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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 남묘는 관(우)왕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작성자독회바|작성시간15.07.22|조회수435 목록 댓글 0

관왕은 아직도 살아 있다

관왕은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살다 간 유명한 장수 관우를 높여 부르는 말로, 관왕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풍습인데 임진전쟁 때 왜적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 관왕의 음덕이라며 명나라 장수 진린 등이 요청해 세우게 되었다. 1598년 남대문 밖에 세운 것이 남관왕묘이고 1602년 동대문 밖에 세운 것이 동관왕묘다.

서울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정차하는 동묘앞역의 ‘동묘’가 바로 동관왕묘를 가리킨다.

동묘는 중국 촉한(蜀漢)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關羽)를 제사하는 사당으로서 원래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관우는 관성제군(關聖帝君)·관보살(關菩薩)이라고도 하며,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의 수호신으로서 중국인의 신앙 대상이었고, 당(唐)나라 중기부터 무신(武神)으로서 관제(官祭)의 하나가 되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타타르를 정벌하였을 때,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대만(臺灣)에 있던 명나라 유신(遺臣)의 폭동을 진압하려 하였을 때, 영험이 있었기 때문에 왕조의 존경과 숭상이 더욱 두터워지면서, 관우는 신성불가침의 우상이 되어 각지에 그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 무묘(武廟)]를 세웠다.

또한 재신(財神)으로서 숭배된 것은 관우가 위(魏)나라의 조조(曹操)에게 잡혔을 때, 조조가 그에게 상마금(上馬金), 하마은(下馬銀) 등의 푸짐한 상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퇴하고 촉 나라 유비(劉備)에게로 돌아갔다는 고사에 따른 것이며, 도교(道敎)에서도 관우를 사후세계의 유력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서울동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선과 명나라 군대가 왜군을 물리칠 때 관우의 신령(神靈)이 여러 번 나타나서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여,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비용과 친필로 쓴 액자를 보내오고, 조선에서도 협조하여 선조 32년(1599)에 착공하여 2년 뒤(1601)에 완공한 것이다.

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중문 내정(內庭) 좌우에는 동·서 행랑이 있다. 이어서 높은 단 위에 자리잡고 있는 단층 정전(正殿)은 전실(前室)과 본실(本室)로 구분되는 정자(丁字)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정면 5칸(57.5척), 측면 6칸(63.5척)에 양식은 익공계(翼工系)이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關平) 주창(周倉)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고,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동묘와 비슷한 시기인 선조 31년(1598)에 경상북도 성주와 안동에도 명나라 장군들에 의해 세워진 관왕묘(關王廟)가 남아 있다.

한편 서울지역에는 동묘이외에도 서묘ㆍ남묘ㆍ북묘ㆍ중묘가 있었으며, 이중 남묘는 현재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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