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책성산토성”이 “대야성”의 본성(本城)인 까닭
“궁성(宮城)은 조상대대로 이어져 오는 것이다”
2017-08-07
어제까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역사적 사실이 하루 아침에 변하거나 바뀔 수 있다. 특히 명백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거나 지정학적 조건이 바뀌면 기존의 역사관이 바뀌거나 변한다.
“합천 대야성” 에 대한 역사인식도 2015년 “쌍책성산토성”이 발견된 것을 깃점으로 재평가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이전에는 현재 연호사 뒷산을 비정(比定)했지만 성산토성이 발견되고 이와 관련된 학술발표가 있은 후 부터는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삼국통일이 지금 대한민국(한반도)의 한민족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으며, 이것의 시발지가 “합천 대야성”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가치를 선양하고 자랑스럽게 가꾸어야 할 책무가 합천군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다라가야(국)에 대하여는 국내 학계에서 가야시대에 합천 쌍책 옥전고분 주변에 존재했던 독립 지배체제였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신라는 562년에 대가야연맹체를 정복한 다음 565년에 대량주(大良州)를 설치하고 대야성(大耶城)을 축조했다” 는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량주가 현재 합천지역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왜 이곳에 지금의 시(市) 단위급 행정조직을 설치 했을까? 전쟁후 지배지에 대규모 행정조직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역을 통치하는 최고 책임자가 기거할 만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곳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쌍책성산토성”에 존재했던 다라가야왕국은 관아와 성곽이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다.
“궁성(宮城)은 조상대대로 이어져 오는 것이다.” 가야시대 조상의 궁궐을 신라시대 후손이 자연스럽게 물려 받은 것이다. 당시 대량주 지역에 또 이런 시설을 갖춘 곳이 있었다고 한다면, 다라가야의 존재를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합천 대야성”의 본성은 “쌍책성산토성”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4개현(초팔혜현, 가주화현, 삼지현, 적화현)을 관활하는 지금의 시단위급 관아(官衙)와 이를 보호하는 성곽과 촌락을 3년만에는 도저히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란시에 최고 권력자는 지배지에서 가장안전하고 유시시에는 퇴로가 있는 지역에 위치하는 것은 상식이다. 성산토성의 위치는 앞은 황강이 낙동강 본류로부터 7km지점이고, 뒤로는 덕곡과 고령으로 연결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지이다.
“대야성” 본성이 합천읍 소재 연호사, 또는 군부대 뒷산(대야성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재 청와대가 휴전선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은 백제와 접경지역이고 소위 전방(前防)이라는 것이다.
또한 565년부터 642년 대야성이 함락되기 까지 77년간은 소위 전란기로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이었던 현재의 “합천읍” 지역에는 도시가 형성되었거나 형성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
국경도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시기에 궁성(宮城)을 짓고 관아를 짓는 바보가 어디있겠는가? 그리고 지배자가 기거하는 곳은 몇십년만에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몇 대를 거쳐 완성되는 것이다. “합천읍”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년)이후에 쌍책에서 옮겨와서 형성된 것으로 보면 맞다고 본다.
지난 2015년 오랫동안 다라국 관련 유적 조사를 진행해 온 경상대학교 조영제 교수는 “성산토성이 발견됨으로써 왕릉(王陵)과 왕성(王城)이 조합된 다라국성(多羅國城)의 경관이 완성되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는 “이번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다라국성을 포함하는 사적지를 확대하는 등의 체계적인 유적 보호대책과 조사연구계획이 수립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며 “ 한편으로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문화자원으로 개발해 지역문화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합천군 관계자도 2015년에 "이번에 발견된 성산토성 배후에 입지하고 있는 옥전고분군(사적 제 326호)과 연계한 다라국성을 포함하는 국가사적지를 확대 지정하는 등의 유적 보호방안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전한바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 을 진행하면서 합천군은 반드시 가야사와 “대야성과 대야성 전투”를 연결하여 연구, 복원 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 쌍책면 소재지 이전과 재조성 사업을 비롯하여 “성산토성” 즉 “대야성 본성” 복원과 주변의 국가사적지 확대조성 등 역사문화체험 관광도시로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대야성 위치에 관한 소견
합천박물관 조원영
2017.09.04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의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킬 것을 지시한 이후, 우리 합천군에서는 국정과제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하여 우리 지역의 가야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방안을 수립하고 복원 방향을 설정하여 경상남도와 함께 가야사 연구에 집중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가야의 대표유적인 옥전고분군, 삼가고분군과 성산토성에 대한 계속적인 조사 및 사적 지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역에서 오랫동안 논의가 되어오던 대야성의 위치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그간의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실제 위치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쌍책면에 위치한 성산토성은 그 동안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유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3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가야시대 다라국의 도성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었다. 최근 한 언론사에서 성산토성이 대야성이 아닐까 라는 의견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성산토성에 관한 문헌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축조 형태와 성벽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 등의 유물을 통해서 가야시대 다라국의 옛 성터일 가능성을 추정하고 있을 뿐, 이 성이 신라의 대야성이라는 증거는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이 성이 신라 선덕여왕 당시의 대야성이라면 성곽 축조 형태를 차치하고서라도 신라 당시의 건물터나 유물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로는 유구와 유물 모두 가야와 관련된 것으로 확인되어 대야성 전투와 관련한 성으로는 보기 어렵다.
대야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조와 백제본기 의자왕조, 김유신 열전, 죽죽 열전에 대야성 전투로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책 지리지 강양군조에 보면 “강양군은 원래 대량주군(대야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합주(합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야성이 합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지지(大東地志)』, 『경상남도 여지집성(輿地集成)』, 『합천군 읍지』, 『교남지(嶠南志)』에도 모두 “합천은 본래 대량주군으로 량(良)은 야(耶) 또는 야(野)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가 편찬될 당시 합천은 합천군, 초계군, 삼가현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대량주’에 대한 내용을 합천군조에 기록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은 합천군에 대야성이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야성터는 2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를 통해 살펴보면 이 성은 원래 존재했던 가야시대의 성을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확대, 개축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 성은 가야 당시에 이 지역을 장악했던 다라국 세력이 5세기 무렵 처음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며, 합천읍 일대를 중심으로 황강 중류지역을 통제하며 낙동강, 남강지역을 아우르는 대가야 연맹체의 주요 군사적 거점의 기능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경남 서북부 일대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주요 교통로의 연결지점에 위치하여 이곳에서 황강을 통해 낙동강과 남강으로 이어진 수운을 이용하여 왜나 중국과 교류할 수 있으며 남쪽의 삼가지역과 의령지역을 대가야연맹체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565년 이 지역이 신라에 완전히 병합된 후 신라는 백제를 방어하는 전진 기지로서 이 지역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통해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하여 검토해 보면 642년 선덕여왕 당시 대야성 전투가 있었던 역사적 현장은 바로 현재 합천읍에 남아 있는 대야성터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