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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歌舞伎가무기(가부키) & 人形浄瑠璃인형 정유리(닌교 조루리)

작성자세이지|작성시간19.02.06|조회수622 목록 댓글 0

■ 가부키

歌舞伎(가무기)

https://youtu.be/IMEoTmCGQ6Q


음악과 무용, 기예가 어우러진 일본의 전통연극으로 16∼17세기 에도시대에 서민 예술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5년 일본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일본의 전통가극 가부키


에도시대[江戶時代]서민의 예능으로 시작하여 현대까지 약 4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일본의 전통연극.

원어명かぶき



역사

가부키(かぶき)라는 명칭은 ‘기울다, 치우치다, 쏠리다’ 라는 뜻을 지닌 가타무쿠(傾く, かたむく)의 고어(古語) 가부쿠(かぶく)에서 비롯되었으며, 가부쿠는 또한 ‘제멋대로 흔들며 춤을 추다. 기발한 옷차림을 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에도시대 초기에 교토와 에도에서는 남장을 하는 등 격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거나 매우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이 유행했으며, 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부키몬(かぶき者)이라 불렀다. 한편 이즈모 오쿠니라[出雲阿國]는 무녀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에 가부키몬의 복장과 무용을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의 무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가부키의 시초가 되었다.

가부키는 ‘노래하고 춤추는 예기(藝妓)’라는 뜻에서 가무기(歌舞妓), 또는 ‘기악(伎樂)·기예(伎藝)’를 뜻하는 기(伎) 자를 써 가무기(歌舞伎)라고 표기하였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가무기(歌舞伎)로 표기가 통일되었다.

오쿠니의 공연이 인기를 끌면서 이를 모방하여 창기인 유녀(遊女)나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은 미소년을 출연시키는 가부키가 크게 유행하였다. 유녀가 출연하는 여성 가부키를 유조가부키[遊女歌舞伎], 소년이 출연하는 가부키를 와카슈가부키[若衆歌舞伎]라고 한다. 그러나 무용과 기예를 중심으로 했던 이들 가부키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관능적이었고, 가부키 극단은 매춘을 일삼기도 하였다. 따라서 에도 막부는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여성과 소년의 가부키 출연을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성인 남자가 여자 역할을 맡게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성인 남자만 출연하는 가부키를 야로가부키[野郎歌舞伎]라고 한다.

여성과 소년이 출연했던 가부키는 무용이 중심이었으나, 이후 성인 남성이 출연하는 가부키는 연극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주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한 가부키교겐[歌舞伎狂言]이 공연되었다. 이러한 공연은 시바이[芝居]로 불렸다.

에도시대에는 사카타 도주로[坂田藤十郎]와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郎]라는 명배우가 등장해 ‘서쪽의 도주로, 동쪽의 단주로’라고 불렸다. 교토에서 활동한 사카타 도주로는 남녀의 애정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화사예(和事藝)에 능했고, 에도에서 활동한 이치카와 단주로는 용감한 무사의 활동을 그리는 황사예(荒事藝)에 능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도쿄는 황사예, 교토와 오사카에서는 화사예가 강하게 나타난다.

메이지시대에는 가부키의 형식을 개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새로운 극단이 설립되었으며, ‘신파’라 불리는 새로운 연극형식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은 전통적인 가부키 애호가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고, 오늘날까지 상연되는 작품도 많지 않다. 한편 서양 문물을 접한 개화지식인들은 가부키를 전근대적인 예술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극장이 폐쇄되거나 상연 작품에 제한을 받는 등 각종 규제가 이루어져 가부키 공연이 크게 위축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발달하면서 가부키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지만, 전통 문화로서 가부키 본래의 양식을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각성이 일어나면서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가부키 전용 국립극장이 개장되었고, 해외공연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배우

가부키 배우는 전통적으로 천민이나 광대로 분류되어 신분의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각지로 통행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받았으며, 점차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면서 가부키 배우는 가업으로까지 이어지는 권위 있는 직업이 되었다.

배우들은 초기 가부키 배우들의 양식을 따라 연기하며 전통을 지켜왔는데, 그래서 이름 앞에 숫자를 붙여 자신이 몇 대(代)임을 나타낸다. 배우들은 가면을 쓰지 않으며, 역사적 인물은 화려한 의상을, 일반인들은 평복을 입어 구분한다. 배우들은 배역의 성격이나 표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붉은색이나 푸른색, 검정색의 선을 얼굴에 그리는데, 가부키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독특한 분장을 구마도리[隈取り]라고 한다.

무대

가부키의 무대는 처음에는 무대의 정면과 양쪽이 열려 있는 노[能]의 무대와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무대의 폭이 넓어지는 등 형태가 독특해졌으며, 여닫이 막(幕)을 사용해 장면을 나누어 복잡한 구성의 극을 전개하는 등 연극의 성격이 더욱 강조되었다.

음악

가부키에는 다양한 음악이 사용되는데, 그 음악은 크게 춤의 반주음악인 나가우타[長唄]와 전통 현악기인 샤미센[三味線]의 반주에 맞추어 특수한 억양과 가락을 붙여 엮어 나가는 조루리[浄瑠璃]로 나뉜다.


■ 人形浄瑠璃(인형정유리)

담로 인형 정유리

https://youtu.be/3E91rCQEafw

文楽는 浄瑠璃로 알려진 음악을 동반한 노래꾼에 맞춰 연출하는 고전 인형극.

浄瑠璃는 文楽의 음악을 말하며 샤미센에 의해 반주된다.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Asia and the Pacific


닌교 조루리 분라쿠(人形浄瑠璃文樂) 인형극



사이토 히로츠구(Hirotsugu Saito)문화재전문가, 일본 문화청 문화재부 전통문화과

닌교 조루리 분라쿠는 가창자인 다유(太夫), 샤미센(三味線) 연주자, 세명의 인형사, 이렇게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인형극이다. 16세기 말에 생겨난 분라쿠는 초기에 야외 공간이나 가설극장에서 상연되었으나 17세기 중반부터 오사카, 교토, 에도(현재의 도쿄)와 같은 대도시의 유명한 극장에서 상연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말 다케모토 기다유(竹本義太夫)라는 가창자가 작가 지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 左衛門)의 극본들을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노래 부분이 적은 그의 가창 방식은 이후 기다유부시(義太夫節)라는 명칭으로 유행하였다.당시까지는 인형사 한 명이 인형 하나를 조종하였으나 18세기 중반 인형사가 셋으로 늘어났다. 인형은 120~150㎝ 높이이며, 수석 인형사가 머리와 오른팔과 오른손, 두 번째 인형사는 왼팔과 왼손, 세번째 인형사는 다리를 각각 조종한다. 머리를 조종하는 수석 인형사가 인형의 전반적인 동작을 통제하며, 이를 통해 기다유부시의 내용과 부합하는 세밀하고 사실적이며 적합한 표현이 가능해진다.
닌교 조루리의 700개 곡목 중 현재 약 170개 곡목이 전승되고 있다. 일부 곡목은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부 작품은 지역민의 삶을 조명한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오락으로 기다유부시를 배워 즐겨 불렀다. 분라쿠에 대한 식견을 갖추게 된 그들은 분라쿠의 엄격한 비평가가 됨으로써 청중의 의견과비평을 통해 분라쿠의 세련화에 기여하였다.
다유와 샤미센 연주자가 기본 기법을 숙련하는 데에는 10년 이상의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 한편, 인형사는 우선 인형의 다리와 왼손의 조종기법을 배우며, 수석 인형사가 되기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일본의 풍부한 역사와 문화, 대중의 감정을 반영하는 걸출한 극본, 세부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음악, 인형의 사실적 표현기법은 분라쿠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외국 극본과 오락거리가 유입되면서 분라쿠의 인기는 줄어들었다. 20세기 들어 극장은 한 곳으로 줄어들었으며, 또한 극단도 하나만이 남아있다. 극단은 분열되었다가 후에 재결합하여 오사카와 도쿄의 극장에서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분라쿠의 후대 전승을 위해 일본 정부는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통해 전승자 훈련 프로그램과 공개 공연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분라쿠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었다. 1966년 도쿄에 국립극장이 설립되었으며, 1984년 오사카에 국립분라쿠극장이 건립되었다.
분라쿠 연행자가 되려는 이들은 도제가 되어 훈련을 받으나, 분라쿠의 인기 하락과 함께 전수생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전수생을 위한 정규훈련 과정이 1972년 도쿄국립극장에서 개설되어 1984년 오사카의 국립분라쿠극장으로 이관되었다. 매년 이수자는 2~3명에 불과하나 현재 활동하는 전문적인 분라쿠 연행자의 절반은 이수자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2003년 분라쿠는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포함되었다. 등재를 통해 더 많은 대중이 분라쿠에 관심을 가져서 이 공연예술의 성공적인 전승이 이루어지고 많은 명인이 배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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