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보검(寶劍), 간장(干將)과 막야(莫邪)
한 쌍의 자웅검
'간장(干將), 막야(莫耶)'는 전설적인 자웅쌍검(雌雄雙劍)인 춘추전국시대 보검(寶劍)의 이름이며 또 이 검을 만든 검공(劍工) 부부의 이름이기도 하다.
훗날 남편인 간장(干將)이 웅검(雄劍)을, 아내인 막야(莫邪)가 자검(雌劍)을 뜻하게 되었다.
고대 중국의 유명한 보검으로는 간장과 동문인 월(越)나라 구야자(歐冶子)가 만든 거궐(巨闕), '담로(湛盧), 승사(승야勝邪), 어장(魚腸), 순구(純鉤)'가 유명하다.
"간장, 막야"에 얽힌 이야기 자체는 춘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이 이야기가 실린 <수신기(搜神記)>라는 책은 위진남북조 시대 간보(干寶)라는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수신기(搜神記)>는 말 그대로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수집한 기록"이란 뜻인데, 간보가 쓴 원본은 소실되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판본은 후대 사람들이 부분부분 짜맞추어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간장 막야의 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온다.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검이라고 알려진 것에 의해 오나라의 사람이었던 대장장이 간장과 그 아내 막야에 대한 이야기와 삼왕묘(三王墓)로 알려진 초나라 사람이었던 간장과 막야의 이야기다.
『오월춘추(吳越春秋)』및 『월절서(越絶書)』에 의하면, 검을 만든 간장(干將)은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 사람으로, 어장과 담로湛瀘를 만든 구야자(歐冶子)와 동문이라 한다.
기세가 좋을 때의 오왕 합려는 월나라에서 구야자가 만든 3자루의 검(담로, 반영, 어장)을 받는데, 이걸 받은 합려는 '촌구석인 월나라에서 이런 좋은 칼이 나오다니!'
하면서 간장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검을 만들 것을 명한다.
그래서 간장은 천하에서 최고의 재료만 모아서 최상의 조건에서 검을 만들려 했으나 철이 굳어 녹지 않았다.
석달 동안 진척이 안되다가 아내인 막야가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넣자 철이 녹아내렸고, 비로서 명검 두 자루가 만들어졌고 이름을 간장, 막야라고 붙였다.
간장은 웅검(雄劍)인 간장(干將)만을 오왕에게 받쳤으나 한 자루가 더 있음을 눈치챈 오왕이 다그치는 과정에서 적국에 넘어가 명검을 제작하면 위협이 된다는 구실로 간장을 죽임으로써 대장장이 간장과 그 아내 막야는 모두 사망하고 명검 간장만이 오왕의 상징적인 명검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 첫 번째다.
두번째 이야기 『수신기(搜神記)』
어느날 초나라왕이 유명한 도검장인 간장에게 두 자루의 검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워낙 공을 들여 만드느라 간장은 칼을 만드는데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했고,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에 분개한 초나라왕은 마침내 간장을 죽이기로 마음먹게 된다.
왕의 노여움을 사 죽게 될 것을 안 간장은 암검 막야만을 가지고 왕을 보러 가면서 임신한 아내 막야로 하여금 몸을 피하게 하고서는, 자신이 죽거든 곧 태어날 아들이 장성하거든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집뒤에 감춰둔 칼로 자신의 한을 씻어달라고 하며,
"아들이 태어나거든 바위 위에 자란 소나무를 잘라보라."고 하곤 떠났다.
삼년이나 걸린 데에다 두 자루 중 한 자루만 가져온 간장은 역시 초왕에게 살해당했다.
두 자루의 검 가운데 웅검인 간장을 숨겼으니, 초나라왕은 간장을 죽이고서도 막야 한 자루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흘러 막야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적(赤)이라 했다. 아들은 간장의 유언대로 주춧돌 위로 뻗은 소나무 기둥을 잘라 간장이 숨겨 놓은 신검 간장을 얻게 된다.
그러나 아들이 간장을 얻었을 때 초나라왕은 꿈을 꾸게 되니 눈썹 사이가 한 자나 되는 사내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었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불안해진 초나라왕은 천하에 천금의 상금을 걸고 꿈에서 본 사내를 잡아들이도록 하니 아들은 복수를 하기도 전에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현상금이 걸려 마을에도 못가게 된 간장의 아들은 서러운 마음을 노래에 담아 부르며 산속을 배회하게 되는데, 그때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던 아들 앞에 한 협객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들로부터 사정을 들은 협객은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 왕이 천금을 들여 당신을 잡으려 하니, 당신의 목과 그 칼을 준다면 내가 당신의 원수를 갚아주리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은 바로 자신의 목을 잘라 칼과 함께 협객에게 건내주었다. 그러나 목이 잘리고도 아들은 뻣뻣이 서서 협객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협객이 이렇게 안심시켜주고서야 아들의 몸은 비로소 누워 죽음을 맞게 되었다.
"내 약속은 반드시 지키리다."
그렇게 아들의 목을 가지고 초나라왕을 찾아가니 초나라왕은 협객을 환대하여 맞아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찜찜하고 불안했던 것이 협객이 가지고 온 목으로 해소된 때문이었다.
협객은 초나라왕과 만나는 자리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원한을 품고 죽은 목입니다. 큰 솥에 넣고 삶아야 후환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후환을 없앨 수 있다는 말에 초나라왕은 그 말을 쫓았다. 커다란 솥을 마련해 물을 가득 채우고 사흘을 불을 피워 끓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흘을 그렇게 물을 끓였어도 아들의 목은 전혀 물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물이 끓는 사이 눈을 부릅뜨고 초나라왕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불안해 하는 초나라왕을 본 협객은 다시 이렇게 조언했다.
"왕께서 직접 다가가 보시면 목이 비로소 물러질 것입니다."
초나라왕은 이번에도 협객의 말을 따랐다. 솥이 끓는 것을 지켜보다 마침내 내려와 솥 옆에 서서 펄펄 끓고 있던 아들의 목을 보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협객은 비로소 칼을 빼들어 솥 안을 보려 허리를 굽히고 있던 초나라왕의 목을 베고 자신의 목을 베어 부탁받은 복수를 완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에서야 아들의 목은 초나라왕과 협객의 목과 함께 물러지기 시작했다.
신하들이 놀라 다가왔을 때는 그래서 누구 것인지 모르도록 하나로 뒤섞인 세 개만이 남아 있었으니, 세개의 목을 모두 거두어 함께 장사지내고 그 묘를 삼왕의 묘라 불렀다. 삼왕묘(三王墓)는 지금의 여남군(汝南郡) 북쪽 의춘현(宜春縣)에 있다.
이 밖에도 간장과 막야는 초나라 왕의 부탁을 받고, 곧 자산(茨山; 지금의 안휘성 경현 북쪽)에서 철을 채취하여, 야련(冶煉)과 주조(鑄造)를 거쳐 또 다른 세 자루의 보검을 만들었는데 용연(龍淵), 공포(工布), 태아(泰(太)阿)가 그것이다.
월왕 구천의 검
1965년 중국 후베이(湖北)성 장링(江陵)에서 한 묘에서 한 자루의 검이 발견되었다. 월왕 구천의 '越王劍'으로 불려지는 이 청동검은 검격(劍格) 양쪽에 남색 유리와 공작석을 박아 넣고 검신(劍身)에는 마름모꼴 꽃무늬를 새겼다. 2천4백년이 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광택이 찬란하게 빛나고 칼날이 예리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검신에는 '월왕 구천이 만들고 사용한 검(월왕구천자작용검)'이라고 새겨져 있다.
구야자((歐冶子)는 간장(干將)과 동문으로 쌍벽을 이루는 월(越)나라 검공(劍工)이다.
구야자는 월왕 윤상(允常)을 위해 다섯자루의 명검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을 거궐(巨闕), 담로(湛盧), 승사(勝邪승야), 어장(魚腸), 순구(純鉤)라 했다.
천자문에 검호거궐 주칭야광(劍號巨闕 珠稱夜光)이라 했다. 검(劍)은 '거궐'을 으뜸으로 부르고, 구슬 중에는 '야광'을 으뜸으로 부른다는 말이다.
'거궐(巨闕)'은 그 단단함과 예리함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거궐로 청동이나 쇠그릇을 찌르거나 베면 잘린 곳에 기장쌀만한 구멍이 곳곳에 뚫렸다고 한다. 검(劍)의 날이 워낙 예리하고 잘 들어 쇠붙이 속의 공기 거품이 눌리지 않고 잘려나가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얘기다. '거궐(巨闕)'이라는 검의 이름도 이 때문에 생겨났는데, 즉 '속이 비어 크게 구멍이 났다'는 뜻이다.
'순구'는 검은 너무 빛이 강렬하여 정면으로 마주보면 눈이 멀 정도라고 했는데 당시 검의 감정가로 명성을 떨치던 설촉이란 사람은 순구의 가치를 값으로 따지자면 1000호의 도시 2개와 준마 1000필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어장'검은 공자 광(합려)의 사주를 받은 전제가 오의 요왕을 암살할때 사용한 검이다.
칼에는 검(劍)과 도(刀)가 있다. 검은 주로 양날로 되어 있어서 찌르기를 위한 칼이고, 도는 한쪽 날만 있어서 주로 베기를 위한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