 ‘고맙습니다’를 건넨 밥에는 누룩처럼 푸른 향기가 나고, 욕을 한 밥은 부패하여 새까맣게 변했다는 실험이 소개돼 있다.
이 실험은 이 책의 밥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직접 실험해 보니 두 유리병 모두 비슷한 곰팡이가 피었다. 마사루의 물 실험은 실험과정이 쉽지 않지만, 밥 실험은 누구나 확인해볼 수 있는 실험이다. 이런 실험조차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 책의 신뢰성을 크게 의심하게 만든다.
더 근본적으로는, 철저한 검증과 재현을 통해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실험 결과는 모두 의심스러운 것이다. 특히 마사루의 물 실험처럼 기존의 과학이론으로 따져볼 때 이치에 맞지 않고, 일반 과학상식으로도 납득이 안 가는 실험일수록 더욱 철저한 검증 과정을 통해 사실임을 증명받아야 한다.
기존 과학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것과 상충된다고 해서 모두 거짓이란 얘기는 아니다. 기존 과학도 허점이 많기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대중서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먼저 소개된 실험결과는 더더욱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
김 주간의 반론문에 흐르는 주된 논리 가운데 하나는 ‘책 내용이 의심스럽다고 반박하려면 그 근거를 대라’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 현상을 믿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논리적 오류다. 어떤 현상이 사실이라고 주장할 때에는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스스로 제시해야지, ‘사실이 아니란 증거는 있느냐’고 반박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마사루는 종이에 쓴 글씨가 슬픈 주파수, 감사의 주파수를 내보내 물 결정구조를 바꾼다고 주장했지만, 그 자신도 주파수를 잰 적이 없다. 그런데 ‘감사의 주파수가 있다는 근거를 대라’고 했더니, ‘아니라는 증거는 있느냐’고 따지는 격이다. 과학의 영역 안에서는 ‘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마사루가 학계의 검증을 받으면 자명하게 해결될 이 논쟁은 그러기 전까지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김 주간은 마사루의 실험결과를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실험결과에 대한 마사루의 설명이 그럴 듯하다고 판단되는가
정재승/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