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의 경신대기근
을해년(1695)과 병자년(1696)의 을병대기근
조선을 습격한 경신(庚辛), 을병(乙丙)대기근
2011.06.25 0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가 이달 초 출간한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푸른 역사)는 1670년과 1671년 당시 조선 인구의 20%가 넘는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경신(庚辛)대기근’을 통해 17세기 조선의 사회 변화를 설명합니다.
요약하면, 당시의 대기근은 기후변화(이때가 소빙기<小冰期>였다네요) 때문에 일어난 재앙이고, 이런 재앙이 17세기 조선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조선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밖에 없는 저로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그간 우리가 몰랐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의 기후 변화를 역사의 전면에 끄집어낸 이 책은 ‘지구온난화’라는 이슈로 고민하는 요즘, 더 실감 있게 읽힙니다.
"아, 내가 즉위한 이래로 천재가 달마다 생기고, 가뭄과 수해가 서로 잇달아 없는 해가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며 편안한 겨를이 없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더욱 참혹하여 봄부터 여름까지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과 보리를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파종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1670년 5월2일, 현종)
갓 서른인 임금 현종(재위 1659~1674)은 답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효종의 뒤를 이어 열아홉에 즉위한 현종은 죽는 날까지 정통성 시비와 정쟁에 시달린 군주였습니다. 현종의 큰 아버지는 소현세자였는데,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하자 마자 인조와의 마찰 끝에 급사했습니다.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효종입니다. 문제는 소현세자에게 아들 셋이 있었다는 겁니다. 적장자(嫡長子)가 왕위를 잇게 돼 있는 조선 사회에서 현종의 즉위는 두고두고 시비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그를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상저온으로 우박과 서리, 때아닌 폭설이 그칠 줄 모르고 내렸고, 가뭄과 홍수까지 덮쳤습니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조선 팔도 전역에 역병 등 전염병이 유행하는 등, 말 그대로 ‘재앙의 종합세트’가 밀어닥쳤습니다. 350쪽 짜리, 이 책은 어느 쪽을 펼쳐봐도 초근목피와 인육까지 먹는 참상이 가득합니다.
책을 읽다가 놀랐던 것은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만 명이라는 통계였습니다. 이 숫자는 1671년 12월 송시열계 서인(西人)인 사간원 관리 윤경교가 장문의 상소문에서 언급한 사망자 수입니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떠돌다 죽은 사람과 고향에서 죽은 사람을 합하면 그 수가 거의 100만에 이른다는 겁니다. 1669년 전국 인구가 516만 명이니, 100만 명이면 인구의 20%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사망자 집계가 이뤄지지 않을 만큼, 행정 시스템이 마비된 실정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경신대기근 당시에 조정에서 청나라 쌀을 수입할 것을 논의했다는 점입니다. 1671년 여름 아사자 발생이 최고조에 달하자,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나라 곡물 도입을 정식으로 현종에게 건의했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운송난과 후환(後患)을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이라서 흐지부지 됐습니다.
그 해 말 기아를 구제하느라 조정의 창고가 완전히 바닥나자, 현종이 다시 신하들에게 청나라 곡식 도입 건을 꺼냅니다. 신하들은 국가 위신 때문에 불가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명분에 사로잡혀 반대 논리만 집착하던 대신들을 향해 임금은 다시 한번 “이곳의 사세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신하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청나라 쌀 도입은 논의가 시작된 지 30년 만에 실행에 옮겨집니다. 1695년 조선에는 다시 100만 명이 굶어 죽는 ‘을병대기근’이 찾아옵니다. 조선정부는 1697년 마침내 청나라에 양곡 지원을 요청합니다. 청나라는 다음해에 압록강변 중강에 쌀 3만석을 실어와 1만석은 무상으로, 2만석은 유상으로 판매했습니다.
또 하나는 경신 대기근 당시 조선의 부자들이 ‘재앙 피로 증후군’에 빠져 백성들을 돕는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저자의 지적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 지주들이 기근을 당하면,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홍문관 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단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일에는 외방에 부민(富民,살림이 넉넉한 백성)들이 많이 있었기에 재앙과 흉년을 만나도 백성들이 개인 저축에 힘입어 살아났다. 그런데 십 수년 이래로 민간의 개인저축을 관에서 무조건 빼앗아 백성들에게 흩어주었고, 가을걷이 후에 다시 거두어 돌려주지 않을 뿐 아니라, 거꾸로 치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곡식을 저축하지 않았다. 지금은 온 나라에 곡식을 저축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즉시 팔방에 알리어 곡식을 저축하게 하되, 무조건 빼앗는 폐단을 금하고 곡식을 많이 저축하는 사람은 자급을 올려주어 권장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백성에게 부(富)를 간직하게 할 수 있다.”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마다 정부가 늘 재력가에게서 거의 강탈에 가까운 방법으로 많은 재원을 기부 받았기 때문에 부자들이 비축하는 미풍을 잊고 기부 말만 나오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겁니다. 이런 정부와 세간의 분위기가 정작 기근을 당했을 때 필요한, 부자들의 조력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글쎄, 보기 나름이긴 한데요. 새겨 들을 만한 지적입니다.
기후변화와 대기근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로 17세기 조선 사회를 해명하려고 한 저자의 시도는 성공적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 책이 실록과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사람 얘기가 소략하고, 탄탄한 스토리보다 사건 중심의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당대의 문집과 편지, 일기 등 각종 기록 발굴을 통해 좀 더 풍부한 17세기의 사회 현실이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