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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주장 살리타이를 실제 사살한 사람은 김윤후가 아니다

작성자조화애|작성시간14.12.26|조회수572 목록 댓글 1
13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일대 파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구 거란족인 몽골족이 새로이 흥기하여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몽골평원의 유목민족인 몽골족은 이전에는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3세기 초엽에 태무친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에 한(칸)의 지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칭기즈한이다.

이때부터 몽골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몽골의 정복사업 여파는 마침내 고려에도 미쳤다.

요나라가 멸망한 후 거란족은 금나라에 복속되어 있다가 몽골로 다시 부활하였는데 금나라가 몽골에 쫓기어 고려 영토로 들어와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강동성에 갇혔다.

고려는 몽골과 협공하여 금나라군을 격멸시켰다. 몽골은 이 사건 이후 큰 은혜나 베푼 듯이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그 와중인 고종 8년에 사신으로 온 제구유는 공물을 과도하게 요구했을 뿐 아니라 그 태도까지도 오만불손하여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샀다.

그가 고종 12년, 다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누구인가에 의해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골은 사신 제구유 피살사건을 트집잡아 고종 18년(1231년) 고려를 침략(1차)하였다.

살리타이를 주장(主將)으로 하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고려군도 곳곳에서 적군을 격퇴시켰다. 특히 서북면도병마사 박서는 귀주성에서 여러 차례 몽골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몽골군은 수도를 포위하는 한편 계속 남하하여 광주, 충주, 청주까지도 공격하였다. 고려는 하는 수 없이 화의를 요청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북면에 일종의 민정감찰관인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이듬해 정월에 철수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몽골의 지나친 내정간섭과 공물 요구는 고려 군신의 분노를 고조시켰다. 이에 최우 정권은 고종 19년(1232년) 몽골에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마침내 몽골은 고종 19년(1232년)에 2차 침입을 단행하였다. 그 주장은 1차 침입 때와 같은 인물인 살리타이였다. 그는 강화도에 사자를 보내 고려 조정을 질책하고 개경으로의 환도를 촉구하였다. 물론 고려 조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살리타이는 강도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과 고려의 본토를 철저히 유린함으로써 강도 정부로 하여금 항복해 오는 방식을 검토하였다. 그 중 최종적으로 확정한 전략은 후자였다.

살리타이는 별동대를 멀리 경사도까지 파견하여 대구 부인사에 보관된 초조대장경를 불사르는 등 초토화 작전을 구사하였다.

하지만 살리타이가 이끈 주력부대는 광주 공격에 실패하고, 그 자신은 수원의 속현 처인성(용인)을 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부장 데구의 인솔 하에 서둘러 철수하였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던 몽골군의 주장이 전사하는 등 고려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고려사》고종 19년 12월조는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한 이때의 광경을,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침공하였다. (이때) 한 승려가 난리를 피하여 성안에 있다가 살리타이를 쏘아 죽였다. ”

고 아주 간략히 적고 있다.

같은 12월조 동진에 보낸 외교문서에서도 “금년 12월 16일 수주(수원)에 속한 고을인 처인 부곡의 조그마한 성에서 몽골군과 대전하다가 그들의 괴수인 살리타이를 쏘아 죽였고 포로한 것도 많았다. 패배를 당한 잔당들은 사방으로 분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고려사》세가에는 살리타이를 사살한 인물이 누구인지 명기되어 있지 않고, 단지 한 승려라고만 적혀 있다.

그러면 살리타이를 사살한 승려는 누구인가?

흔히 김윤후로 알고 있다. 《고려사》열전 김윤후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김윤후는 고종 때 사람으로서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에 있었다. 몽고군이 오자 김윤후는 처인성으로 피난 가 있었다. 몽골 원수 살리타이가 그곳을 공격하여 왔을 때 김윤후가 그를 사살하였다.”

열전 김윤후조는 살리타이를 사살한 인물이 김윤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위 구절에 이어지는 다음의 기사를 주목해야 한다.

“왕이 그의 공을 기특히 여겨 상장군의 직을 수여하였다. 김윤후는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전투할 때에 나는 활이나 화살도 갖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귀중한 상만 받겠느냐?’ 며 굳이 받지 않았으므로 다시 섭랑장 벼슬로 고쳐주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써 일거에 몽골의 침입을 격퇴한 공로자가 김윤후인 것으로 단정하고 그에게 무반직 중 최고위직인 상장군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따르면 살리타이를 사살한 실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아쉽게도 《고려사》등 어떤 기록에서도 그 주인공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김윤후가 그 주인공으로 천거한 사람이 그다지 비중있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고려 조정에서는 왜 적장 살리타이를 살해한 인물이 김윤후라고 당정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실마리는 김윤후의 이후 행적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관한 다음의 열전 기록을 보자.

“김윤후는 후에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임명되었는데, 몽골군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 공격한 지 무려 70여 일이 되어 성내에는 식량도 거의 바닥났을 때였다. 김윤후가 병사들을 격려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힘을 다 바쳐 싸우는 사람이라면 귀천의 차별 없이 모두 벼슬과 작위를 죽겠다. 너희들은 내 말을 의심하지 말라.’

며 드디어 관노를 등록한 장부를 불에 태워 버렸으며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있는 힘을 다하여 적을 공격하였으므로 몽골군의 기세가 적이 꺾여 드디어 남으로 향하지 못하였다. 이런 공으로 김윤후는 감문위 상장군으로 승진되고 기타 군공이 있는 관노와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에 따라 차등있게 관작을 주었다.”

물론 이 사건은 살리타이가 죽은 후인 고종 41년에 있었던 일이지만, 충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자인 김윤후가 원래부터 지략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이다.

이런 김윤후의 능력으로 보아, 그는 처인성 전투 때에도 휘하 승도들과 함께 성으로 피난한 부곡민들을 지휘했을 개연성이 짙다.

그것도 관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력적인 항전이었기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고려 조정에서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에게 정6품인 섭랑장 벼슬을 제수한 것은 처인성 전투의 승리가 그의 지휘력에 크게 힘입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은 왜 살리타이를 죽인 사람이 김윤후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몽골의 제2차 침입 때에 그 승패를 결정적으로 가른 처인성 전투의 논공행상 과정에서 그 전투의 실질적인 지휘를 맡은 사람은 바로 김윤후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가 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 공로로 상장군이라는 최고직을 제수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김윤후의 증언으로 보아, 살리타이를 사살한 인물은 김윤후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던 듯하다.

출처 : 한국사 그 끝나지 않은 의문(이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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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솔로몬독회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2.26 승장 김윤후는 승려로서 도를 깨우친 목민관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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